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는 전교조 해직교사 원상회복 특별법 제정하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국가폭력 인정했다!!!
윤석열 정권은 국가폭력 희생 해직교사 즉시 원상회복하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인권침해 인정했다!!!
이주호 장관은 전교조 해직교사 명예 당장 원상회복시켜라!
국민의 힘은 89 해직교사 원상회복 특별법 제정 앞장서라!!!
전교조 해직교사 원상회복 외면한 문재인 정권 규탄한다!!!
전교조 해직교사 원상회복 소극 대처한 민주당 각성하라!!!
민주당 이재명 대표 해직교사 원상회복 특별법 앞장서라!!!
정치 독점 민주당과 국힘은 교원들의 정치 참여 보장하라!!!
2024년 6월 26일 수요일
교육민주화동지회 임종헌
시위장소: 충주시 교현동 체육관 사거리
1. 국가폭력 피해자 ‘배보상 특별법’ 대통령 나서야
https://blog.naver.com/leemsan/222939218190
2. 89년 전교조 해직교사 원상회복의 법적 정당성
https://blog.naver.com/leemsan/222849745106
3.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도 자료
https://blog.naver.com/leemsan/222950761811
4. 교민동 성명서 '원상회복 특별법 제정하라~!!!
https://blog.naver.com/leemsan/222950809012
#전교조 #해직교사 #원상회복 #특별법 #진화위 #국가폭력 #인권침해 #문재인 #이재명 #민주당 #배보상 #명예회복 #윤석열 #국민의힘 #이주호 #임종헌 #교육민주화동지회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리라 - 89전교조 해직교사 임종헌
지금도 그때 당시 일이 떠오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한다. 12.12 군사반란으로 5.18 광주민중항쟁을 유혈 진압하고 집권한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에 이어 들어선 노태우 군부 독재정권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대한 탄압이 극도에 달했을 무렵이다. 1989년 7월초 산척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던 나는 전교조 활동과 공안 당국자들이 말하는 소위 이적표현물 소지, 전교조 지지 성명서 배포와 관련해 국가보안법,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노태우 군부 독재정권은 청와대를 비롯해서 문교부(현 교육부), 각도 교육위원회(현 교육청), 각시군 교육청(현 교육지원청) 등 교육 기관은 물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국가정보원의 전신), 경찰청, 국군 보안사령부 등을 총동원해서 전교조를 좌경 용공 단체로 몰아 와해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공안 당국에 의해 사전에 모의된 용공 조작 사건의 희생자가 된 나는 1990년 5월 11일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 1호 법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직에서 해직되었다.
내가 경찰에 체포되자 신문, 방송에서도 내 사건을 보도했다. 당시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던 철부지 아들은 방송 보도를 보고 "아빠가 텔레비젼에 나왔다!"며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녔던 일이 지금도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충주시 산척중학교 햇병아리 국어 교사였던 나는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과 나중에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동인, 김동환, 김억,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백철, 서정주, 유진오, 정비석, 조연현, 주요한, 채만식 등 부일민족반역(附日民族反逆) 행위를 한 문인들의 글이 버젓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을 보고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교과서보다도 더 크고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찬탈한 군부 독재정권에 의해 반민족, 반민주, 반인간화 교육이 강요되는 학교 현장은 더 심각했다. 진실을 가르쳐야 하는 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나아가 이 땅의 지식인으로서 나는 군부 독재정권에 저항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아이들에게 진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자 결심한 나는 1987년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부르짖으며 출범한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전교협 충북지부 충주지회에서 문화부장을 맡은 나는 주로 문화 관련 활동을 펼쳤다.
노태우 군부 독재정권의 방해 공작에도 전교조 출범이 가시화되자 공안 당국은 전교협 교사들을 대상으로 노골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내게도 탄압의 어두운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기 시작했다.
1989년 5월 14일 청주에서 열린 전교조 충북지부 발기인 대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나는 산척중학교장으로부터 경고장을 받았다. 교장은 내게 경고장을 주면서 "임 선생 앞으로 전교조 활동을 계속하면 어떤 불이익과 처벌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할 거야."라는 위협조의 말도 잊지 않았다.
노태우 군부 독재정권 차원의 전면적인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전교협은 마침내 1989년 5월 28일 역사적인 전교조 창립으로 이어졌다. 전교조 창립에 이어 각 도지부도 속속 결성됐다. 1989년 6월 10일 전교조 충북지부 창립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창립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이때, 충주경찰서 대공과 형사 2명이 들이닥쳐 나를 반강제적으로 끌고가다시피 해 차에 태웠다.
경찰은 나를 차에 태우면서 상관인 듯한 사람이 "임 선생님, 오늘은 우리와 삼탄 유원지에서 술이나 한 잔 마십시다."라고 말했다. 내가 "난 경찰과 술 마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고 완강하게 버티자, 그는 "임 선생님 우리도 임무를 받고 왔어요. 임무에 실패하면 우리도 문책을 받아요. 그러니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라고 강압적으로 말했다. 순간 달아날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뛰어봤자 벼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이들은 내가 도망갈 것에 대비해서 교통도 아주 불편한 오지로 나를 끌고 왔던 것이다.
충주시 산척면 명서리 삼탄 유원지로 끌려간 나는 아침부터 팔자에도 없는 경찰과 술판을 벌여야만 했다. 이것은 사실상 납치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전교조 충북지부 결성대회 참석을 막기 위해 나를 이곳으로 끌고온 것이었다. 결국 나는 전교조 충북지부 결성대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후 충주경찰서 대공과 형사들은 수시로 나를 찾아와 전교조를 탈퇴하라고 회유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공과 형사나 산척 지서장, 학교장, 면장 등 지역 기관장들은 부모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교조 탈퇴 압력을 가해 왔다. 이들은 부모님을 만날 때마다 "전교조는 빨갱이 집단이니 당신 아들을 전교조에서 빨리 탈퇴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찰에 잡혀가서 무슨 고초를 당할지 모릅니다."라고 은근히 위협조의 말을 했다.
어느 날 아버님은 "너 하나 때문에 우리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 나게 생겼다. 전교조를 탈퇴하던지 아니면 내 집을 나가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라."라고 최후 통첩을 하셨다. 당시 갓 결혼한 나는 시골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충주 시내에 월세 단칸방을 얻어서 쫓겨나듯이 고향 시골집을 떠나야만 했다.
경찰은 당시 공무원이었던 아내의 직장에도 찾아와서 염탐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아내에게 직접 접근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가까운 주변의 직장 동료들에게 아내의 평소 언행 등을 묻고 다니며 은근히 압박감을 주었다. 수사 기관의 전형적인 왕따 만들기였다.
충주시 교육청 담당 장학사도 수시로 나를 찾아와 전교조 탈퇴를 종용했다. 그는 '임 선생은 국립 사범대학 출신 아닌가? 가만히 있으면 승진해서 교장도 되고 교육장도 될 수 있을 텐데 뭐하러 전교조에 가입해서 스스로 앞길을 망치려고 하는가? 전교조를 되도록 빨리 탈퇴하는 것이 신상에 좋을 거야."라면서 끈질기게 설득했다.
온갖 와해공작에도 전교조가 공식 출범하고 각 도지부가 속속 결성되자 노태우 군부 독재정권은 대규모 강제 해직으로 나왔다. 1989년 7월1일 노태우 군부 독재정권의 문교부는 전교조가 불법단체라며 1527명의 교사를 파면 또는 해임시켰다.
마침내 내게도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1989년 7월 3일 충주경찰서 대공과 형사들이 산척중학교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도서실에 갖다 놓았던 홍명희의 역사소설 '임꺽정(林巨정)', 황석영의 역사소설 '장길산(張吉山)' 등 100여 권의 책을 금서라면서 압수하고 나를 충주경찰서로 연행했다. 누군가 '임꺽정'이나 ' 장길산'을 모르면 지식인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런 책들을 금서로 규정한 정권은 과연 정통성이 있는 집단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공안 당국의 터무니없는 '북침설 조작 사건'으로 유명한 제천의 강성호 선생, 충주의 권영국 선생, 청주의 도종환 선생의 구속에 이어 나까지 경찰에 체포되자 전교조 충북지부는 그야말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공안 당국에서는 전교조 출범을 막기 위해 활동가 교사들을 상대로 국가보안법 덮어씌우기 작업을 벌였는데, 충북에서는 강성호 선생과 내가 그 희생자가 된 것이었다. 이 두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군부 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해 악용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나는 3일 동안 구치소에 구금된 상태에서 전교조 결성 관련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와 이적표현물 소지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수사를 받았다. 수사 과정을 통해서 나는 1989년 2월 겨울방학을 이용해 담임을 맡았던 학생 3명을 데리고 광주민중항쟁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망월동 묘지를 참배할 때부터 공안 당국이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3월 29일 2학년 수업시간에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을 학생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실시했던 여론조사에 대해서도 공안 당국은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제보가 없었다면 경찰이 알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내 사건이 터지자 학사장교 출신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던 네째 동생도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보안사의 수사를 받았다. 보안사 수사관들은 동생의 숙소를 압수 수색하고 나와의 관련성을 집요하게 캐물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동생은 아무런 문제 없이 넘어갔다.
수사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도 드러났다. 대공과 계장 직급으로 보이는 형사가 "안기부 요원이 옆방에 와서 대기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의 말을 통해서 나는 내 국가보안법 사건이 안기부가 기획하고, 충주경찰서 대공과 형사들이 실행한 사건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청주지방검찰청 충주지청 검사는 나를 전교조 결성 관련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와 이적표현물 소지, 이적단체 고무찬양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검사는 수사와 기소 과정에서 내가 전교조를 탈퇴하면 선처를 할 것이라고 회유하기도 했다. 검찰의 기소가 있자 충주시교육청은 1990년 1월 22일 나에게 직위해제 처분을 내렸다.
1990년 5월 11일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전교조 결성 관련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와 이적표현물 소지, 이적단체 고무찬양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인정하고 내게 징역 6월, 자격정지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모두진술에서 나는 재판부를 향해 "이 법정에 있는 재판부는 나를 심판할 수 없다. 오직 역사만이 나를 심판할 수 있다. 나를 심판한 이 공판을 언젠가 역사가 반드시 다시 심판할 것이다."라고 일갈(一喝)했다.
1심 공판 선고가 있은 지 두 달 후인 7월 10일 충청북도교육위원회는 나에게 해임 처분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나는 노태우 군부 독재정권에 의해 해직교사가 되었다.
대법원 상고심이 열리는 날이었다. 상고심 재판장은 훗날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게 되는 이회창 대법원장이었다. 상고심 재판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전교조 결성 관련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하고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 상고심 재판부도 내게 적용된 국가보안법 사건이 황당한 조작 사건임을 인정한 것이다.
1991년 나는 전교협, 전교조를 통한 교육민주화운동에 투신해서 해직될 때까지의 겪었던 일들을 일기 형식으로 쓴 '참교육 일기'(참세상출판사)를 펴냈다. '참교육 일기'는 내가 교육현장에서 몸소 겪었던 체험과 아이들에게 진실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던 나의 실천 과정이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갈망하는 학생과 교사, 학부모뿐만 아니라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쓴 책이었다.
교단에서 해직된 이후 나는 3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집에만 들어앉아 사서오경(四書五經) 등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읽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주역(周易)이었다. 주역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문득 한의학(韓醫學, Korean Medicine)을 공부해야겠다는 깨달음이 왔다. 그리고, 나는 1995년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에 입학했다.
2000년 김대중 국민의정부는 1989년 전교조 대량 해직교사 복직 방침을 정했다. 내게도 복직 통보가 왔다. 나는 다니던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에 휴학계를 내고 복직 절차를 밟았다. 충청북도교육위원회는 나를 단양중학교로 발령을 냈다.
단양중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정말 학생과 교사, 학부모 모두가 만족하고 보람을 느끼는 교육,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하려고 노력했다. 먼저 학생들이 가장 좋아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학부모, 동료 교사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교육 철학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단양중학교에서 1년을 근무한 뒤 나는 정식으로 사표를 쓰고 교단을 영원히 떠났다. 교단을 떠나기 싫었지만 내게는 이미 새로 걸어가기 시작한 제2의 인생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 8월 1일 노무현 참여정부의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는 전교조 해직교사들에 대해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하고 증서를 수여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민주화운동관련자증서만 보내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해직교사들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원상회복과 배상 및 명예회복을 시켜줄 것으로 큰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원상회복이 물 건너가자 노무현 정부에 대한 기대는 큰 실망으로 바뀌었다.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에 다시 복학해서 학업을 마친 나는 2013년 10월경 실시된 한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하고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2014년 세명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한 나는 그해 4월 충주에서 '임종헌한의원'을 개원했다.
2017년 시민들의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도 전교조 해직교사들의 원상회복을 끝내 외면했다. 해직교사들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는 사실 기대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촛불정부를 자칭한 문재인 정부의 원상회복 외면은 실망을 넘어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2022년 12월 8일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전교조 교사들의 대량 해직은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였다고 판결했다. 진화위는 판결과 함께 정부에 피해 당사자들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 등 원상회복 조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2023년 11월 9일
1989년 전교조 해직교사 임종헌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교육민주화운동백서발간위원회 제출용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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