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9일. 토요일. 그녀가 왔다. 민지네에서 '찬별'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그녀.....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냉정한 느낌을 주는 닉네임 '찬별'..... 민지네 오프에서 한 두어번 잠깐씩 얼굴을 스치듯 만났던 그녀..... 대구출생이며 경북대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교원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올해 갓 30인 솔로..... 여럿이 함께 오는 줄 알았더니..... 홀홀 단신으로 나타났다. 50대 초반 그것도 유부남인 나에게 프로포즈를 하러 오는 것은 설마 아닐테고..... 나는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찬별이 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나는 왠지 그녀가 여동생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찬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차를 마시며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대화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찬별이 매우 명석하고 이지적이며 뜨거운 가슴을 가진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감은 스르르 풀어지고....... 한겨울 밤하늘을 초롱초롱 밝히는 별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찬별이라는 닉네임..... 그녀의 설명을 듣고 보니 찬별은 차가운 느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따뜻하고 밝은 느낌을 주는 이름이다.
찬별은 내게 선물이라면서 김원정이 부른 '낮에 나온 반달'이라는 타이틀의 CD 한장을 건넨다. 그녀가 좋아하는 동요가 실려 있어서 이 CD를 보자마자 골랐다고 한다. 초록색 펜으로 글씨를 이쁘게 쓴 엽서 한 장과 함께..... 글씨만 이쁜 것이 아니라 엽서내용도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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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님께
곡차 한 잔 나눠주신다는 고마운 말씀에 혼자 충주에 들르려고 해요. 다시 혼자 여행다닐려구요. 제 자신과 맞닥뜨려서 뭐든 깨쳐볼까 해서 말예요.
임산님의 삶의 향기도 궁금하구요. 인생 선배님의 말씀이 듣고 싶기도 하구요. 山을 좋아하시니 마음으로 친하게 느껴지기도 하구요.
전 요즘 딥 수쿠버다이버들과 산악인들의 다큐를 보면서 많은 걸 느껴요. 거기 있으니깐 갈 뿐이라는 말에 무언의 동감을 느낀답니다.
얼마 전에 대학로에 있는 째즈클럽 '천년동안도'에 가봤어요. 이정식씨의 섹소폰 연주가 환상적이었어요. 그 가게에서 나오는 길에 째즈음반을 샀어요. 제가 좋아하는 동요가 실렸기에 냉큼 샀답니다. 오랜만에 뵙는 님께도 나눌려고 해요.
굳은 심지로 늘 세상 보듬으시는 넉넉한 품으로 힘내서 가시길 빌어요. 건강하세요.
2005.7.9 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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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스쿠버다이버와 산악인들의 세계에 동감한다는 말에서 그녀의 심지를 엿볼 수 있다. 인간의 생사가 엇갈리는 극한상황의 세계..... 그곳에 몸을 맡긴 사람들..... 인간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어야지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 찬별은 그것을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불현듯 지리산에서 12시간 동안 눈과의 사투를 벌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몇 년 전 겨울 지리산에 폭설주의보가 내렸을 때다. 성삼재에서 출발해서 만복대를 넘어 정령치까지 가려고 하는데 초입에서부터 키를 넘는 눈이 가로막았다. 눈을 헤치고 가다가 눈구덩이에 빠지면 허우적거리면서 빠져나오고..... 바람은 살을 에는 듯이 불어오는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날도 저물고..... 먹을 것이 떨어져서 허기도 지고.... 러셀을 하느라 힘은 있는 대로 빠지고 피로가 겹치면서 탈진 일보직전까지 갔다. 이대로 주저앉아서 잠들면 체온저하로 인해 십중팔구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캄캄한 밤중이라 몇 번이나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간신히 길을 찾곤 했다. 폭설에 뒤덮힌 산속을 장장 12시간이나 헤매다가 정령치에 닿았을 때의 기쁨이란..... 그러나 딥 스쿠버다이버나 히말라야 8천 미터급 산을 오르는 산악인들이 겪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충주시청 옆에 있는 '수가성'식당에서 순두부 백반으로 식사를 했다. 찬별은 순두부를 좋아한단다. 이 집 주인은 나의 중학교 동창인데 한달 전쯤 개업을 했다. 순두부 메뉴가 11가지나 되는 순두부 전문식당이다. 두부는 맛도 좋고 영양도 만점인 식품이어서 나도 좋아한다.
오후 4시 드디어 퇴근시간이다. 찬별에게 충주의 문화유적과 명승지를 안내해 주기로 한다. 옆지기도 함께 했다. 두 여인을 에스코트해서 먼저 중앙탑 공원으로 갔다. 남한강변의 넓게 펼쳐진 잔디밭 한가운데 중앙탑이 우뚝 솟아 있다. 한반도의 한가운데에 세워졌다는 중앙탑..... 중원을 차지하는 세력이 한반도의 패권을 잡을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지역은 옛날부터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공원 잔디밭에 조성된 조각공원을 한바퀴 돌아보고 탄금대로 갔다.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 그래서 탄금대다. 이곳은 또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왜적을 막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곳이다. 그러한 슬픈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한강은 고요하게 흐르고 있다. '감자꽃'의 시인 권태응 시비도 이곳에 있다. 옆지기와 찬별은 다정한 자매처럼 솔밭 오솔길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탄금대를 떠나 충주호를 보러 가기로 한다.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라는 계명산 순환도로를 따라 마즈막재를 넘으니 드넓은 충주호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충주댐 박물관 전망대에 들러 충주댐을 구경한 뒤, 충주호 선척장, 서운리까지 그림같은 호반도로를 달린다. 차창밖으로 남해 다도해와 비슷한 풍광이 계속 나타나자 두 여인은 연신 탄성을 자아낸다. 서운리에서 임도를 따라 지등산을 넘었다. 옛날에는 심심 두메산골이었던 음양지, 미라실, 사과로 유명한 장선을 지나서 충주시내로 돌아오니 벌써 저녁 때가 다 되었다.
'수가성' 식당에서 순두부 백반으로 저녁을 먹고 포항산 과메기를 안주로 곡차도 한 잔 하였다. 원래 과메기는 겨울철에 먹어야 제 맛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은 그게 아니다. 과메기가 입에서 살살 녹는다. 찬별도 과메기를 맛있게 잘 먹는다. 수가성 식당을 나와서 호암지 호반에 있는 라이브 카페 '나루터'를 찾았다. '나루터'에서 우연히 지기들을 만나 한데 어우러져 한여름밤의 음악회를 벌였다. 찬별은 호암지의 야경에 푹 빠져버린 듯 밤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한여름밤의 음악회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와 찬별을 빈방에 재우다.
이튿날 옆지기는 천주교 성당에 나가고 찬별과 둘이서 이화령부터 가보기로 한다. 수안보에서 연풍을 거쳐 이화령에 올라선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고개마루다. 이화령 정상에 앉아 연풍읍내를 내려다 보며 찬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찬별은 그녀가 태어나서 성장한 과정, 가족들, 지난날의 학창생활과 사회활동, 그리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 간직하고 있는 꿈과 희망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조령산이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등산객들이 많이 보인다.
이화령을 내려와 월악산으로 들어갔다. 덕주골 '월송상회'에 들러 손두부 한 접시를 시킨다. 찬별은 유난히 두부를 좋아한다. 월악산을 떠나 청풍 문화재 단지에 들러 산성터와 수몰지에서 옮겨온 누각, 동헌, 고가들을 구경하였다.
청풍 문화재 단지를 나와 청풍대교를 건넌다. 금수산 자락을 따라 난 충주호반 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옥순대교 광장에서 내렸다. 단양팔경 중의 하나인 옥순봉과 구담봉을 보기 위해서..... 충주호를 사이에 두고 왼쪽으로는 가은산이 오른쪽으로는 구담봉과 옥순봉이 멋진 경치를 연출한다. 한폭의 진경산수화가 따로 없다.
다음에 들른 곳은 선암이다. 선암은 상,중,하선암을 합쳐서 이르는 말이다. 계곡을 따라 펼쳐지는 바위와 소나무들의 아름다운 조화....... 선암을 보고나서 간 곳은 사인암...... 선암과 사인암도 단양팔경에 속한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절벽 아래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그 옛날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풍월을 읊던 곳 사인암.....
사인암을 나와 죽령재에 올랐다. 이화령과 마찬가지로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곳..... 풍기읍이 저만치 내려다 보인다. 죽령터널이 뚫려서 그런지 차량들이 한산하다. 다시 죽령재를 내려와 구단양에서 신단양에 이르는 강변도로를 달려 도담삼봉을 보러 갔다. 강의 한가운데 바위봉우리가 세 개 솟아올라 있고 그중 가장 큰 바위봉우리에는 정자가 하나 있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 저 정자위에 올라 곡차 한잔 마셨으면 좋겠다. 단소 한 가락이 있으면 금상첨화고......
이제는 충주로 돌아갈 때..... 찬별에게 보여줄 것은 거의 다 보여 준 셈이다. 돌아올 때는 금봉이와 박달선비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서려 있는 박달재 옛길을 넘어서 왔다. 충주로 돌아오니 벌써 저녁 때가 다 되었다. '충주추어탕'에서 추어탕으로 저녁을 먹었다. 성당에서 돌아온 옆지기도 자리를 함께 했다. 찬별과 옆지기는 언니 동생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저녁을 먹고 버스터미널로 가서 찬별을 서울로 떠나 보냈다. 찬별이 충주에 와서 얻으려고 했던 것을 제대로 이루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녀에게 줄 것이 별로 없는지라..... 혹시 못 이룬 것이 있다면.....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찬별님 안녕!
2005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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