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할아버지의 유골을 모셔오다

林 山 2005. 4. 30. 15:48

아침 일찍 아버지와 5촌 당숙, 동생 두 명과 함께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아버지의 고향 경북 예천을 향해 출발했다. 할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서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8살 때, 고모님이 6 살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연세가 지금 70 세이시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2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할아버지는 사진 한 장도 남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전혀 모른다. 나는 가끔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을 통해서 할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아버지와 고모 어린 남매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가난과 아버지 없는 설움이야 오죽했겠는가! 아버지의 고향 경북 예천군 유천면을 떠나 충주시 산척면으로 이주한 것도 가난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국민학교 그러니까 지금의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 했다. 아버지의 친구분들 이야기에 의하면 아버지는 공부를 매우 잘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난으로 인해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할 만큼 지독한 가난에 대해서 아버지는 아마 한이 맺혔을 것이다. 또한 일찍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많았을 것이다.나의 어린 시절도 뼈저린 가난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지금 자신의 존재를 있게 해 준 그 존재의 근원을 모시러 가는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모셔와 예순 해나 청상으로 지내다 재작년 겨울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묘소에 합장을 하려는 것이다. 아버지는 늘 고향에 묻혀 계신 할아버지를 모셔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장남이자 종손으로서 그런 아버지의 뜻을 지금껏 이루어 드리지 못 했다. 아버지의 그런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 하고 바라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나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교육민주화운동 당시 나는 전교조에 참여해서 유죄판결을 받고 10 여년간 해직상태로 지냈다. 거기다 뒤늦게 다시 시작한 대학공부로 인해 나는 경제적 어려움이 몹시 많았다. 그러다가 1999년 정부의 특별조치로 복직이 되었고(단양중학교에 복직해서 근무하다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1년만에 퇴직을 했다.) 작년에는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도 받았다. 또 올해는 다니던 대학도 졸업을 해서 마침내 아버지의 꿈을 이루게 해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큰 짐을 덜어놓은 듯 한 느낌이다.

지난날 장남으로서 집안을 전혀 돌보지 못 했던 마음의 짐을 오늘에서야 조금은 던 것 같다. 아버지도 매우 흡족하신 듯 표정이 환하다. 충주에서 예천까지는 길이 훨씬 좋아졌다. 소조령과 이화령 터널이 뚫린데다가 4차선 도로가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산기슭에는 연분홍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다. 예천까지는 이제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고향마을에 도착하니 친척 아저씨 두 분이 기다리고 있다. 할아버지의 묘소는 아버지의 고향마을 뒷산 너머에 있었다. 먼저 산신제를 지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묘소 봉분을 파헤치기 전에 주과포혜를 놓고 이장을 고하는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지내는 도중 아버지는 "아버님께 올리는 글"을 읽다가 할아버지에 대한 회한과 지난날의 설움에 가슴이 복받치는 듯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읽지 못 하신다. 할 수 없이 세째 동생이 대신 읽어야만 했다. 나는 아버지의 눈물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안다.

봉분을 파헤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얼마쯤 파내려가자 썩은 송판 부스러기가 나온다. 시신을 담았던 관은 거의 다 썩어서 흔적만이 남아 있다. 유골도 완전히 분해되어 흔적조차 없다. 다만 유골이 있었다고 보여지는 곳에는 흙이 고운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다. 할아버지는 죽어서 그렇게 한 줌 흙으로 변해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 세상을 하직하신 지 62년만에 완전하게 만물의 어머니인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자손들을 남겨놓고.....

당숙이 회색빛 흙을 부위별로 한 바가지씩 퍼서 올리면 아버지는 그것을 한지에 담아 정성스럽게 싸서 번호를 매기셨다. 오래지 않아서 유골수습은 끝났다. 동생들과 나는 파헤쳐진 봉분을 다시 메우고 그 자리에 어린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조상은 장손이 모셔야 된다는 당숙의 말씀에 따라 나는 할아버지의 유골토가 담긴 상자를 가슴에 안고 산을 넘었다. 아버지의 고향마을로 돌아와 할아버지의 유골상자를 동생의 차에 모신 다음 친척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충주로 향했다.

예천을 떠나 내 고향 충주 산척으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는다. 이제 오늘 할 일은 다 끝난 셈이다. 내일은 할아버지의 유골을 앙성 진달래 공원묘원에 계신 할머니의 묘소에 합장만 해드리면 된다. 내일이면 돌아가신 지 62년만에 비로소 할아버지는 오매불망 그리던 할머니와 해후를 하게 되리라. 비록 무덤속에서나마 62년만에 해후를 하시게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얼마나 반가우실까!

그토록 오랜 세월을 할머니는 어떻게 견디셨을까!

 

 

2004년 4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