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황사가 얼마나 짙게 끼었는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계명산과 금봉산이 흐릿하게 윤곽만 보인다. 이런 날은 집안에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지만 어디 그럴 수 있는가!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길을 나서서 금봉산을 오르기로 한다. 금봉산은 충주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집에서부터 걸어서 갔다와도 3시간이면 충분하다. 교현2동 부강아파트를 출발하여 갱고개와 안림동 4거리를 지나 용산동 체육공원 등산로 입구로 들어선다.
*개나리꽃
대원정사 입구에는 개나리가 활짝 피어 있다. 개나리도 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보춘화 중 하나다. 개나리가 피어나기 시작하면 비로소 봄이 왔음을 느끼게 된다. 노란색으로 피어난 개나리꽃을 보면 병아리가 떠오르곤 한다. 손수건을 가슴팍에다가 달고 다니던 초등학교 코흘리개 시절 불렀던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로 시작되는 '개나리'란 노래도 생각난다.
3월부터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개나리는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으로 어디서나 잘 자란다. 생장속도가 빠르고 추위와 공해에도 강하기 때문에 정원이나 공원, 도로변에 많이 심는다. 개나리의 꽃은 수술이 암술보다 긴 꽃과 짧은 꽃, 두 가지가 있다. 그래서 꽃은 아주 많이 피지만 꽃가루받이가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열매가 잘 열리지 않는다. 봄철에는 개나리꽃을 따서 약술을 담그기도 한다. 개나리주는 여자들의 미용과 건강에 좋다. 또 가을에는 개나리 열매를 말려서 연교주(連翹酒)를 담그기도 한다. 개나리주나 연교주는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어서 그 맛을 모르겠다.
개나리꽃에 관한 전설에는 세 가지가 있다. 개나리는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꽃이어서 개나리가 자라는 곳에는 어디서나 그에 대한 전설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첫번째 전해지는 전설이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어느 마을에 욕심 많은 부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이 부자를 찾아와 시주를 청했다. 그러나 부자는 '우리 집에는 개똥도 없소'라고 하면서 문전박대를 하였다. 스님이 이번에는 이웃에 살고 있던 가난한 사람에게 시주를 청했다. 가난한 사람은 스님에게 정성껏 시주를 했다. 시주를 받은 스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짚으로 바구니를 하나 만들어 주고는 떠났다. 스님이 떠난 뒤 그 바구니 속에서는 신기하게도 쌀이 쏟아져 나와 가난했던 사람은 금방 부자가 되었다. 이것을 본 부자는 땅을 치면서 원통해 했다. 이듬해 그 스님이 다시 부자를 찾아와 시주를 청했다. 이번에는 부자도 스님에게 쌀을 시주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자에게 짚으로 바구니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스님이 떠난 뒤 부자가 바구니를 열어 보니 그 속에서는 쌀 대신 개똥이 계속 흘러 나왔다. 부자는 놀란 나머지 그것을 울타리 밑에다가 파묻어 버렸는데 얼마 뒤 그 자리에서는 똥색과 비슷한 꽃이 피어났다. 그 꽃이 개나리였다는 이야기..... 마음씨를 곱게 쓰라는 교훈이 담긴 전설이다.
또 다른 전설은 이렇다. 먼 옛날 어느 마을에 밭 한 뙈기조차 없는 찢어지게 가난한 홀어미가 개나리라는 딸과 두 명의 아들을 데리고 오막살이집에서 살았다. 어느 해 심한 가뭄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생겨날 정도로 온나라에 큰 흉년이 들자 인심마저 흉흉하였다. 홀어미와 어린 삼남매도 양식이 떨어져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다. 철없는 어린 것들은 홀어미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매달렸다. 홀어미는 삯바느질이라도 해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고 했지만 마을사람들은 아무도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홀어미는 할 수 없이 거지처럼 밥동냥을 해서 겨우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홀어미가 병들어 눕게 되자 어린 개나리가 대신 밥동냥을 나갔다. 다들 굶어죽을 판이라 밥동냥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겨울날 홀어미와 삼남매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놓고 서로를 꼭 껴안고는 잠이 들었다. 이튿날 마을사람들은 완전히 타버린 채 흔적만 남은 개나리네 집을 발견하였다.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집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타죽은 홀어미와 삼남매의 슬픈 이야기다.
개나리에 얽힌 마지막 전설이다. 옛날 인도에 유독 새를 좋아하는 공주가 있었다. 공주는 아름답고 예쁜 새를 보는 대로 사들여서 궁전 안은 마치 새의 천국 같았다. 공주의 마음에 드는 새를 갖다 바치는 사람은 출세를 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백성들을 보살피는 일에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기이한 새를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굶주림에 시달렸다. 공주는 아주 멋진 새장을 하나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멋진 새장에 어울릴 만한 예쁜 새가 없었다. 공주는 이 새장에 어울릴 만한 아름다운 새를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만약 그런 새를 갖게 된다면 공주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새를 다 날려 줄 생각이었다. 이런 소문은 곧 온 나라에 퍼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이 예쁜 새를 들고 공주를 찾아왔다. 그 새는 아름다운 새장에 어울릴 만큼 예쁘고 멋진 새였다. 공주는 너무나 기뻤다. 공주는 노인으로부터 새를 받아서 새장 안에 넣은 다음 다른 새들을 모두 날려보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그렇게 예쁘던 새의 색깔이 점점 변하고 울음소리도 이상한 것이었다. 공주는 새의 몸을 물로 깨끗이 씻어 주었다. 그런데 목욕을 끝내고 보니 흉측한 까마귀의 모습이 아닌가! 그 노인은 까마귀에 예쁜 물감을 칠해서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제서야 공주는 자신이 속은 것을 알고는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화병이 난 공주는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죽은 공주의 넋은 가지를 뻗어 금빛 장식이 달린 새장과 닮은 꽃으로 피어났다. 이 꽃이 바로 개나리였다는 이야기.....
*냉이꽃
양지 바른 길가에는 하얀 냉이꽃이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냉이꽃도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보춘화다. 어릴 때는 냉이를 캐어 뿌리를 먹기도 했는데 독특한 향과 고소한 맛이 난다. 냉이는 십자화과에 속하는 풀로 지중해 지역이 원산지이며 지금은 전세계에 두루 퍼져 있다. 한국에서도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른 봄에 새로 나온 싹을 캐어 나물이나 국거리, 김치를 담글 때 쓰고, 어린 잎은 죽에 넣어 먹기도 한다. 특히 된장찌개를 끓일 때 냉이를 넣으면 그 맛과 향이 뛰어나다.
*생강나무꽃
깔딱고개와 범바위 샘터로 가는 삼거리에 이른다. 오른쪽으로 가면 범바위 약수터로 갈 수 있다. 깔딱고개로 오르는 산길로 들어선다. 산기슭에는 노오란 생강나무꽃이 활짝 피어 있다. 생강나무꽃을 볼 때마다 '한창 피어 흐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는 구절이 나오는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이 떠오르곤 한다. 대학시절에 읽었던 '동백꽃'에 대한 인상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일까? 생강나무꽃과 산수유꽃은 언뜻 보면 비슷하다. 그러나 산수유는 꽃대가 길게 나와 있고 암수가 한그루인데 비해 생강나무는 꽃대가 거의 없으며 암수 딴그루다.
*낙엽송 숲길
야생화를 키우는 화단을 지나면 낙엽송(落葉松) 숲길이 나타난다. 소나무나 잣나무 같은 침엽수는 사시사철 푸르기 때문에 상록수라고 하는데, 같은 침엽수인 낙엽송은 가을이 되면 노랗게 낙엽이 진다. 그래서 '잎을 간다'는 뜻을 가진 잎갈나무 혹은 이깔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낙엽송은 바로 일본에서 들여온 일본 잎갈나무다. 한국 재래종은 북한이 고향으로 추운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가을에 낙엽송의 잎이 노랗게 물들면 이 길은 제법 운치가 있는 풍경으로 변한다.
*제비꽃
낙엽송 숲길 음지에 다른 제비꽃들과는 좀 다른 제비꽃이 한 송이 피었다. 대부분의 제비꽃은 진자주색인데 이 꽃은 연한 자주색을 띄고 있다. 둥근털제비꽃이 아니면 고깔제비꽃으로 생각되는데..... 아무래도 둥근털제비꽃으로 보인다.
*금봉약수터
운동기구들을 설치해 놓은 곳을 지나 돌계단길을 다 오르면 두 아름드리쯤 되는 느티나무가 나타난다. 이 느티나무는 무당들이 보름이나 초하루에 찾아와서 치성을 드리는 당나무이기도 하다. 이 당나무 바로 위에 금봉약수터가 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는 법이 없어 목마른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다. 이 약수터는 금봉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물줄기를 찾아 우물을 파서 숯을 채운 뒤 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깔딱고개
금봉약수터를 지나면 깔딱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경사가 급해서 숨이 깔딱 넘어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얼마 전까지는 돌계단길이었는데 지금은 새로 나무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깔딱고개를 올라서면 금봉산성까지는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능선길이다. 이 고개에서 반대쪽 계곡으로 내려가면 창룡사가 나온다.
*소나무 숲길
산책을 하는 기분으로 능선길을 걸어간다. 소나무 숲속으로 난 산길이 호젓하다. 황사 때문인지 등산객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햇빛이 들지 않을 정도로 황사가 짙게 끼어 있어 음산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금봉산성으로 오르는 길
금봉산성 못미처 응달진 곳이 한군데 있는데,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녹아서 길이 질척거린다. 낙엽송과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 옆에 있는 무덤을 지나서 조금 더 가면 금봉산성에 이른다. 여기저기 큰 바위들이 박혀있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서면 금봉산성이다.
*금봉산성에 세워진 이정표
허물어진 성터의 돌계단길을 오르면 이정표가 나타난다. 여기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마즈막재,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재오개에 이른다. 마즈막재를 사이에 두고 계명산과 금봉산이 사이좋게 솟아 있다. 깔딱고개에서 여기까지는 1.28km의 거리다. 금봉산성에 올라서서 사방을 바라보지만 황사 때문에 시야가 좋지 않다.
*보수중인 금봉산성의 북쪽
금봉산 정상 주위를 둘러싼 금봉산성(충청북도 기념물 제31호)은 지금 한창 보수중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삼한시대에 마고선녀가 7일 만에 이 성을 쌓았다고 해서 마고산성이라고도 한다. 금봉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시대 때는 충주산성의 방호별감이었던 승병장 김윤후 장군이 70여일간의 고투 끝에 몽고군을 물리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백제 개로왕 21년에 이 성을 축성하여 적을 방어하였다고도 하는데, 이는 개로왕이 바로 이 성 북쪽에 있는 안림동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다는 이궁지설과도 일치한다.
충주는 그 옛날 삼국시대 각국의 변경지역으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진 격전지였다. 그 증거가 바로 고구려의 유산인 중원고구려비와 신라의 유산인 누암리 고분군, 그리고 이 금봉산성이다. 금봉산성은 충주시에서 동남쪽으로 4km쯤 떨어져 있다. 이 산성의 높이는 5∼7m, 둘레는 1.2km 정도 되지만 거의 다 무너지고 300m 가량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98년부터 산성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700m 정도 복원되었으며, 지금도 계속 공사중에 있다.
*금봉산 정상에서
금봉산(錦鳳山) 정상(636m)에 올라선다. 정상에는 돌로 만든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충주시청에서 세운 표지석에는 남산(南山)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남산이라는 이름은 일제시대에 충주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고 해서 붙인 것이다. 엄연히 금봉산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놔두고 왜 남산이라고 해야만 하는지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없다. 행정관청에서 아름다운 산이름을 찾는데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산을 오르는 목적이 꼭 정상에 오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정상에 서서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산의 정상에 오르면 내려갈 일 밖에 더 있는가! 사람의 일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추락의 위험성은 그만큼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금봉산성의 남쪽
금봉산성의 남쪽은 아직 복원공사를 시작도 안 했다. 하루 속히 예산을 확보해서 복원공사를 마무리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금봉산의 남서쪽 산기슭에는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 신라 문무왕(661∼681) 때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창룡사가 있고, 이 산성의 남쪽 바로 아래 산기슭의 탑대라는 곳에는 3층 석탑이 지금도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의 지명이 윗절골, 아래절골인 것으로 보아 창룡사를 중심으로 한 직동일대가 대사찰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대에는 지금 매우 큰 규모의 사찰을 짓고 있는 중이다.
*산성의 동쪽 끝에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
금봉산 정상에서 헬기장을 지나면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는 산성의 끝자락에 이른다. 소나무 아래에는 주인을 잃은 무덤이 하나 있다. 날이 좋으면 월악산 영봉이 아주 잘 보이는데 오늘은 윤곽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재오개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금봉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대개 여기까지 왔다가 되돌아 내려간다.
동쪽으로 금봉산 산줄기가 충주호를 향해서 뻗어간다. 나는 아직 가보지 못한 산이다. 언제 시간을 내서 한 번 마룻금을 밟아 보아야 하겠다. 산 전체가 황사로 인해 어둠이 내려앉은 것처럼 보인다.
*산성 끝에서 바라본 충주호
충주호를 내려다 보니 역시 황사로 인해 잘 보이지 않는다. 충주호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곳은 황사만 아니면 전망이 아주 뛰어난 곳으로 충주호와 월악산을 비롯해서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잘 조망할 수 있다.
*깔딱고개와 샘골 삼거리 표지판
금봉산 정상에서 되돌아 내려와 깔딱고개와 샘골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샘골로 내려가기로 한다. 샘골 등산로는 아기자기한 멋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다.
*샘골로 내려가는 소나무 숲길
삼거리에서 조금 내려가면 소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만나게 된다. 아직은 소나무들이 그리 크지 않지만 세월이 흐르면 아름다운 숲이 될 것이다. 나무는 잘라내기는 쉽지만 키우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나무를 심을 때는 3대를 보고 심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진달래꽃
소나무 숲길을 다 내려와 고압송전탑을 지나자 산기슭에 진분홍색의 진달래꽃이 활짝 피었다. 진달래는 꽃을 따서 먹을 수 있으므로 참꽃이라고도 하는데, 제주도에서 자생하는 참꽃나무와는 다르다. 진달래도 개나리와 함께 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보춘화다. 진달래는 봄에 한국의 산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져 있다. 어릴 때는 참꽃을 많이 따먹기도 했다. 약간 떫은 맛은 있지만 달착지근해서 먹을 만하다. 진달래꽃으로 화채를 만들거나 전을 부치기도 하고 또 술을 담그기도 하는데, 술을 담근 지 백일이 지나야만 제대로 맛이 난다. 그래서 진달래술을 백일주라고도 한다. 진달래를 두견화(杜鵑花)라고도 하는데, 두견화라는 이름은 두견새가 밤을 새워 피를 토하면서 울어, 그 피로 꽃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금봉산에서 바라본 석양
해는 이미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황사구름 속에서 공처첨 생긴 새빨간 불덩어리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듯 하다. 산중턱에 서서 자연이 연출하는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말없이 바라다 본다. 서서히 땅거미가 밀려오고 있다.
*샘골 약수터
샘골 약수터에 이르러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얼굴과 손을 씻고나니 상쾌하다. 약수터에는 각종 운동기구와 벤취를 설치해 놓았다. 또 천막도 쳐져 있어서 비나 눈을 피할 수도 있다.
*샘골 등산로 입구
샘골 약수터에서 등산로 입구까지는 금방이면 내려온다. 근처에 있는 별장 울타리에는 빠알간 명자꽃 봉우리가 막 피어나고 있다. 등산로 입구에서부터는 포장도로라 산길을 걷는 재미가 별로 없다.
*개울가에 활짝 피어있는 개나리꽃
포장도로를 걷기가 싫어서 논둑길로 들어선다. 시냇물이 흐르는 개울가에 노오란 개나리가 활짝 피어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서 개나리꽃을 찍을 때는 플래쉬를 터뜨려야만 했다.
*금봉산
논둑길을 걷다가 무심코 뒤돌아 보니 금봉산은 어느덧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산도 이제는 조용히 휴식에 들어갈 시간이다. 전교조 운동을 하다가 교직에서 해직이 되었던 젊은 시절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금봉산을 찾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금봉산은 언제나 나를 말없이 품어주었다. 나에게는 고마운 산이다.
큰길로 나오자 시내에는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다. 어둠 속에 잠긴 계명산이 실루엣으로 보인다. 일주일 전에 저 봉우리에 올랐었는데..... 그동안 또 어떤 꽃들이 피어났을까? 황사가 없는 맑은 날을 잡아서 금봉산을 다시 찾아야겠다.
2006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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