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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무당 - 김인국 마르꼬 신부

林 山 2022. 1. 25. 12:34

충주 연수성당 김인국 마르꼬 주임신부가 '정치 무당'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정치적 발언에 매우 신중한 카톨릭의 전통에 비추어 김 신부의 글은 제20대 대선을 앞두고 전개되고 있는 정국을 매우 걱정하는 마음에서 쓴 글이라고 생각된다. 신부도 엄연한 사회적 구성원이기에 필요할 때는 정치적 발언도 해야 한다. 더구나 '거짓'이 '진실'을 몰아내고, '악화(惡貨, 돌)'가 '양화(良貨, 금)'를 구축하는 세상, '정치 무당'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에서 더이상 '침묵은 금'이 아니라 죄악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진정한 성직자, 참 목회자라면 '정치 무당'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상황을 바로잡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인국 마르꼬 신부의 '정치 무당'이라는 제목의 글은 가슴을 열고 꼭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林 山>

 

김인국 마르꼬 신부(연수성당)

정치 무당 - 김인국 마르꼬 신부

 

정치 무당들

 

사람은 “(하느님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고,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우리) 발아래 두셨도다.”(시편 8,6) 하는 노래를 부른다. 천지지간天地之間 만물지중萬物之衆에 유인惟人이 최귀最貴하다(동몽선습)는 말이 맞는가? 그래서 하늘은 인간이라는 종락을 차마 그를 잊지 못하며 따뜻이 돌보시는 것인가?  단도직입으로 묻는다. 사람은 무슨 근거로 자신을 만물의 영장靈長, 영묘한 힘을 지닌 뭇 생명의 우두머리로 자임하는가? 

 

공인公人의 탄생

 

하느님은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 그렇게 해서 사람은 하늘과 통하고 하늘을 그리워하며 하늘과 사귀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서서 하늘과 땅을 중개한다. 하늘의 뜻을 땅에 펼치고, 땅의 형편을 하늘에 고한다. 그리하여 땅은 하늘을 잊지 않으며, 하늘은 땅을 모르지 않게 된다. 사람은 땅바닥에 발붙이고 살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피조물들의 흠숭을 올려드린다. 사람이 있어서 하느님은 하늘 높은 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땅에서는 착한 목숨들이 평화를 누린다. 하느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하늘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세우시려는 것은 사람이 있어서요, 사람을 믿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런 숙원을 이뤄낼 인물들을 미리 점지해두셨다가 어느 날 문득 부르신다. 주님봉헌축일을 지낸 교회는 한평생 교회와 세상을 위해 헌신하려는 용감한 젊은이들을 격려하면서 선인들의 ‘그날’에 대해 들려주고자 한다. 다음은 하느님의 호출을 받고 어리둥절해 하다가 결국 부르심에 응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날에 이사야는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고 했다. 베드로는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였다. 이사야는 “나는 더러운 사람”인데, 베드로는 “나는 죄 많은 사람”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동의할 수 없었으므로 진저리쳤다. 훗날 바오로는 자격 미달의 인간에게 하늘의 소임이 맡겨진 사연을 끝내 알 수 없어 그것은 그저 은총이라고만 했다. 하느님은 넋이 나간 자를 진정시키느라 타는 숯을 그의 입술에 대주며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이사 6,7) 하기도 했고,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라고도 했다. 그런다고 덜덜 떨리는 마음이 곧바로 진정되었으랴. 누군들 에라 모르겠다. 그렇게 합시다, 했겠는가.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하는 하늘의 한숨소리를 듣고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기까지. 그리고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서기까지 어떤 번민이 요동쳤는지 성경은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잠시 배를 내주는 정도는 몰라도 인생을 통째로 내놓으라는 말에 선뜻 여기 있소, 할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따르기의 어려움

 

내가 너를 부른다. 주님의 동원령을 접수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서워 부르르 떨었다. 개인의 삶은 이 순간으로 끝내고 오늘부터 공인公人으로 살자는, 어제까지는 사私였더라도 오늘부터 공公이 되라는, 그래서 네가 아니라 네 안에서 내가 살게 해다오, 하는 곡진한 당부 아니 지엄한 명령이 끔찍했고 두려웠다.  

 

사사 ‘사’厶는 팔꿈치를 구부린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다. 자기 쪽으로만 구부러진다 하여 ‘나’를 가리키는 뜻이 됐다. 거기다가 벼 ‘화’禾가 붙으니 사적 욕망이 한층 두드러졌다. ‘공’公은 이에 정면으로 맞서는 글자다. 나눔의 뜻이 있는 팔八자를 독점 의지가 선명한 厶 위에 둠으로써 공정과 공평의 글자가 되도록 하였다. 八자는 양 손가락을 네 개씩 펴고 서로 등지게 한 모양을 한 글꼴이다. 왼쪽으로 잡아당기고(丿), 오른쪽으로 잡아당기는(㇏) 모양이라고도 한다. 나눈다(分)는 뜻은 똑같다. 한편에서는 八이 사익을 극복하는 힘을 가진 상서로운 글자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런지 사주팔자에다 상팔자, 미인 중에도 팔방미인, 이리저리 다 통할 수 있는 길이 사통팔달이다. 조선은 팔도요, 박종팔은 한국 최고의 권투선수였다. 사람이 팔팔해야지 비실거려서는 못 쓴다.    

 

어찌 살아야 사私자였던 삶이 공公자 인생이 되는가. 별 수 없다. 나날이 빌 공空이 됨으로써 결국은 공共이 되는 지경까지 가야 한다. 아니, 공共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공유지公有地는 내 땅도 아니고 네 땅도 아닌 나라 땅이다. 나라님의 몫이므로 아무도 건들지 못한다. 하지만 공유지共有地는 너도 나도 소유하지 않지만 누구나 나누어(分) 누리는(享) 모두의 땅이다. 공空에서 공公, 거기서 다시 공共까지 가는 여정은 너무나 멀고 험해서 누구든 가려고 하지 않는다.     

 

영적인 사람

 

정치 무당들이 대선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무속’과 ‘굿’의 힘에 기대어 인생 대소사를 해결해 온 수상한 후보가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을 노리고 있다. 손바닥에 ‘임금 왕’ 자를 쓰고 나올 때만 해도 웃고 말았는데 배후에 무巫 자들이 득시글거린다니 소름이 돋는다. 사실은 왕王도 좋고, 무巫도 나쁘지 않다. 생김새가 말해주듯 왕과 무는 한 글자나 마찬가지다. 둘 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령한 중개자를 가리킨다. 하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두 팔 벌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형상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제 한 몸(丨)을 기둥 삼아 하늘(一)과 땅(一)을 위아래로 연결하는 모습이다. 제정일치의 고대사회에서는 왕이 곧 무요, 무가 곧 왕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왕을 받들고 무를 공손하게 대했다. 둘 다 공익 추구에 복무하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야말로 자기私를 없애고無, 자기를 비움으로써空 공적公的이며 공적共的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가 막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왕은 사라졌으며, 무巫는 어엿한 무교巫敎가 되지 못하고 무속巫俗으로 격하되었다. 왕이 제 욕심에만 연연하고, 무가 개인의 이해를 충족시켜주는 데서 딱 멈추고 말았기 때문이다.  

 

웬만한 무당보다 내가 낫다고 자부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영적인 사람이다. 내 남편도 영적인 끼가 있다.”고 했다. 어떤 의미로 썼는지 모르지만 ‘영’이라는 글자의 뜻은 이렇다. 맨 위에 雨자가 있고 맨 아래에 巫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기우제를 올리는 중이다. 그 중간에 입(口) 세 개가 있다. 빌고 빌어서 하늘로부터 비가 내려야 농사가 잘 된다. 그러면 나도 먹고 너도 먹고 그도 먹을 수 있다. 내 입만 입이 아닌 것이다. 입은 생존뿐 아니라 소통의 창구이기도 하다. 내 말만 말이 아니다. 이 말도 저 말도 들어야 한다. 하여 아무나 가리켜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모두의 생존과 선익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사람, 제 손으로 거둬들인 좋은 것이라도 두루 나눌 수 있는 대범한 사람, 자신과 당파의 이해보다 공동선을 앞세우는 공정과 공평의 사람이라야 영적인 사람이다.  

 

너는 네가 되어라 

  

성 바오로는 “가장 보잘것없는 자의 아무 자격조차 없는 몸”이 “지금의 내가 되었다.”(1코린 15,10)면서 한없이 기뻐하였다.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자, 하지만 참으로 사람인 자. 그래서 사람이 어째서 사람인지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람. “나는 되었다. 그런 내가 되었다.”고 감격하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성취인가.

 

글쓴이 김인국 마르꼬 신부(연수성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