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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 김수영 시, 김성장 서

林 山 2019. 10. 30. 20:39


풀 - 김수영 시, 김성장 서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의 '풀'은 1960년대 대표적인 저항시다. 김수영은 초기에 모더니즘 경향의 시를 쓰다가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민주혁명, 그 4.19민주혁명을 좌절시킨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을 목도하면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참여시를 쓴 시인이다. 시인의 개인사를 알고 있다면 이 시는 별다른 해설이 필요없다.


김수영은 다소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식민지 종주국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입학, 미즈시나(水品春樹)에게 연극을 배우던 김수영은 1943년 겨울 징병을 피해 귀국했다. 1944년 그는 가족과 함께 만주 지린 성(吉林省)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 만주에서 돌아온 김수영은 6·25전쟁 때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북한으로 끌려갔다. 북원훈련소에 배치된 그는 평양 일대를 장악한 유엔군에 의해 자유인이 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경찰은 김수영의 의용군 징집을 문제삼아 그를 체포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냈다. 그는 포로수용소 야전병원 외과 원장의 통역으로 있다가 풀려났다.


김수영은 김춘수와 함께 반시론(反詩論) 운동을 전개했다. 반시론은 1960년대 시의 주류인 참여시론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더니즘을 청산하고 현실과 역사, 시대와 사회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런 김춘수가 훗날 군사반란 수괴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쓴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1960년의 4.19민주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김수영은 자유와 민주, 정의 사회 실현이라는 희망에 차서 시와 시론을 쏟아냈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제2공화국 윤보선 정권이 민중을 배반하고 친일 지주와 관료, 경찰 출신, 수구보수파들을 요직에 앉히는 것을 본 김수영은 4.19민주혁명이 실패로 끝날 것임을 예감했다.


1961년 5.16군사반란이 일어나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이 들어서자 4.19민주혁명의 실패와 부당한 현실에 대한 김수영의 절망은 극에 달했다. 그는 그토록 혁명을 갈망했지만 그 스스로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소시민적 한계를 절실히 깨달았다. 김수영의 시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김수영은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 순수문학 논리에서 참여문학 세계관으로 옮겨 갔다. 또 세련되고 간접적인 표현 대신 풍자와 독설을 날리는 직설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적 화두는 자유와 민주, 정의와 혁명이었다. 4.19민주혁명의 실패에 대한 분노와 절망은 김수영으로 하여금 시를 무기로 외세와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전사로 거듭나게 했다.


1968년 4월 13일 김수영은 펜클럽이 마련한 부산의 문학 세미나에 참석해 '정치적 자유'를 설파하는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당시 서슬퍼런 박정희 군부독재정권 치하에서 파격적이고 예기치 못한 강연이었다. 청중들도 당혹했다.


1968년 6월 15일 김수영은 원고를 신구문화사에 넘겨주고, 신구문화사 편집인 신동문, 이병주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뒤 집으로 돌아가다가 좌석 버스에 치어 적십자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에 숨을 거뒀다. 일설에 의하면 인도를 걸어가던 김수영을 좌석 버스가 뒤에서 들이받았다고 한다. 단순한 사고였을까?


1968년 교통 사고로 숨지기 얼마 전의 김수영(출처 시공사)


이쯤이면 '풀'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풀'은 바로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민중을 상징한다. '비', '바람', '동풍'은 외세와 그 외세에 빌붙은 군부독재정권을 상징한다. 부당한 권력을 상징한다. '풀'은 '비', '바람', '동풍'에 의해 울면서 쓰러진다. 하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먼저 웃는다. 시인은 풀에서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본다. 거기서 민중의 저항성을 발견한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는 이 시의 마지막 행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분노케 한다. 아직 이 시대는 암울한 시대라는 것이다. 민중이 부당한 권력에 의해 짓밟히고 쓰러지는 시대라는 것이다.


시인은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 것을 보고 세상을 떠났다. 김수영의 시는 그래서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김수영의 시 정신은 1960년대 신동엽을 거쳐 1970년대 저항시인들에게로 이어졌다. 그 중심에 김남주 시인이 있었다. 김수영이 부활한다면 지금의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1969년 김수영의 사후 1주기에 그의 무덤에는 시 '풀'을 새긴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풀'은 그가 죽기 보름 전에 쓴 시였다.


글씨는 김성장이 신영복 민체로 썼다. 가로획이나 세로획이나 그 형태가 비슷하다. 민체는 민중체를 말한다. 민중을 지향하는 글씨체라는 의미다.


2019.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