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을 맞아 충주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계명산을 오르기로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충주에 이런 명산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로 인해 하늘이 조금 뿌옇기는 해도 봄날씨 답게 포근하다. 마즈막재에서 계명산으로 오르는 산길로 접어든다.
마즈막재라는 이름의 유래는 무엇일까? 옛날에는 선비들이 한양에서 벼슬을 하다가 낙향을 한다거나, 죄를 지어 유배를 간다거나 할 경우 나룻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서 청풍, 단양, 영월 등지로 갔다고 한다. 그런데 중죄를 지은 사람들이나 사형수들은 종민동 나루에서 내려 이 고개를 넘어 충주 관아나 사형장으로 끌려 갔다. 이들은 이 고개를 넘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후 사람들은 이 고개를 마지막으로 넘는 고개, 즉 마즈막재로 불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유래가 있다. 아주 먼 옛날에는 이 재 근처에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충주 성안 사람들이 이 재를 넘다가 호환을 당해서 살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다.
앞의 두 유래와는 좀 다른 유래도 있다. 계명산의 옛이름은 심항산(心項山)으로 마음 심(心) 목 항(項), 즉 '마음목'산이다. 마음의 고어는 마슴이다. 그러니까 마슴목산이 되는 것이다. 이 마슴목산을 넘어가는 재도 산이름을 따라 마슴목재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이 마슴목재가 마즈막재로 음운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즈막재에 세워진 대몽항쟁기념탑
마즈막재에서 계단길을 올라서면 대몽항쟁기념탑이 나타난다. 이 탑은 고려시대 승병장 김윤후 장군이 이끄는 민중들의 영웅적인 대몽항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당시 몽고의 침략을 당한 고려왕실은 백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강화도로 천도하여 자신들의 안전만을 도모하였다. 지배층들이 도망치고 나자 대몽항쟁의 주체가 된 사람들은 농민과 천민들이었다. 몽고와의 개전 초기에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초적의 활동이다. 초적은 고려 지배층의 폭압정치를 뒤엎어버리기 위해서 봉기한 농민 반란군이다. 그런데 몽고군이 침략해오자 이들은 최일선에서 몽고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제1차 몽고군 침입 당시 평북 귀주 부근의 마산 초적들은 관군과 합세하여 황해도 황주 부근의 동선역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광주(廣州)의 관악산 초적들도 정부군과 함께 몽고군을 방어하였다.
초적과 함께 대몽항전에 참여한 계층은 노비와 부곡민 등 하층민이었다. 몽고군의 1차 침입 당시 충주성에서는 양반 자제들로 편성된 양반 별초와 노비로 구성된 노군 잡류 별초를 조직해서 성을 방어하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몽고군이 쳐들어오자 지휘관과 양반 별초부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고 말았다. 비겁한 지배층과는 달리 충주성에 끝까지 남아서 몽고군을 맞아 영웅적인 전투를 치루고 성을 지킨 사람들은 바로 노군 잡류 별초부대였다. 몽고군은 결국 충주성을 빼앗지 못한 채 남하하다가 승병장 김윤후가 부곡민을 이끌고 지키고 있던 처인성에서 장수 살리타를 잃고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인성은 양인이 거주하는 일반 군현이 아닌 천민들의 거주지인 부곡이었다. 몽고군이 공격해오자 김윤후 부대가 몽고의 장수인 살리타를 여기서 포살했던 것이다.
1253년(고종 40)몽고군의 제5차 침입 때에도 김윤후가 이끄는 천민들은 충주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바 있다. 몽고군이 충주성을 포위하고 아사작전으로 나가자 성내의 식량 사정은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이 때 김윤후는 '만일 힘을 다해 싸워서 몽고군을 물리치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관작을 줄 것이다'라는 약속으로 천민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약속대로 그는 관노의 문서를 가져다가 불태워 버린 뒤 몽고군으로부터 빼앗은 소와 말을 관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관노들은 감격한 나머지 용맹스럽고 영웅적인 전투를 전개한 결과 몽고군을 물리치고 충주성을 사수하였다. 충주성 전투의 공로로 김윤후는 상장군을 제수받았고, 군공이 있는 관노와 백정들에게도 벼슬이 내려졌다. 천민신분에서 해방된다는 희망을 갖게 된 천민들은 고려를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웠다. 천민신분이었을 때는 고려가 '당신들의 나라'였지만 신분이 해방된 지금 그들에게 있어서 고려는 바로 '나의 나라'였던 것이다. 충주성에서의 대몽항쟁은 바로 민중들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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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산 등산로 입구
등산로 초입에 들어서자 낙엽송 숲이 나타난다. 생기발랄한 봄철을 맞아서 숲에는 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다. 초목들의 새싹이 막 터져 나오기 직전의 고요라고나 할까! 온산에 가득 넘치는 생명기운으로 인해 내 가슴마저 벅차오르는 듯 하다.
*무릇
등산로 초입에 있는 무덤가에도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다. 그 중에는 무릇싹도 보인다. 무릇은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둥근 공처럼 생긴 땅속 비늘줄기에서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두 장의 잎이 나오는데, 봄에 나오는 잎은 여름에 말라버린다. 꽃은 연보라색으로 7월부터 9월까지 비늘줄기에서 길다란 꽃줄기가 나와서 그 끝에 무리지어 핀다. 봄철에 잎과 비늘줄기를 캐서 나물로 먹을 수 있다. 또 비늘줄기는 둥굴레, 참쑥과 함께 고아서 물엿처럼 만들어 먹기도 한다. 내 고향에서는 무릇을 물곳이라고 불렀다. 무릇은 어린 시절 보리고개를 넘길 때 구황식물이기도 했다. 나도 어릴 때 먹어본 경험이 있는데 그 맛이 이상야릇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지금 사람들은 무릇을 먹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할미꽃
할미꽃도 이제 막 종모양의 꽃봉우리를 터뜨리고 있다. 적자색의 꽃잎과 이파리에는 솜털이 보송보송 나 있다. 꽃모양이 마치 할머니의 등처럼 굽은 모습으로 피어나며, 암술대의 모양도 할머니의 하얀 머리털 같아서 할미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할미꽃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식물들은 대개 독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한국에 자생하는 근연종으로는 북한에서 자라는 분홍할미꽃, 산할미꽃, 제주도에 자생하는 가는잎할미꽃 등이 알려져 있다. 할미꽃의 뿌리를 한방에서는 백두옹(白頭翁)이라고 하며 건위, 소염, 수렴, 지사, 지혈, 진통제로 써왔다. 민간에서는 학질과 신경통에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방에서는 물론이고 민간에서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할미꽃 뿌리를 짓찧어서 구더기를 구제할 목적으로 재래식 화장실에다 뿌리기도 했다.
할미꽃에 얽힌 전설이 하나 전해지고 있다.
옛날 할머니가 두 손녀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큰 손녀는 얼굴은 예뻤지만 마음씨가 무척 나쁜데 비해 작은 손녀는 얼굴은 비록 못 생겼지만 마음씨만은 고왔다. 얼마 뒤 두 손녀는 혼기가 차서 시집을 가게 되었다. 큰 손녀는 이웃에 사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고 작은 손녀는 찢어지게 가난한 산지기에게 시집을 갔다. 노쇠한 할머니는 거동조차 힘들게 되자 부잣집으로 시집간 큰 손녀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러나 큰 손녀는 자기를 길러준 은혜를 잊고 할머니를 구박하고 멸시하였다. 그래서 할머니는 큰 손녀의 집에 더 이상 있지 못 하고 작은 손녀를 찾아가다가 그만 길에 쓰러져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할머니가 걱정되어 마중을 나온 작은 손녀는 할머니의 주검을 발견하고는 슬프게 울면서 양지 바른 야산에 정성을 다해 묻어 주었다. 이듬해 할머니의 무덤가에는 허리가 꼬부라진 꽃이 백발을 달고서 피어났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이 꽃을 할미꽃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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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에서 계명산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능선. 그 바로 앞 봉우리는 봉수대가 있던 심항산이다
한참을 오른 끝에 자그마한 돌탑이 있는 쉼터에 닿는다. 쉼터는 전망이 아주 뛰어난 곳이다. 계명산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길이 여기서 갈라진다. 봉수대가 있던 심항산 너머로 보이는 푸르른 호수가 충주호다.
심항산 봉수대 터는 다른 곳의 봉수대와는 달리 계명산 정상에 있지 않고 종민동 충주호 쪽으로 뻗어내려간 산줄기의 맨끝 봉우리에 있다. 지금은 이 봉우리만을 심항산이라고 부른다. 봉수대는 심항산 정상에서부터 충주시 이류면에 있던 마산 봉수대가 잘 보이는 남쪽 사면 아래에 걸쳐 약 85m의 석축을 쌓고 3단의 토루를 둘러 쳤다. 정상에는 4각형으로 돌을 쌓은 봉수대 터가 있는데, 지금은 누군가의 묘자리가 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봉수대에 별장 1명과 감관 5명, 군인 100 여명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마산 봉수는 동쪽으로는 청풍의 오현 봉수와 응하고 남서쪽으로는 이류면의 마산 봉수와 응했다. 계명산 정상이 아니라 이곳을 봉수대로 정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계명산이 높고 가파를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도 동쪽의 오현 봉수대와 남서쪽의 마산 봉수대가 잘 바라다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마즈막재 목벌길은 그 옛날 동쪽으로는 청풍이나 단양, 서쪽으로는 여주나 이천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로였기에 심항산에 봉수대를 세우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쉼터에서 바라본 금봉산
쉼터에 앉아서 마즈막재 건너편에 있는 금봉산을 바라본다. 마즈막재에서부터 임도가 구불구불 산허리를 감으면서 산성에 이르고 있다. 임도는 산성 바로 아래를 따라 왼쪽으로 돌아서 직동으로 넘어간다. 금봉산에 세워진 고압송전탑들이 아름다운 산의 풍광을 망치고 있다.
*원추리
쉼터를 떠나 능선길을 걷다가 땅을 뚫고 올라온 원추리 새싹을 만난다. 이파리의 연한 연두색이 참 귀엽고 곱다. 원추리는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고구마처럼 생긴 덩이줄기가 뿌리 끝에 달린다. 6~7월 경에 노란색으로 피는 원추리의 꽃이 매우 아름답다. 그래서 정원에 관상용으로도 많이 심는다. 원추리꽃의 장관은 뭐니뭐니해도 지리산 노고단이 최고다. 원추리는 이른 봄철에 어린순을 나물로 먹는다. 살짝 데쳐서 갖은 양념을 해서 무치거나 된장국을 끓여도 좋다. 봄가을에 덩이뿌리를 캐서 말린 것을 한방에서 훤초(萱草)라고 하는데 치황, 이뇨, 지사, 강장제로 쓴다. 민간에서는 뿌리와 생간의 즙을 내어 변비 치료에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용도로는 거의 쓰지 않는다.
*계명산 정상으로 오르는 소나무 숲길
계명산을 오르다가 보면 군데군데 아름드리 소나무 숲길을 만나게 된다. 소나무는 언제 보아도 정겹다. 어릴 때부터 늘 보아와서 그런 것일까? 언제나 늘 푸른 모습으로 서 있기에 그런 것일까? 이곳의 소나무들은 나무껍질에 붉은 빛이 감도는 적송이다. 여러 가지 소나무 품종들 중에서도 적송이 더 친근한 느낌을 준다.
*계명산 정상
계명산 정상이 바로 앞에 보인다. 마즈막재에서 오르는 등산로는 일직선으로 가파르기 때문에 아지자기한 멋이 별로 없다. 계명산 정상이 보이는 이곳부터는 전망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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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산 정상 표지석에서
잠시 땀을 흘린 끝에 계명산(鷄鳴山) 정상에 올라선다. 헬기장이 닦여져 있는 정상은 전망이 매우 좋다. 동쪽으로는 월악산 영봉, 제비봉이, 북쪽으로는 천등산, 인등산, 지등산이, 서쪽으로는 장미산, 보련산, 국망봉이, 남쪽으로는 조령산, 마패봉, 신선봉이 다 보인다. 충주호의 아름다운 푸른 물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도 이곳이다. 계명산(775m)은 충주시 안림동과 연수동, 용탄동,종민동 사이에 있는 산으로 전에는 계족산,심항산,오동산,동악산,광명산,객망산이라고 했다. 충주지역의 발전이 지체되자 충주사람들은 그 까닭을 이 산의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1958년에 계명산으로 개명을 했다.
계명산으로 개명하기 전에는 이 산을 계족산(鷄足山)이라고 불렀다. 계족산의 유래는 이렇다. 오랜 옛날 이 산에는 지네가 대단히 많았다. 백제 때 마고 성주의 왕족은 충주성 내관(지금의 관아공원)에 드나들 때 지네가 우글거려 도저히 다닐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마고 성주는 백성들에게 보이는 대로 지네를 잡아 없애라는 명령까지 내렸지만 지네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성주는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기로 했다. 지성으로 치성을 올린 끝에 어느날 밤 꿈에 용두백발(龍頭白髮)의 한 도인이 나타나서는 '지네는 닭과 상극이니 닭을 기르면 지네가 사라질 것이다.'하고 일러주는 것이 아닌가! 꿈에서 깨어난 성주는 도인의 말대로 하였더니 지네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후 사람들은 이 산을 계족산이라고 불렀다.
*계명산 정상에서 바라본 지등산
충주호 건너 북쪽으로 보이는 산이 지등산이다. 왼쪽 끝으로 충주호 선착장도 보인다. 지등산은 천등산, 인등산과 함께 삼등산의 하나로 천지인(天地人) 중 지(地)에 해당하는 산이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천등산, 인등산, 지등산의 산세의 흐름이 태극무늬를 이룬다고 생각해서 최고의 명당이 숨어 있다고 여겼다. 충주댐은 지등산 산줄기의 한 봉우리인 관모봉과 계명산 사이의 남한강을 막아서 세운 것이다.
*충주호와 유람선들
계명산 정상에서는 드넓은 충주호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푸른 물결 위를 유람선이 한가롭게 오간다. 충주호는 1985년 충주시 종민동과 동량면 사이의 계곡을 막아서 만든 다목적호수로 한국에서 소양호(29억t) 다음으로 담수량이 가장 큰 인공호수이다. 그래서 '육지 속의 바다'라는 별명도 얻었다. 충주호의 규모는 면적 67.5㎢, 높이 97.5m, 길이 464m, 저수량 27억 5000t이나 된다. 충주호에는 붕어·잉어·향어·백연(잉어과)·떡붕어·송어 등 각종 물고기들도 많이 서식하고 있다.
충주시와 제천시, 단양군에 걸쳐 있는 충주호는 주변경관도 뛰어나서 월악산국립공원, 송계계곡, 청풍 문화재 단지, 단양 8경, 고수동굴, 구인사, 수안보온천, 노동동굴 등 수많은 명승지가 있다. 충주댐 나루터에서 쾌속관광선과 대형유람선이 충주호 뱃길 52km를 옥순봉, 구담봉, 만학천봉, 초가바위, 고래바위, 현학봉, 신선봉, 강선대, 버들봉, 오성암, 설마봉, 제비봉, 두무산 등을 구비돌아 신단양나루(물이 빠졌을 때는 장회나루)까지 운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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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산 정상에서 바라본 월악산 영봉
동쪽으로 충주호 건너편에 우뚝 솟은 산이 바로 월악산 영봉이다. 덕주골에서 자연경관로를 타고 영봉으로 오르는 능선도 뚜렷하게 보인다. 계명산 정상에서 신년 해맞이를 할 때 태양은 영봉 바로 왼쪽에서 떠오른다.
*계명산 정상에서 바라본 충주시 안림동과 용산동, 그리고 호암동
내가 살고 있는 충주 시가지를 내려다 본다. 저 아래 동네에서는 지금 이 순간도 온갖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잠시나마 속세를 떠나온 감회에 젖는다. 돌이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인간사 일장춘몽이 아니던가!
*전망대에서 바라본 두진아파트로 이어지는 계명산 산줄기
정상에서 잠시 쉰 다음 하산하기로 한다. 두진아파트로 내려가는 등산로는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서 호젓한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산길이다. 산벚나무 한 그루와 바위가 있는 전망대에서 후곡산을 거쳐 팽고리산으로 뻗어가는 능선을 바라본다. 오른쪽에서 흘러오는 남한강과 왼쪽에서 흘러드는 달천강이 탄금대에서 만난다. 탄금대 건너편에 있는 산이 장미산이다.
*산괴불주머니꽃
전망대를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낙엽송 우거진 숲속에서 이제 막 피어나고 있는 산괴불주머니꽃을 보았다. 산괴불주머니는 암괴불주머니라고도 하는데 유독성 식물이다. 괴불주머니와 거의 비슷한 산괴불주머니는 현호색과에 속하는 두해살이풀로 이른 봄부터 이른 여름에 걸쳐 줄기 끝에 노란색 꽃이 무리져서 피어난다. 국어사전에서 괴불주머니를 찾아보면 '색 헝겊에 솜을 넣고 수를 놓아 예쁘게 만든 조그만 노리개로 어린이들이 주머니에 차고 다니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꽃을 보고 붙인 이름인지 잘록한 열매를 보고 붙인 이름인지 알 수 없다. 괴불주머니의 꽃말은 '보물주머니'인데 아마도 꽃이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산괴불주머니는 현호색과 비슷하지만 현호색보다 꽃이 가늘고 꿀주머니가 위쪽으로 조금 휘어진 점이 다르다.
*뱀딸기 꽃
햇빛이 잘 드는 곳에는 샛노란 뱀딸기 꽃도 피었다. 뱀딸기 꽃과 양지꽃은 잘 구분이 안된다. 하지만 꽃잎과 보조 꽃받침을 잘 관찰하면 쉽게 수분할 수 있다. 뱀딸기 꽃은 꽃잎 사이로 끝이 뾰족한 보조 꽃받침이 보이지만, 양지꽃은 보조 꽃받침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뱀딸기의 꽃받침은 꽃보다 큰 반면 양지꽃의 꽃받침은 꽃보다 작다.
*제비꽃
자주색 제비꽃도 수줍은 듯 피어 있다. 제비꽃은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야생화로 그 이름도 참 다양하여 근근채, 반지꽃, 병아리꽃, 씨름꽃, 오랑캐꽃, 외나물꽃, 자화지정, 장수꽃이라고도 부른다. 반지꽃이란 이름은 어릴 때 여자애들이 제비꽃으로 꽃반지를 만들던 것을 보았던 기억이 있기에 그리 낯선 이름이 아니지만 다른 이름은 거의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들이다. 자화지정은 한의학에서 제비꽃의 한약재명으로 부르는 전문용어다.
제비꽃은 제비꽃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원줄기가 없고, 잎이 땅바닥에 모여달린다. 꽃색은 짙은 자주색으로 3월부터 피기 시작해서 5월까지 피어난다. 제비꽃의 어린 순은 나물로 먹기도 한다. 제비꽃의 전초를 말린 것을 한방에서 자화지정이라고 하는데 청열해독의 효능이 뛰어나 종기를 비롯한 각종 염증을 치료하는데 쓴다. 그러나 자화지정은 성질이 차서 허한한 사람에게 쓰면 안된다. 지금은 소염진통제로 인해 그 쓰임새가 많이 줄었다.
*현호색꽃
연한 자주색 꽃들을 달고 있는 현호색은 지금이 한창이다. 여러 개의 꽃들이 한 꽃대에 매달려 피어나는 현호색은 꽃모양도 아름답다. 현호색은 현호색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산과 들 어디서나 잘 자라며 3~5월에 연한 홍자색의 꽃을 피운다. 현호색속에 속하는 식물은 매우 다양하여 전세계에 걸쳐 300여 종이 발견되고 있다. 한국에는 현호색, 빗살현호색, 댓잎현호색 등 덩이줄기를 갖는 종들과 산괴불주머니, 염주괴불주머니 등 곧은 뿌리를 갖는 종들을 포함해 21종 1변종 5품종이 자생하고 있다. 한방에서는 현호색의 덩이줄기 말린 것을 한약재로 쓰고 있는데, 덩이줄기에는 정혈, 진경, 진통작용을 가진 코리달린(corydaline)과 푸마린(fumarine)이 들어있다. 현호색은 진통작용이 상당히 우수한 한약재로 임상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는 한약재다.
*후곡산 정상에서 바라본 팽고리산과 탄금대
현호색 자생지에서 경사가 완만한 오르막길을 잠시 오르면 후곡산에 오르게 된다. 정상에는 벤취가 있고 기둥에는 시계도 걸어 놓았다. 계명산 정상에서 산줄기 하나가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가 후곡산을 지나 충주시청 근처에 작은 봉우리 하나를 맺어놓고 끝나는데 그 봉우리가 바로 팽고리산이다. 팽고리산 앞으로는 충주~제천간 4차선 국도가 지나가고 그 건너 남한강과 달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탄금대가 있다.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 때 악성 우륵이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을 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탄금대는 또 임진왜란 때 도순변사 신립장군이 적은 수의 군사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의 대군을 맞아 이곳에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패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장렬하게 전사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생강나무꽃
노오란 색으로 꽃을 활짝 피운 생강나무가 산길 나그네를 반긴다. 계명산에도 생강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꽃나무들 중 가장 먼저 피어서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보춘화다. 생강나무는 녹나무과의 낙엽 활엽 관목으로 암수딴그루인데 2,3월 경에 잎보다 먼저 노란 꽃이 피어난다. 한국의 중남부와 중국, 일본 등지에 분포하는 생강나무는 잎이나 가지를 꺾으면 생강의 향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그래서 생강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옛날에는 이 나무의 열매로 기름을 짜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다. 생강나무는 새앙나무 또는 생나무라고도 한다는데 나는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이다.
*연수정
후곡산을 내려와 올망졸망한 봉우리 몇 개를 넘으면 연수정에 닿는다. 연수정이라는 정자 이름은 이 봉우리가 속해 있는 동인 연수동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연수정 바로 앞에는 돌탑 두 개가 있다. 등산객들이 오며가며 돌 하나씩을 주워 모아 쌓은 것이 제법 큰 돌탑이 되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꽃다지꽃
연수정을 떠나 여러 가지 체육시설을 설치해 놓은 작은 봉우리를 넘으면 등산로 입구인 두진아파트 후문이 나온다. 길옆 무덤가에는 노오란 꽃다지꽃이 피어나 있다. 양지 쪽에서 잘 자라는 꽃다지는 십자화과에 속하는 두해살이풀로 식물 전체에 별처럼 생긴 털이 나 있다. 노란색의 꽃은 3~6월에 줄기 끝에 모여 피어난다. 이른 봄에 꽃다지의 줄기와 잎을 따서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떫은 맛을 없앤 뒤 나물이나 국거리로 이용하기도 하는데, 지금은 잘 먹지 않는다.
두진아파트 등산로 입구에서 산행을 마친다. 계명산 등산은 3시간에서 4시간 정도 걸린다. 바쁜 일정 때문에 먼 곳에 있는 산에 가지 못할 때 나는 이 계명산을 오르곤 한다. 오늘 찾은 계명산에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2006년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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