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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North Africa) - 수단(Sudan)

林 山 2010. 1. 27. 17:40

1. 수단 개관


수단 공화국(Republic of the Sudan) 북쪽으로 이집트, 북서쪽으로 리비아, 서쪽으로 차드, 남서쪽으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남쪽으로 남수단, 동쪽으로 에리트레아, 남동쪽으로 에티오피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북동쪽은 홍해로 열려 있다. 


'Sudan'은 아랍어로 '흑인들의 땅(بلاد السودان, bilād as-sūdān)'이라는 뜻이다. 수단의 인구는 2018년 기준 약 4,322만 명이다. 국토 면적은 1,861,484㎢로 한반도의 약 8.6배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세 번째, 세계에서 16번째로 국토 면적이 큰 나라다. 


수단은 1956년 독립 이후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계 원주민 종족들의 고향인 남수단과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2011년 남수단이 분리 독립을 하기 전까지 수단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면적이 큰 나라였다. 그 면적은 아프리카 대륙의 8%가 넘었고, 세계 육지 면적의 2%에 가까웠다.


수단 공화국 지도


2. 수단 국기


수단의 국기는 1970년 5월 20일에 제정되었다. 범아랍색인 빨간색, 흰색, 검정색으로 구성된 세 가지 색의 가로 줄무늬에 깃대 쪽으로 초록색 삼각형이 그려져 있다. 빨간색은 독립 투쟁과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순교자들, 흰색은 평화, 검정색은 수단, 초록색은 이슬람교를 상징한다.


수단 국기


1956년부터 1970년까지는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으로 구성된 세 가지 색의 가로 줄무늬로 구성된 국기를 사용하였다. 당시의 국기에서 파란색은 나라를 관통해서 흐르는 나일 강(Nile River), 노란색은 사하라 사막, 초록색은 농경지를 의미했다.


3. 수단의 수도


수도 하르툼(Khartoum)


수단의 수도는 하르툼(Khartoum)이다. 남수단에서 흘러오는 백나일 강(White Nile River)과 에티오피아에서 흘러오는 청나일 강(Blue Nile River)은 하르툼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하르툼은 나일 강에 놓인 다리로 연결된 북하르툼(Khartoum North, al-Khartûm Bahrî), 옴두르만(Omdurman)과 함께 수단 최대의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북하르툼(Khartoum North)


북하르툼 위치


북하르툼은 청나일 강, 백나일 강이 만나는 지점과 청나일 강 동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2016년 기준 160만 명이다. 청나일 강 남쪽의 하르툼, 백나일 강 서쪽의 옴두르만과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수단의 산업 중심지로서 조선소, 선박과 철도 공작창, 제재소 등이 있다. 북하르툼을 하르툼 바흐리(Khartoum Bahri)라고도 한다.


옴두르만(Omdurman)


옴두르만은 청나일 강과 백나일 강 합류지점 바로 아래 나일 강 본류 서안에 있다. 옴두르만은 알-마디(al-Mahdi)로 알려진 무암마드 아흐마드 이븐 앗-사이이드 압드 알라(Muammad Ahmad ibn as-Sayyid Abd Allh, 1844~1885)가 1885년 영국을 물리친 후 그 자신과 후계자 칼리프 압드 알라(Caliph ʿAbd Allāh)는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이후 옴두르만은 수단의 문화와 종교,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옴두르만(Omdurman)의 알-마디 영묘(al-Mahdi's Tomb)


압드 알라 저택은 지금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알-마디의 영묘(al-Mahdi's Tomb)도 복구되었다. 중앙 모스크와 연계된 옴두르만 이슬람 대학교(Omdurman Islamic University)에서는 이슬람교 법률과 신학을 가르친다. 1912년에 건립된 이 대학교는 1965년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다. 


4. 수단의 자연 환경

 

수단 북부는 사하라 바위사막이 펼쳐져 있는 광활한 평원이다. 남부와 중부는 반건조성 관목지대 및 사바나와 고립된 산들이 자리잡고 있는 평원이다. 서부는 사구지대이다. 동부 홍해 연안은 해발평균 2천m의 산악지대이다. 나일 강은 수단을 관통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른다. 북부 사막지대는 열대 대륙성 기후이고, 남부는 적도성 기후로 전 지역의 기온이 매우 높다. 남부 고지대는 열대우림지대이다. 


나일 강 양안에는 대추야자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수단에는 사자와 표범, 코끼리, 기린, 얼룩말, 하마, 침팬지 등의 야생동물과 수많은 종류의 영양이 살고 있다. 북위 12° 이남 지역에는 체체파리(Tsetse fly)가 서식한다. 체체파리는 사람에게는 수면병, 가축에게는 나가나병을 감염시키는 병원체인 트리파노소마를 옮기는 중간 숙주이다. 


5. 수단의 정치와 사법제도


수단의 정부 형태는 현재 2019년 8월 출범한 39개월 임기의 과도정부인 주권위원회가 수립되어 있다. 수단 의회는 현재 미구성 상태이다. 이전까지 수단은 대통령제 연방공화국(25개 주)으로 오랫동안 군부가 독재정치를 해왔다. 입법권은 임기 4년의 직선 의원 450명으로 구성되는 단원제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에 있었다. 


수단의 최고 사법권은 최고재판소에 있다. 그외 특별군사재판소와 종교재판소도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민사소송에 관한 한 이슬람교의 종교법인 샤리아(Shariah)의 적용을 받는다. 


6. 수단의 인구 구성과 언어

 

수단의 인구 구성은 매우 복잡하다. 수단에는 19개의 주요 종족을 포함해서 약 597개의 부족이 존재한다. 북부에는 아랍인(Arabs)과 누비아족(Nubian), 남부에는 나일족(Nilotic)과 수단족(Sudanic)이 살고 있다. 종족 구성은 흑인 55%, 아랍계 39%, 서아프리카인 6% 등이다. 수단 정부가 1983년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수단 전체 인구 중 흑인인 딩카족(Dinka) 12%, 베자족(Beja) 6%, 누에르족(Nuer) 5%, 실루크족(Shilluk) 2% 등은 주로 남부 3개 주에 거주한다(딩카족은 실제 수단 인구의 25% 점유).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에 인접한 에티오피아, 우간다, 차드 난민의 유입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수단의 공용어는 아랍어이며, 인구의 약 절반이 아랍어를 사용한다. 영어도 통용된다. 그외 수단에는 약 114개의 다양한 언어와 방언이 있다. 수단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매우 보수적인 사회다. 총인구에 대한 종교 분포는 수니파 이슬람교 97%, 기타 3%이다. 수단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고는 있지만, 이슬람교가 사실상 국교이다. 수단 내 기독교 신자 등 다른 종교는 차별이나 탄압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7. 수단의 교육과 언론

 

수단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58%에 불과하다. 그래서 수단 국민의 문자 해독률은 22% 정도로 매우 낮은 편이다. 대학은 대부분 카르툼 주에 집중되어 있으며, 하르툼 국립대학교(The University of Khartoum)는 명문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국립대학은 13개, 사립대학은 9개 대학이 있다.


하르툼 대학교

 

수단의 언론은 1970년에 거의 모두 국유화되었으며, 언론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수단에는 현재 SNBC와 Khartoum TV 등 2개의 TV 방송국이 있으며, 라디오 중파방송은 5개 지역에서 방송하고 있다. 4개의 주요 아랍어판 일간지와 2개의 영어판 월간지는 정부의 통제 하에 발행되고 있고, SUNA 통신은 관영이다. 


남수단 언론인들이 만든 일간지 하르툼 모니터(Khartoum Monitor)는 영어로 발행되며, 남부를 대변하는 신문이다. 하르툼 모니터는 수단 군부독재정권의 검열을 거부해서 한때 폐간을 당하고 벌금을 물기도 했다. 편집인 니알 볼(Nhial Bol)은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투옥된 뒤 피신해야 했다. 


마흐줍 모하메드 살리흐(Mahjoub Mohamed Salah)


수단의 가장 오래된 독립 신문 알-아얌(al-Ayyam) 지 편집장 마흐줍 모하메드 살리흐(Mahjoub Mohamed Salah)는 '수단에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면 내전이 대재앙으로 번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수단 군사정권은 알-아얌 지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1958년에 두 번, 1960년대에도 한 차례 강제 폐간시킨 뒤 압류해서 국유화했다. 살라흐 편집장은 수단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구금되는 등 탄압을 받아왔다. 세계신문협회(World Association of Newspapers)는 2005년 수단의 군사정권으로부터 수많은 탄압과 고초를 겪은 살라흐에게 골든 펜 상을 수여했다.


8. 수단의 경제


수단의 GDP는 2019년 기준 336.9억 달러이고, 1인당 GDP는 759.71달러이다. 경제 성장률(GDP)은 2019년 기준 -1.5%이다. 교역 규모는 2019년 기준 98.2억 달러이다. 수출은 30.2억 달러이다. 주로 원유, 면화, 참깨 등을 수출한다. 수입은 68억 달러이다. 주로 자동차, 식품, 기계류 등을 수입한다. 화폐 단위는 수단 파운드(SDG), 1$=SDG 47.5이다. 원유 매장량은 약 15억 배럴로 추정된다. 


9. 수단과 한반도

 

수단은 한국과 1976년 영사관계를 수립하고, 1977년 4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수단에는 한국-수단 친선협회(1978)와 한국-수단 의원친선협회(1983)가 구성되어 있다. 1983년 3월에는 수단의 누메이리 대통령, 1984년 10월에는 엘타옙 제1부통령이 방한한 바 있다. 수단에는 약 100명의 한국 교민이 체류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1969년 9월 국교를 수립한 이래 문화협정(1969), 경제 문화 및 기술원조협정(1970), 항공운수협정(1978) 등을 체결했다. 수단의 대북한 관계는 중국의 태도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1992년 7월 북한대사관의 철수 이후 양국 간 접촉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1980년 1월에는 친북한 인사로 구성된 코리아 클럽이 조직되었고, 1990년 10월에는 수단-북한 친선협회가 창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10. 수단의 치안


수단의 일부 지역은 치안이 불안정하므로 여행자들은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남수단과 북수단의 장기간에 걸친 내전은 2005년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최근 남수단이 독립함으로써 종결되었다. 하지만, 다르푸르 분쟁(War in Darfur)의 여파는 남수단이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프랑스와 비슷한 면적에 인구 약 5백만 명이 거주하는 다르푸르 지역은 북수단의 유목민과 남수단의 아프리카계 농경민의 갈등이 수백 년 전부터 있어 왔던 지역이다. 다르푸르 지역은 여행허가 없이 여행할 수 없다. 기타 지역은 여행허가 없이 방문 가능하다.


11. 수단의 유적지


11-1. 메로에 섬의 고고유적지(Archaeological Sites of the Island of Meroe)


메로에(Meroe) 유적은 나일 강과 앗바라(Atbara) 강 사이의 반사막(semi-desert) 지역에 있다. 수단 북부 나일 강 주 카부시야에서 북쪽으로 약 6.4㎞ 떨어진 나일 강 동안에 그 유적이 있다. 1902년부터 유적 발굴작업으로 메로에 피라미드(Meroe Pyramids), 나일 강변의 안벽 등이 발견되었다. 안벽 근처에는 궁전 유적지가 있다. 메로에 피라미드, 무사와라 에 수프라(Musawwarat es Sufra), 나가(Naga) 유적은 반사막 지역에 있다. 메로에 마을 유적은 강변에 있다. 무사와라 에 수프라 신전과 나가 신전, 메로에 피라미드는 적갈색 산 옆에 세워져 있다.


메로에 피라미드(Meroe Pyramids)


메로에는 BC 8세기 경부터 서기 4세기까지 번영했던 쿠시 왕국(Kingdom of Kush)의 중심지였다. 쿠시 왕국 유래 누비아인들이 세운 고대 이집트 제25왕조는 BC 656년 이후 축출되어 남쪽으로 물러가 메로에에 자리잡았다. 당시 쿠시 왕국의 수도는 나파타(Nafata)였으며, 메로에는 BC 750년 경부터 쿠시 왕국의 남부 행정중심지였다. 


무사와라 에 수프라(Musawwarat es Sufra) 도시 유적


BC 590년 경 이집트 제26왕조 프삼티크 2세(Psamtik II)가 나파타를 침략하자 메로에는 쿠시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메로에는 쿠시트(Kushite) 왕들의 왕실 도시로, 100여년 간 이집트를 다스린 통치자가 있던 곳이었다. 로마의 침략에도 살아 남았던 메로에는 니그로이드(Negroid)와 나일 강 유역 부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쇠퇴했고, 마침내 악숨 왕국(Kingdom of Aksum) 엘라 아미다(Ella Amida, 재위 320~325) 왕의 군대에게 멸망당했다.


무사와라 에 수프라(Musawwarat es Sufra)의 사자 신전(Lion Temple)


종교적인 유적인 나가와 무사와라 에 수프라 도시 유적은 수단의 부타나 사막의 낮은 구릉으로 에워싸여 있다. 중앙 신전 주위에 사자 신전(Lion Temple), 아페데막 신전(Apedemak Temple)을 비롯해 소형 신전과 궁전, 귀족과 신관(神官)들의 주택, 마구간, 교역소, 저수시설 등이 배치되어 있다. 높은 테라스 위에 중앙 신전과 원주회랑(圓柱回廊), 수십 개의 원주, 높이 5~6m의 석벽 터가 남아 있다. 건축이나 부조는 이집트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사자 신전의 부조는 규모는 작지만 세련미가 있다. 아페데막(Apedemak)은 사자머리를 한 전사의 신(lion-headed warrior god)이다. 


나가(Naga)의 로마 오두막(Roman Kiosk)과 아페데막 신전(Apedemak Temple)


전성기의 쿠시 왕국은 지중해에서 아프리카 중심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메로에 섬 유적들은 두 지역 사이에 예술, 건축, 종교, 언어의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메로에는 고대 세계에서 오랫동안 아프리카를 드나드는 중요한 통로였다. 서기 6세기에 나일 강 중부 지역으로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쿠시 문명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급격히 사라졌다. 


로마의 오두막(Roman kiosk)


메로에 피라미드는 쿠시 왕국의 장례 유적이다. 메로에는 BC 3세기 이후부터 오랫동안 왕실의 무덤이 있었다. 메로에 문명이 철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당시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대륙에 철기 문화가 보급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가(Naga)의 아몬 신전(Amon temple)


나가의 건축 기법은 이집트의 파라오, 그리스-로마, 쿠시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로마의 오두막(Roman kiosk)은 여러 장식 기법이 섞여 있고, 사자 신전에는 쿠시 신들과 왕족에 대한 조각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무사와라 에 수프라는 신전, 정원, 건물뿐만 아니라 물 관리 시설, 채석장 지역들로 서로 연결되어 전체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11-2. 게벨 바르칼과 나파탄 지구 유적(Gebel Barkal and the Sites of the Napatan Region)


게벨 바르칼과 나파탄 지구 고고학 유적(Gebel Barkal and the Sites of the Napatan Region) 다섯 곳은 나일 강 계곡에서 약 60㎞에 걸쳐 펼쳐져 있다. 이들 유적은 쿠시의 두 번째 왕국인 나파탄(Napatan) 문명(BC 900~270)과 메로에(Meroitic) 문명(BC 270~AD 350)을 보여주는 기념물이다. 유적지에는 피라미드가 있거나 없는 묘지, 신전, 궁전, 생활 복합 단지가 있다. 


게벨 바르칼 산(Mt Gebel Barkal)


게벨 바르칼 산(Mt Gebel Barkal)은 이집트 신왕국 시대(New Kingdom, BC 1570~BC1293) 이래 줄곧 신성한 산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이 거룩한 산에 그들의 신 아몬(Amon)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이슬람 성인인 셰이크(Muslim Sheikh)가 높고 평평한 사암 바위로부터 100m 떨어진 곳에 묻힌 이후 지금은 이 산을 게벨 와드 엘 카르사니(Gebel Wad el-Karsani)라고 부른다. 게벨 바르칼 산은 지역 주민들이 이슬람 셰이크의 무덤에 기도하러 오면서부터 종교적 전통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다. 지역 주민들은 이곳의 아몬 대신전(Great Temple of Amon)을 성지로 여기고 있다.


게벨 바르칼 산(Mt Gebel Barkal)의 아몬 대신전(Great Temple of Amon)


게벨 바르칼과 나파탄 지구의 피라미드, 궁전, 신전, 매장실, 장제전(mortuary temple), 벽화, 조각, 문자들은 예술, 사회, 정치, 종교 등의 가치를 2천 년 이상 구현해 온 인간의 독창적 능력을 보여주는 최고 걸작이다. 엘쿠루(El-Kurru) 묘지 지하 납골당의 돌출 받침대는 새로운 건축 공법으로, 기원전 7세기부터 지중해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벨 바르칼(Gebel Barkal) 피라미드


나파탄 지구 유적은 당시 아몬 신 숭배와 이집트 고전 비문을 재현하고 증명하는 자료이다. 게벨 바르칼과 다른 유적지의 유산들은 BC 9세기~AD 6세기 기독교 세계가 될 때까지 나일 강 계곡에서 유행하던 나파탄-메로에(쿠시테) 문명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 문명은 북부 지역의 파라오 문명 및 다른 아프리카 문명과 강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엘쿠루(El-Kurru) 피라미드


게벨 바르칼, 누리(Nūrī), 엘쿠루에 있는 피라미드 건축, 바위를 깎아서 칠한 매장실, 피라미드의 가파른 각도와 장식한 각 면들은 BC 9세기~AD 4세기 뛰어난 장례 건축과 독특한 예술을 보여준다. 주마(Zuma)의 고분은 이러한 매장 전통이 AD 6세기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누리(Nūrī)의 피라미드


무트(Mut) 신전의 비문과 쿠루의 그림 같은 유물들은 당시 가장 일반적인 종교와 관련 언어, 이를테면 아몬 신 숭배와 이집트 고전 비문을 재현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이러한 장면은 무트 여신에게 봉헌하기 위해 바위를 깎아서 만든 신전 내부에 잘 보존되어 있다. 이는 이집트 제25왕조 4대 파라오 타하르카(Taharqa)가 평평한 산 정상 안에 앉아 있는 아몬 신을 숭배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게벨 바르칼 산의 성스러움을 증명한다. 타하르카는 구약성서에 이름이 언급되는 수단 출신의 유일한 파라오다.


12. 수단의 전근대사

 

지질시대 제4기 이래 사하라의 사막화는 신석기 시대의 대변혁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이후 아프리카 역사에 중요한 지정학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BC 3만 년∼2만 년에 니그로이드(Negroid) 수렵채취인들이 지금의 이집트 남부와 수단 북부 사이에 누비아(Nubia) 문화의 토대를 이룩했다. BC 3천 년 경에는 이미 야생동물을 길들였다. 기원전 3000년 경 말부터는 이집트와 교류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BC 2500년 경부터는 이집트 고왕국(제3왕조~제6왕조, BC 2686~BC 2181)과 무역이 이루어졌으며, 이집트 벽화에 누비아 노예나 병사가 등장한다. 이집트 고왕국 시대를 피라미드 시대라고도 한다. 


케르마(Kerma) 고대 도시 유적지


BC 2181년 이후 북부 아프리카인들 특히 리비아인들이 수단으로 이주하여 흑인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후 이집트가 누비아를 점령하여 누비아 문화에 이집트 문화가 융합되었다. 둔쿨라(Dunqulah)에서 48㎞ 북쪽 나일 강 동안 제3폭포 바로 위쪽 케르마(Kerma)에는 수단 최초의 왕국인 쿠시 왕국(Kingdom of Kush)이 존재했다. 카르마가 역사에서 처음 언급된 것은 이집트의 세누스레트 1세(Senusret I, BC 1918~1875)에 의해서인데, 그는 이 지역을 쿠시(Kush)라고 했다. BC 1826년 경에는 세누스레트 3세(Senusret III, BC 1878~1841)가 사이 섬을 침공하여 쿠시인들과 최초의 교전을 벌였다.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 투트모세 1세(Thutmose I, 재위 BC 1520~ 1492)는 대공세를 펼쳐 케르마를 함락시키고 쿠시 왕국을 무너뜨렸다. 쿠시 왕국은 이집트화된 누비아인의 나라였다. BC 1070년 이집트 신왕국 제20왕조가 멸망하면서 누비아에는 쿠시 왕국이 다시 일어나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번영했다. BC 8세기 중엽 쿠시 왕국은 나파타(Nafata)를 수도로 하여 이집트를 정복하고, 이집트 제3중간기 마지막 왕조인 제25왕조를 세웠다. 쿠시 왕국은 BC 7세기 아시리아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다. 


메로에 피라미드(Pyramids of Meroe) 문명 유적지


이후 이집트의 침공을 받은 쿠시 왕국은 블레미스(Blemmyes) 등의 유목 민족에게 압박을 받으면서 수도를 나일 강 중류의 메로에(Meroe)로 옮겼다. 이들은 이곳에서 메로에 피라미드(Pyramids of Meroe) 문명을 일으켰다. BC 3세기 말에서 2세기 초 쿠시인들에게는 이미 고유문자가 있었다. BC 2~1세기 경 쿠시 왕국은 로마 제국의 이집트 속주를 공격했다가 도리어 반격을 당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서기 1~2세기 경부터는 에티오피아의 악숨 왕국(Kingdom of Aksum)이 누비아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AD 350년 경 쿠시 왕국은 악숨 왕국의 공격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쿠시 왕국의 멸망 후 누비아에는 노바디아 왕국(Kingdom of Nobadia)과 마쿠리아 왕국(Kingdom of Maquria)이 세워졌다. 마쿠리아 이남 지방에는 알와 왕국(Kingdom of Alwa)이 들어섰다. 알와 왕국을 알로디아 왕국(Kingdom of Alodia)이라고도 한다. 6세기 경 이들은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와 테오도라(Theodora)가 보낸 선교사들을 맞아들여 단성론(單性論) 계통의 기독교로 개종했다. 7세기 중엽에는 마쿠리아가 노바디아를 병합했다. 


마쿠리아는 이어 7세기 경 등장한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받았으나, 바크트(Baqt)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여러 세기 동안 안전할 수 있었다. 이후 12세기 경까지 마쿠리아는 비교적 안정된 상황에서 파티마 왕조(Fatimid dynasty) 등의 이슬람 왕국과 교역하며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아이유브 왕조(Ayyubid dynasty)와 맘루크 왕조(Mamluk dynasty) 등 이슬람 세력의 공격이 재개되면서 마쿠리아는 혼란에 빠졌다. 


12세기부터 맘루크 왕조에 시달리던 아랍 이슬람 유목민들이 이집트로부터 수단으로 남하하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아랍 유목민들은 기독교 왕국을 차례로 멸망시켰다. 1500년 경에는 아랍 연맹군이 수단 남부의 기독교 왕국인 알와 왕국마저 정복하였다. 맘루크 왕조에게 점령되었던 마쿠리아는 토착 세력이 결집하여 왕국을 다시 회복했으나, 15세기 초반 아랍인과 흑인 간의 혼인을 통해 마쿠리아를 잠식해온 아랍계 민족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수단 북부는 이집트에 편입되었다. 이후 수단 북부에는 아랍인과 흑인 간의 혼혈인종이 다수 거주하게 되었다. 오늘날 수단 아랍인은 아랍화된 누비아인의 후손이다.


한편 수단 남부에서도 알와 왕국이 분열하여 소국들이 난립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16세기 초반 센나르(Sennar)에는 술탄국 푼지 왕조(Funj dynasty)가 세워지고, 17세기 초반에는 수단 서부에 다르푸르(Darfur) 술탄국이 세워지면서 남쪽 지역도 이슬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센나르의 남쪽에서는 여전히 기독교 혹은 토착 유일신 신앙을 믿고 있던 쉴루크(Shilluk), 딩카(Dinka) 등의 부족이 센나르와 투쟁하면서 북수단과 남수단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7세기 수단 지역은 중기병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과 군주가 직접 관리하는 대상무역으로 흥성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수단은 내전으로 인해 두 술탄국 모두 국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13. 수단의 근현대사


1821년부터 오스만 투르크의 속국 이집트는 나일 강 유역 전체를 포함하는 하나의 주로 통합하기 위한 수단을 침략했다.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부왕(총독)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1769~1849)는 수단으로 진격하여 센나르 술탄국을 멸망시켰다. 무함마드 알리는 이집트 마지막 왕조의 창시자였다.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1874년에는 다르푸르 술탄국마저 멸망함으로써 수단은 마침내 이집트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마케도니아 출신 무함마드 알리는 고향인 발칸 반도 등지에서 데려온 사람들에게 수단의 세금 징수를 맡겼다. 알리의 세리들은 세금을 너무 가혹하게 징수하여 수단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스마일 파샤(Isma'il Pasha)

 

무함마드 알리의 손자로 이집트 부왕이 된 이스마일 파샤(Isma'il Pasha, 1830~1895)는 수단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유럽인과 미국인들을 고용했다. 또, 재정적 지원을 끌어들이려고 유럽의 기독교도로 하여금 수단에서 성행하던 노예무역을 근절시키게 했다. 파샤에 의해 수단 총독으로 임명된 영국의 찰스 조지 고든(Charles George Gordon, 1833~1885) 장군은 노예무역을 억제하고 여러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이집트의 지배권을 다졌다.


무함마드 아마드(Muammad Ahmad ibn as-Sayyid Abd Allah)


다르푸르는 이집트에 대한 항거를 계속하면서 왕조를 복원했다. 이슬람 신비주의자 무함마드 아마드 이븐 앗사이드 압달라(Muammad Ahmad ibn as-Sayyid Abd Allah, 1844~1885)가 이끄는 반군은 수단의 나머지 지역을 평정하기 시작했다. 1882년 이집트를 강제 점령한 영국은 1884년 찰스 고든을 수단 총독에 임명하여 무함마드 아마드 수단 반란군의 위협을 받고 있는 하르툼에서 이집트 군대를 철수시키라는 임무를 주었다. 


찰스 조지 고든(Charles George Gordon)


찰스 고든은 영국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크림 전쟁에 참가하였다. 1860년 청나라에 파견된 찰스 고든은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 Taiping Rebellion) 진압에 참가한 이후 이집트 총독과 수단 지사를 거쳐 수단 총독이 된 인물이었다. 


무함마드 아마드 반군은 1885년 하르툼을 점령하고, 수단에 이슬람 마흐디 신국을 세웠다. 영국은 고든 총독이 살해당하고 효수되는 굴욕까지 겪으며 하르툼을 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허레이쇼 허버트 키치너(Horatio Herbert Kitchener, 1850~1916)가 이끄는 영국-이집트 연합군은 1898년 옴두르만 전투에서 무함마드 아마드의 군대를 격파하고 수단을 정복하였다. 영국은 나일 강 유역에 최초로 목화를 심어 면화를 수단의 주요 수출상품으로 만들었다. 


허레이쇼 허버트 키치너(Horatio Herbert Kitchener)


수단을 안정시킨 후 키치너에게는 '하르툼의 키치너 경'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중요 역할을 수행한 영국 육군 원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내각의 전쟁장관이 된 키치너는 전쟁의 장기화를 예견하고 대규모 의용군을 조직했다. 키치너 모병 포스터의 '조국은 당신을 필요로 한다'(BRITONS WANTS YOU)는 문구는 오늘날까지도 유명하다.

 

1922년 이집트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수단은 영국-이집트의 공동통치령이 되었다. 1924년 수단에 대한 단독 지배권을 주장하는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의 반발과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수단 딩카족의 봉기로 수단 총독이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영국은 남부와 북부를 차별하고 이간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영국은 농토와 수원, 석유 등의 자원이 풍부한 남수단에 대해 영어와 토착어를 장려하는 동시에 기독교 포교를 강화함으로써 남북 수단 간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동질성을 단절시켜 상호 이질성이 심화되었다.


이스마일 알 아자리(Ismail al-Azhari)

 

1930~40년대에 들어와 수단에서는 민족주의가 성장했다. 1951년 가말 압델 나세르(Jamāl, Abd an-Nāsir, 1918~1970)는 이집트가 수단의 유일 종주국을 주장하면서 영국과의 협약을 파기하고 독자적으로 수단을 지배하고자 했다. 2년 뒤, 영국과 이집트는 수단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협약에 서명했다. 1953년 실시된 수단 총선에서 이스마일 알 아자리(Ismail al-Azhari, 1900~1969)가 이끄는 국가통일당(National Unionist Party, NUP)이 승리하였다. 알 아자리는 수단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14. 수단의 독립 


1956년 1월 수단 공화국의 독립이 선포되었다.독립 이후 수단은 대외적으로 아랍연맹(AL)에 가맹하고, 국제적으로 반이스라엘 기치 하에 이집트 등과 협력했다. 하지만 대내적으로 수단은 영국의 식민지 내부 분열과 이간 정책의 결과 남부와 북부의 대립, 다수 정당의 난립으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북부 정치인들은 국가의 모든 영역에 이슬람법과 문화를 강력하게 확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비종교적인 정부를 선호하는 대다수 남수단인들과 일부 북수단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알 아자리 정권은 국가통일당(NUP)의 분열로 인해 무너지고, 남수단과 북수단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브라힘 아부드(Ibrahim Abboud)

 

1958년 11월 군 장성 출신 이브라힘 아부드(Ibrahim Abboud, 1899~1983)는 무혈 쿠테타로 알 아자리 정부를 전복시키고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1964년 알 아자리는 NUP의 당수로 다시 등장하였다. 1965년 5월 실시된 총선에서 승리한 알 아자리는 수단의 국가수반인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고, 무하마드 마흐굽(Muhammad Ahmad Mahgoub, 1908~1976)이 총리에 올랐으나 정쟁과 남부문제 등으로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지 못했다. 


가파르 모하메드 누메이리(Gaafar Mohamed Numeiri)

 

1969년 5월 25일 가파르 모하메드 누메이리(Gaafar Mohamed Numeiri, 1930~2009)는 군부 쿠데타로 알 아자리의 민간정부를 전복시키고 혁명위원회 의장과 총리가 되었다. 누메이리는 수단 사회주의를 선언하고, 국명를 수단 민주공화국으로 개칭하였으며, 구정치인과 반대파들에 대한 대숙청을 단행하였다. 또 외국인 자산과 은행을 국유화하고,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에 있어서 사회주의권 국가들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갔다. 1972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누메이리는 수단 사회주의연맹(Sudan Socialist Union, SSU)을 창립하고, 단일정당제를 채택했다. 남수단과 북수단의 내전은 1972년의 아디스아바바 협정으로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1977년 이후 이집트가 친미로 돌아서자 수단-이집트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78년 누메이리는 아프리카 통일기구(OAU) 의장으로서 아프리카 국가들이 외부세력과 제휴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슬람법인 샤리아를 시행하려던 누메이리의 구상은 기독교가 우세한 남부지역에서 거센 반발을 야기했다. 1979년 2월 누메이리는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방정부에 대폭 이양하는 지방분권화를 추진하였다. 


1983년 수단의 법률체계를 이슬람화하려는 북부 정치인들의 지속적인 시도와 경제발전에서 상대적으로 낙후한 남수단인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내전이 재발하였다. 국제 사회의 노력으로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수많은 협상과 휴전 협정들이 있었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1985년 4월 국방장관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무혈 쿠테타를 일으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다가 이집트에 체류하고 있던 누메이리를 축출하고 과도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누메이리의 15년 독재정권은 쿠데타로 종식되었다. 임시 군사정권이 실시한 총선 결과 1986년 5월 사디그 알 마흐디(Sadig Al-Mahdi, 1935~ ) 내각책임제 연립정부가 수립되었다.  


사디그 알 마흐디(Sadig Al-Mahdi)

 

알 마흐디는 민주정치 회복과 경제재건, 남부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제1당인 움마국민당(National Umma Party, NUP)을 비롯해서 민주연합당(Democratic Unionist Party, DUP), 이슬람민족전선(National Islamic Front, NIF), 그리고 남부 출신 정당 간 이해의 상충, 이슬람법 시행, 경제불황, 남부 내전의 장기화 등으로 정치 투쟁과 내부 분열은 점점 심화되었다. 1989년 2월 남부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합의 내용을 놓고 연합정당 간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남부 반군인 수단인민해방군(Sudan People's Liberation Army, SPLA)이 동남부의 요충지인 쿠르묵(Kurmuk)과 나시르(Nasir), 토리트(Torit)를 점령했다. 


수단인민해방군(SPLA)에게 동남부를 점령당한 수단 정부군은 사기가 저하되자 국방장관이 사임하였다. 수단 정부군 총사령관은 평화협정 체결, 거국내각 구성, 군장비 개선 등 대정부 청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1989년 3월 이슬람민족전선(NIF)을 제외한 정당연합의 거국내각을 성립시킨 알 마흐디는 6월 30일 아디스아바바에서 수단인민해방군(SPLA)과 국민헌법회의 개최, 외국과의 군사동맹 폐기, 이슬람법 적용범위 축소 등에 합의하고 각의에서 통과시킬 예정이었다.


같은 날 대 남부 협상에 불만을 가진 가진 이슬람민족전선(NIF)이 주동한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부 쿠데타의 중심인물인 오마르 알-바시르(Omar Hassan Ahmed al-Bashir, 1944~)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시켰으며, 언론을 통제했다. 1991년 1월 1일부터 남부 3개 주를 제외한 전국에서 이슬람법 샤리아가 시행되면서 대통령 중심 연방제와 이슬람 슈라(Shura) 원칙에 따른 인민의회제(People`s Congresses) 등 새로운 정치제도가 채택되었다. 사법은 회교국 건설을 목표로 민사, 형사 모두 샤리아를 적용하였다.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1991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추방당한 석유 재벌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1957~2011)은 수단으로 건너와 5년 동안 거주했다. 빈 라덴은 이후 아프가니스탄으로 넘어가 반미, 반이스라엘 이슬람 근본주의 국제 테러 조직 알카에다(al-Qaeda)를 창시했다. 


오마르 알-바시르(Omar Hassan Ahmed al-Bashir)

 

혁명위원회는 1993년 10월 특별회의에서 자진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알-바시르 혁명위원장 겸 수상을 대통령에 임명하였다. 쿠테타 배후세력인 이슬람민족전선(NIF)은 정재계, 사법부, 군부, 언론계, 학계 등 요직을 독점하여 수단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다. NIF는 세력을 확대하여 정통 이슬람 국가 건설에 목표를 두고, 반대파 정치인과 언론인, 지식인 등을 탄압함으로써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 NIF는 장기적으로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조치를 강화했다.


1993년 미국은 수단이 알카에다 등 테러단체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렸다. 테러지원국 명단에 오른 뒤 수단은 외국인 투자 유치, 금융거래 등에서 제약을 받았으며, 외화 부족과 물가 급등 등으로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되었다. 

 

1996년 3월에 실시된 제9대 대선에서 알-바시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99년 1월 알-바시르는 정치결사법을 발효시켜 1989년 쿠데타 이후 금지되었던 정당활동을 허용하는 등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취하는 듯 했지만, 그해 12월 하산 알-투라비(Hassan Al-Turabi, 1932~) 국회의장과의 권력투쟁에서 불리해진 알-바시르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1998년 8월 20일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화학무기 공장이라는 이유로 하르툼 소재 엘-쉬파(El-Shifa) 제약공장을 미사일로 파괴했다. 이로 인해 약품 생산이 중단되었고, 백신을 투여받지 못한 수천 명의 수단 어린이들이 말라리아와 결핵 등으로 사망하는 사태기 벌어졌다. 이 사건을 두고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곤란해진 클린턴 행정부가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저지른 짓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이 사건을 토대로 '웩 더 독(Wag the Dog'이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자 미국은 수단에 의약품을 지원했다. 한국판 '웩 더 독' 사건이 바로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전두환이 북한의 수공 가능성으로 공포를 조장한 뒤 국민들로부터 막대한 강제 성금을 거둬들여 만든 평화의 댐이다. 


하산 알-투라비(Hassan Al-Turabi)


2000년 5월 집권 국민회의(NC, National Congress) 사무총장인 알-투라비의 권한을 정지시키는 법령이 발효되자, 알-투라비는 그해 6월 지지세력과 함께 신당 국민회의(PNC, Popular National Congress)를 창당했다. 2000년 12월 알-바시르는 비상사태 하에 주요 반정부 세력들이 불참한 가운데 실시된 대선에서 5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재집권에 성공했다. 총선에서는 4년 임기 국회의원 총 360명을 선출했는데, 이 가운데 350석이 집권 국민회의(NC) 소속이었다.  

 

그동안 아랍계와 아프리카계 흑인 혼혈의 이슬람교도가 많은 수단 북부는, 아프리카계 흑인이 대부분인 기독교도와 애니미즘 신봉자가 많은 수단 남부에 대해 중앙정부의 권한을 행사하려고 했다. 이에 수단 남부인들은 수단인민해방운동(SPLM)과 수단인민해방군(SPLA)을 중심으로 1963∼71년까지와 1980년대 중반부터 중앙정부에 대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내전이 발생했다. 설상가상 1980∼90년에 남부지역에 극심한 기근이 발생하여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2001년 6월 수단의 내전 종식과 평화를 위한 리비아와 이집트의 회담, 2002년 1월의 동아프리카정부간개발기구(IGAD) 정상회의와 누바(Nuba) 휴전협정, 2002년 7월 수단 정부와 남수단 반군이 케냐의 마차코스(Machakos)에서 의정서를 체결하는 등 내전이 종식될 기미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2002년 9월 정부군이 남수단 반군의 군사요충지들을 기습점령함으로써 제2차 평화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후 수단 정부와 남수단 반군은 2004년 1월 남북 간 자원 배분에 관한 협정에 서명하고, 2004년 5월 남북 간 권력배분에 관한 협정에 서명하였다. 이어 2005년 1월 9일에는 수단과 남수단 사이에 포괄적 평화협정(Comprehensive Peace Agreement, CPA)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서는 남수단에 반자치권을 보장하고, 남수단 독립에 대한 주민투표를 6년 후에 실시할 것을 명문화했다. 평화협정에 의거 2005년 7월 9일 과도통일정부가 구성되어 남수단은 6년 간의 자치정부를 수립하였다. 남수단 대통령은 수단 제1 부통령을 겸직하게 되어 있었다. 이로써 북부와 남부의 38년에 걸친 내전이 종식되었으나 언제든 다시 재발할 수 있는 요인이 상존했다. 


다르푸르(Darfur) 지도

 

수단과 남수단의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2003년 2월부터 발생한 다르푸르(Darfur) 봉기는 수단의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다르푸르 봉기는 수단 내전 종식을 위한 북부 정부와 남부 반군 간 평화회담에서 다르푸르 지역 문제도 포함시켜 달라는 요구가 묵살되자 아프리카계 원주민 반군인 수단해방군(SLA, Sudan Liberation Army)이 경찰서와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무장투쟁을 시작함으로써 일어났다. 이에 수단 정부는 다르푸르 지역 내 아랍계 민병대로 하여금 봉기를 진압하려고 했다. 수단 정부가 아랍 민병대를 개입시킨 목적은 다르푸르에서 아랍화 정책을 계속 추진하는 동시에 서부 다르푸르 흑인들이 남부 흑인들과 연합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단 정부가 반군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1989년 창설한 군사조직인 아랍계 이슬람 민병대 잔자위드(Janjaweed)는 아프리카계 원주민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였다. 잔자위드의 인종청소로 지금까지 아프리카계 원주민 20여만 명이 사망하고, 300여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수단의 유전개발을 위해 수십억 달러를 투자한 중국은 수단 정부에 차관을 제공하고 무기를 판매하는 등 잔자위드의 인종청소를 방조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다르푸르는 수단의 서쪽 끝에 있는 인구 500만 명의 지역이다. 북부의 사막지대와 남부의 초원지대로 이루어진 다르푸르는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으나 크게 아랍계와 아프리카계로 구분된다. 아랍계 무슬림과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 카톨릭교도들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갈등이 있어 왔다. 1980년대 후반 전세계적인 기후변화로 인해 북부의 사막화가 가속화되고, 현대식 농업기계 도입으로 아프리카계 농민들이 농경지를 확대해 나가면서 아랍계와 갈등이 격화되었다. 게다가 수단 정부는 다르푸르의 주요 지방관직에 아랍계를 임명하는 등 아랍화를 추진해 왔다. 그러면서도 통신, 철도, 도로 등 사회 기반시설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하는 등 다르푸르 지역에 대한 소외정책이 지속되자 아프리카계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다르푸르 봉기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1989년 현 정권의 군부 쿠테타에 동참해 권력을 분점하다가 1999년에 실각한 알-투라비의 주요 지지기반인 움마당(Umma Party)을 견제하려는 이슬람 세력 간의 권력투쟁이 다르푸르에서 극단적 형태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알-투라비가 다르푸르 주요 반군 중 하나인 정의평등운동(JEM, Justice and Equality Movement)의 실질적 배후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금세기 최악의 인종학살로 기록된 다르푸르 봉기는 2006년 5월 수단 정부와 최대 반군조직인 수단해방운동(Sudan Liberation Movement, SLM)이 나이지리아의 수도 아부자에서 아프리카연합(AU)과 유엔이 주선한 평화협정(DPA)에 서명함으로써 일단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종족 간의 갈등이 워낙 뿌리깊고, 또 수단해방운동(SLM)의 한 계파인 압델 와히드 누르(Abdel Wahid Mohamed al Nur) 그룹과 SLM의 경쟁단체인 정의평등운동(JEM) 등 일부 반군조직이 평화협정에 반대하고 있어 평화정착이 쉽지 않았다.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은 정전 합의와 함께 아랍계 잔자위드 민병대의 무장 해제, 수천 명에 이르는 반군단체의 정부군 통합, 다르푸르 주민과 난민 보호를 위한 특별군 편성, 반군의 다르푸르 3개 주의회 과반 의석 점유 등이었다.

 

수단은 남부와 북부 간의 내전, 다르푸르 지역의 인종청소 등으로 200만 명이 사망하고 4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2007년 5월 미국은 31개 수단 국영 또는 국가 통제회사, 다르푸르 사태 관련 인사에 대한 금융제재를 골자로 한 추가제재를 발표했다. 2007년 7월 31일 유엔 안보리 결의 1769호에 따라 다르푸르에 유엔 다국적군이 배치되었다.


남다르푸르 그라이다(Graida) 소재 유엔 아프리카임무단(UNAMID)

 

알-바시르 정권은 쿠테타로 집권한 후 계속적인 사회통제와 경제난 등으로 국민들로부터 인기는 없으나 남부 반군의 약화, 반정부 세력의 분열 등으로 비교적 안정된 정권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과격 이슬람화 정책과 내전으로 인한 난민 발생, 인권문제 등으로 서방으로부터 원조가 중단되면서 수단의 대외적 고립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난제들을 타개하기 위해 수단 정부는 국내적으로 국민과의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고, 남부 반군과의 협상에 노력을 기울였다.  


2008년 5월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의 전세기가 추락하면서 남수단 지도자 다수가 사망했다. 같은 달 다르푸르 반군 정의평등운동(JEM)은 수도 인근 옴두르만까지 진격해서 정부군과 교전을 벌였다. 2009년 3월 국제형사재판소(ICC)는 다르푸르 지역 내 반인도주의 범죄 및 전쟁범죄 혐의로 알-바시르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그럼에도 알-바시르는 2010년 4월 실시된 대선에서 대통령에 또다시 당선되었다. 


2011년 1월 남수단의 분리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 투표에서 98.83%가 수단으로부터 남수단의 분리독립에 찬성했다. 그해 7월 9일 남수단은 독립국가임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수단과 영토분쟁으로 갈등이 컸던 이집트는 남수단의 독립을 가장 먼저 승인했다. 2011년 8월 미국은 수단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했다. 


헤글리그(Heglig) 유전지대


2012년 4월 남수단군은 헤글리그(Heglig) 유전지대를 점령했다. 이후 수단군은 다시 헤글리그를 탈환했다. 5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수단-남수단 사태 해결을 위한 2046호 결의안을 채택했다. 같은 달 아프리카연합(AU) 중재에 따른 남북 수단 간 협상을 재개했다. 7월에는 AU 정상회의를 계기로 남북 수단 간 정상회담이 열렸다. 8월에는 원유 이득의 분배에 관한 협상을 타결지었고, 9월에는 남북 수단 정상회담을 종료하고 합의문에 서명했다. 같은 달 반서방 시위가 발생하여 독일과 영국 대사관이 습격당했다. 


2013년 9월 유가 인상에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수단 정부의 유혈진압으로 200여 명이 사망했다. 2014년 8월 수단 정부는 차기 대선 및 총선 일정을 발표했다. 12월 수단 정부는 유엔개발계획(UNDP) 지역 조정관 및 수단 사무소장을 추방했다. 


2015년 4월 총선 및 대선에서 알-바시르는 대통령에 재선되어 집권 연장에 성공했다. 6월 대통령에 취임한 알-바시르는 10월부터 국민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국민과의 대화는 이듬해 10월 종료되었다. 


2017년부터 수단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1월 미국은 대수단 경제 제재를 조건부로 해제했다. 2월 간도르(Ghandour) 수단 외교장관은 유엔 다르푸르 문제 관련 전문가 패널 방문단을 접견했다. 5월에는 국민과의 대화 결과에 따른 신정부가 출범했다. 같은 달 알-바시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빈 살만 왕세자로부터 돈을 받고 5천 명의 병력을 예멘에 파견했다. 예멘 파병 수단군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 에미리트(UAE)군과 함께 이란이 지원하는 후티 반군과 전투를 벌였다. 10월 미국은 수단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지는 않은 채 대수단 독자 제재를 해제하고, 무역 및 투자와 금융거래를 허용했다. 


2018년 1월 8일 수단에서 식료품값이 폭등하면서 시위가 발생하여 고등학생 1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 9월 9일 알-바시르는 내각을 해산하고, 총리를 1년 9개월만에 교체했다. 하지만 빵 가격 인상에 반발한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12월 20일에는 시위 참가자 8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시위가 격화되면서 사망자도 37명으로 늘어나자 시위대는 알-바시르의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2019년 1월 2일 수단 야당을 포함한 22개 정당은 알-바시르의 퇴진과 정권 교체를 촉구했다. 하지만 알-바시르가 퇴진 요구를 거부하자 반정부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2월 22일 알-바시르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는 한편 의회를 해산하고 1년 간 비상사태를 선포하겠다고 발표했다. 수단 의회는 국가비상사태를 승인했고, 기간은 6개월로 단축시켰다. 


2019년 4월 6일 알-바시르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은 군부에 시위대의 편에 서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경찰의 무자비한 시위 진압으로 시위대 7명이 사망했다. 이에 미국과 영국, 노르웨이는 알-바시르 정권에게 권력이양을 하라고 압박했다. 4월 9일 수단 경찰 지휘부는 경찰관들에게 군 사령부 앞 반정부 시위에 개입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경찰이 시위대의 편에 가담하면서 알-바시르 독재정권은 궁지에 몰렸다.


15. 독재자 오마르 알-바시르 축출 이후 


2019년 4월 11일 알-바시르는 군부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축출되고 2년 간의 군사과도위원회가 수립되었다. 과도군사위원회 의장에 취임한 아와드 이븐 아우프(Awad Ibn Ouf, 1956~ )는 군정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는 하루만에 과도군사위원회 의장을 사임하고 후임에 아흐메드 아와드 이븐 아우프(Awad Mohamed Ahmed Ibn Auf, 1956~ ) 전 국방장관을 지명했다. 즉각적인 민정 이양을 요구하는 민주화 요구 시위대와 군부의 파벌 간 알력 다툼의 결과였다. 군부는 정치범들을 석벙하고 2년 뒤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했다.  

압델 파타 알-부르한(Abdel Fattah al-Burhan)


야권연대 '자유와 변화의 힘을 위한 선언'(DFCF)은 군부가 권력이양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2019년 5월 2일 대규모 민주화 요구 행진을 예고했다. 5월 13일 민정이양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향한 총격으로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DFCF와 군사과도위원회는 5월 19일부터 정치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정치협상의 난항이 계속되자 시위대는 총파업을 예고했다. 과도군사위원회는 알자지라 수단 지국을 폐쇄했다. 6월 3일에는 시위대를 겨눈 총격으로 최소 13명이 사망했다.


수단 군부는 7개월 이내에 총선이 실시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즉각적인 민정이양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군부의 충돌로 60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다수가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에티오피아의 아비 아흐메드(Abiy Ahmed, 1976~ ) 총리는 수단을 방문해서 군부와 야권의 협상을 중재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수단 문제를 다룰 비공개회의를 소집했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중국은 수단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으며, 수단에서 수입하는 석유는 전체 수입량의 5%에 달했다. 러시아는 수단에 상당한 양의 무기를 판매하고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자국의 이권을 위해 수단의 변화를 바라지 않았다. 


2019년 6월 9일부터 수단 야권은 군부에 대해 불복종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수단 군부는 오히려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야권 주요 인사 3명을 남수단으로 추방했다. 수단 야권연대는 에티오피아의 중재안을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6월 30일 수도 하르툼을 비롯한 수단의 주요 도시에서 민정이양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2019년 7월 11일 수단 군사과도위원회는 군사쿠데타 기도를 적발하고 이를 진압했다고 주장했다. 계속되는 민주화 요구 시위 과정에서 고등학생 4명이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수단 군부는 고등학생에게 충격을 가한 군인 2명을 체포했다. 


2019년 8월 3일 수단 군부와 야권연대 DFCF는 수도 하르툼에서 향후 3년 간 양측이 권력을 분점하는 내용을 구체화한 과도정부 구성과 제헌선언 최종 합의문에 서명했다. 9월 20일 수단 군부와 야권연대는 문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과도통치기구 주권위원회를 구성했다. 주권위원회는 선거 전까지 3년 3개월 동안 수단을 통치하기로 되어 있었다. 주권위원회는 민간인 6명, 군부 5명 등 11명으로 구성됐다. 양측은 수단 과도군사위원회(TMC) 위원장을 지낸 압델 파타 알-부르한(Abdel Fattah al-Burhan, 1960~ ) 먼저 21개월 동안 주권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야권이 지명하는 민간인이 나머지 18개월 동안 주권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로 했다. 


과도정부의 총리에는 유엔에서 활동한 경제학자 압달라 함독(Abdalla Hamdok, 1956~ )이 취임했다. 함독 총리는 전체 국가 예산의 70∼80%에 달하는 국방 예산을 20% 이하로 줄이고, 나머지를 경제 발전에 할당하겠다는 구상을 공개했다. 과도정부는 또 알-바시르의 소속 정당을 해산시키고 여성차별법도 폐지한다고 밝혔다. 


압달라 함독(Abdalla Hamdok)


2019년 12월 14일 수단 법원은 수단을 30년 간 철권통치하다 국민적 시위와 군부에 축출당한 독재자 알-바시르에 대해 돈세탁과 부패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2년형을 선고했다. 알바시르 정권을 끌어내린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수단직업협회(SPA)는 법원의 판결에 대해 도의적, 정치적인 유죄 판결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수단 경찰은 알-바시르의 집에서 현금 780만 달러(약 95억 원)를 발견했다. 알-바시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에게 9천만 달러(약 1천57억 원)를 받았지만 그가 이 사실이 공개되는 걸 원치 않아 중앙은행에 예치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보관했다고 진술했다. 법원은 780만 달러를 압수해 국고로 귀속하라고 명령했다. 알-바시르가 거액의 뇌물을 받고 예멘에 파병한 수단군은 사우디의 용병이었다. 


알-바시르 2018년 12월 시작한 반정부 시위에서 시민에게 발포하라고 명령한 혐의로도 재판을 받고 있다. 과도정부를 이끄는 수단 군부가 알-바시르의 혐의를 어느 정도까지 밝혀내 기소할지는 불분명했다. 수단 검찰은 1989년 알-바시르가 일으킨 쿠데타의 경위를 조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알-바시르의 신병을 인도하라고 수단에 요구했으나 과도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ICC는 2003년 수단 서부 다르푸르에서 발생한 내전에서 인종학살을 지시하고, 전쟁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2009년과 2010년 알-바시르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12월 30일 수단 법원은 시위 참가자 살해 혐의로 27명에 대해 사형 선고를 내렸다. 


2020년 1월 중순 퇴직금에 불만을 품은 수단 정보사 요원들이 무장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저명한 경제학자 출신인 함독 총리가 이끄는 과도정부는 피폐한 수단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군경 구조조정 등을 통해 막대한 군비 지출 삭감을 추진하고 있으나, 조직적인 저항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 3월 9일 수도 하르툼에서 차량 폭탄을 이용한 함독 총리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하였다. 함독 총리는 자신에 대한 암살 기도가 수단의 변화를 향한 여정을 멈추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함독 총리는 2000년대 수단에서 벌어진 다르푸르 인종학살 및 전쟁범죄 관련자들을 기소하는 데 과도정부가 국제형사재판소(ICC)와 협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지만 사실상 수단을 통치하고 있는 군부 장성들은 권력을 문민정부에 이양하려는 의지를 별로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수단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수단 군부 장성들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수단 민주화 여정이 험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20. 4. 11.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