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린 사람 - 기형도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기형도의 '홀린 사람'은 1989년에 나온 '입속의 검은 잎'이란 제목의 시집에 들어있는 시다. 기형도는 '홀린 사람'에서 선동가를 동원해 대중을 기만하는 지배자와 이성적 비판 능력을 상실한 채 맹목적 추종으로 지배자에게 기만당하는 어리석은 대중의 모습을 우화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분'을 '지배자'나 '권력자', '독재자' 또는 '사이비 종교(似而非宗敎) 교주'로 바꿔서 읽어도 뜻이 아주 잘 통한다. 그렇게 바꿔서 읽으라고 기형도는 우리에게 권한다.
기형도의 '홀린 사람'은 온갖 감언이설(甘言利說)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이비 종교 교주와 그런 교주에 홀려 정신적 노예가 되어버린 광신도들을 풍자한 시로 읽어도 무방하다. 특히 요즘처럼 혹세무민하는 자들이 난무하는 시대에는 말이다.
2020.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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