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맞이하여 내 고향 산척을 찾았습니다. 고향 땅에 발을 들여 놓으면 언제나 천등산이 반갑게 맞아 줍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산이라 고향을 생각하면 언제나 천등산이 떠오릅니다. 천등산은 충청북도 충주시 산척면과 제천시 백운면 경계에 있는 산이지요. 높이는 해발 807m입니다. 북동쪽에는 시랑산(侍郞山:691m), 남쪽에 인등산(人登山:667m)이 솟아 있습니다. 북동쪽 비탈면을 흐르는 계류는 제천천(提川川)을 이루며 충주호(忠州湖)로 흘러들고, 서남쪽 비탈면을 흐르는 계류는 영덕천(永德川)을 이루며 남한강으로 흘러듭니다. 남동쪽으로 충북선 철도가 가로지르고, 북서쪽으로 장호원~제천 간 국도가 지나며, 서쪽 기슭에는 광덕사(廣德寺)가 있습니다. 남쪽 기슭에는 천등사, 오은사가 있고요.
천등산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우리 가요 '울고넘는 박달재'에도 나옵니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님아.....'로 시작하는 노래지요. 그런데 박달재는 원래 시랑산에 있는 것이고, 천등산에 있는 고개는 박달재에서 약 9km 쯤 서쪽에 위치한 다리재입니다. 산척면의 천등산과 인등산 동량면의 지등산을 일컬어 삼등산이라고 합니다. 이 삼등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왔던 전설이지요.
조선 세조 때 황규라는 지사가 명당을 찾아 팔도강산을 두루 돌아보고 다닐 때 이곳 천등산에 와서 하룻밤을 묵은 일이 있었답니다. 황지사가 밤에 잠을 자는데, 어디선가 세차게 달리는 말발굽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 일어납니다.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니 하얀 옷을 입은 신선이 갈색의 준마를 타고 한 골짜기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황지사가 신선의 뒤를 몰래 따라가 보니 한산제당으로 가서 말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신선은 갈장을 들어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습니다. '천상천하 만물이 생성되는 것은 음양의 섭리로 천지사이에 서있는 우리의 모습도 음양의 법도를 벗어나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지금 내가 말하는 세 곳의 명산을 다스리는 것은 하늘의 뜻이요, 이곳에 사는 억조창생을 위한 땅의 뜻이요, 선악의 구별은 우리의 할 일이니라. 천동이 너는 저 천산에 올라가 양을 맞아들이고, 인동이 너는 인산에 올라가 혈을 이루도록 하고, 지동이 너는 지산에 올라가 음을 누르도록 하여라. 앞으로 이 삼산의 정기가 상통되거든 천등산 밑에는 갈마음수혈을 만들고, 인등산 밑에는 용비등천혈을 만들고 지등산 밑에는 옥녀직금혈을 만들어라.' 하고 이르자, 세 신동들은 제각기 보라색 구름을 타고 세 곳으로 흩어져 갔습니다. 잠시후 신선이 갈장을 높이 들자 남쪽에서는 파란빛이, 중앙에서는 보라빛이, 북쪽에서는 황금빛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신선은 그 세 곳의 명당을 갈장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황지사는 세 곳의 명당자리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삼등산의 명당도를 그려서 가슴에 품고 하산하려는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면서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황지사가 급히 숙소로 돌아가려고 하는 찰나 산봉우리에서 나는 벼락치는 소리에 깜짝놀라 눈을 번쩍 떴습니다. 깨어나 보니 지금까지의 일은 일장춘몽 한바탕 꿈이었습니다. 황지사가 급히 밖으로 나와 산꼭대기를 바라보니 한 곳에서는 파란색, 또 한 곳에서는 보라색, 또 다른 한 곳에서는 황금색의 빛이 나오더니 서서히 꺼지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밝자 황지사는 이 세 산의 명당자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황지사는 신선의 말을 기억해서 명당의 지도를 그려놓고는 세상에 발표하기 전에 그만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이 삼등산의 명당자리는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구름에 가린 천등산
송강리 소림마을과 인접한 영덕리 계척마을, 그리고 서곡마을 사이에 나즈막한 산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산의 이름은 왕박산(170m)입니다. 천등산 줄기 하나가 서쪽으로 뻗어내린 끝부분에 있는 산이지요. 우리집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지요. 창문만 열면 바로 코앞에 보이는 산입니다. 왕박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신라 박혁거세 41년은 백제의 온조가 한산에 위례성을 세우고 국호를 십제라고 했던 이듬해입니다. 천등산 자락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농부가 새벽 일찍 일어나 뒷산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 웅성거리고 있습니다. 농부는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자세히 살펴봅니다. 사람들이 빙 둘러선 그 한가운데 허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신선같은 노인이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허리에 황색 띠를 두른 사람 세 명씩 여섯 명이 일어서서 사방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농부는 그 광경이 엄숙하고 존경스러워 저절로 고개가 수그려집니다. 농부는 한동안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집으로 돌아와 가장 아끼던 찹쌀로 밥을 지어서는 따뜻한 물과 함께 그곳으로 올라가 진상을 합니다. 인자한 얼굴에 황금 광배를 등에 진 노인은 그가 진상한 찰밥을 받아서 맛있게 먹고는 크게 치하를 합니다. 농부는 산에서 내려오며 곰곰이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잠시후 허리에 황색 띠를 두른 사람이 농부를 찾아와 삼줄이 있는지 농부에게 묻습니다. 장막을 칠 끈이 모자라서 빌리러 온 것입니다. 농부는 삼줄을 있는대로 내주면서 신선같은 노인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황색 띠를 두른 사람이 목소리를 낮추어 '저 분은 바로 이 나라의 혁거세 거서간으로 나라순행을 위해서 이곳까지 행차한 것이라오.'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 거서간은 당시의 왕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농부는 무릎을 꿇어 큰절을 합니다. 혁서세 옆에서 황색 띠를 두르고 있던 사람들은 양산, 고허, 대수, 진지, 가리, 고야의 여섯 촌장임도 알게 됩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해지는 이 여섯 촌장은 후에 이(李), 정(鄭), 손(孫), 최(崔), 배(裵), 설(薛)씨 성의 조상들입니다. 박혁거세는 그 산에서 행궁을 차리고 하룻밤을 쉰 다음 떠납니다. 그 후 왕이 숙박한 산이라고 해서 이 산을 왕박산이라고 부릅니다.
왕박산이 두 갈래로 갈라진 골안에는 계척마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계척마을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습니다. 내가 엄정면에 있는 중학교를 걸어서 다닐 때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연못의 둑길을 지나다니곤 했지요. 못 안쪽에 있는 마을은 '못안'이라고 부르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옵니다. 역시 어릴 때부터 숱하게 들어오던 전설이지요.
조선조 중엽 계척마을에 한양에서 낙향한 구관이 한 사람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판서를 지낸 사람으로 성이 유씨였습니다. 유판서는 재산이 많았는데 사사로운 욕심이 없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요. 특히 가난한 효자나 충신들에게 적지않은 도움을 주곤 했습니다. 또한 그는 부처님에 대한 지성이 아주 지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판서'라는 별명도 얻었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한가지 커다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50살이 넘도록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유판서는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점도 쳐보았고, 영험하다고 알려진 산천이나 고목, 바위 등을 찾아 치성을 올리기도 했지만 별다른 효험이 없었습니다. 환갑을 지낸 뒤부터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식갖는 일을 체념합니다. 그리고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 뒤로 그는 부처님께 시주하는 것을 비롯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데 재산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한 노스님이 유판서네 집에 와서 시주를 청합니다. 전에 많은 시주를 한 절의 스님이었지요. 노스님이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무슨 큰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으신지요? 소승은 미력하오나 부처님께 청원하오면 소원이 성취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유판서 부부에게 희망적인 말을 들려줍니다. 유판서는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만 우리는 슬하에 혈육을 두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라고 말하고 한숨을 내쉽니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온 집안을 두루 살핍니다. 그리고는 뒷산으로 올라가서 집터를 살피더니 집 앞에다 연못을 파면 혈육을 얻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갑니다. 그 말을 들은 유판서 집앞에다 연못을 파기 시작합니다. 연못이 완성되자 물고기까지 넣어서 기르며 정성을 다합니다. 이게 웬 일이랍니까! 얼마 뒤 과연 부인에게 태기가 있더니 드디어 옥동자를 낳습니다. 유판서 부부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마을사람들도 기뻐합니다. 유판서의 아들은 나중에 장성하여 사관에 오르게 됩니다. 유판서는 벼슬길에 오른 아들을 따라 집을 정리하고 한양으로 떠납니다. 그 집을 사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조씨였지요. 조씨네 역시 자손이 번창해서 사관하는 자손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이 집터가 명당터로 알려져 있지요. 마을사람들은 지금도 이 연못에 있는 물고기를 잡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 집에는 얼마전까지 실제로 조씨네가 살았습니다. 조씨네 아들 중에 나와 중학교를 같이 다녔던 사람이 있지요.
또 도봉마을에서 송정마을 쪽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신작로 가에 아들바위 딸바위라는 확바위가 있었습니다. 길가에서 약 7m쯤 떨어진 곳에 큰 바위가 있고, 이곳에 확처럼 생긴 구멍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위에 있고 다른 하나는 1m쯤 아래쪽에 있었습니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이 확바위에 조약돌을 참 많이도 던져 넣었던 기억이 나네요. 친구들끼리 확에 누구의 돌이 더 많이 들어가나 시합을 하기도 했지요. 이 확바위에도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지요. 역시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입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아들이 없는 어떤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갖게 해달라며 날마다 돛대봉에 치성을 드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백발도인이 나타나서 이 학바위를 알려주며 '돌확이 두 개 있는데 아들을 원하거든 윗 확바위에 돌을 넣고, 딸을 원하면 아래 확바위에 돌을 넣어라. 지성을 다하면 원하는대로 될 것이다.'라고 일러줍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이른 아침에 그곳에 가보니 확바위가 정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인은 돌을 윗 확에다 던져넣고는 정성을 다해서 빕니다. 이게 웬 일입니까! 바로 그 날부터 부인에게 태기가 있습니다. 열 달이 차 출산을 했는데 옥동자입니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일명 아들바위 딸바위라고 부르게 됩니다. 산척사람들은 다 아들바위 딸바위라고 부릅니다. 나도 확바위라는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들을 원하는 사람은 아들바위에 한 번씩 돌을 던지고 가는 풍습이 생겨났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번씩 던진 돌이 아들바위 근처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아들바위에 비해 딸바위 근처에 떨어진 돌은 훨씬 적었습니다. 남아선호사상이 뿌리깊이 박힌 한국인들의 의식구조를 확바위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 확바위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도로확장 공사와 구치소를 짓느라고 확바위를 치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일 면장이었다면 이 확바위를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다른 곳으로 옮겨다 놓았을 것입니다. 확바위가 사라짐으로써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고향을 기억할 수 있는 기념물을 영원히 잃어버렸습니다.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용천산
고향의 우리집을 중심으로 천등산과 반대편에 있는 산이 용천산입니다. 두 산 모두 우리집에서 빤히 바라다 보입니다. 용천산은 동량면 대전리와 산척면 영덕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지요. 고려초까지 흘산이라고 불리워 오던 산입니다. 높이는 해발 약 293.7m입니다. 이 산 중턱에는 물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병을 고치는 데도 좋다고 소문이 난 약수터가 있습니다. 이 샘의 영기를 받으면 소원성취를 할 수 있는 영천이라고 모시는 사람들도 있지요.
이 약수터에 얽힌 전설도 있습니다. 전설은 이렇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산속에서 풍악소리가 나서 보니 그 약수터 부근에 오색구름이 영롱합니다. 약수터에 머물던 영롱한 오색구름이 서서히 하늘로 올라갑니다. 사람들은 그 오색구름이 용이 승천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이 약수터를 신성시해 오고 있지요. 그 후 사람들은 이 약수터를 용천이라고 불렀으며, 산이름도 용천산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지금은 약수터의 물을 간이 상수도로 이용하고 있지요. 나도 이 샘의 물을 마셔 보았는데 물맛이 참 달고 시원합니다.
송강리 월현(月峴)마을에서 영덕리 덕해마을 쪽으로 넘어가는 나즈막한 고개가 하나 있습니다. 이 고개를 달랑고개 또는 월현이라고 합니다. 제가 태어나서 자란 동네가 바로 이 월현마을입니다. 월현은 옛날에 구릿들이라고 불리워 오다가 천등산, 인등산, 지등산의 세 명산이 둘러 있어, 삼등산을 향해서 달을 보던 고개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월현마을은 상방, 중방, 하방이 있습니다. 나의 시골집은 바로 중방에 있지요. 하방은 갈마장이라고도 하는데,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고가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 고향 구릿들은 달랑고개에서 서남쪽으로 펼쳐진 들을 말하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조때 일입니다. 임진왜란으로 백성들은 왜적들을 피해 피난가기가 바쁩니다. 좋은 피난처가 있다는 소문만 나면 사람들이 그리로 모여 듭니다. 그 때..... 중원(충주의 옛 지명)에 있는 삼등산 밑으로 가야 살 수 있다는 도참설이 떠돕니다. 도참설을 믿는 사람들은 남부여대하고 삼등산을 찾아서 줄을 이어 모여듭니다. 피난민의 행렬이 끝이 없습니다. 이 무렵 가족을 모두 잃은 한 노인이 삼등산을 물어물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보니 같은 처지의 노인을 만납니다. 또 노인을 만납니다. 이렇게 해서 아홉 명의 노인이 모이게 됩니다. 이 노인들은 서로의 불행과 고독을 위로해 주면서 한 곳에 모여 여생을 보내자고뜻을 모읍니다. 우선 비를 피할 집을 산기슭에 마련하고, 먹고 살아갈 밭을 일구어 씨를 뿌립니다. 피붙이도 없고 일가친척도 없는 노인들이고 보니 신세한탄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그리고 오로지 일하는 것을 낙으로 삼게 됩니다. 노인들은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샛별을 보면서 들로 나가서는 어두워져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게 일과였습니다. 그러니 늘어나는 것은 땅이요, 우거지는 것은 곡식입니다. 어느새 아홉 노인들이 개간한 땅은 한 들판을 이루게 됩니다. 그 들판에 이름이 붙습니다. 아홉 노인이 만든 들이라는 뜻의 '구로(九老)들'..... 그후 구룻들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나중에는 구릿들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노인들이 집에서 이 들판으로 오려면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달빛을 보면서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해서 '달랑고개', 한자로는 '월현'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달랑고개는 내가 어렸을 때 대보름날 망월놀이를 하곤 했던 고개지요. 깡통에 불을 피워 돌리면서 동산에 둥그런 달이 떠오르면 달을 향해 소원을 빌면서 절도 했습니다. 지금은 구릿들에 인가가 많이 들어서서 부락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면사무소가 있는 면소재지가 되어 있습니다.
*고향의 집앞에 있는 대추나무
천등산과 용천산을 한 번 더 바라보고는 고향집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대추나무가 반겨줍니다. 꽤 오래 전 내가 어린 묘목을 직접 심었는데 어느새 저렇게 자라 있습니다. 굵은 대추알이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대추가 얼마나 많이 달렸는지 가지가 늘어져 있네요. 저러다 가지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대추가 붉게 잘 익으면 어머니는 따서 햇볕에 말린 다음 한의원으로 갖다 주십니다. 한의원에서 대추가 들어가는 처방이 있으면 바로 이 놈들을 씁니다. 나는 내 환자들에게 항상 전국 아니 전세계에서 최고로 좋은 한약을 처방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품질이 뛰어나면서도 오염되지 않은 한약재를 사용해서 말이지요.
본초서에 보면 대추에 대해 '大棗味甘和百藥 益氣養脾滿休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해석을 하자면 '대추는 맛이 달고 모든 약성을 조화시키며, 기(氣)를 더하고 비(위장)를 튼튼하게 해준다. 그러나 배가 북처럼 뻥그렇게 불러오는(滿) 병에는 대추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대추는 맛이 달고 독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한약을 달일 때 대추 몇 개를 생강과 함께 넣어주면 다른 약초의 독을 중화시켜 줍니다. 또한 대추의 단맛은 긴장을 풀어주는 완화작용이 있어 신경이 예민하고 날카로워지거나 불면증에 시달릴 때 복용하면 효과적이겠지요. 대추에 인삼을 더 넣어 끓여 마시면 기운이 생기면서 식욕도 좋아집니다. 이 밖에도 대추에는 이뇨작용과 혈압을 떨어지게 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대추에 함유되어 있는 무기염류들은 빈혈을 치료하는데도 도움을 줍니다. 대추는 또 항알레르기 성분도 들어 있어서 천식을 비롯한 내분비질병이나 정신질환 등에 좋습니다. 그래서 대추는 예로부터 감초와 함께 해독약, 완화제로 써 왔습니다. 최근에는 과민성자반증에도 효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의보감에도 나와 있는 '甘麥大棗湯'은 히스테리, 신경쇠약, 수면장애 등을 치료해 줄 뿐만 아니라 신경안정을 도와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대추
대추가 익으려면 좀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막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으니까요. 우리 몸에 좋은 차 중에 대추차가 있습니다. 대추차를 만드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먼저 대추를 깨끗이 씻어 말린 후 2∼3시간 달입니다. 이 때 생강과 감초를 함께 넣고 끓이면 더욱 좋습니다. 또 한 가지는 대추를 반으로 썰어 꿀이나 설탕과 함께 겹겹이 재워 둡니다. 한달 정도 지나면 대추청이 됩니다. 대추청에 끓는 물을 부어 마시면 훌륭한 차가 됩니다. 대추차를 오랫동안 복용하면 얼국색이 좋아지고 몸도 가벼워져 장수를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단, 대추는 몸이 마른 사람은 많이 먹어도 해가 없으나 비만체질인 사람은 조금씩 먹어야 합니다. 대추의 단맛이 살을 찌게 하니까요.
대추는 간기능 회복에 효능이 있어 강장제로도 쓸 수가 있습니다. 잘 익은 대추에는
비타민과 탄수화물이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을대추는 각종 부인병에 탁월한 효과가 있지요. 대추에 들어있는 비타민류나 식이성 섬유소, 플라보노이드, 미네랄 등은 노화방지, 항암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추의 식이성 섬유는 발암물질을 흡착해서 몸 밖으로 밀어냅니다. 뿐만 아니라 대추에 함유된 베타카로틴은 암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몸속의 유해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추는 특히 여성들의 피부를 윤택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대추를 보고 안 먹으면 늙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황제나 황후들은 대추를 불로장수약식의 한 가지로 여겼습니다.
*고향집 지붕 위의 호박
고향집 옥상에 올라가 행랑채 지붕을 바라봅니다. 지붕에는 잘 생긴 호박이 다섯 덩이나 있습니다. 벌써 호박이 늙어가고 있네요. 옛날같으면 지붕 위에 호박대신 달처럼 둥근 박이 올라가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플라스틱 바가지에 밀려나 박을 구경하기도 힘듭니다.
호박은 그 용도가 참으로 다양합니다. 여린 호박잎은 쪄서 쌈으로 먹기도 하고, 어린 순과 함께 된장찌개에 넣기도 합니다. 애호박은 썰어서 각종 국이나 찌개에 넣으면 맛이 아주 구수하지요. 또 전으로 부치거나 갖은 양념을 해서 볶음요리로도 만듭니다. 나는 특히 호박볶음을 좋아합니다. 늙은 호박은 범벅을 만들어 먹기도 합니다. 어릴 때 많이 먹던 음식이지요. 늙은 호박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서 말린 후에 떡을 만들 때 넣으면 호박떡이 됩니다. 호박으로 엿을 만들면 호박엿이 되고요. 울릉도 호박엿이 유명하지요. 아이를 낳은 부인의 몸은 부기가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 호박을 달여서 복용하면 부기가 잘 내립니다. 호박씨도 버리지 않습니다. 잘 말려 놓았다가 겨울에 화롯가에서 손톱으로 까먹으면 훌륭한 간식거리가 됩니다. 어릴 때 호박씨 많이 까먹었습니다.
호박범벅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준비물은 호박 1개, 찹쌀가루 반 컵, 설탕, 소금입니다. 호박대신 단호박을 써도 무방합니다.
호박을 반으로 갈라 속을 판 뒤 껍질을 벗깁니다.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물을 넉넉하게 붓고 냄비에 끓입니다. 호박이 어느 정도 익으면 숟가락이나 주걱으로 눌러 으깹니다. 호박이 어느 정도 끓었을 때 찹쌀가루를 넣어 좀 더 끓입니다. 다 끓으면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맞춥니다. 영양도 만점이고 맛도 뛰어난 호박범벅입니다. 이 때 고구마를 한 개 정도 썰어 넣으면 좋습니다. 콩이나 팥을 넣으면 더 좋습니다.
단호박 샐러드는 어떨까요? 준비물은 단호박 100g, 통조림 옥수수·건포도 2큰술씩, 드레싱(단호박 120g, 마요네즈 2큰술, 설탕 1큰술)입니다. 이렇게 만듭니다. 단호박을 껍질과 씨를 제거한 후 큼직큼직하게 썰어 놓습니다. 찜통에 단호박을 넣고 찐 다음 뜨거울 때 체로 내려서 으깹니다. 사과는 껍질을 벗기고 씨를 발라낸 후 가로 세로 5cm 크기로 썹니다. 건포도는 깨끗이 씻어서 물기를 닦아둡니다. 그릇에 으깬 호박, 건포도, 사과를 마요네즈와 함께 버무린 뒤 소금으로 간을 맞춥니다.
애호박 냉국을 만들어 볼까요? 준비물은 애호박 2개, 소금 약간, 녹말가루 2큰술, 붉은 고추 1개입니다. 냉국 국물은 얼음물(장국) 4컵, 국간장·설탕 1큰술씩, 소금 2작은술, 식초 1½큰술을 혼합해서 만듭니다. 애호박을 깨끗이 씻어서 4㎝ 길이로 잘라 돌려 깎은 뒤 채썹니다. 유리나 사기그릇에 호박채와 소금, 물을 조금 붓고 버무려 절였다가 물기를 꼬옥 짜냅니다. 붉은 고추는 송송 썰고 씨를 털어냅니다. 절인 호박에 녹말가루를 골고루 입힙니다. 소금을 약간 넣어 펄펄 끓는 물에 녹말가루 입힌 애호박을 넣어 삶습니다. 삶은 애호박을 찬물에 헹군 뒤 체에 밭쳐 물기를 뺍니다. 냉국 국물을 만든 뒤 냉장고에 넣어서 차게 둡니다. 그릇에 호박을 담고 냉국 국물을 부어 내면 됩니다. 싱싱한 야채나 해물을 넣어도 됩니다. 육수 만들기가 어려우면 시중에서 판매하는 육수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애호박 냉국은 여름철에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요.
*고향집 장독대
옥상에서 수도와 장독대가 있는 곳을 내려다 봅니다.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그 모습이 정겹습니다. 저 항아리들에는 된장, 고추장, 간장, 장아찌 등이 담겨 있을 겁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항아리들이라 이젠 정이 들었습니다.엣날에는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정한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리기도 한 곳입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을 통 볼 수가 없습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이제 더 빌 것이 없으신가 봅니다.
*담장에 기대어 핀 해바라기
담장에는 해바라기가 서 있습니다. 한 대궁에 큰 꽃 다섯 송이, 작은 꽃 두 송이가 달려 있습니다. 머리가 무거운지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이 꽃을 볼 때마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의 기수 비토리오 데 시카가 감독하고 소피아 로렌과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주연한 '해바라기'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화면 가득히 활짝 핀 해바라기가 끝없이 펼쳐집니다. Henry Mancini가 작곡한 음악 Loss of Love(Theme from Sunflower)가 흐르면서..... 소피아 로렌이 끝없이 펼쳐진 우크라이나 해바라기 밭을 지나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전쟁이 갈라놓은 두 연인.....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소련에서 찍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영화를 찍은 곳은 우크라이나 동쪽 중앙지역에 있는 뽈다바라고 합니다. 우크라이나는 스탈린이 연해주를 차지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기차로 실어다 버린 곳이기도 하지요. 러시아의 발생지로 징기스칸이나 히틀러도 탐낸 땅..... 검은 숲과 검은 땅 그리고 드넓은 대평원..... 이곳이 바로 중앙아시아 우크라이나입니다.
해바라기는 국화과(菊花科 Asteraceae)에 속하는 1년생 초본입니다. 중앙 아메리카가 원산지이고 한국 전역에 널리 심고 있는 꽃이지요. 키는 2~3m에 달하며 전체에 가늘고 억센 털이 있고 줄기는 곧게 섭니다. 큰 난형(卵形)의 잎은 길이가 10~30㎝로서 어긋나는데 톱니가 있고 잎자루가 깁니다. 총포(總苞)는 반구형이며 각각의 포편(苞片)은 달걀 모양의 피침형으로 가장자리에 억센 털이 많이 있습니다. 꽃은 8~9월경 한 방향을 향해 두상(頭狀)꽃차례를 이루는데 지름이 25㎝에 이릅니다. 꽃은 황색의 꽃잎이 길게 밖을 향해 뻗은 설상화(舌狀花)와, 암술과 수술이 있으며 중앙 부위에 밀집되어 있는 암자색 또는 갈색의 통상화(筒狀花)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열매는 2개의 능선이 있는 둥근 난형으로 길이가 1㎝ 내외이고 검은 줄무늬가 있지요.
해바라기의 어원은 '꽃이 해를 향해 핀다'라는 뜻의 중국어 향일규(向日葵)에서 유래되었으며, 영어 이름 'sunflower'는 'helios'(태양)와 'anthos'(꽃)의 합성어인 속명(屬名) 헬리안투스(Helianthus)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꽃은 현재 페루의 국화[國花]이자 미국 캔자스 주의 주화(州花)이기도 합니다. 해바라기는 씨에 20~30%의 종자유가 포함되어 있어 이를 식용·비누원료·도료원료 등으로 사용합니다. 또한 한방에서 구풍제·해열제로도 쓰입니다. 해바라기의 품종은 관상용과 종자용으로 개발되어 있고요. 특히 씨를 얻고자 러시아에서 많이 심고 있으며 유럽의 중부와 동부, 인도, 페루, 중국 북부에서도 많이 심고 있습니다.
*고향집 텃밭
고향집에는 대문이 없습니다. 대문이 없기에 1년 내내 개방되어 있는 집이지요. 시골이라 아직 대문이 없어도 도둑이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고향집 앞에는 텃밭이 있습니다. 텃밭에는 지금 고추며, 가지, 토마토, 호박, 배추, 무우, 실파, 대파, 동부, 콩들이 심겨져 있습니다. 온갖 채소가 다 있네요.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주려고 심으신 것이지요.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가슴이 뭉클하네요.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콩과 동부는 어릴 때 불을 피우고 놀이삼아 구워먹기도 했지요. 어릴 때 '청태'라고 하던 것입니다. 고소하고 맛있습니다. 배추와 무우는 아직 어립니다. 저 앞에 보이는 들이 바로 구릿들입니다. 아홉 노인이 일구었다는..... 원래 고향집은 이 텃밭에 있었습니다. 흑벽돌로 벽을 쌓고 초가지붕을 얹은 집이었지요. 나중에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었지만.....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고추가 자라고 있는 곳이 안방쯤 될 겁니다. 텃밭을 바라보고 있으니 묘한 생각이 드네요.
*고향집
텃밭 바로 앞에는 텃논도 있습니다. 텃논의 논둑에 서서 고향집을 바라봅니다. 고향집 바로 뒤에는 산척면사무소가 있습니다. 튼실한 벼이삭들이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벼농사가 비교적 잘 된 것 같습니다. 이 논의 앞으로 실개천이 흐릅니다. 어릴 때 체를 가지고 고기를 잡거나 물놀이를 하던 개울이지요. 지금은 물고기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환경오염이 그만큼 심해졌다는 증거입니다. 논이나 밭에 무수히 뿌려지는 농약 때문입니다. 물고기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요?
오랜만에 고향집에 오니 마음이 참 푸근합니다. 부모님도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줄 모릅니다. 앞으로는 좀더 자주 고향집에 다녀가야 하겠습니다.
2005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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