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몽고는 왜 고려를 침략했을까?

林 山 2013. 12. 3. 16:56

몽고는 왜 고려를 침략했을까?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당시 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3차에 걸친 려요전쟁(麗遼戰爭)에서의 패전 후유증으로 요(遼)나라는 랴우둥(遼東)에서의 패권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고려가 있는 한 송(宋)나라를 침략할 수 없게 되었다. 요군(遼軍)에 의해 서북지역에서 큰 피해를 입은 고려도 개국 이래의 국시(國是)였던 북진정책을 계속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고려 제15대 왕인 숙종(肅宗) 때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哈爾濱)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完顔部, 완안부) 추장 잉게(盈歌, 영가)는 여진족(女眞族)을 통합하고 북간도(北間島)를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하였다. 1104년(숙종 9) 잉게의 뒤를 이은 조카 우야슈(烏雅束, 오야속)는 두만강에서 더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한 여진부락들을 공략하였다. 우야수는 완옌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고려 복속 여진인들을 추격해서 정주(定州, 함남 정평)의 장성(長城) 부근까지 진출하여 고려군과 전투를 벌였다.

 

1104년 2월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임간(林幹)이 우야슈를 막지 못하자, 3월 추밀원사(樞密院使) 윤관(尹瓘)을 보냈으나 여진정벌에 실패하고 강화만 맺고 돌아왔다. 두 차례에 걸친 고려의 패전으로 정주 장성 밖의 여진부락은 완옌부의 치하에 들어갔다. 기병(騎兵)과 군량(軍糧)의 부족으로 여진족에 패한 윤관은 숙종에게 건의하여 신기군(神騎軍, 기병)과 신보군(神步軍, 보병), 항마군(降魔軍, 승군)으로 편성된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했다. 별무반은 이후 고려의 정규군 외에 결사대(決死隊), 선봉대(先鋒隊), 별동대(別動隊)의 성격을 띤 특수부대(特殊部隊)인 별초(別抄)의 기원이 되었다. 


1105년(숙종 10) 10월 서경(西京)에 순행하여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묘(東明王廟)에 제사하고 돌아오던 숙종이 수레 안에서 죽자 태자 왕우(王俁)가 제16대 예종(睿宗)으로 즉위하였다.

 

성종 때 중앙집권적 전제왕조 통치체제를 확립한 고려는 문종대를 거치면서 문벌귀족(門閥貴族) 중심의 사회로 자리 잡았다. 문벌귀족들은 왕권을 견제하면서 그들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과거제도(科擧制度)와 전시과(田柴科), 녹봉제(祿俸制) 등을 배타적으로 정비하였다. 이들은 과거와 음서제도(蔭敍制度)를 통해서 관료로 진출하여 가문의 세력을 키웠다. 또 사전(賜田)과 공음전(功蔭田) 등의 특권 위에 토지의 겸병이나 약탈로 사전(私田)을 확대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문벌귀족 가운데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 대표적인 명문세족(名門世族)이 인주(仁州 또는 慶源, 인천) 이씨(李氏)였다. 세 딸을 문종의 후비(后妃)로 들여보낸 이자연(李子淵)은 7명의 왕이 재위하는 80여 년 동안 왕실과 이중삼중의 혼인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 큰 세력을 떨쳤다. 이자겸(李資謙)은 그의 둘째 딸이 예종의 왕후로 들어가 원자(元子) 왕해(王楷, 인종)를 낳으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고려 예종은 숙종의 유지에 따라 여진정벌에 힘썼다. 1107년(예종 2) 예종의 명을 받은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 등은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을 몰아낸 뒤, 이듬해 천리장성(千里長城) 동북지역에 9성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의 계속적인 침입으로 9성의 방어가 어렵게 되자 1년만에 돌려주었다. 

 

1113년(예종 13) 우야슈의 동생으로 완안부(完顔部)의 추장이 된 아구다(阿骨打, 完顏旻)는 스스로 도발극렬(都勃極烈, 황제)이라 칭하고, 동만주(東滿洲)로부터 고려 천리장성 이북의 생여진(生女眞)을 통일했다. 1114년(예종 14) 행정 및 군사제도인 맹안모극제(猛安謀克制)를 정비한 아구다는 1만여 명의 여진군을 이끌고 영강주(寧江州)를 점령하고, 출하점(길림성 전곽기 팔랑향 탑호성)에서 요나라 도통 소규리(蕭糺里)의 10만 대군을 격파했다.


1115년(예종 15) 쑹화강(松花江) 이동의 땅을 장악한 아구다는 금(金)을 건국하고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 黑龍江省 阿城)에 도읍했다. 요나라 천조제(天祚帝) 야율연희(耶律延禧)는 70만 대군을 이끌고 금나라를 공격했으나 호보답강(護步答岡) 전투에서 2만의 금군(金軍)에게 대패하였다. 요나라는 고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고려는 이를 거부하였다. 1117년(예종 17) 금나라 태조 아구다는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는 글로써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나 예종은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회답하지 않았다. 1120년년 송나라는 마정(馬政)을 금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요나라 협공을 위한 일명 '해상의 맹약(海上之盟)을 맺었다. '금은 요나라의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 내몽고 영성 서쪽), 송은 옌징(燕京, 베이징)을 각각 공략한다. 요나라 멸망 후 양국은 만리장성을 국경선으로 한다.'는 등의 '해상의 맹약'에 따라 금나라는 1120년 요나라의 수도인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내몽고 파림좌기 남쪽), 1121년 말에는 중경대정부를 함락시켰다.  

 

평장사(平章事) 이자겸은 김부식(金富軾) 등 신라 경주파(개경파) 문신들과 함께 금나라와의 화친정책을 추진하여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이로 인해 고려의 북진정책은 일시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1122년(예종 22) 4월 예종이 종양으로 죽자 장남 왕해(王楷)가 외조부인 이자겸의 도움을 받아 14살의 나이에 제17대 인종(仁宗)으로 즉위하였다. 이자겸은 윤관의 부하 장수인 척준경(拓俊京)과 손을 잡고 인종의 즉위 초부터 권세를 부리면서 인종을 위협했다. 그는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인종의 이모)을 인종의 후비로 들여보내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까지 되었다. 


1122년 송 휘종의 명을 받은 환관 동관(童貫)은 송군을 이끌고 옌징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금군은 송과의 맹약에 따라 요나라 군대를 파죽지세로 공파하고 옌징을 함락시켰다. 1123년(인종 2) 금 태조 아구다가 병에 걸려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로 돌아가던 중 사망하자 그의 동생 우키마이(吳乞買, 完顔晟)가 태종으로 즉위하였다. 1125년(인종 3) 금나라는 요 천조제(天祚帝) 야율연희(耶律延禧)를 포로로 잡고 마침내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이후 금나라는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하면서 송나라와의 외교관계에도 간섭하기 시작했다. 


송나라는 요나라에 할양했다가 금나라에 점령당한 베이징(北京, 燕)과 다퉁(大同, 雲)을 중심으로 한 만리장성(萬里長城) 남쪽의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탈환하기 위해 거란족 잔병들과 금나라에 대한 공격을 모의했다. 이 사실을 안 금 태종 완안성(完顔晟)은 군대를 출병시켜 송나라를 공격했다. 1126년(인종 4) 금나라는 두 번에 걸쳐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開封)을 공격하여 상황(上皇)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포로로 잡아서 돌아갔다. 이른바 정강(靖康)의 변(變)이다. 금나라는 흠종의 신하 장방창(張邦昌)을 황제로 책립하여 대초국(大楚國)을 세우게 했다. 

 

1126년 3월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이자겸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인종은 김찬(金粲) 등의 신하와 공모하여 이자겸을 제거하려고 기도했다. 이에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에 불을 지르고 인종을 이자겸의 집에 연금했다. 그 후 남궁(南宮)으로 피신한 인종은 최사전(崔思全)을 시켜 회유한 척준경으로 하여금 이자겸을 체포케 하여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듬해에는 척준경도 탄핵으로 숙청되어 암타도(巖墮島, 암태도, 전남 신안)에 유배되었다.   


이자겸의 쿠데타로 문벌귀족 중심의 고려 전제왕조정권의 문제점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자겸의 쿠데타는 이후 계속되는 정변의 시초가 되었고, 고려 조정은 서경 신진세력과 개경 관료세력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문벌귀족 때문에 출세를 할 수 없었던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세력의 이자겸에 대한 불만은 금나라에 대한 불만으로도 나타났다. 인종도 신진세력과 손잡고 문벌귀족들의 숙청을 기도했다. 신진세력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인종에게 고려 부흥이라는 새로운 비젼을 제시했다.  

 

1127년(인종 5) 송 흠종이 금나라의 포로가 되자 흠종의 동생 강왕(康王) 자오거우(趙構, 고종)는 장쑤성(江蘇省) 양쯔강(揚子江) 남안의 건강부(建康府, 난징)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송나라를 재흥시켰다. 1129년(인종 7) 금나라에 쫓긴 송 고종은 수도를 강남(江南)의 린안(臨安, 항주)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카이펑시대를 북송(北宋), 고종(高宗) 이래의 린안시대를 남송(南宋)이라 한다. 1130년 송 흠종과 함께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어사중승(御史中丞) 진회(秦檜)는 가까스로 탈출하여 남송의 고종에게 돌아갔다. 남송 초기에는 악비(岳飛), 한세충(韓世忠) 등의 활약으로 수차례나 금군을 격파하는 등 금나라에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진회(秦檜)가 재상이 되면서 주전론(主戰論)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정권을 잡은 진회는 악비 등 군벌이 장악한 군사지휘권을 조정으로 되돌렸다. 주전론자들을 탄압한 진회에 의해 악비는 살해되고, 한세충은 은거를 하였다. 


요나라가 망한 뒤 요의 왕족인 야율대석(耶律大石)은 몽고로 탈출하였다가 거란족의 잔존세력을 거느리고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였다. 1132년(인종 10) 야율대석은 위구르족(维吾尔族) 등의 지원을 받아 터키계의 카라칸(喀喇汗) 왕조를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 츄 강변의 베라사군에서 천우황제(天祐皇帝, 德宗)를 자칭하고 제위에 올라 서요(西遼, Kara Kitai)를 세웠다. 서요 덕종 야율대석은 서 투르키스탄을 공략한 뒤 사마르칸트 부근에서 셀주크 제후(諸侯)의 대군을 격파하고 동서 투르키스탄 전역을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처럼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 속에서도 고려는 남송, 요, 금과 줄타기 외교를 벌이면서 실속을 취했다. 불가피한 상황으로 요, 금과 국교를 맺고 송과는 단교했던 시기에도 고려와 송의 우호관계는 더욱 긴밀해지고 문화교류도 더 활발해졌다. 두 나라는 함께 동아시아 최고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서경 출신의 신진세력으로 인종의 신임을 얻은 승려 묘청(妙淸)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도참사상(圖讖思想)을 근거로 '개경쇠지 서경길지(開京衰地西京吉地)'론을 주장하면서 서경천도운동(西京遷都運動)을 일으켰다. 이자겸 일파에게 모진 시련을 당하면서 개경이 싫어진 인종도 개경의 문벌귀족들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다. 인종은 옛것을 혁신해서 새것을 세우는 이른바 ‘혁구정신(革舊鼎新)’의 정치를 펴고자 했다. 묘청은 신진세력인 정지상(鄭知常), 백수한(白壽翰) 등과 함께 인종에게 칭제건원(稱帝建元)해야 한다는 자주적 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 금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고 다시 북진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을 건의했다. 

 

1134년(인종 12) 1월 인종은 묘청을 삼중대통지루각원사(三重大統知漏刻院事)에 임명하고, 2월에는 서경의 신궁으로 행차하였다. 그러나 뱃놀이하던 대동강에 폭풍우가 몰아치자 낙심한 인종은 개경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기상이변이 계속되자 김부식 등 개경파들은 인종의 서경행을 결사적으로 저지하였다. 결국 인종도 서경행을 포기하고 개경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1135년(인종 13) 1월 김부식 등의 반대로 서경천도운동이 무산되자 묘청은 서경을 근거지로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을 일으켜 자주적 독립국가를 세우고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였다. 묘청이 타도하고자 했던 목표는 인종의 전제왕조정권이 아니라 보수 개경파 귀족들이었다. 이때 정지상, 백수한, 김안(金安), 최봉심(崔逢深), 음중인(陰中寅), 이순무(李純武), 오원수(吳元帥) 등 묘청과 뜻을 함께 한 개혁 서경파는 개경에 머물고 있었다. 묘청의 천견충의군은 순식간에 자비령(慈悲嶺, 절령) 이북의 서북 일대를 장악하였다. 서북계의 요충지 서경에는 고려 태조 때부터 정치와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중앙 조정과 비슷한 조직이 구성되어 있었기에 묘청은 어렵지 않게 대위국을 세울 수 있었다.


금 태종은 자기 자식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다 여진족 부족장들의 반발로 실패하고, 1135년 금 태조 아구다의 적자 종준(宗峻, 繩果)의 장자인 완안합라(完顔合剌, 完顔亶)가 3대 황제 희종(熙宗, 또는 閔宗)으로 즉위하였다. 


1136년(인종 14) 서경천도를 놓고 우유부단한 태도로 오락가락했던 인종은 김부식을 서경정토대장(西京征討大將)으로 임명하고 묘청의 천견충의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김부식은 '묘청파의 우두머리만을 죽이라'는 왕명을 어기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김안과 정지상, 백수한 등 개경에 있던 묘청파들을 모조리 죽였다. 김부식은 정지상의 문명(文名)을 질투한 나머지 그를 묘청파로 몰아서 죽여 버렸다고 한다. 

 

김부식의 토벌군이 출병하자 묘청의 부하 조광(趙匡)은 묘청과 유참(柳旵), 유참의 아들 유호(柳浩) 등 3인의 목을 베어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조광이 항복하기도 전에 개경파 진압군은 묘청과 서경파 우두머리들의 목을 베어 효시하였다. 개경파 정부군이 강경하게 나오자 조광은 결사항전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군의 총공세에 몰린 조광은 가족들과 함께 분신자결하고, 천견충의군 지휘관들도 목을 매 자살하였다.

 

천견충의군의 봉기 1년여 만에 서경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천견충의군 진압에 1년이나 걸린 것은 개경의 문벌귀족 세력에 반대하는 서경의 농민들이 가세했기 때문이다.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을 내세웠던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고려 조정의 서경세력은 완전히 몰락했고, 불교세력도 쇠퇴하였다. 서경천도운동의 배경에는 고려 조정의 지역차별과 성분차별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는 개경의 보수파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개혁파의 도전이었던 것이다. 개혁 서경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독점한 김부식 등 보수 개경파 문신귀족들의 전횡은 이후 무신(武臣)을 천시하는 풍조로 이어져 무신정변(武臣政變)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申采浩)는 망명지에서 쓴 '조선역사상 1천 년래 제1대 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에서 서경천도운동에 대해 '서경 전투에서 양편 병력이 서로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전투의 기간이 2년도 안되지만, 그 결과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은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보다도 몇 갑절이나 더한 사건이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李朝)에 이르는 1천 년 사이에 이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없을 것이다.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의 군대가 반란의 무리를 친 싸움 정도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적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싸움이며, 독립당(獨立黨) 대 사대당(事大黨)의 싸움이며, 진취사상(進取思想) 대 보수사상(保守思想)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여 조선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묘청이 승리했다면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나아갔을 것이니, 이 사건을 어찌 1천 년래 조선사 제1대 사건이라 하지 않으랴.'라고 평가하였다.


1142년(인종 20) 남송은 금과 굴욕적인 화평조약을 체결했다. 남송은 신하의 예를 갖춰 매년 은 25만 냥, 비단 25만 필의 세폐를 금에 보냈다. 그리고, 여진인 100만 명이 화북(華北) 지방으로 이주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완성한 것을 본 인종이 1146년(인종 24) 음력 2월 38세의 나이로 죽자 태자 왕현(王晛)이 제17대 의종(毅宗)으로 즉위하였다. 의종은 인종 때 이자겸의 전횡과 반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등으로 약화된 고려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의종은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 이의민(李義旼) 등의 무신들을 중용하 친위군(親衛軍)을 강화시켜 나갔다. 


묘청의 항쟁이 실패한 뒤에도 고려 조정에 대한 서경인들의 반감은 여전하였다. 1147년(의종 1) 11월 서경 사람 이숙(李淑), 유혁(柳赫), 숭황(崇晃) 등은 금나라의 제전사(祭奠使)가 돌아갈 때 글을 보내 금군이 서경을 공격하면 안에서 호응할 것을 약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살되었다. 1148년(의종 2) 10월 이심(李深)과 지지용(智之用)은 송나라 사람 장철(張喆)과 모의한 뒤 이심의 이름을 동방흔(東方昕)으로 바꾸고 송나라 태사 진회에게 '만약 당신이 금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목으로 고려에게 길을 빌리고, 우리가 여기서 내응하면 고려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유공식(柳公植)의 집에 보관되어 있던 고려오도양계도(高麗五道兩界圖)를 보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1149년(의종 3) 금의 완안량(完顔亮, 迪古乃)은 쿠데타를 일으켜 사촌형인 희종 완안합라(完顔合剌, 完顔亶)를 살해하고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에 즉위하였다. 중국문화 애호가였던 해릉왕은 황족(皇族)과 여진인 유력자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중국인을 중용하여 여진족의 중국화와 황제권의 강화를 도모했다. 1153(의종 7)년 해릉왕은 수도를 화북의 옌징(燕京)으로 옮기면서 이전 도읍인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를 폐허로 만들었다.  

 

11~12세기의 몽고고원에는 나이만(Naymann, 乃蠻), 케레이트(Kereyid, 克烈), 메르키드(Merkid), 타타르(Tatar), 옹구트(Ongghud), 몽고족(Mongghol) 등 여러 부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몽고족은 여러 씨족으로 나뉘어 요, 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155년(일설에는 1162년) 몽고 대초원에서는 보르지기드(Borjigid) 씨족의 예수게이(Yesugei)와 올크누트 부족 출신의 후엘룬(Өэлүн) 사이에 테무진(Temuchin, 鐵木眞)이 태어났다. 아버지가 타타르 부족에게 독살되자 테무진은 어린 시절부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랐다. 테무진은 당시 강대한 부족이었던 케레이트 부족의 완칸(王汗, 옹칸)에게 의탁하고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갔다. 


일본은 1156년(의종 10) 바상황(鳥羽上皇)이 죽은 뒤 귀족들 사이에 벌어진 권력쟁탈전인 호겡(保元)의 난이 일어나자 무사(武士, ぶ-し, 사무라이)들이 개입하여 평정하면서 고려의 무신정권처럼 일본도 무가정치(武家政治)시대의 막을 열었다. 때는 헤이안시대(平安時代) 말기 덴노(天皇)의 직계존속이 상황(上皇)이 되어 정권을 잡고 인세이(院政)를 행하던 시기였다.


1161년 금 태조의 손자이자 완안보(完顔輔)의 아들인 오록(烏祿, 完顔雍)은 해릉왕이 송나라를 공격한 틈을 타서 랴오양(遼陽)에서 5대 황제 세종(世宗)으로 즉위하였다. 해릉왕은 남송을 공격하던 중 부장(部將)에 손에 살해당했다. 금 세종은 이랄와알(移剌窩斡)의 반란을 진압하고, 송나라와 화의를 성립시켰다. 또, 여진족이 성(姓)을 중국식으로 고치거나 중국인의 의관(衣冠) 풍습을 배우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여러 차례 전답을 거두어 맹안(猛安)을 발급했다. 세종 치세는 금의 황금기였으므로 그를 기려 소요순(小堯舜)이라 일컬었다.

 

고려 의종은 말년에 문신과 환관 측근들을 중용하고 그들과 어울려 유흥과 오락에 빠지는 한편 불교와 음양설(陰陽說)을 지나치게 믿었으며, 선풍(仙風)을 중요시했다. 1162년(의종 16) 3월 간관(諫官)들은 의종에게 별궁(別宮)에 물품을 바치는 별공(別貢)의 폐지를 상소했으나 듣지 않았다. 음양비축설(陰陽秘祝說)에 빠진 의종은 행재소(行在所)에서 수시로 수백 명의 승려들을 불러모아 재초(齋醮)를 베풀었는데, 그 비용이 엄청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나라의 재정이 텅 빌 정도였다. 또 사저(私第)를 취하여 별궁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별공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았았다. 설상가상으로 가뭄과 전염병으로 인해 길에서 굶어 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즐비하였다.

 

1162년(의종 16) 5월 고려 조정과 지방관의 학정을 참다 못한 백성들은 이천(伊川, 강원 이천), 동주(東州, 강원 철원), 선천(宣川, 평북 선천) 등지에서 대규모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1163년(의종 17) 7월에는 남도(南道) 지방의 농민들이 봉기했다. 1168년(의종 22)에는 탐라(耽羅, 제주)에서도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특산품의 진상과 부임 지방관의 급여 지급으로 세금 부담량이 갑자기 증가한데다가 탐관오리가 수령으로 와 수탈을 일삼자 양수(良守)는 불만이 커진 탐라민을 규합해 봉기를 일으켜 수령을 쫓아냈다. 탐라안무사(耽羅安撫使) 조동희(趙冬曦)가 선유(宣諭)하자 탐라민들이 스스로 투항하므로 양수와 그 부하 6인의 목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곡식과 포백(布帛)을 내려서 무마하였다.     

 

한편, 고려 조정의 총신(寵臣)들은 의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무신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하였다. 의종의 문란한 정치와 문신들의 횡포는 고려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의종의 측근이자 김부식의 아들인 내시(內侍) 김돈중(金敦中)이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하던 정중부의 수염에 불을 지르고, 정6품의 젊은 문신인 한뢰(韓賴)가 노령의 무신이자 종3품의 대장군 이소응(李紹應)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문신들의 천대와 멸시에 이를 갈던 이의방, 이고정중부이의민, 채원(蔡元), 석린(石隣) 등 무신들은 1170년(의종 24) 8월 30일 의종이 이궁(離宮)인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했을 때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일으켜 50여 명의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폐위시켰다. 이의방, 이고 등 무신들은 의종을 거제도의 둔덕기성(屯德岐城), 태자를 진도로 귀양보내고, 의종의 동생 익양공(翼陽公) 호(皓)를 제18대 명종(明宗)으로 세움으로써 무신정권 시대를 열었다.  


1171(명종 1)년 1월 이고는 무신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무뢰배와 승려들을 모아 태자의 관례(冠禮)에 참석하여 이의방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했다. 채원까지 제거한 이의방은 고려 중앙군 2군(軍) 6위(衛)의 정, 부지휘관인 상장군(上將軍, 정3품)과 대장군(大將軍, 종3품) 등 총 16명의 합좌기구인 중방(重房)을 최고권력기구로 강화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무신정권의 등장으로 고려는 신분 질서의 해이와 하극상의 풍조 등으로 사회적 동요가 일어났다. 무신들이 권력을 잡은 후 고려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백성들은 고려 조정에 부세(賦稅)를 바쳐야 하는 한편 무신정권에게도 곡식과 특산물을 빼앗겼다. 무신들은 또 농민들에게 고리(高利)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갚지 못하면 강제로 땅을 탈취하기도 했다. 이처럼 고려 민중은 고려 조정과 무신정권으로부터 이중삼중의 수탈을 당했다. 

 

고려 조정과 무신정권의 압제와 수탈, 지방관의 탐학과 착취를 견디다 못한 농민과 노예 등 하층민들은 전국적으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저항했다. 민중봉기는 1172년(명종 2) 북계(北界, 平安道) 창주(昌州, 평북 창성)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창주 백성들은 창주의 수령이 가렴주구를 일삼자 그가 사랑하던 기생을 죽여서 아문(衙門)에 내버렸다. 철주(鐵州, 평북 철산)에서도 지방관의 횡포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봉기했다. 성주(成州, 평남 성천)에서도 백성들이 수령의 가렴주구와 횡포에 저항하여 삼등현(三登縣, 평남 강동)을 쳐 없앨 것을 모의하고, 이에 따르지 않는 사람 수십 명을 죽였다.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송유인(宋有仁)은 민중봉기를 진압하지 못하고 사직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우학유(于學儒)도 또한 이를 막지 못했다.

 

1173년(명종 3) 이의방은 문신 김보당(金甫當)이 의종복위운동을 전개하자 이의민을 계림(雞林, 경북 경주)으로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하게 했다. 이의민은 의종의 허리를 꺾어서 죽인 다음 그 시체를 연못에 던져버렸다. 의종이 죽자 이의방은 그의 집과 애첩들을 차지하고 태후의 여동생을 위협해서 간통하는 등 국정을 제 마음대로 처리했다.


1174년(명종 4)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은 이의방과 정중부를 타도하기 위해 절령(岊嶺, 자비령) 이북 40여 성의 지방관과 농민들의 호응을 얻어 군사를 일으켰다. 조위총군은 초반에 화주영(和州營, 함남 영흥)을 함락시키는 등 기세를 올렸다. 조위총군이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이의방은 내통 혐의를 씌워 서경 출신들을 모두 도륙했다. 


개경의 귀법사(歸法寺)와 중광사(重光寺), 홍호사(弘護寺), 홍화사(弘化寺) 승려들은 횡포가 심하던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고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승려들의 거사를 진압한 이의방은 부병(府兵)을 징집해 귀법사, 중광사, 홍호사, 용흥사(龍興寺), 묘지사(妙智寺), 복흥사(福興寺)에 보내어 불을 지르고 재물을 탈취했다. 승려들의 반란은 불교사원의 후원세력이었던 고려 왕실과 문신귀족 중심의 구지배체제를 복구하려고 한 운동이었다. 따라서 이 반란은 쿠데타의 성격을 띤 반동적인 의미가 있었으며, 진보적인 요소를 지닌 농민봉기나 천민봉기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이의방은 조위총군을 토벌하기 위해 도성 서쪽 교외에서 훈련하던 관군을 시찰하기 위해 선의문(宣義門)을 나섰다가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과 보제사(普濟寺)의 승려 종참(宗旵)에게 살해되었다. 이의방이 죽자 정중부가 무신집정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정부군에 밀린 조위총군이 서경으로 후퇴하여 농성전에 들어가자 윤인첨(尹鱗瞻)은 서경에 대한 지구전으로 대응했다. 위기에 처한 조위총은 금나라에 사절을 보내 국왕 시해를 보고하고, 자비령 이북의 40여 성을 내주는 조건으로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금나라가 구원병을 보내오지 않자 정부군은 서경성을 공격해서 조위총군을 진압했다. 조위총의 항쟁은 왕실 복위라는 명분으로 지역 차별을 타파하려 한 저항이었다. 

 

무신집권기 고려의 병제는 극도로 문란해져서 기존의 군사편제 및 전시동원 체제가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치안 및 국방이라는 대내외적인 목적을 위하여 중앙과 지방에는 각종 별초가 많이 설치되었다. 특히 명종 4년 이후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 신의별초(神義別抄) 등의 삼별초(三別抄) 뿐만 아니라 경주별초(慶州別抄), 양반별초(兩班別抄), 노군잡류별초(奴軍雜類別抄) 등 다양한 별초가 조직되었다. 별초는 야별초(夜別抄)에서 보듯이 초기에는 주로 도둑을 잡기 위한 순검군(巡檢軍)의 역할을 맡았다. 중앙에는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경별초(京別抄), 지방에는 외별초(外別抄) 조직이 있었다. 별초는 이후 초기 선봉대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모군(募軍)에 의한 직업군인으로서 정규군화되었다. 무신정권은 별초를 사병화(私兵化)하면서 자신들의 경호와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무신집권기 무신들간의 권력쟁탈전으로 고려 조정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고, 집권무신들의 토지점탈과 지방관리의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해지자 전국각지에서 사회경제적 모순을 타파하고 신분해방을 쟁취하려는 농민과 천민 등 하층민들의 무장봉기가 치열하게 일어났다. 


1175년(명종 5) 8월 개경의 하급관리들이 남도의 농민봉기군과 연합해서 항쟁을 계획하다가 처형되었다. 1176년(명종 6) 1월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의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는 신분해방과 차별 없는 세상을 부르짖으면서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를 자칭하고 농민과 천민(賤民)들을 모아 고려 조정과 무신정권의 과중한 수탈에 저항하는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향(鄕), 소(所), 부곡(部曲)은 노비(奴婢), 천민과 유사한 잡척(雜尺)이라는 열등계급이 사는 특수행정구역으로 이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특산물까지 만들어 바쳐야 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보다 더 많은 세금과 부역에 시달렸다. 대장군 정황재(丁黃載)와 장군 장박인(張博仁) 등은 3천 명을 이끌고 천민봉기군을 진압했으나 실패하였다. 고려 조정은 할 수 없이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키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에 천민봉기군은 해산하여 일터로 돌아갔다.


9월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 노약순(盧若純)은 주사동정(主事同正) 한수도(韓受圖)와 함께 거짓으로 평장사 이공승(李公升), 상서우승 함유일(咸有一), 내시장작소감 독고효(獨孤孝) 등의 편지를 만들어 망이와 망소이에게 보내 천민봉기군의 힘을 빌어 의종을 살해한 무신정권을 타도하려고 기도했다. 그러나 망이가 도리어 그 사자를 사로잡아 안무별감(安務別監)을 지낸 그의 형 노약충(盧若冲)에게 보냄에 따라 거사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노약순의 무신정권 타도 미수사건은 이의방의 의종 살해가 고려 조야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왔음을 알 수 있는 단적인 예다. 


고려 조정은 망이와 망소이를 회유한 뒤 가족을 인질로 가두어 재봉기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1177년(명종 7) 2월 분노한 망이 망소이의 천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공주를 함락시킨 뒤 예산현(禮山縣, 충남 예산)을 공격해서 감무(監務)를 살해하고 충주(忠州)까지 점령하였다. 천민봉기군은 가야사(伽耶寺,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이어 진주(鎭州, 충북 진천)와 황려현(黃驪縣, 경기 여주)을 공격했다. 서해도(西海道, 황해도)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하자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박소(朴紹)를 보내 주현의 군사를 징발하여 토벌케 하였다.


3월 망이와 망소이의 천민봉기군은 홍경원(弘慶院, 충남 천안시 성환읍 직산면)을 불태운 뒤 개경까지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천민봉기군이 아주(牙州, 충남 아산)에 이어 청주(淸州)를 제외한 청주목(淸州牧) 관내의 모든 군현(郡縣)을 점령하자 최충헌은 군대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였다. 4월 고려 조정에 불만을 품은 의주(義州, 평북 의주)의 도령(都嶺) 김순부(金純夫)와 낭장 김숭(金崇)은 정주(靜州, 평북 신의주)의 군민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조정은 직문하(直門下) 사정유(史正儒)와 예부낭중 임정식(林正植)를 보내 선유(宣諭)했으나 실패했다.  


5월 서경성 진압 당시 도망했던 조위총군 잔여 병력 5백여 명이 다시 봉기하여 유수판관(留守判官) 박영(朴寧)과 처음에 항복을 청했던 자들을 죽였다. 고려 조정은 대장군 이경백(李景伯), 낭중(郞中) 박소(朴紹)를 보내어 그들을 선유하게 하였다. 7월 망이와 망소이가 남적처치병마사(南賊處置兵馬使) 정세유(鄭世猷)에게 붙잡혀 청주옥(淸州獄)에 갇힘으로써 노예제도의 철폐와 신분해방을 위해 창칼을 들고 일어난 천민봉기는 실패하고 말았다. 


9월 고려 조정은 상장군 이의민을 보내 조위총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조위총군은 서경의 담화사(曇和寺)에서 향산(香山)으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 10월 조위총군의 지도자 강축(康畜) 등 3인이 와서 항복하고, 11월에는 조충(曹忠)마저 항복함으로써 서경봉기군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12월 의주와 정주의 반란은 서북면병마사 최우청(崔遇淸)이 김순부와 김숭을 죽인 뒤에야 진압되었다.  


1179년(명종 9) 4월 조위총군의 잔여 세력이 재봉기할 것을 우려한 서북면 지병마사(西北面知兵馬事) 이부(李富)는 양식을 주겠다고 속여서 유인한 뒤 이들을 주살하였다. 이를 눈치챈 조위총군의 지도자 우방전(牛方田) 등은 병력을 불러 모아 관군을 공격했다. 조위총군은 병마사가 이끄는 정부군을 패퇴시키고 안북도호판관(安北都護判官) 함수산(咸壽山)을 죽였다. 이부는 관군의 병력을 더 동원하여 여러 번의 전투 끝에 조위총군을 토벌하였다.

  

9월 정중부의 전횡에 분개한 경대승(慶大升)은 허승(許升), 김광립(金光立) 등과 함께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宋有仁)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경대승은 무신정변 세력의 최고권력기구였던 중방을 해체하고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 사병(私兵) 집단인 도방(都房)을 설치하였다. 


1182년(명종 12) 전주 사록(司錄) 진대유(陳大有)는 형벌을 가혹하게 하여 백성들이 큰 고통을 받았다. 그때 고려 조정에서 정용보승군(精勇保勝軍)을 보내 관선(官船)을 만들게 하였는데, 진대유는 상호장(上戶長) 이택민(李澤民)을 시켜 사람들을 심하게 다루었다. 이에 주현군(州縣軍)의 기두(旗頭)인 죽동(竹同)을 비롯한 6명의 관노(官奴)는 주현군과 관노, 승려, 농민들을 규합하여 봉기했다. 봉기군은 진대유 등 관리들을 쫓아내고 이택민 등 10여 명의 집에 불을 지른 뒤 전주성의 문을 굳게 닫고 관군에 저항했다. 안찰사(按察使) 박유보(朴惟甫)는 도내의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전주성을 공격했으나 40여 일이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봉기군의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일품군(一品軍) 대정(隊正)과 승도(僧徒)가 죽동 등 10여 명을 살해함으로써 봉기는 진압되고 나머지 30여 명도 처형되었다. 


무신정변으로 무너진 고려 조정의 질서를 회복하려 했던 경대승은 1183년(명종 13) 30살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경대승이 죽자 경주로 달아났던 이의민은 명종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올라와 권력을 장악했다. 노예 출신이었던 이의민은 정권을 장악하자 그의 아들들을 요직에 앉히는 한편 뇌물수수는 물론 여러 민가를 빼앗아 자기 소유로 만들고, 백성의 논밭도 수시로 빼앗는 등 부정부패를 일삼아 그 타락상은 극에 달했다. 그는 또 여색을 몹시 밝혀 미모의 여성이 있으면 아내로 삼았다가 싫증 나면 차버리기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까지 품었다.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李至榮)과 이지광(李至光)도 악독하고 횡포가 심하여 사람들이 그 두 형제를 '쌍도자(雙刀子)'라고 부를 정도였다. 군사반란으로 집권하는 독재정권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바로 고려 무신정권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은 1185년(명종 15)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족벌정치를 일삼던 헤이지(平氏) 일족을 멸망시키고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설치하여 무가정치를 실시하였다. 전국 지방관의 인사권이 카마쿠라 막부로 이양됨으로써 헤이안시대 덴노(天皇)의 친정체제(親政體制)는 막을 내렸다. 이른바 막부(幕府, 바쿠후)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189년 금 세종이 죽자 그의 손자이자 황태자로 요절한 완안윤공(完顔允恭)의 아들 완안경(完顔璟)이 제6대 황제 장종(章宗)으로 즉위하였다. 칭기즈칸은 젊은 시절 케레이트와 함께 금 장종의 신하로서 타타르와 싸운 적이 있었다. 금 장종은 그 댓가로 칭기즈칸에게 많은 재물을 지불하였고, 그에게 중국식 칭호를 내려주기도 했다. 금 장종은 여진의 언어와 문자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학문과 문화를 익혀 서화와 시문에도 능했다. 그는 많은 문화인을 한림(翰林)에 초치하는 한편, 서적과 서화를 수집하였다. 또, 예악(禮樂)을 정하고 형법(刑法)을 정비했으며, 섬학양사(贍學養士)의 법을 제정하였다. 이 시기는 금나라의 문화적 황금기였다. 


금나라는 서지국(胥持國)과 이숙비(李淑妃) 등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금은 서서히 쇠약해졌다. 장종은 범람한 황허강의 치수(治水) 공사와 몽고계 유목민인 타타르의 침입을 방어하느라 국력을 소진하였다. 타타르의 침입을 기회라고 생각한 남송이 영종(寧宗) 옹립에 공을 세운 외척 한탁주(韓侂冑)의 주도로 실지회복을 위한 북벌을 감행하자 금나라는 더욱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다. 금나라는 송나라의 북벌군(北伐軍)을 격파했지만, 북방에서 일어난 몽고가 점차 강대해지면서 큰 위협 세력으로 등장했다. 뿐만 아니라 경지를 둘러싼 여진인과 한인(漢人)의 분쟁으로 금나라는 안팎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1190년(명종 20) 경상도 동경(東京, 경주)을 중심으로 신라부흥운동을 표방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무신정권에 의한 중앙정부의 부패와 지방관리들의 탐학을 견디다 못한 경주인들은 민중해방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신라부흥운동으로 폭발시켰던 것이다. 고려 조정은 안찰부사 주유저(周惟氐)를 보냈으나 진압에 실패하자 남로착적사(南路捉賊使)를 보내 토벌하게 했다. 동경농민봉기는 이후 약 15년에 걸쳐 고려 조정과 무신정권에 저항했다. 


1192년 일본의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쇼군(將軍)의 지위에 오르자 가마쿠라 막부는 중앙정부 역할을 하면서 일본 전국을 통치했다. 막부정권의 수장인 쇼군은 일본 최고권력자로서 덴노의 정통성과 국가의 틀만 유지한 채 전권을 휘둘렀다. 고려와 일본의 무신정권은 전제왕조정권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국정을 천단했다.

 

1193년(명종 23) 7월 경상도 청도(淸道)의 농민 김사미(金沙彌)는 인근의 농민과 천민, 그리고 특히 유망농민(流亡農民)을 규합해서 운문(雲門, 경북 청도군 운문면)에 본거지를 두고 고려 전제왕조정권과 무신정권의 가혹한 압제와 수탈에 저항하여 봉기하였다. 김사미의 농민봉기군은 초전(草田, 울산)에서 봉기한 효심(孝心)의 농민봉기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사미와 효심이 지휘하는 농민봉기군을 진압하기 위해 이의민 무신정권은 대장군 전존걸(全存傑)과 장군 이지순(李至純), 이공정(李公靖), 김척후(金陟侯), 김경부(金慶夫), 노식(盧植) 등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무인집정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은김사미, 효심 등과 서로 통모(通謀)하여 군사기밀을 누설하는 한편 농민봉기군에게 식량과 의복 등 군수물자를 원조해 줌으로써 진압군의 작전은 번번이 실패하였다. 진압군 사령관 전존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지순이 당대 최고권력자 이의민의 아들인지라 감히 처벌하지 못하고 고민 끝에 자결하고 말았다.

 

이의민은 당시 경주인(慶州人)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라부흥운동을 이용해서 고려 왕조를 타도하고 자신의 새 왕조를 개창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또, 경주인들과 동류의식을 갖고 있던 농민봉기군 가운데 일부는 비록 사비(寺婢) 소생이지만 경주 출신이자 경주이씨의 일족인 이의민을 이용해서 신라의 부흥을 도모하려고 기도했다. 이의민과 농민봉기군은 고려 왕조를 타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같았기에 서로를 이용하려는 속셈으로 일시적으로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이처럼 김사미, 효심이 이끄는 농민봉기군의 차별철폐와 신분해방을 위한 투쟁은 경주인의 신라부흥운동, 제왕(帝王)을 꿈꾸던 이의민의 야망, 경주이씨의 문중적(門中的) 유대의식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다.    

 

11월 고려 조정은 상장군 최인(崔仁)을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 , 장군 고용지(高湧之)를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에 임명하여 장군 김존인(金存仁), 사량주(史良柱), 박공습(朴公襲), 백부공(白富公), 진광경(陳光卿)과 함께 김사미, 효심의 농민봉기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1194년(명종 24) 2월 김사미는 진압군에 투항하여 처형당했다. 이에 농민봉기군은 구심점을 잃고 흩어졌고, 일부는 울진과 삼척 방면으로 북상하다가 강릉 근처에서 관군에게 진압되었다. 김사미 농민봉기군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이의민은 이들과 통모하려던 종래의 태도를 바꿔 손을 떼고 말았다.  

 

1194년 4월 효심의 농민봉기군은 저전촌(楮田村, 경남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여 7천 명이 전사하면서 참패하였다. 8월 효심은 부하 4명을 개경으로 보내 항복하도록 했고, 이들은 처벌을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2월 효심마저 관군에 체포됨으로써 김사미와 효심이 이끌었던 농민봉기는 막을 내렸다. 김사미와 효심의 농민봉기군이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농민과 천민들의 오합지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 정부군에 맞서 장기간의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만큼 고려 전제왕조정권과 무신정권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분노와 적개심이 컸다는 반증도 되겠다.  


1196년(명종 26) 4월 고려의 최충헌(崔忠獻)은 그의 동생 최충수(崔忠粹)와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과의 다툼이 동기가 되어 미타산(彌陀山)에 있는 이의민의 별장(別莊)을 습격하여 그 일당을 도륙하고 정권을 잡았다. 잔학하고 음흉했던 최충헌은 반대파는 물론 의심이 가는 사람들까지 철저하게 숙청함으로써 독재정권의 기반을 확립하고 최씨 무신정권의 시대를 열었다. 5월 최충헌이 정변의 명분을 얻고 폐정의 시정과 왕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국정개혁안인 봉사10조(封事十條)를 명종에게 올렸다. 봉사10조의 제시는 사실 정변의 정당화와 최충헌 형제의 권력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종은  무신정권 집권자들을 서로 견제하게 하는 한편 왕족들의 단합을 이끌어내 왕실의 강화에 힘썼다. 1197년(명종 27) 명종은 최충헌의 쿠데타 초기의 혼란을 기회로 삼아 무신정권의 타도를 기도하였다가 도리어 최충헌 형제에게 폐위를 당하고 창락궁(昌樂宮)에 감금되었다. 인종의 5남이자 의종과 명종의 막내동생인 평량공(平凉公) 왕민(王旼)은 최충헌의 옹립으로 제20대 신종(神宗)에 즉위하였다.      

 

1198년(신종 1) 최충헌은 나라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설치하고, 관서(關西) 민가의 안대(安碓, 방앗간)를 금지하였다. 비보(裨補)란 사찰을 파괴하거나 성을 쌓는 등 자연환경을 인위적으로 보완하여 실한 곳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지리도참설(地理道讖說)을 맹신(盲信)한 최충헌이 음양술사(陰陽術士)들의 말을 좇아 산천비보도감을 설치한 것은 실상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일족의 비보를 위한 것이었다. 


무신정변은 고려의 신분 질서에 큰 변동을 일으켜 하극상의 풍조가 유행하였다. 특히 노예 출신 이의민이 무인집정에 오른 것을 계기로 고려의 농민과 잡척, 노예 등 천민들은 신분해방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고 있었다. 농민과 천민 등 하층민들은 고려 왕조와 무신정권 등 지배자들의 압제와 수탈에 저항하는 한편 신분해방을 위한 대규모 항쟁을 전개했다.   


1198년 최충헌의 사노(私奴) 만적(萬積)은 미조이(味助伊), 연복(延福), 성복(成福), 소삼(小三), 효삼(孝三) 등 5명의 노예와 함께 개경 뒷산에서 나무를 하러 온 노예들을 모아놓고 '정중부의 난 이래 공경대부(公卿大夫)는 노예계급에서도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다. 우리는 주인의 매질에 근골(筋骨)의 고통만 당할 수는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文籍)을 불질러, 나라를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서 봉기를 선동하였다.


만적의 연설에 찬성한 노예들은 날짜를 정해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관노(官奴)들의 호응을 받아 조정에서 권신들을 죽이고, 사노들은 개경에서 최충헌 등 자기 상전들을 죽인 후, 노비문적을 불태워버린 뒤 자신들이 집권하자고 약속하였다. 약정한 날짜에 모인 노예가 몇 백 명에 불과하자 날짜를 다시 정하고 보제사(普濟寺)에서 봉기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율학박사(律學博士) 한충유(韓忠愈)의 사노 순정(順定)이 봉기 계획을 상전에게 밀고하여 봉기 전에 발각되었다. 신분해방과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꿨던 만적을 비롯한 수백 명의 노예들은 체포되어 모두 강물에 던져져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


노예봉기를 밀고한 순정은 은(銀) 80냥(兩)을 상금으로 받고 양민(良民)이 되었으며, 한충유도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제수받았다. 자신의 입신과 영달을 위해 동지들을 적의 손에 팔아넘긴 순정에 의해 노예봉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만적과 그의 동지들은 신분제도가 엄격한 시대에 계급을 타파하고 평등세상을 구현하려 했던 것이다. 만적이 이끄는 노예봉기가 성공했더라면 한반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1199년(신종 2) 최충헌은 문무관의 인사권(人事權)을 장악하고 명실공히 고려의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2월 명주(溟州, 강원 강릉)의 농민들은 봉기하여 삼척(三陟)과 울진(蔚珍) 두 현을 함락하였다. 이때 동경(東京, 경북, 경주)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하여 명주의 봉기군과 합세하여 인근의 주군(州郡)을 약탈하였다. 고려 조정은 회유책으로 낭장(郞將) 오응부(吳應夫)와 송공작(宋公綽)을 명주, 장작소감(將作少監) 조통(趙通)과 낭장 한지(韓祗)를 동경에 보내 봉기군을 설득시키도록 했다. 3월 송공작의 설득으로 동경의 김순(金順)과 울진(蔚珍)의 금초(今草) 등이 와서 항복하자 신종은 주식(酒食)과 옷을 주어 향리로 돌려보냈다. 


8월 황주목사(黃州牧使) 김준거(金俊据)는 신기지유(神騎指諭) 이적중(李勣中)과 비밀리에 최충헌의 제거를 모의하고 안변부(安邊府)에 나가 있던 그의 아우 김준광(金俊光)에게 연락하여 황주 백성들 중에서 가장 날래고 힘센 사람들을 거느리고 개경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그의 장인 낭장(郎將) 김순영(金純永)이 이 사실을 최충헌에게 밀고함으로써 모두 잡혀 처형되었다.


1200년(신종 3) 4월 진주(晋州)에서 주리(州吏)들의 탐학을 견디다 못한 공사노예들이 무리를 모아 주리들의 집 50여 채를 불태우고 봉기했다. 진주는 최충헌의 식읍(食邑)으로 당시 고려는 지배층에 의한 토지겸병이 가속화되어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어난 노예봉기는 주리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주리 정방의(鄭方義)가 궁시(弓矢)를 지닌 채 사록(司錄) 전수룡(全守龍)을 찾아간 것이 화근이 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정방의의 아우 정창대(鄭昌大)는 무리를 불러모아 옥을 부수고 정방의를 구출하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평소 원한을 가졌던 사람들 6천 4백여 명을 살해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소부감(小府監) 조통(趙通)과 중랑장(中郞將) 이당적(李唐績)을 보내 진압하였으나 실패함으로써 노예와 토호(土豪)의 대립은 지방관과 토호의 대립으로 전화(轉化)되었다.


정방의 형제에게 원한이 있던 진주 백성 20여 명은 합주(陜州, 경남 합천) 노올부곡(奴兀部曲)의 광명(光明)과 계발(計勃)에게 도움을 청했다. 진주 백성들은 광명과 계발이 이끄는 노올부곡민과 합세하여 정방의를 진압하려 했지만 도리어 패배하여 부곡민이 전멸당했다. 이로써 지방관과 토호의 대립은 다시 농민과 천민을 포함한 노예와 토호의 대립으로 변했다. 진주 백성들의 봉기로 정방의는 죽고, 정창대는 도망감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다. 

 

5월 밀성(密城, 경남 밀양)의 관노 50여 명은 관아의 은기(銀器)를 훔쳐 운문(雲門, 경북 청도)의 농민군에 가담했다. 김사미가 관군에 항복하여 참살된 뒤에도 운문을 근거지로 한 농민군 세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농민봉기는 전제왕조정권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호응을 받아 그 세력이 계속 확대되어 갔다. 농민군에는 농민뿐만 아니라 관노 등 다양한 피억압 계층이 참가했다. 신분적,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던 노예 등 하층민들에게 농민군의 존재는 전제왕조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정부군의 가혹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민중봉기의 기세가 약화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8월 금주(金州, 경남 김해)에서도 처우에 불만을 품은 잡족인(雜族人)들이 탐학과 횡포를 일삼는 자를 제거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봉기했다. 잡족인은 여진인, 거란인, 왜인(倭人) 등 고려에 포로로 잡혀오거나 귀화한 외국인으로 변방이나 황무지에서 토지와 가옥을 받아 살고 있었다. 이들은 토호(土豪)의 집을 습격하여 죽이고, 부사(府使)가 있는 관아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봉기 지도자가 부사 이적유(李迪儒)가 쏜 화살에 맞아 죽자 흩어져 달아났다. 얼마 후 이들은 다시 돌아와 '우리는 횡포하고 탐학한 자를 제거하여 우리 고을을 깨끗이 하려 했는데, 어찌 우리를 쏘느냐?' 하고 항변하였다. 이적유는 거짓 놀란 체하면서 '나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너희들을 외적으로 잘못 알고 그리 하였노라.'고 하면서 그들을 회유하는 한편 성밖으로 피난한 토호들을 은밀히 끌어들여 잡족인의 봉기를 진압하였다.

 

지배층의 압제와 수탈에 저항하는 민초들의 민중봉기는 4.3 제주민중항쟁, 4.19 민주혁명, 5.18 광주민중항쟁, 6.10 민주항쟁에 이어 오늘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전국각지에서, 고압송전탑 설치를 반대하는 밀양에서, 쌍용자동차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와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는 평택에서, 대한문에서, 서울역에서, 청계광장에서.....      


고려 전제왕조정권과 무신정권에 저항하는 민중봉기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비롯한 전국각지에서 점점 더 격렬해져 갔다. 특히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탐라(耽羅, 제주도)는 지방관과 토호들의 탐학과 횡포가 더 심했다. 1202년(신종 5) 10월 번석(煩石)과 번수(煩守) 등을 중심으로 한 탐라 민중들은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지방관의 파면과 선량한 지방관의 부임을 요구하면서 봉기했다. 12월 번석과 번수가 탐라안무사(耽羅按撫使) 소부소감(少府少監) 장윤문(張允文), 중랑장 이당적이 이끄는 관군에게 잡혀서 처형당하고 관련자들이 투옥됨으로써 탐라민중봉기는 진압되었다.

 

경주지역의 항쟁은 그 규모나 지속성 면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더 격렬하였다. 같은 해(1202년) 10월 경주별초군(慶州別抄軍)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영주(永州, 경북 영천) 사람들을 공격했다. 경주별초군은 운문의 농민군과 무신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부인사(符仁寺)와 동화사(桐華寺)의 승려들을 끌어들여 영주를 공격하였다. 이에 영주의 이극인(李克仁)과 견수(堅守) 등이 정예를 이끌고 맞서 싸우자 경주별초군은 대패하고 물러났다. 경주별초군의 항쟁에 큰 충격을 받은 최충헌은 경주를 토벌해 민중봉기를 뿌리뽑도록 했다. 최충헌의 강경진압 소식을 들은 이의민의 추종세력과 경주인들은 11월 신라부흥운동을 표방하고 장군 석성주(石成柱)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석성주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12월 경주도령(慶州都領) 이비(利備, 義庇)와 전 동경야별초(東京夜別抄) 패좌(孛佐)는 경주에서 일어난 항쟁 가운데 가장 대규모의 항쟁을 일으켰다. 이비와 패좌의 항쟁은 신라부흥운동과 연결된 정치적 반란의 성격을 띠었으나, 기본적으로는 고려 민중의 반봉건항쟁의 흐름 속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독재자 최충헌은 대장군 김척후(金陟侯)를 초토처치병마중도사(招討處置兵馬中道使)로 삼아 좌도사(左道使) 최광의(崔匡義), 우도사(右道使) 강순의(康純義), 우도부사(右道副使) 이유성(李維城) 등과 함께 삼군(三軍)을 편성하여 이비패좌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토벌군 소식을 들은 경주인들은 운문과 울진, 초전(草田, 성주)의 저항군과 연합하여 삼군을 편성하고 정국병마(正國兵馬)라 칭하면서 여러 주군(州郡)들을 위협했다. 정부군이 사기 저하로 싸우지 못하자 김척후는 소환되어 파직되고 정언진(丁彦眞)으로 교체되었다.

 

1203년(신종 6) 정국병마군(正國兵馬軍)은 기양현(基陽縣, 경북 안동)에서 최광의의 정부군과 싸우다 대패하였고, 이비는 정언진에게 체포되었다. 패좌는 기계(杞溪, 경북 경주)를 공격하다가 이유성의 정부군에 패하여 운문산으로 후퇴하였다. 정언진은 대정(隊正) 함연수(咸延壽), 강숙청(康淑淸)을 보내 패좌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듣지 않자, 패좌의 부장이 함연수와 내통하여 패좌를 죽임으로써 항쟁은 실패하고 말았다.

 

정국병마군의 항쟁을 진압한 최충헌은 동경(東京)을 경주, 동경유수(東京留守)를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경주 소관의 주부군현과 향(鄕), 부곡(部曲)을 안동(安東)과 상주(尙州)에 나누어 소속시켰으며, 경상도를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로 개칭하였다. 무신정권이 반군의 잔존세력을 색출하는 등 강경책을 쓰자 민중봉기는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고려 왕실과 문신귀족의 후원으로 매우 융성했던 불교는 무신정권의 등장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불교의 지원세력인 왕실과 문신귀족이 무력해지면서 무신집권자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이에 반발하여 승려들의 봉기가 자주 일어났다. 지방에서는 승려들이 농민과 노예 등 하층민의 항쟁에 편승하여 봉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1203년 경주, 운문, 울진, 초전 등지에서 민중들이 항쟁을 전개하자 송생현(松生縣, 경북 청송) 쌍암사(雙巖寺)와 흥주(興州, 경도 영주) 부석사(浮石寺), 대구 부인사(符仁寺)의 승려들도 무신정권에 항거하여 봉기를 준비했다. 이비패좌군을 진압한 좌도사 최광의가 승려들을 붙잡아 섬으로 귀양보냄으로써 승려봉기는 수포로 돌아갔다.

 

무신정변 이후 고려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되어 농민과 천민들의 민중봉기가 폭발적으로 일어나던 무렵 몽고 초원에서는 테무진이 일으킨 돌풍이 아시아를 뒤덮으려 하고 있었다. 테무진은 케레이트 부족 완칸의 승인 아래 소집된 쿠릴타이(忽里勒臺, 족장회의)에서 몽고 씨족연합의 맹주(盟主)로 추대되었고, 마침내 칸(汗)의 칭호를 얻었다.


자무카(札木合)의 자다란 부족과 타이치우드 부족을 격파(1201)한 테무진은 타타르를 멸망(1202)시키고 우랄산맥 서쪽 지역을 장악하였다. 1203년 케레이트 부족을 토벌하여 동부 몽고를 평정한 테무진은 군제를 개혁한 뒤 1204년 나이만 부족을 격파했다. 1205년(희종 1) 테무진은 메르키트 부족을 멸망시킴으로써 마침내 몽고 초원을 통일하였다. 1206년(희종 2) 테무진은 부르칸 칼둔 성산(聖山) 근처 오논 강 원류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대양(大洋)의 군주', '황제 중의 황제'인 칭기즈칸(Chingiz Khan, 成吉思汗)에 올라 대몽고국(大蒙古國)을 세웠다.  


1208년 금나라 장종이 아들이 없이 죽자 세종의 7남인 황숙(皇叔) 완안윤제(完顔允濟, 完顔永濟)가 7대 무평황제(武平皇帝, 衛紹王)로 즉위하였다. 무평제는 유약(柔弱)한데다 무능하여 금나라는 날로 쇠퇴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칭기즈칸에게 군신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였으나, 칭기즈칸은 이를 거부하였다. 


몽고를 통일한 칭기즈칸은 대외정복에 나서기 시작했다. 1209년(희종 5) 몽고는 중국 서북부의 오르도스(Ordos)와 깐쑤(甘肅)에 있던 서하(西夏, 대하)을 정복하고 서역과의 무역로를 차지하였다. 요나라가 멸망한 뒤 금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거란족은 1211년경부터 몽고의 도움을 받아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던 투르크계 웅구트(Ungut)인들은 금나라를 위해 몽고에서 만리장성으로 통하는 산시성 북부의 길을 방어하고 있었다. 웅구트의 알라쿠쉬 티긴이 이 길을 열어주자 칭기즈칸은 거란족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거란족의 유민으로 금나라의 변방을 지키던 북변천호(北邊千戶) 야율유가(耶律留哥)는 몽고의 후원 아래 거란의 옛 영토인 만주 서남부의 랴오허(遼河)에서 금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성공했지만 야율유가는 몽고에 투항했다. 몽고의 철기병들은 남하하여 서북 방면의 금나라 영토를 차례로 점령해 나갔다. 금나라는 동경(東京, 베이징 남쪽 동안현)마저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서 멸망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고려 신종의 양위로 즉위한 제21대 희종(熙宗)은 1211년(희종 7)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를 당하여 쫓겨났다. 태자 왕오(王祦)는 최충헌의 옹립으로 제22대 강종(康宗)으로 즉위했다. 1213년(강종 2) 강종이 죽자 최충헌의 적(嫡)매형이자 사돈인 태자 왕철(王皞)이 제23대 고종(高宗)으로 즉위하였다. 


1213년 칭기즈칸의 몽고군은 산시성(山西省) 중부를 돌파한 뒤 남진하여 허베이성(河北省)과 산둥성(山東省) 평원을 가로질러 하간(河間)과 제남(濟南)을 함락시켰다. 화북(華北) 일대까지 밀고 내려온 몽고군에 의해 금나라 수도인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옌징, 베이징)는 한때 함락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몽고군이 중도대흥부를 포위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나라 조정에 쿠데타가 일어나 흘석렬호사호(紇石烈胡沙虎)는 무평제(위소왕)를 죽이고, 무평제의 조카이자 장종의 서형인 오도보(吾睹補, 完顔珣)를 제위에 앉혔는데, 곧 8대 황제 선종(宣宗)이다. 칭기즈칸은 금 선종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1214년(고종 1) 3월 금나라는 몽고군의 공격을 받고 수도를 북중국의 중도(中都, 옌징, 베이징)에서 황허 남쪽의 카이펑(開封)으로 옮겼다. 금나가 수도를 카이펑으로 옮기자 칭기즈칸은 이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몽고는 군대를 동원해서 옌징을 함락시키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천도 이후 금나라의 영토는 섬서성(陕西省) 일부와 허난성(河南省) 일대로 축소되었다. 1216년(고려 고종 3) 금나라의 요동선무사(遼東宣撫使) 푸젠완누(蒲鮮萬奴, 포선만노)는 자립하여 만주에 동진국(東眞國, 東夏)을 세웠다. 


북중국과 만주를 차지한 몽고는 야율유가의 투항을 계기로 거란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몽고는 요나라가 망한 뒤 만주에 흩어져 살던 거란족으로부터 가혹한 수탈을 하였다. 1216년 거란족의 야사포(耶斯布, 耶斯不)는 야율유가를 따라 칭기즈칸에 복종하지 않은 거란인들을 규합하여 대요수국(大遼收國, 後遼)을 세우고 청저우(澄州, 卑沙城, 海城)에 도읍했다. 몽고군이 청저우를 공격하자 대요수국의 승상 걸노(乞奴)는 9만여 명의 거란족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하하여 고려 영내로 쳐들어왔다. 거란군은 북계(北界, 서북계)의 의주(義州)에서 염주(鹽州, 황해 연백)까지 침탈하고 개경을 위협하였으며, 동계(東界, 동북계)의 함주(咸州, 함남 함흥)에서 명주(溟州, 강원 강릉), 내륙의 원주(原州)에서 제천(堤川), 금천(金川)에 이르기까지 유린함으로써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고려 조정에서는 서경병마사 상장군 최유공(崔兪恭)과 판관예부낭중(判官禮部郎中) 김성(金成)에게 서경의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군을 물리치게 하였다. 서경의 군대를 소집한 최유공이 탐학하고 병사들을 학대하자 불만을 품은 하급 병졸 최광수(崔光秀)는 병사들을 선동하여 출동을 거부하도록 하였으며, 자신에게 동조하는 병사들을 모아 서경성을 탈취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최광수는 스스로 고구려부흥병마사금오위섭상장군(高句麗復興兵馬使金吾衛攝上將軍)이라 칭하고, 서북면의 여러 성에 격문을 돌려 반란에 동조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최광수는 신사(神祠)에서 거사의 성공을 빌던 중 동향인 분대녹사(分臺錄事) 정준유(鄭俊儒) 등 10여 명에게 살해되었다.


1217년(고종 4) 1월 걸노군의 침입에 대비해 소집된 개성의 흥왕사, 홍원사(弘圓寺), 경복사(景福寺), 왕륜사(王輪寺)와 시흥의 안양사(安養寺), 광주(廣州)의 수리사(修理寺)의 승군이 최충헌을 제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승군들은 도성으로 쳐들어가 자주 요역을 일으켜 사원을 피폐하게 한 낭장(郎將) 김덕명(金德明)의 집을 부수고, 최충헌의 집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최충헌은 가병(家兵)을 보내 승군을 공격해서 8백여 명의 승려를 죽였다.


1218년(고종 5) 서요를 멸망시킨 몽고는 카진(合眞)과 쟈라(扎刺)로 하여금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푸젠완누의 동진국과 연합하여 대요수국의 걸노군을 토벌하게 했다. 이때 인주(麟州, 평북 의주)의 도령(都令) 홍대순(洪大純)은 몽고군과 교전중 자발적으로 몽고에 투항하였다. 몽고군은 추위와 군량 부족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자 고려에 군대와 식량의 지원을 요구했다. 고려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 조충(趙冲)과 병마사(兵馬使) 김취려(金就礪)가 군사를 이끌고 몽고군과 합세하였다. 1219년 고려와 몽고, 동진국 연합군은 서경(西京, 평양) 동쪽의 강동성(江東城, 평남 강동)에 웅거하던 걸노군 섬멸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강동의 역(江東之役)'이다.

 

1219년(고종 6) 9월 최충헌이 죽자 대장군 최준문(崔俊文), 상장군 지윤심(池允深) 등은 최충헌의 맏아들 최우(崔瑀, 최이)를 제거하고 막내아들 최향(崔珦)을 후계자로 세우려다가 실패하였다. 최준문은 최우에게 살해당하고, 최향은 장인인 수춘후(壽春侯) 왕항(王沆) 등과 함께 섬으로 유배되었다. 


최충헌의 정권을 물려받은 최우는 자신의 집에 정방(政房)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는 한편 서방(書房)을 설치하여 명유(名儒)들을 포섭했다. 또, 도방을 확장하여 사병의 규모를 더욱 증강시켰다. 모든 명령은 무인집정(武人執政) 최우의 입에서 나왔고, 나약한 고려 왕실은 무신정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1219년(고종 6) 10월 의주의 낭장 다지(多智)와 별장 한순(韓恂)이 반란을 일으켜, 의주 방수장군(防戍將軍) 조선(趙宣) 등을 죽이고 원수라 칭하고, 장부의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니 북계의 여러 성이 호응하였다. 고려 조정이 삼군(三軍)을 동원하여 토벌하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한순과 함께 동진국(東眞國)에 투항한 다지는 금나라 원수 우가하(于哥下)를 끌어들여 의주에 진을 치게 하고, 자신은 여러 성의 군사를 모아 박천(博川)에서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그러나 다지와 한순은 중군지병마사(中軍知兵馬事) 김군수(金君綏)의 설득과 항의를 받은 우가하에게 잡혀 처형당했다. 다지와 한순의 잔당은 그 후 동진군 1만여 명을 이끌고 정주에 쳐들어왔으나, 중군병마사 이적유(李廸儒) 등에 의해 진압되었다.


몽고는 121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호라즘, 1222년에는 파키스탄, 1223년에는 러시아 남부와 이란의 일부를 정복함으로써 마침내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했다. 몽고의 대제국 건설은 고려에게 불리한 정세로 작용하였다. 이 해 금나라 선종이 죽고 3남 영갑속(寧甲速, 完顔守緒)이 9대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곧 애종(哀宗)이다.   


강동의 역으로 고려와 처음 접촉한 몽고는 거란족으로부터 고려를 구해준 은인으로 자처하면서 일방적인 형제맹약(兄弟盟約)의 체결을 요구하였다. 형제맹약으로 고려는 몽고를 형의 나라로 받드는 불평등한 외교관계를 갖게 되었다. 몽고의 지나친 조공 요구와 사신들의 고압적인 자세는 고려의 반발을 불러왔다. 또, 1225년 1월(고종 11) 고려에 공납을 독촉하기 위해 파견된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몽고는 저고여 피살사건을 기화로 고려와 국교를 단절하는 한편 고려에 대한 정벌을 준비하였다. 고려는 저고여를 살해한 범인이 고려인으로 변장한 동진국 우가하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였다.  


1226년 5월 서경 사람 조영수(趙永綏)는 석준(石俊), 김대지(金大志), 김광영(金光永) 등과 모의하여 네 명의 도령(都領)과 낭장 황승룡(黃勝龍), 동방림(東方林)을 죽이고 군대를 빼앗아 개경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전 대정(隊正) 김국인(金國仁)의 고발로 이들은 서경유수 진식(陳湜)의 군대에 잡혀 모두 처형되었다. 조영수의 반란은 서경과 개경의 오랜 세력다툼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고려 태조 때부터 개경과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중시된 서경은 묘청과 조위총의 항쟁 이후 급격히 그 세력이 약화되었는데, 무신정권 이후 여러 차례 일어난 서경인들의 항쟁은 최광수의 반란에서 보듯이 서경세력의 강화, 나아가 고구려 부흥운동과 연결지을 수 있다.


1227년 칭지즈칸이 이끄는 몽고군은 중국 서북부의 오르도스(Ordos)와 간쑤성(甘肅省) 지역에 티베트 계통 탕구트족(党項族)이 세운 서하(西夏)를 멸망시켰다. 서하 정복전쟁에 나섰던 칭기즈칸은 승리를 바로 앞에 두고 깐수성 칭수이현(淸水縣) 시장(西江) 강변에서 세상을 떠났다. 칭기즈칸의 유언에 따라 1229년에 열린 쿠릴타이에서 오고타이(窩濶台, 와활태)는 몽고 제2대 황제(태종, 太宗)로 추대되었다. 오고타이한국(汗國)의 시조인 그는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칭기즈칸의 신뢰로 일찍부터 후계자로 지목된 오고타이는 서아시아 원정 당시 호라즘의 수도 우르겐치성을 함락시키는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칸에 오른 오고타이는 랴오둥(遼東) 방면의 동진국 과 금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오고타이가 셋째 아들임에도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칭기즈칸의 첫째 아들인 주치(朮赤)는 보르테(孛兒帖)가 납치되었을 때 가진 아이로 그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에 시달렸고, 둘째 아들 차가타이(察合臺)는 황제가 되기에는 그릇이 모자랐다. 몽고에는 막내아들에게 집안을 잇게 하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원래는 막내 툴루이(拖雷)가 제위에 올랐어야 했다. 하지만 툴루이는 쿠릴타이에서 오고타이를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별다른 잡음 없이 황위가 계승될 수 있었다.


1230년(고종 17) 홍주(洪州, 충남 홍성)의 귀양지에서 최향은 최우에 대한 불만과 앙심으로 홍주 부사(副使) 유문거(柳文柜)와 판관 전양재(全兩才)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최향은 인근의 주군(州郡)에 격문(檄文)을 돌려 무리를 지어 난동을 벌이다가 붙잡혀 옥사하였다.  


이처럼 12세기 초부터 13세기 초의 동아시아는 발해와 요, 북송, 서요가 차례로 멸망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가 바야흐로 팽창정책을 펼쳤던 격동의 시대였다. 남송은 북중국을 잃고 강남으로 밀려났고, 고려와 일본에는 무신정권이 들어서서 국정을 전단하고 있었다. 중원의 금과 동만주 두만강 유역의 동진국은 몽고와 남송, 고려의 틈바구니에 끼어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고려 민중들은 고려 왕실과 무신정권의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고 있었으며, 잦은 외세의 침략으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