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어머니와 이별 연습을 하다 2

林 山 2012. 11. 20. 11:14

오늘도 7시 퇴근 후 늘 하던대로 현대요양병원으로 향했다. 부강아파트상가 2층에 있는 사무실을 나와 예성로를 따라 체육관사거리를 지나 탄금횟집-충청알뜰매장-타이거 자동차정비소-남포동횟집에서 보행자 신호등도 없는 연원7길을 건넌다. 중국음식점 자금성-주연테크-충주화제신문-크리스탈 볼링센터-수정목욕탕을 차례로 지나 우림아파트상가 CU마트에서 번영대로를 건넌다. 연원로를 따라 옛날순대국밥집-삼삼구이를 지나 연수2길로 들어서면 노래방과 편의주점 골목이 나타난다. 제통의원에서 연수3길로 우회전하면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이 현대요양병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면 왼쪽 복도 끝에 간호사들의 당직 프론트가 있고, 오른쪽으로 돌면 약간 넓은 로비가 나타난다. 벽쪽으로 벤치가 놓여 있고 한쪽 벽에는 평면 텔레비젼이 걸려 있다. 로비를 중심으로 방사상 형태로 5개의 병실이 있다. TV 연속극을 보러 나온 노인들에게 인사를 하자 반갑게 맞아 준다. 거의 매일 다니다 보니 이젠 낯이 익었다. 

 

어머니의 병실은 504호. 바깥쪽 벽쪽으로 다섯 개의 병상이 세로로 놓여 있고, 안쪽으로는 두 개의 병상이 가로로 배치되어 있다. 안쪽 첫 번째 병상의 할머니는 치매가 있어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바리케이트로 막아 놓았다. 그래도 내 인사만큼은 잘 받아주신다. 안쪽 끝 병상은 신앙심이 독실한 개신교 신자 할머니가 차지하고 있다.

 

벽쪽 첫 번째 병상에는 귀가 어두워 소리를 질러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할머니가 계신다. 웃는 무습이 귀여운 할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효자라고 칭찬을 하신다. 두 번째 병상은 비어 있는 지 꽤 오래 됐고..... 세 번째 병상에는 간경화로 복수가 팽팽하게 차오른 할머니가 있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떠오른다.

 

네 번째 병상의 주인은 아담한 키에 옷매무새가 항상 정갈한 할머니다. 그 다음이 벽쪽 맨끝 구석자리 어머니의 병상이다. 어머니는 오늘도 여전히 노란색 액체가 담긴 포도당 수액 주사바늘을 왼손에 꽂은 채 잠이 드신 모습이다.

 

"어머니 저 왔어요."

 

그제서야 실눈을 뜨신다. 

 

"아버지 왔다 가셨어요?"

 

고개만 끄덕이신다.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입원하자 아버지는 고향 산척집에서 홀로 생활하고 계신다. 충주에 삼형제가 살고 있지만 다들 맞벌이라 아버지를 모실 형편이 못된다. 그래서 내가 우리집에 와 계시라고 몇 번을 청해도 아버지는 싫으시단다. 정든 고향을 떠나 좁은 아파트에서 생활하시려니 상상만 해도 답답하신가 보다. 

 

"또 누구 왔다 갔어요?"

 

어머니 대신 옆 할머니가,

 

"세째 아들 부부가 다녀갔어요."

 

하신다. 옆 할머니에게 간경화 할머니 안부를 물으니 2층으로 옮겨 갔단다. 회복되면 다시 올라올 거라던데 하면서 말끝을 흐리신다. 어머니에게,

 

"오늘 침 치료 받으셨어요?"

"식사는 잘 하셨어요?" 

 

하니 또 고개만 끄덕이신다. 그런데 옆 할머니가,

 

"침 치료는 받은 것 같은데..... 식사는 병원에서 나온 죽을 안 먹겠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아침에 사가지고 온 호박죽을 먹었어요. "

 

하신다. 어머니는 종종 병원에서 나오는 죽이 '맛대가리'가 하나도 없어서 못 먹겠다는 말을 하시곤 했다. 터미널 앞에서 파는 호박죽은 맛이 괜찮아서 먹을 만하단다. 그래서 요즘은 아버지가 시골에서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서 내릴 때 호박죽을 사오시곤 한다.  

 

"한약도 잘 드셨어요?" 

 

어머니는 고개만 끄덕이신다. 그러자 옆 할머니가,

 

"한약 먹는 것은 보지 못했는데....."

 

하신다. 냉장고를 확인해보니 한약이 다 떨어졌다. 한약을 다시 달여야겠다.

 

"한약을 안 드셨으면 안 드셨다고 해야지 왜 드셨다고 하세요?"

"....."

 

어머니는 반쯤 떴던 눈을 다시 감으신다. 옆 할머니가 오늘도 어머니는 하루종일 잠만 잤다고 하던데..... 어머니는 만사가 다 귀찮은 것일까? 아니면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린 것일까?

 

마비된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는데 살이 빠질 대로 빠져 보기에도 애처로울 지경이다. 팔다리의 관절이란 관절도 모두 뻣뻣하게 굳은 상태다. 어머니 자신도 이젠 다시 건강한 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삶에 대한 의지가 중요한데 어머니는 그 끈을 놓아 버리신 듯 하다. 

 

어머니의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나는 한의원 문을 닫고 고향 시골집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상 한의원 문을 닫으려고 하자 걸리는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문을 닫으면 당장 직원 세 사람의 생계부터 문제가 될 것이다. 직원 중 두 명은 세째 동생 부부다. 그건 그렇다치고 한달에 약 150만원 정도 들어가는 병원비는 어떻게 할 것이며, 또 아버지의 생활비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그동안 모아 놓은 돈으로 얼마동안 버틸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어머니가 앞으로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실 것인가? 어머니가 살아 계신 동안 여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드리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은 결국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다. 또 어머니의 병 수발을 들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온 부모 반 자식'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쏟은 정성에 비하면 나의 어머니에 대한 효도는 그 반에 반에 반에 반에도 미치지 못하리.

 

잠든 어머니를 향해서,

 

'내일 또 올게요."

 

하자 어머니는 실눈을 뜨신 채 고개만 끄덕이신다. 옆 할머니들에게도 편안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병실을 나선다.

 

돌아오면서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떠올려 본다. 79년 전 당시 일제시대..... 어머니는 동량면 대전리 내동에서 땅부자 충주 최씨의 맏딸로 태어났다. 남의 땅을 안 밟고 다닐 만큼 부자였던 충주 최씨네 장남이셨던 외할아버지는 인물이 훤하게 잘 난 미남이셨고, 외할머니도 시집 오실 때 하인을 데려올 만큼 대가집이셨다. 어머니는 내가 외할아버지를 빼닮았다고 하셨다. 특히 코가 외탁을 했다는 것이다.

 

인물값을 했던 것일까? 외할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만나 살림을 차리고 외할머니를 내쫓았다. 외할아버지는 도시락만한 아편을 만들어 가지고 같은 동네 친구와 함께 만주로 떠나셨다. 아편을 팔아서 일확천금을 노릴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독립운동 단체에 자금을 대기 위해서였지는 모른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외할아버지는 강직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 단체에 자금을 대기 위해 아편을 숨겨 만주로 떠나셨다고 믿고 싶다.  

 

얼마 뒤 외할아버지와 함께 떠났던 친구는 혼자서 돌아왔다. 그 친구는 외할아버지가 자신을 먼저 돌아가라고 하고는 대륙 더 먼 곳으로 떠났다고 말을 전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해방이 된 이후에도 영영 돌아오지 돌아오지 않았다. 외할아버지의 친구는 어디서 돈이 났는지 땅을 여러 마지기 샀다. 외가에서는 외할아버지의 친구에게 혐의를 두었지만 증거는 없었다.

 

내 어린 시절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생사를 알기 위해 무당을 찾아 점을 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무당들은 외할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것인지 죽었다는 것인지 모를 애매한 점괘를 내놓곤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외할아버지는 만주에서 아편과 관련해서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무남독녀 어머니만 남겨 두고 쫓겨난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다시 찾아올 가망이 없자 당시 가흥에 살던 홀아비에게 재가를 하셨다. 외할머니는 새 남편과 금슬이 좋으셨는지 여러 남매를 두셨다.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를 따라 가흥에 가서 외할머니와 외삼촌, 이모들를 딱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다. 그 후 무슨 까닭인지 어머니는 다시는 외할머니를 찾지 않으셨다. 내가 외할머니에게 가고 싶다고 조를 때마다 어머니는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당시 어머니가 왜 그러셨는지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외증조모의 손에서 자란 어머니는 혼기가 차자 천등산 기슭 산척면 월현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찢어지게 가난한 총각이었던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셨다. 아버지는 독자였고 여동생 한 분이 있었다. 한학을 사서삼경까지 공부한 아버지는 농사도 서툴렀을 뿐만 아니라 돈벌이에도 문외한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생존해 있었다면 결코 아버지에게 당신 딸을 시집보내지 않았으리라.   

 

어머니는 남편 대신 팔을 걷어부치고 악착같이 일을 해서 가정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이후 3년 터울로 남동생 넷, 여동생 하나를 더 낳으셨다. 까막눈 시어머니 모시랴 무능한 남편 뒷바라지 하랴 어린 5남 1녀 6남매 키우랴..... 어머니는 눈코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장리쌀을 다 갚고도 밭 천 평, 논 일곱 마지기를 마련한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힘이었다. 마침내 어머니는 암소 한 마리까지 장만하셨다. 6,70년대 농촌에서는 소는 큰 재산이었다. 소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부자냐 아니냐의 기준이 될 정도로.....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살림은 점차 나아졌지만 어머니의 청춘은 속절없이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어머니에게 는 것은 주름이요, 생긴 것은 병 뿐이었다. 유난히 잔병치레가 많았던 어머니는 늘 약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다가 10여년 전 가을, 그동안 내가 걸어왔던 교직의 길을 버리고 다시 들어간 세명대 한의대에 다니고 있을 때다. 주말에 김장을 담근다고 시골집에 들렀더니..... 김장을 담그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오른쪽 손발이 저리다면서 쓰러지셨다. 순간 나는 어머니에게 중풍이 발병했음을 직감하고 십선혈을 방혈하는 응급처치를 한 뒤 신속하게 세명대 한의대 부속 충주한방병원에 입원시켰다. 

 

명색이 한의학을 공부한다는 내가 어머니를 저 지경에 이르도록 무관심하게 방치했다는 죄책감에 나는 몹시 괴로왔다. 우반신이 마비된 어머니는 혼자서는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한방병원에서 두 달을 치료한 뒤 다행히도 어머니의 반신마비가 어느 정도 회복되어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오른쪽 팔다리는 전과 같이 힘을 쓰지 못했고, 후유증으로 나타난 저린 증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후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 한의원에서 1주일에 두세 번 침구치료를 받으셨다. 한약도 꾸준히 썼다. 한약을 한 100제 썼을까..... 어머니는 비로소 일상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로 거의 완전히 회복되셨다. 아직도 오른쪽 팔다리는 저렸지만......

 

중풍에서 회복되자마자 어머니는 일당을 받고 품을 팔러 다니기 시작했다. 하루 일당은 점심을 먹여 주고 4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중풍 재발을 염려한 나는 일당을 드릴 테니 제발 품팔이는 그만두시라고 말려도 어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처음에 나는 부모님 생활비로 매달 70만원씩 드리는 것이 부족해서 그런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한여름 땡볕에 나가 품팔이로 번 돈을 틈틈이 둘째와 막내 동생에게 보내 주고 있었다. 둘째 동생은 출판기업에 몸담고 있다가 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10년 이상을 실업자 신세로 지내고 있고, 막내 동생은 사회봉사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느라 생계가 다소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노년의 쇠약한 어머니가 피땀 흘려 일해서 번 돈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그 돈은 바로 어머니의 피와 땀 그 자체가 아니던가? 나 같으면 차라리 목을 매고 죽으면 죽었지 그 돈을 받지 않을 것이다.

 

둘째는 서울 도독동인가 어딘가에 집값이 10억이 넘는 꽤 평수가 넓은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궁색하게 살지 말고 그 집을 팔아서 작은 아파트로 옮기라고 해도 동생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 돈이 필요하면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나도 두어 번 돈을 보내준 적이 있다.

 

그러나..... 세 번째부터는 동생이 도와달라는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게 도와주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신약 어딘가에 나오듯이 고기를 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 후에도 잊을 만하면 돈을 부탁하는 전화가 왔지만 나는 굳게 마음먹고 도와주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에게도 둘째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게 자식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식을 버리는 길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어머니는 듣지 않았다. 어머니 눈에는 그저 불쌍한 자식이 눈앞에 보일 뿐이었다.  

 

막내는 십수 년 전부터 작은사랑실천운동연합(작사련)이라는 사회봉사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나도 여기에 매월 10만원씩 후원하고 있다. 작사련은 지역아동센터, 시민오케스트라단, 시민국악단 등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는 외에도 의료생협을 결성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회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공감과 호응을 얻어 후원금이 많이 들어와야 한다. 후원금이 부족하면 정부나 자치단체의 지원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작사련의 후원금은 미미한 수준이고 지원금도 부족하다. 이러니 집에 생활비도 제대로 가져다 주지 못 할 수 밖에..... 결국 막내 제수씨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어느 약국에 다니고 있다. 내가 보기에 막내는 사회사업을 하기에 아직 시기상조다.  

 

어머니는 특히 막내가 눈에 밟히는 것 같았다. 언제 들으니 성치 않으신 몸으로 번 돈 2천만 원을 막내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사시는 고향집까지 막내에게 주었는데..... 2천만 원을 벌기 위해 어머니는 얼마나 애를 쓰셨을까?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당신 몸으로 직접 돈을 벌어 자식에게 주는 바로 그 자체가 어머니의 기쁨이요 행복이 아니었던가 싶다. 자식을 위해 어머니는 몸이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한여름 땡볕에서 땀을 흘리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올해 마침내 어머니는 뇌경색으로 쓰러지시고 말았다. 과도한 노동으로 누적된 피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어머니의 몸이 스스로 파업을 선언한 것이다. 어머니 육신의 유효기간은 이제 거의 다 끝나가려 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 편도선 열차를 타고 있는 것과 같다. 어머니는 지금 당신 자신의 종착역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계신 듯하다.  

 

2012.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