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어머니와 이별 연습을 하다 4

林 山 2012. 11. 23. 11:02

2012년 11월 16일 금요일..... 겨울을 재촉하는 가랑비가 하루종일 내렸다. 퇴근하려고 어두워진 창밖을 내다보니 비가 좀 그은 것 같다. 그러나 건물 밖으로 나서자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우산을 쓰기에도 좀 뭣할 만큼 비가 내린다. 가랑비를 맞으며 어머니에게로 향한다.

 

요양병원에 도착했을 때 옷이 꽤나 젖어 있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현관에서 옷을 대충 한 번 털고 병실로 올라갔다. 

 

어제까지 보이던 포도당 링거가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면서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몇 시에 태어났어요?"

"점심 먹고..... 두 시에서 세 시 사이다." 

"태몽은 어떤 꿈을 꾸셨어요?"

"천등산에 무지개가 뜨더니 커다란 용이 승천하는 꿈이었다."

 

천등산은 내가 태어난 충주시 산척면 월현 마을을 품고 있는 산으로 충주의 진산이기도 하다. 꿈에서 용은 일반적으로 신령스럽고 위엄이 있는 존재로 풀이된다. 왕의 얼굴을 용안, 왕이 앉는 자리를 용상, 왕이 입는 옷을 용포라고 하듯이 용은 제왕을 상징한다. 어머니는 용꿈을 꾸셨는데..... 나는 그런 인물이 되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이다.

 

"어렸을 때 저는 어떤 아이였어요?"

"너는 총명해서 뭐든지 잘 하는 아이였다."

 

어머니는 나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생생하게 기억하셨다. 중풍 후유증으로 발음기관에 문제가 생겨 비록 말은 몇 번을 반복해야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엊그제 못다한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갔다.

 

"외할머니는 슬하에 몇 형제를 두셨나요?"

"팔남매..... 아들 다섯에 딸 셋....."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다녀오셨나요?"

"그럼."

"어머니의 동생들은 지금 연락이 되나요?"

 

어머니가 고개를 가로 저으신다. 먼 옛날로 돌아가신 듯 어머니의 눈이 허공에 걸려 있다. 외할머니의 죽음은 내 기억에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어째서일까?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죽음을 내게 알리지 않고 상가에 다녀오신 것일까? 왜 나는 외할머니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머니를 따라 처음 가흥 외할머니댁에 갔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때는 여름..... 가흥 앞에는 남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외삼촌은 나를 데리고 남한강으로 헤엄을 치러 갔다. 그런데 내가 그만 물에 빠졌다.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다가 움푹 파인 강바닥에 빠진 것이다. 나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물 밖으로 나오기 위해 온힘을 다해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허우적거릴수록 몸은 점점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팔다리에 힘도 거의 다 빠지고 물도 수없이 먹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무서운 생각이 든 바로 그 때 외삼촌이 나를 발견하고 수영을 해서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리고는 나를 한 손으로 잡아서 물가로 끌어냈다. 해병대 출신 외삼촌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때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충주댐 생기기 전에 삼탄으로 올뱅이 잡으러 갔던 생각은 나세요?"

 

내 고향 사람들은 다슬기를 올뱅이라고 불렀다. 올뱅이를 잡으로 갔던 기억은 어머니의 기억에 없는 듯 고개를 가로 저으신다.

 

내 어린 시절은 보리고개란 말이 있을 정도로 양식이 귀했다. 쌀밥과 고기는 명절이나 제사 때만 구경할 수 있었다. 하루 세 끼 중 밥은 한 끼나 두 끼 정도 밖에 먹을 수 없었다. 그것도 고구마나 감자를 얹은 밥이었다. 나머지 끼니는 어머니가 취로사업에 나가서 타온 미국 원조 밀가루로 만든 칼국수나 개떡, 수제비로 때워야만 했다. 어떤 때는 찐 감자나 고구마로 끼니를 때울 때도 있었다. 고구마에 어찌나 물렸던지..... 나는 지금도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기도 귀했다. 소고기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명절과 제사날을 목을 빼고 기다린 것은 바로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해 가을이던가? 돼지고기 가격이 폭락했다. 어디서 돈이 났는지 아버지는 돼지 뒷다리 하나를 사오셨다. 아버지는 돼지 뒷다리를 부엌 기둥에 걸어 놓았는데..... 나는 그것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나는 늘 영양실조에 시달려야 했다. 영양실조가 오래 되면 머리에 여기저기 원형탈모가 생기곤 했다. 어머니도 내 원형탈모의 원인이 영양실조라는 것을 아셨다. 그렇다고 자식들에게 고기를 사먹일 돈은 없고.... 궁여지책으로 어머니가 생각해 낸 것이 올뱅이였다. 

 

어느 해 여름 어머니는 한 말 들이 고무다라를 들고 올뱅이를 잡으러 가자시면서 나와 둘째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월현에서 달랑고개를 넘어 둔대를 지나면 천등산과 인등산 사이에 있는 느릅재를 넘던가 충북선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느릅재를 넘는 길은 더 멀고 힘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터널로 지나다녔다.

 

컴컴한 터널 속을 걸어갈 때면 나는 늘 기차를 만날까봐 두렵고 무서웠다. 그래서 터널을 빠져나가는 내내 나는 기차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천지신명님께 빌곤 했다. 재수없게도 터널 한가운데서 기차를 만날 때가 있었다. 굉음을 울리면서 달려오는 기차가 일으키는 바람의 소용돌이는 나를 순식간에 낚아채 가버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귀청을 찢는 듯한 기적소리는 터널 안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은 채 나는 어머니의 치마폭에 매달렸다. 나보다 더 어린 동생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터널을 다 빠져나오면 마치 지옥 속에서 살아나온 기분이었다. 터널에서 나와 서대와 도덕 마을 지나 한참 더 내려가면 드디어 강이 보였다. 강을 건너 좀더 내려간 곳에 올뱅이가 많았다. 이곳에 이르면 강가에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여름에는 수영을 하면서 더위도 식히고 올뱅이도 잡고 일석이조였다. 강바닥에는 올뱅이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나는 작은 놈들은 놔두고 굵은 놈들만 골라서 잡았다.   

 

올뱅이를 잡는 재미에 한창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고 머리를 들었다. 바로 몇 미터 앞에 머리만 물 위로 내민 채 몸통을 물속으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뱀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혼비백산해서 올뱅이고 뭐고 다 던져 버리고 걸음아 날 살려라 강가로 도망쳐 나왔다. 마음은 급하지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지...... 가까스로 강가에 나와서 정신을 차린 뒤에도 다리는 여전히 후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놀라셨던가 보다. 어머니는 내게 다가와 나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주셨다. 올뱅이 잡이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올뱅이를 잡으러 다시 물속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 동생 셋이서 잡은 올뱅이는 어느덧 고무다라에 한가득 찼다. 고무다라를 머리에 인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앞세운 채 왔던 길을 되밟아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맑은 물에 며칠 담가서 해금을 말끔히 없앤 올뱅이를 다시 대바구니에 담아 박박 문질러 물때를 제거하셨다. 그런 다음 물에서 건져 놓으면 몸통이 껍데기 밖으로 길게 빠져나왔다. 어머니는 올뱅이를 그대로 가마솥에 된장과 소금을 풀어서 펄펄 끓고 있는 물에  쏟아 부으셨다. 그렇게 하면 올뱅이가 까 먹기 좋은 상태로 익는 것이었다. 그날로부터 올뱅이는 며칠동안 우리들의 훌륭한 간식거리가 되었다. 어머니가 아욱을 넣어 끓여주신 올뱅이국은 참 구수하고도 맛있었다.

 

충주댐이 생긴 이후 삼탄에서 올뱅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나의 추억만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