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 태종 오고타이는 저고여 살해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으로 1231년(고종 18) 대장군(大將軍) 살리타(撒禮塔, 薩里台)에게 고려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몽고는 7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여 살륙과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고려 민중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1231년(고종 18) 8월 28일 몽고 원수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함으로써 제1차 려몽전쟁(麗蒙戰爭)이 발발하였다. 몽고군은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咸新鎭, 평북 의주)을 함락하고 철주(鐵州, 평북 철산)를 짓밟았다. 몽고군이 인주(麟州, 평북 의주)를 점령하자 인주의 신기도령(神騎都領) 흥복원(洪福源)은 1천 5백여 호의 군민을 이끌고 몽고에 투항했다. 몽고로부터 고려군민만호(高麗軍民萬戶)에 제수된 홍복원은 몽고군의 향도(嚮導)가 되어 고려를 침략하는 데 앞장섰다. 홍복원은 고구려 보장왕(寶臧王) 때 남건(男建)과 남산(男產)의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당하자 당나라로 망명한 뒤 668년 이적(李勣)과 함께 당군(唐軍)을 이끌고 신라와 연합하여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남생(男生)과 같은 반역을 저질렀다.
일찌기 몽고에 투항한 부 홍대순과 함께 홍복원은 나라의 운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친몽매국노가 되었다. 홍대순, 홍복원 부자는 고려 후기 원나라에 붙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 권세를 부린 부원배(附元輩)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홍복원 부자의 반역행위는 일제강점기의 친일매국노들과 미군정기 친미매국노들에게서 그대로 되풀이 되었다. 매국노의 유전자는 대를 이어 유전되는 것인가!
9월 재상들은 최우의 집에 모여 몽고군을 격퇴하기 위한 방어전략을 세운 다음 채송년(蔡松年)을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로 임명하고 삼군을 출동시켰다. 몽고군을 방어하던 삭주(朔州, 평북 삭주)의 분도장군(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과 정주(靜州, 평북 의주)의 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은 구주성(龜州城, 평북 구성)으로 후퇴하였다. 몽고군이 철주성(鐵州城, 평북 철산)을 포위 공격하자 철주방어사(鐵州防禦使) 이원정(李元禎)과 판관(判官) 이희적(李希勣)은 성내의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창고에 불러 모은 다음 불을 지른 뒤, 성문을 공파하고 돌격해온 몽고 기병부대와 싸우다가 군민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위기를 느낀 최우의 무신정권과 고려 조정은 청천강(淸川江)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몽고군은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박서(朴犀)와 김경손이 방어하던 구주성을 수차례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몽고군은 구주성을 포위한 부대만 남겨두고 주력부대를 남하시켰다. 몽고군이 황주(黃州, 황해 황주)와 봉주(鳳州, 황해 봉산)로 남하하자 두 주의 수령은 백성을 이끌고 황주 서쪽 30리 대동강 하구의 철도(鐵島)로 들어가 방어했다. 몽고군에 포위된 용주성(龍州城, 평북 룡천)은 항복하고 부사(副使) 위소(魏玿)는 포로가 되었다. 용주에 이어 선주(宣州, 평북 선천)와 곽주(郭州, 평북 곽산)도 함락되었다.
10월 항복을 재촉하는 공문을 휴대하고 평주(平州, 황해 평산)로 찾아온 몽고인과 여진인 두 명을 잡아 가두고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죽여야 한다는 등 찾아온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이들을 개경으로 압송하여 신원을 확인한 결과 조정에서는 몽고군임이 드러났다. 몽고군은 북계의 각 성에서 항복한 고려 군민들을 동원해 구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몽고군이 성곽을 넘어 들어와 공격하자 구주성의 군민들은 필사적으로 싸워 대패시켰다.
10월 20일 고려 삼군은 안북성(安北城, 평남 안주)에 진을 쳤는데 후군진주(後軍陣主) 대집성(大集成)의 오판으로 장군 이언문(李彦文), 정웅(鄭雄), 우군판관(右軍判官) 채식(蔡識) 등이 전사하고 고려군의 절반 이상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안북성 전투에서 고려군에 대승을 거둔 몽고군은 자주성(慈州城, 평남 순천)을 포위 공격했으나 부사(副使) 최춘명(崔椿命)은 군민을 지휘하여 성을 사수하였다. 동계의 화주(和州, 함남 금야)를 침공한 동진군(東眞軍)은 선덕진(宣德鎭, 평남 덕천)의 도령(都領)을 포로로 잡아 갔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음에도 고려 고종은 승려 3만여 명에게 사흘 동안 친히 음식을 대접했다.
11월 북계분대어사(北界分臺御史) 민희(閔曦)는 병마판관(兵馬判官) 원외랑(員外郞) 최계년(崔桂年)과 함께 삼군의 명령을 받고 몽고군영으로 찾아가 자칭 권황제(權皇帝) 살리타(撒禮塔)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살리타는 민희보다 고관이 와서 항복하라고 다그쳤다. 11월 28일 몽고군 주력부대는 지난 10월 평주에서 공문을 전달하려던 몽고 사자를 수감시켰다고 하여 앙심을 품고 평주를 멸살하려고 했다. 평주의 성안으로 돌입한 몽고군은 주리(州吏)와 주민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민가를 불태웠다. 평주에는 개와 닭마저도 씨가 마를 정도였다. 평주성(平州城)을 점령한 뒤 몽고 원수(元帥) 포리대완(蒲里帒完)은 금교(金郊, 개성부 소속의 역), 원수 적거(迪巨)는 오산(吾山), 원수 탕구(唐古)는 포리(蒲里)에 진을 쳤다. 예성강(禮成江)으로 남진한 몽고군 선봉부대는 고려 군민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민가를 불태웠다.
12월 몽고군은 개경의 4대문 밖에 진을 친 후 흥왕사(興王寺)를 공격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어사(御史) 민희(閔曦)를 몽고 진영으로 보내 음식을 대접하고 화친을 맺게 했다. 고려 고종은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에 주둔한 살리타가 보내온 사자를 대관전(大觀殿) 뜰에 내려가 맞이하였다. 몽고사절은 저고여 살해사건을 추궁하면서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고려 조정은 금으로 만든 술잔과 쟁반, 은병(銀甁), 수달가죽으로 만든 옷, 비단과 모시 등의 뇌물을 탕구 등 세 원수와 사절들에게 주는 한편 회안공(淮安公) 왕정(王侹)을 살리타에게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그럼에도 몽고군 별동부대는 한강 이남인 경기도 광주(廣州), 충청도 충주(忠州), 청주(淸州) 등지로 남진하면서 남김없이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몽고는 살리타의 사절과 함께 함신진에서 항복한 장군 조숙창(趙叔昌)을 보내와 조속히 항복할 것과 말 1~2만 필에 실을 수 있는 금은(金銀), 몽고군 1백만 명이 입을 수 있는 의복, 진품의 자색 비단(眞紫羅) 1만 필, 수달피(水獺皮) 2만 장, 대소마(大小馬) 각각 1만 필을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고려 태자가 직접 왕족의 아들 1천 명과 대관인(大官人)들의 딸 1천 명을 데리고 와서 황제에게 바치라고 명했다. 몽고가 이처럼 과중한 인적, 물적 공납을 강요하자 고려 조정은 몽고사절과 탕구, 탕구의 처자 및 부하 관인(官人, 몽고의 부족장 또는 고관대작)들에게 뇌물을 주어 해결하려 하였다.
1231년 12월 충주성(忠州城, 충주시 성내동)에서는 부사(府使) 우종주(于宗柱)가 양반으로 구성된 양반별초(兩班別抄), 판관(判官) 유홍익(庾洪翼)이 노비와 천민으로 구성된 노군별초(奴軍別抄)를 지휘하고 있었다. 충주성은 호서(湖西)와 영남(嶺南) 지방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무기와 식량을 많이 비축하고 있어 몽고군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몽고군 별동부대가 충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우종주와 유홍익을 비롯한 양반관료와 양반별초 등 지배층들은 백성들을 버려둔 채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그러나 노군별초 도령(都令) 영사(令史) 지광수(池光守)와 승려 우본(牛本)은 항전을 결의한 노군별초와 잡류별초(雜類別抄)를 지휘하여 몽고군을 물리쳤다.
충주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구주성과 자모산성(慈母山城, 평남 평성)의 끈질긴 항전에도 불구하고 최우 무신정권은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 강화도(江華島)로의 천도(遷都)를 도모했다. 그러나 강화도로 가는 길이 차단되자 최우는 북계분대어사(北界分臺御史) 민희(閔曦)와 내시낭중(內侍郞中) 송국첨(宋國瞻)을 보내어 몽고와의 화친을 모색했지만 몽고는 고려의 왕족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위기를 느낀 고려 고종은 몽고의 권항사(權降使)를 인견하고 왕족인 회안공 왕정을 안북부의 몽고군 진영에 보내어 강화를 청했다. 고려와 강화를 체결한 몽고는 점령지 및 요충지에 총독(總督)격인 다루가치(達魯花赤)와 경호부대인 탐마치군(探馬赤軍)을 두어 고려의 내정을 간섭했다.
몽고와의 화의가 이루어졌음에도 최춘명과 구주성의 박서, 김경손은 11월 자주성에서 좀더 견고한 자모산성으로 옮겨 몽고군에 대항했다. 12월 중순 화의 결렬을 염려한 고려 조정은 송국첨에 이어 후군진주 대집성을 몽고 관리와 함께 보내 항복을 종용했으나 박서와 김경손, 최춘명은 끝까지 거부하였다. 회안공 왕정의 설득으로 박서와 김경손, 최춘명은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최춘명은 몽고 관리들의 압력으로 서경(西京, 평남 평양)에 투옥되었다. 그 화가 자신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웠던 최우는 자주성에서 수모를 당한 대집성의 권유를 받아들여 최춘명의 처형을 명했다. 그러나 살리타가 남기고 간 다루가치는 '몽고에는 거역했지만 고려에는 충신이니 죽이지 말라'고 하여 최춘명은 극적으로 석방되었다. 최우에 의해 죽게 된 최춘명이 아이러니칼하게도 적국인 몽고의 다루가치에 의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32년(고종 19) 1월 화의가 진전됨에 따라 고려에서 몽고군이 철수하면서 제1차 려몽전쟁은 끝났다. 몽고군이 물러가자 우종주 등 도망갔던 양반관료와 양반별초들은 충주성으로 돌아와 노군별초의 승전을 치하하기는 커녕 관청과 민가의 은기(銀器)가 없어진 것을 트집잡아 노군들을 조사하였다. 노군들은 몽고군이 은기를 약탈해 갔다고 진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호장(戶長) 광립(光立) 등은 노군별초 대장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은기 분실이 노군들의 소행이라고 무고(誣告)하였다. 광립의 말만 듣고 양반관료들이 지광수를 처형하려 하자 분노한 노군들은 봉기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소라나팔을 신호로 노군들은 먼저 광립 등 주모자의 집에 불을 지르고, 평소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고 있던 양반 호족(豪族)과 관리들을 찾아내어 모조리 죽였다. 충주성의 노군봉기 소식을 접한 최우는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소집하여 진압 문제를 논의하였으나 판관 유홍익은 사절을 보내어 사태를 무마하여 주기를 청했다. 최우는 안무별감(安撫別監) 박문수(朴文秀)와 봉어(奉御) 김공정(金公鼎)을 보내 노군봉기를 수습하게 했다. 노군봉기를 수습한 박문수, 김공정은 지광수와 우본을 데리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최우는 지광수에게 교위(校尉) 벼슬을 내리고, 우본은 대원사(大院寺) 주지로 임명했다.
1232년 2월 몽고는 개경의 다루가치로 도단(都旦)을 파견하는 한편 과중한 공녀(貢女)와 공물(貢物)을 바치라고 요구하였다. 도단은 거란인으로 매우 간특해서 몽고군을 강동성으로 맞아들여 자기 나라 군대를 전멸시킨 자로 거란의 홍복원이었다. 다루가치 도단은 개경에서 고려 국왕과 나란히 앉으려 하고, 궁궐에서 거처하려 하며, 객관(客館)의 영송판관(迎送判官) 낭중(郞中) 민회적(閔懷迪)이 대접을 제대로 못한다고 트집을 잡아 몽둥이로 타살하는 등 오만방자한 횡포를 부렸다. 몽고의 지나친 내정 간섭과 공납 요구, 왕공과 고관대작의 입조(入朝) 강요, 도단의 만행은 고려 조야를 분노케 했다.
5월 고려의 문무관료들은 선경전(宣慶殿)에 모여 몽고군의 침략을 저지할 대책을 논의했다. 대부분의 관료들은 도성을 수비해서 몽고에 항전하자고 했으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정무(鄭畝)와 대집성 등은 천도(遷都)해서 병화(兵禍)를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달 몽고는 북계의 용강(龍岡, 남포직할시 용강군)과 선주(宣州, 평북 선천)에 다루가치 네 명을 파견했다.
강도동문(江都東門) 망한루(望漢樓)
6월 16일 최우 무신정권은 고종을 위협해서 수도를 강화도(江華島)로 옮겼다. 몽고군이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한 것을 이용할 속셈이었다. 최우는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해 강화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고려의 지배층은 몽고군의 침략을 막을 능력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의 권력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최우에게 백성들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권력자나 지배세력은 이처럼 위기에 처하면 언제든지 백성들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곤 했다.
7월 최우는 강도(江都, 강화도 임시수도)에서 왕경유수병마사(王京留守兵馬使)로 임명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김중구(金仲龜)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김인경(金仁鏡)으로 하여금 팔령군(八領軍)을 지휘하여 개경을 방어하라는 명을 내렸다. 또 최우의 명을 받은 내시(內侍) 윤복창(尹復昌)은 북계의 여러 성에서 다루가치의 무장을 해제시키다가 선주에서 다루가치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고종은 개경을 떠나 승천부(昇天府, 개성직할시 개풍군)을 경유하여 강화도로 들어왔다.
8월 서경순무사(西京巡撫使) 대장군 민희는 사록(司錄) 최자온(崔滋溫)과 함께 비밀리에 장교들을 시켜 다루가치를 습격해서 살해할 모의를 했다. 서경의 백성들은 민희의 모의 소식을 듣고 만약 다루가치가 살해되면 평주성의 군민처럼 몽고군에 무참하게 도륙당할 것으로 판단하고 봉기했다. 서경봉기군이 최자온을 잡아 가두자 유수(留守) 최임수(崔林壽)와 판관(判官), 분대어사(分臺御史), 육조(六曹)의 관원 등은 저도(楮島)로 도주했다. 전쟁에서 언제나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아녀자 등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백성들의 안전를 고려하지 않은 고려 관군의 작전이 강한 반발을 불러온 것은 당연했다.
한편 충주에서 노비들의 신분이 해방되고 우본이 대원사 주지에 임명되자 재지세력(在地勢力)인 호족과 상급 승려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노군과 재지세력의 심한 갈등 끝에 우본은 다시 노군을 규합하여 봉기했다. 이 봉기에 지광수가 참여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최우로부터 충주성의 노군봉기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병마사(兵馬使) 이자성(李子晟)은 삼군을 거느리고 충주로 향했다. 관군이 달천(達川, 달래강)에 이르렀을 때 노군 몇 명이 강 건너편에서 '주모자의 머리를 베어 항복하려 한다'는 항복 의사를 전해 왔다. 이자성이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하자 이들은 다시 충주성으로 들어가 이틀 후에 우본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왔다. 그 사이 용감하고 건장한 노군들은 모두 충주성에서 탈출했다. 관군은 성으로 들어가 남아있던 노비봉기군을 사로잡아 모두 처형했다.
노군봉기 지도부는 노군이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 우본을 희생양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봉기에 실패하고 충주성을 탈출한 노군들은 새로운 해방세상을 찾아서 갔던 것일까? 충주성의 노군봉기는 노예제(奴隸制) 사회에서의 신분해방투쟁과 양반관료 지배층의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충주성 전투에서 보듯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피흘려 싸우는 사람들은 언제나 힘없고 이름없는 백성들이었다. 민중들이 피흘려 나라를 지켜 놓으면 다시 돌아와 주인행세를 하는 자들은 언제나 양반관료 지배층이었다. 조선이 미군에 의해 일제(日帝)로부터 해방이 되자 재빨리 미국의 앞잡이로 변신한 친일민족반역자들이 정관계, 재계, 법조계, 언론계, 학계, 군대, 경찰 등 사회 모든 분야를 장악하지 않았던가! 또, 군대도 안간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등 고위공직자가 수두룩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몸이 약해서 군대도 못간 자들에게 국민의 안위와 나라의 흥망성쇠가 걸려 있는 국정을 어떻게 믿고 맡길 수 있겠는가!
충주성은 불행하게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시가지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철거하여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현재는 관아공원(官衙公園) 안에 충주목 동헌(東軒)으로 쓰던 청령헌(淸寧軒)과 내아(內衙)였던 제금당(製錦堂), 수직청(守直廳)이었던 산고수청각(山高水淸閣), 충청감영문(忠淸監營門), 충주성사적비(忠州城史跡碑) 등만 수령 5백여 년이 넘은 느티나무와 함께 남아 있다. 대몽항전의 승리에 빛나는 역사의 현장인 충주성이 복원되기를 기대해 본다. 충주성의 복원은 기업도시나 경제자유구역, 세계조정선수권대회 유치보다도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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