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을 며칠 앞둔 12월 26일 할머니가 89세를 일기로 마침내 운명하셨다. 사흘전 이웃집에 마실을 갔다가 떡을 얻어먹은 것이 그만 체하여 쓰러진 뒤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길을 떠난 것이다. 비록 세상을 살 만큼 살다가 돌아가셨다지만 하늘이 맺어준 천륜인지라 그 슬픔을 어찌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있을까!
그날 이른 아침 어머니로부터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산척면 월현 천등산자락의 고향집으로 부랴부랴 차를 몰았다. 고향집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어제 할머니가 이웃집에서 떡을 얻어먹고는 밤에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인사불성이 되었다고 전한다. 할머니는 눈을 감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디가 아프시냐고 물어보아도 할머니는 간신히 머리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나는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할머니의 맥과 증세를 살펴보고나서 우선 체기를 내리고 정신을 돌아오게 하는 침을 놓았다. 침을 놓고나자 잠시후 할머니의 숨이 조금 순조로와지고 방귀가 나오는 등 증세가 어느정도 호전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할머니가 이승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음식에 체한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체한 것을 이겨낼 수 없을 정도로 할머니의 육신이 쇠약해져 있다는 데 있었다. 기계도 오래되면 쓸 수가 없듯이 인간의 육신도 수명이 다하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에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일렀다. 그리고 외지에 나가 살고 있는 동생들에게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찾아 뵙도록 연락을 하였다. 부모님과 막내 남동생은 병원에 입원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나는 반대했다. 병원의 응급실에 가봐야 의사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산소호흡기를 달아주고 링거액 주사를 놓아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생명을 며칠 연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나온 삶을 정리하면서 조용하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것이 망자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이튿날 할머니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할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서의 인연의 끈을 놓으려 하고 있었다.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침을 한 번 더 놓아 드렸다. 이승에서의 할머니의 인연이 끝나려 하는 지금 과연 침을 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다만 살아있는 자손으로서 정성을 다하는 것일 뿐...... 부모님과 동생은 할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봐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해서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나도 동의를 하고 말았다.
할머니를 충주에 있는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예상했던대로 병원의 의사는 생리식염수만 처방해주고는 더 이상 방법이 없으니 집으로 모시고 가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하늘이 정해준 천명은 어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병원에서 의사의 말을 들은 가족들은 그제서야 나의 뜻을 이해하였다.
외지에서 사는 동생네 가족들이 할머니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서 왔다. 할머니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은 중풍으로 굴신을 할 수 없어서 대신 사위가 수의 일체를 장만해 가지고 청주에서 달려 왔다. 할머니는 이제 곡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영원한 안식에 들기 위한 준비를 하는 듯 평안해 보였다. 고통도 없어 보였다. 그것은 할머니에게나 우리에게나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이튿날 할머니는 맥도 더 약해지고 숨소리도 점점 잦아들어 갔다. 밤 9시경 나는 할머니에게 마지막 공양을 올렸다. 최고의 보약이라 일컫는 경옥고와 십전대보탕을 달여서 어린아이 안듯이 할머니를 품에 안은 채 한 숟가락씩 떠먹여 드렸다. 그것은 한의학을 늦게 시작한 맏손자가 할머니에게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의식이 없었지만 손자가 먹여주는 보약을 맛있게 잘 드셨다.
그날 밤 12시 43분. 할머니의 맥이 점점 약해지다가 끊어지더니 숨도 따라서 멈췄다. 89세를 일기로 마침내 운명하신 것이다. 할머니는 마치 긴 잠에 들 듯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 평화롭게 잠드신 할머니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장손자라고 유난히도 나를 귀여워 해주셨던 할머니! 다른 증손자들보다도 내 아들 정하를 유달리 사랑해주셨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와 지금 막 이승에서의 이별을 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 슬픔은 이루 말할수 없을 만큼 컸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잃고 30년을 청상으로 살아오시다가 같은 날 운명하신 것이다. 할머니는 살아 생전에 할아버지와 못다한 정을 자손들이 차려주는 제사밥이나마 함께 드시므로써 나누려고 했음인가! 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알렸다.
할머니를 충주의료원 영안실에 모시려고 119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 안에서 할머니의 이마에 손을 얹으니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할머니가 잠에서 깨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불가능한 일인 줄 알면서도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음으로써 이승에서의 할머니를 영원히 가슴속에 담으려고 애를 썼다.
할머니의 장례는 3일장으로 정해졌다. 날이 밝자마자 친척들이 할머니의 부음을 듣고 달려왔다. 오후가 되면서부터는 문상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화환도 많이 들어와서 영안실 문앞에 두 줄로 세워놓아야만 했다. 2002년 대선에서 대통령후보였던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도 화환을 보내왔다.
상주인 아버지는 할머니의 외아들이었다. 수많은 조문객들을 혼자서 맞이하느라 아버지는 정신이 없으셨다. 그래서 손님접대는 맏아들인 내가 맡아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몹시 추웠던 날씨가 많이 풀렸다. 이튿날은 훨씬 더 많은 손님들이 조문을 왔다. 아무래도 할머니가 생전에 많은 복덕을 쌓으셨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 여섯, 증손 열둘, 그리고 딸 내외와 외손 다섯, 증외손 여덟을 두셨으니 자손들도 그만하면 번창한 편이었다.
할머니는 충주시 앙성면 진달래공원묘지 양지바른 곳에 묻히셨다. 우리 형제들이 할머니의 관을 들고서 묘터까지 운구하였다. 할머니를 묻는 내내 어머니는 섧게도 우셨다. 시어머니를 평생 모시고 살았던 며느리로서 고부간의 애증이 남아서였을까! 유택은 풍수지리설에 의한다면 할머니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자리였다. 산세를 보면 거센 기세로 치달리는 호랑이 등줄기의 한가운데라 할 수 있으니, 호랑이해에 그것도 정월 초하루에 태어나신 할머니만이 편안히 누워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삼우제날 할머니의 무덤앞에 조촐한 비석을 하나 세워드렸다. 비석을 세우는 자리에서 맏증손인 내 아들 정하가 한양대학교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 정하의 대학 등록금까지 마련해 놓으셨다. 이렇듯 할머니의 손자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었다. 비석을 세우고나서 할머니에게 제사를 올렸다. 할머니의 무덤앞에서 아버지는 내내 울먹이는 목소리로 할머니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이별의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의 이별사를 듣는 동안 내 가슴속에서는 뭉클한 그 무엇이 치밀어오르면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나는 할머니의 무덤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할머니를 남겨두고 오려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편히 쉬시라는 인사말을 마음속으로 남기고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가 쓰시던 방에서 유품들을 하나하나 정리하였다. 할머니가 즐겨 드시던 사탕봉지에는 아직도 사탕이 반이나 남아 있었다. 사탕봉지를 보니 금방이라도 할머니가 이웃에 마실을 갔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실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꿈이었다.
그날 밤 나는 고향집 하늘에 떠올라 반짝이는 할머니의 별을 보았다. 할머니는 저 하늘 아스라이 먼 곳에서 별이 되어 나를 말없이 굽어보고 계셨다.
200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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