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포 조경환 씨네 '금강호반'에서 일요일 아침을 맞이하다. 황복탕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다음 함라산을 오르기로 한다.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스하다. 산을 오르기에 좋은 날씨다. 웅포를 포근하게 감싸안고 있는 함라산은 웅포의 진산이다. 함라산을 보지 않고서는 웅포 여행을 제대로 했다고 말할 수 없다. 발걸음도 가볍게 함라산으로 향한다.
산을 오르는 것은 높은 곳으로 오르는 것이다. 높은 곳은 신성한 곳이다. 그래서 산을 오를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올라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 산은 하나의 화두다. 산의 그 의연함, 그 변함없는 모습은 항상 나에게 말없는 깨달음을 주곤 한다. 산은 나의 영원한 스승인 셈이다. 또 산에는 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 있다. 내가 산길을 가는 것은 그 산길이 나의 인생길이기 때문이다. 산길을 가다가 보면 수없이 많은 존재들과의 만남이 있다. 사람들 뿐만 아니라 짐승과 새, 그리고 풀과 나무들..... 미지의 존재들과의 만남은 얼마나 반가운가! 산은 인간과 자연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산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서 인간은 자연의 품속에 동화될 수 있다. 자연에 온전히 동화되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삶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함라산 기슭에 있는 숭림사 보광전
신라 경덕왕(742~764)때 진표율사가 금산사와 함께 창건하고, 1345년 충목왕 1년 행여(行如)선사가 중건했다고 전해지는 숭림사(崇林寺)를 먼저 보고 함라산을 오르기로 한다. 숭림사는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송천리 함라산 기슭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숭림사라는 절이름은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인 달마(達磨) 대사가 허난 성(河南城)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 동안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했다는 고사(故事)에서 따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전화를 입어 보광전(普光殿 : 보물 제825호)만 빼고 모두 소실되고 말았는데 10년 뒤에 우화루(雨化樓)만 재건되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뒤 1923년에 황성렬 주지가 나한전과 영원전을 신축하였다. 절 입구에는 부도군이 있다.
보광전에는 정혜사(定慧寺)라 쓴 오래된 편액이 있고, 보광전 왼쪽 요사(寮舍)에도 정혜사라 쓴 편액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숭림사의 전신이 정혜사였던 듯이 보인다. 그러나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보광전 전각의 규모는 앞면이 3칸, 옆면이 3칸으로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처마는 전면에는 부연(浮蓮)을 단 겹처마로 되어 있으나 후면은 홑처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건축양식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다포식 건물로 기둥머리 뿐만 아니라 기둥머리 사이에도 한 개씩의 공간포를 배치하였다. 공포는 내외 삼출목(三出目)의 구조로서 쇠서는 앙설형(仰舌形)이고 첨차의 양 끝에 연화문을 조각하여 건물의 멋을 더해 주고 있다. 그러나 건물 옆면에는 공포를 배치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귀솟음과 안쏠림의 기법으로 축조된 보광전은 균형감과 안정감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숭림사 보광전에 안치된 불상들
보광전에는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두루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안치하고, 그 우측에는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좌측에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을 모신 배치를 보이고 있다. 석가 세존을 본존불로 모신 전각을 '대웅전',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신 전각을 '비로전', 또는 열반의 경지라는 뜻을 가진 '대적광전', '화엄전'이라고 한다. 보광전에는 보통 석가세존을 본존불로 모신다. 그런데 숭림사 보광전 본존불은 비로자나불이다. 무슨 까닭일까? 보광전은 본래 고대 인도 마가다국 보리도량에 있었다고 하는 불전의 이름으로 부처가 화엄경을 설하는 법회를 열었다고 하는 곳이다. 보광전과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의 첫부분인 '여래명호품'에 보인다.
'..... 여래가 이 사천하에서 혹은 일체의성이라 이름하고, 원만월이라 이름하고, 사자후라 이름하고, 석가모니라 이름하고, 제7선이라 이름하고, 비로자나라 이름하고, 고타마라 이름하고, 대사문이라 이름하고, 최승이라 이름하고, 도사라 이름하나니 이러한 이름이 그 수효가 10천이라 중생들로 하여금 제각기 알고 보게 하느니라.'
화염경은 부처의 깨달음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여래명호품'을 보면 비로자나불은 석가 세존이 다른 모습으로 나투신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석가 세존의 다른 이름은 10천이라 일컬을 정도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것은 중생들이 자신의 수준에 맞게 부처를 바라보고 수행의 모범으로 삼아 해탈에 이르기 위한 공부에 정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보광전에 석가 세존을 본존불로 안 모시고 왜 비로자나불을 모셨을까라는 의문이 여기서 저절로 풀리게 된다. 비로자나불은 곧 석가 세존의 다른 모습인 것이다.
보광전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전라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 1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목조 불상은 1613년(광해군 5년) 경 만들어진 것으로 전체 높이 110cm, 머리 높이 35cm 어깨폭 48cm 무릎폭 77cm로 제법 규모가 큰 편인데, 전체적으로 균형감과 안정감이 있으면서 중후한 느낌을 준다. 특히 옷주름의 사실적인 표현이 눈에 띈다.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이 석가여래좌상은 만들어진 시기가 확실해서 불상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보광전 천정
건물 안쪽은 보 끝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고, 기둥 윗부분에 설치된 건축 부재들은 각각 연꽃, 용의 몸, 용의 앞발이 여의주를 쥐고 있는 모양으로 장식해 놓았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초제공단(初諸貢端)은 수련(睡蓮)을, 2제공단은 용의 몸통을, 그리고 3제공단은 용의 앞발이 여의주를 쥔 모양을, 살미(山彌)는 용의 목부분을, 상단에는 용의 머리를 별도로 조각했는데 그 기법이 특이하다. 건물 내부는 통칸(通間)구조로 중앙 후면에 방주(枋柱)를 세워 불상의 후벽을 축조하였다. 불단의 위쪽은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으로 닫집을 만들어 불상을 장엄하게 엄호하게 하였는데 용두(龍頭)와 봉황장식, 연화장식이 아름답다. 아쉽게도 오른쪽에 있던 용두는 사라지고 없다.
*율재에서 오르는 등산로와 율재 주차장에서 오르는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
숭림사를 떠나 율재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함라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나무로 만든 계단길을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니 금새 능선길이 나타난다. 산기슭에는 진달래가 분홍빛 꽃망울을 막 터뜨리려 하고 있다. 함라산 주능선을 따라 고압 송전탑이 세워져 있는 모습이 흉물스럽다. 저 고압선들을 땅속으로 묻을 수 있는 기술이나 방법은 없을까?
*함라산 제1쉼터에 세워진 정자
능선길은 기복이 심하지 않고 매우 평탄해서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느낌이다. 펑퍼짐한 봉우리에 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다. 정자에 앉아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목을 축일 겸 감귤과 배를 먹는다. 산에 오를 때 갈증이 나면 과일을 먹는 것이 도움이 된다. 과일 중에서도 달면서도 수분함량이 많은 배나 오이, 참외 등이 좋다.
*함라산 정상
정자가 있는 봉우리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함라산 정상에 올라선다. 함라산은 해발 240.5m로 별로 높은 산은 아니다. 그러나 함라산은 바닷가에 위치한 산이라서 그런지 내가 사는 충주에 있는 금봉산(636m)과 높이에서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정상에는 아름드리 벚나무들 아래 여러 개의 벤취가 설치되어 있다.
*생강나무꽃
함라산 정상 산기슭에는 노오란 생강나무꽃이 활짝 피어있다. 잎사귀나 가지를 꺾어서 냄새를 맡아보면 생강향이 난다. 그래서 생강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산길 바로 옆에서 자라는 생강나무는 팔자가 참 딱하다. 왜냐하면 너도나도 생강나무의 향을 맡아보려고 하기에 가지가 성할 날이 없기 때문이다. 생강나무를 한자명으로는 황매목(黃梅木), 속명으로는 동백나무라고 한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나무가 바로 이 나무다. 제주도나 남해안에서 자라는 붉은꽃이 피는 동백나무와는 전혀 다른 나무다.
*함라면과 미륵산
남쪽을 바라보니 드넓은 평야에 자리잡은 함라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함라면 건너편에는 미륵산이 솟아 있다. 저 미륵산 너머에 있는 금마면은 내 젊은 시절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금마에 있는 제7공수특전여단은 내가 2년 동안 군복무를 했던 부대다. 불현듯 얼룩무늬 군복에 검은 베레모를 쓴 육군 중위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 난다. 함께 고생했던 부하들의 얼굴도 하나 둘 떠오른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는지.....
*함라산에서 바라본 웅포대교
함라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금강(錦江)을 바라본다. 익산과 부여를 잇는 웅포대교가 금강을 가로질러 놓여 있다. 그 밑으로 푸르른 금강은 유유히 흐르고..... 금강의 남쪽에는 넓다란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금강의 건너편은 충남 부여땅이다. 부여의 금강변에서 태어난 신동엽은 그의 시집 '금강'을 통해서 미완의 혁명인 동학혁명을 노래했다. 금강은 반역의 강이다. 혁명의 강이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제국주의와 백성들을 압제에 신음하게 하는 독재정권, 온갖 썩은 것, 껍데기들을 바다로 쏟아버리는 개벽의 강이다. 백제의 멸망을 말없이 지켜 보았을 저 금강..... 우금치로 진격하는 동학군들이 강을 건너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 보았을 저 금강.....
웅포재를 지나 조금 더 가자 봉화산이 바로 앞에 보인다. 함라산맥은 소나무숲이 많이 우거져 있다. 앞으로 2,30년 더 세월이 흘러서 저 소나무들이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면 아름다운 숲이 되리라. 숲은 인류의 희망이다. 숲은 산소를 제공하는 지구의 허파이기에..... 사람들은 아직 산소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잘못하면 다가올 미래에 산소가 부족한 비극적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숲을 가꾸는 일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그런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하는 필수사항인 것이다. 숲이 없는 자연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나무가 자랄 수 없는 땅은 인간도 살아갈 수 없다.
*봉화산 정상
봉화산 정상 바로 밑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세워져 있고 감시원이 상주하고 있다. 정자가 있는 정상에 올라서니 사방이 탁 트인다. 봉화산 정상은 전망이 매우 좋다. 봉화산은 지도에는 해발 220m로 나와 있는데 함라면에서 세운 표지판에는 236m라고 씌어져 있다.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또 표지판에는 봉화산이 아니라 소망봉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 함라산 소망봉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봉수군 75명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 함열현편에 나온다. 아마 그래서 이 봉우리에 봉화산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소망봉 봉수대는 여수에서 한양 목멱산에 이르는 제5직봉에 속해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임피현 오성산 봉수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용안현 광두원산 봉수와 응했다. 봉수는 고려 중엽에 설치되어 조선 고종 때(1894년) 폐지된 통신제도이다. 밤에 횃불로 신호를 보내는 것을 봉(烽)이라고 하고 낮에 연기를 피워서 신호를 보내는 것을 수(燧)라고 한다. 봉화는 평상시에는 1홰, 적이 나타나면 2홰, 해안에 가까이 오면 3홰, 적선과의 접전은 4홰, 육지에 침입하면 5홰를 피워서 신호를 하였다. 봉홧불을 피우는 재료는 싸리나무나 섶나무, 쇠똥, 말똥 등을 사용했다고 한다.
칠목재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올망졸망 솟아 있다. 소망봉 기슭 어딘가에는 야생 작설차나무들이 자라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찾을 수가 없다. 조경환 씨에 따르면 바로 여기가 작설차 자생지의 북방한계선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스님들이 사찰 주위에 차나무를 심어서 차를 직접 만들어 마셨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다는 차밭 근처에는 아마도 사찰의 흔적이 있을 것이다.
*봉화산에서 바라본 웅포면 소재지와 금강
정자에 앉아서 말없이 웅포를 내려다 본다. 웅포 앞으로는 금강이 흘러가고 그 건너는 부여땅이다. 웅포면 소재지와 함라산 사이에는 엄청난 규모의 골프장이 건설중이다. 산이 잘려 나가고 논과 밭들이 마구 파헤쳐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마음이 우울해진다. 웅포관광개발(주)은 2008년 '월드 골프 챔피언십' 유치를 목표로 총사업비 1천753억원을 들여 웅포면 일대 74만여평에 회원제 18홀과 대중 골프장 9홀을 비롯, 골프연수원과 콘도미니엄 등을 조성 중이라고 한다. 땅덩어리도 좁은 나라에서 골프장을 자꾸 만드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남한을 골프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골프는 분명 환경을 파괴하는 스포츠다. 뿐만 아니라 골프장 잔디를 가꾸기 위해서 뿌리는 맹독성 농약은 필연적으로 주변의 강과 하천을 오염시킨다. 산과 들, 강과 하천을 썩어가게 하면서까지 골프를 해야 하는가! 속절없이 흐르기만 하는 저 금강도 내 심정과 같으리라.
저 멀리 금강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르는 곳, 금강 하구가 눈에 들어온다. 금강하구 위에 건설된 다리는 충남 서천과 전북 군산을 연결하는 서천대교다. 지금은 금강하구둑을 막아서 더이상 바닷물이 유입되지 않는다. 금강하구의 전북 군산시 성산면과 건너편 충남 서천군 마서면 갯펄지대는 철새도래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금강하구는 강과 바다가 접하는 지역으로서 새들의 먹이가 되는 바다생물이 풍부해서 각종 철새들이 모여들고 있다. 금강하구둑 위쪽은 하중도에 갈대가 자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농경지도 많아서 철새들이 살아가기에 좋은 환경이다. 그리고 하구둑 아래쪽은 곡류부의 형성으로 갯벌과 갈대밭이 남아 있어 철새 서식지로서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그래서 해마다 큰기러기나 고방오리, 큰고니, 검은머리물떼새, 흰죽지수리, 검은머리갈매기, 흰뺨검둥오리 등 철새들이 떼를 지어 찾아들고 있다.
어느덧 해는 서산에 기울고 있다. 갈 길이 멀기에 이젠 산을 내려가야만 한다. 서해 낙조를 못 보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서해바다와 하늘을 온통 짓붉게 물들이면서 장렬하게 지는 태양을 상상하면서 산을 내려간다.
2006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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