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함께 모시다

林 山 2005. 5. 2. 12:22

이른 아침 할아버지의 유골을 모시고 온 가족이 함께 앙성 진달래 공원묘원으로 향한다. 제사음식도 정성스레 마련했다. 타지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딸 선하와 아들 정하도 참석했다. 제천에서 네째 동생도 공휴일을 맞아서 내려왔다. 하나뿐인 여동생 내외는 내일 아프리카로 떠나는 해외출장을 앞두고 친정행사에 참석했다. 청주에서 고모부님도 오셨다. 중풍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 고모님은 끝내 오시지 못 했다. 서울에서 사업에 여념이 없는 둘째 동생도 내려오지 못 했다. 고모님과 둘째를 제외하고는 모처럼 온 가족이 다 모인 것이다.

공원묘원에 도착하니 성묘를 온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연휴를 맞아서 조상묘를 찾은 것이다. 앙성에 사시는 막내 남동생 장인 어르신도 사돈의 큰일에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오셨다. 산기슭에는 진달래가 진분홍색으로 물들고 있다. 노오란 양지꽃도 군데군데 보인다. 백목련도 하이얀 속살을 드러내며 활짝 피었다. 화창한 봄날이 더없이 푸르다. 어디선가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할머니의 묘소 주위를 맴돌고 있다. 날씨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재회를 축하해 주는 듯 하다.

산신제를 지내고 곧바로 봉분을 허무는 작업에 들어간다. 땅을 파는 일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얼마간 파들어가자 암반이 나타난다. 다행히 쉽게 부스러지는 암반이다. 나도 곡괭이를 잡아본다. 곡괭이질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내가 힘들어 보였는지 네째가 내게서 곡괭이를 빼앗아 든다. 새로 맞춘 비석을 일꾼들이 목도를 해서 올려왔는데 왼쪽 옆면의 글씨를 새기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비석을 도로 메고 내려가야만 했다.

몇 시간 동안 번갈아 가면서 땅을 파내려간 끝에 할머니의 관을 덮은 횡대가 나타난다. 거의 다 팠다. 이제는 할아버지의 유골을 모신 칠성판이 들어갈 자리만 더 파면 된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묘소 한켠에서 한지에 싼 할아버지의 유골을 상(上)에서부터 순서대로 칠성판 위에다 배열을 하고 있다. 배열을 마치자 아버지는 고모부의 도움을 받아 마치 시신을 싸듯이 삼베로 칠성판과 유골토를 함께 칭칭 동여맨다. 할아버지를 할머니 옆에 모실 준비를 마친 것이다.

마침내 할머니가 묻힌 바로 옆에 할아버지를 모실 자리가 마련되었다. 당숙은 할아버지의 칠성판은 장손인 내가 모시고 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칠성판을 들고 할아버지가 영원히 안식하실 자리로 모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비록 저승에서라도 백년해로하시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칠성판 위에 청색과 홍색의 사주를 놓고 횡대를 깐 다음 명정을 덮었다. 할아버지를 모시는 아버지의 손길이 그렇게 정성스러울 수가 없다.

아버지부터 차례로 취토를 한다. 취토란 살아있는 사람들이 돌아가신 이의 관 위에 한줌의 흙을 뿌리는 이별의식이다. 취토가 끝나자 무덤을 메우고 봉분을 만드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봉분을 쌓으면서 잔디도 심었다. 동그란 봉분이 보기에도 좋다. 돌아가신 이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유택이 완성된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잠들어 계신 묘소 앞에 젯상을 차려 정성껏 제사를 올렸다.

할아버지는 이처럼 한줌의 흙이 되어 할머니의 곁으로 돌아오셨다. 62년만에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해후가 이루어진 것이다. 할머니는 이제 더이상 할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러고보니 할머니는 오늘 62년만에 처음으로 신랑을 맞이하신 것이다. 집안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아버지도 오랜 숙원이 이루어져서 그런지 더는 여한이 없다고 하신다. 나도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한 것 같아서 마음이 기쁘다.

할아버님 할머님 부디 편히 쉬시기를.....

20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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