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제2차 려몽전쟁(第二次麗蒙戰爭)

林 山 2013. 12. 3. 17:22

몽고 태종 오고타이는 고려를 무력으로 위압하여 복속시킴으로써 조공을 받는 군신관계를 수립하는 선에서 침략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는 몽고가 금나라를 정복할 때 고려가 배후의 위협세력이 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강화도(江華島) 고려궁지(高麗宮址)


고려는 비록 몽고와 강화를 맺었지만 이것이 무신정권의 본의가 아니었다. 최우는 강화천도와 동시에 고려 주민들을 산성과 해도(海島)에 입보(入保)시켜 몽고에 대한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몽고의 공녀와 공물 요구도 거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려는 몽고가 북계에 잔류시킨 다루가치를 살해하는 등 반몽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고려의 북계수복운동과 대몽항쟁의 움직임이 점차 강화되자 몽고는 이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1232년(고종 19) 8월 몽고 태종 오고타이는 대장군 살리타에게 고려 정벌을 명했다. 8월 하순 오고타이의 명을 받은 살리타는 1만여기의 병력을 이끌고 고려를 재차 침략함으로써 제2차 려몽전쟁이 발발했다. 몽고군은 최우의 강화천도로 무인지경이 되다시피 한 북계의 여러 중요한 성들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남하하여 청천강 남안의 안북성(安北城, 평남 안주)에 주둔하였다. 살리타는 다루가치 살해사건과 강화천도가 반몽 적대행위임을 엄중하게 추궁하고 최우와 고려 국왕의 즉각적인 출륙환도(出陸還都)를 요구하였다.  


최우는 당연히 타협안을 거부했다. 고려에 대한 몽고의 내정간섭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개경으로의 출륙환도는 곧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이라는 사실을 최우는 잘 알고 있었다. 최우는 더욱더 강화도 수비에만 치중하였다. 


살리타는 몽고군을 이끌고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 평남 안주)에서 서경->황주->봉주->평주을 거쳐 개경 근처까지 진출하는 한편 각군으로부터 차출한 1천여 기의 별동부대(別動部隊)를 경상도 대구지역으로 남하시켰다. 몽고군 별동부대는 대구까지 빠른 속도로 남하하면서 약탈과 살륙을 자행하여 고려 민중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몽고군 별동부대의 이같은 무력시위는 고려의 항전의지를 꺾기 위한 것이었다. 


몽고군 별동부대는 고려의 귀중한 사찰(寺刹)과 불탑(佛塔), 전적(典籍) 등의 고적(古跡)과 문화재들을 무차별 파괴했다. 국보급 문화재인 대구 부인사(符仁寺)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도 몽고군의 병화(兵火)에 타버렸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때 불력(佛力)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1011년부터 70여 년에 걸쳐 판각(板刻)하여 부인사에 보관해오던 것이었다. 초조대장경은 종이와 인쇄기술 등 고려의 문화적 역량이 결집된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유산이었다. 


몽고 원수 살리타는 개경 부근에서 전군을 4개 부대로 나눈 뒤 제1군을 개경 주변에 배치하고, 제2과 3군을 강화도 승천포(昇天浦,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의 대안인 풍덕리(豐德里, 개풍군 대성면)와 월암리(月岩里, 개풍군 임한면) 일대로 진출시켜 강화도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살리타는 제4군을 직접 이끌고 개경을 출발하여 임진강(臨津江)을 건넌 다음 한양성(漢陽城)을 함락시키고, 11월 중순에는 광주(廣州)로 향했다. 


살리타의 이런 전략은 고려의 주력군을 개경과 강화도에 묶어 놓은 채 경기, 충청, 경상도 등 중부와 동남부 지역을 초토화함으로써 고려의 대몽항쟁 의지를 꺾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수전(水戰)에 약한 몽고군은 강화도를 침공하지는 못했지만 내륙지방에서 약탈과 살륙을 자행하여 고려 민중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고려 민중이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최우의 무신정권과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만 틀어박힌 채 사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광주에 도달한 살리타의 몽고 제4군은 광주성(廣州城)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광주성의 군민들은 광주안무사(廣州按撫使) 이세화(李世華)의 지휘하에 용감하게 맞서 싸워 몽고 제4군을 물리쳤다. 이세화군은 정면공격과 기습공격을 적시에 구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광주성의 군민들은 제1차 려몽전쟁 때도 몽고군의 포위 공격에 맞서 싸워 이들을 물리친 바 있었다. 또, 이세화는 경상도 안찰사로 있다가 살리타의 1차 침입 당시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달려가 수도 함락을 막은 지략과 용맹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광주성 공격에 실패한 몽고군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232년 12월 몽고군은 광주 남쪽의 용인 방면으로 공격의 진로를 바꾸었다. 용인은 삼국시대 백제의 멸오현(滅烏縣)이었다가 고구려가 점령하고 구성현(駒城縣)으로 고쳤다. 신라의 삼국병합 후 경덕왕 때 구성현을 거서현(巨黍縣)으로 고치고 한주(漢州)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는 거서현을 용구현(龍駒縣)으로 고치고, 현종 때 광주(廣州)의 속현으로 병합했다가 명종 때 현으로 승격시켜 감무를 두었다. 서쪽 20리에는 광교산(光敎山)이 솟아 있고, 동쪽 13리에는 보개산성(寶蓋山城), 남쪽 25리에는 처인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남동쪽에서 바라본 처인성(處仁城)


몽고군의 남하 소식이 전해지자 용인의 군민들은 인근의 산성과 처인성으로 대피했다. 처인성은 수주(水州, 경기 수원)의 속읍이었던 처인부곡(處仁部曲)에 있었다. 이때 처인성에는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를 비롯한 승병(僧兵) 1백여 명과 처인부곡민, 인근 고을에서 들어온 군민 1천여 명이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김윤후는 백현원(白峴院, 평택시 송탄동)에서 수도하고 있다가 몽고군의 병화를 만나 처인성으로 피난했던 것이다. 


텅 빈 용인현을 무혈 점령하자 살리타는 몽고 제4군 주력부대를 용인에서 수원->군포->부평->김포를 거쳐 강화도 대안의 통진(通津, 경기 김포) 방면으로 진출케 하여 강화도를 압박하도록 한 뒤 자신은 병력 일부만을 이끌고 처인성 공략에 나섰다. 1232년 12월 16일 처인성 동북방 50여 리 지점까지 내려온 살리타는 5백여 기병대를 3개 부대로 나눠 완장리(完庄里, 용인시 남사면)와 매릉리, 화동 일대에 분산 배치하고 처인성 공격 준비를 마쳤다. 

 

김윤후는 동문 밖 300m 지점의 언덕(일명 살장터)에 수십 명의 뛰어난 궁병(弓兵) 저격수들을 매복시켜 몽고군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였다. 살리타는 대여섯 명의 기병(騎兵)만 거느린 채 처인성을 정찰하기 위해 몸소 동문쪽으로 접근해 왔다. 살리타와 정찰기병(偵察騎兵)이 살장터(殺場址)에 이르자 고려군 저격수들은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다. 살리타는 눈에 화살을 맞고 말에서 굴러떨어지고, 정찰기병들도 모두 사살되었다. 고려군 저격수들은 살리타와 정찰기병의 목을 모두 베었다. 


대장군 살리타의 목이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한 몽고 기병대는 그를 구출하기 위해 처인성 동문으로 돌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처인성 군민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응으로 몽고군 대다수가 전사하고 말과 병장기들을 빼앗겼다. 고려군은 승세를 몰아 몽고군 본진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몽고 원수 살리타가 전사한데다가 고려군의 기습 공격으로 몽고군은 걷잡을 수 없이 와해되어 결국 용인현 방면으로 패주하였다. 


처인부곡의 군민이 일치단결하여 세계 최강의 몽고군을 물리친 처인성 승첩은 려몽전쟁이 발발한 이래 고려가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 처인성 전투의 대승으로 패전을 거듭하며 수세에 몰려 있던 고려군은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처인성 전투에서 패하고 대장군 살리타마저 전사하자 패배를 모르던 몽고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원정군 최고사령관의 전사로 지휘체계가 무너진 몽고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고려로부터 철수를 서둘렀다. 명령계통의 부재로 몽고군의 각 부대는 조직적으로 철수하지 못하고 개별적 독자행동으로 북계의 국경지역을 향해 도주하였다. 퇴로를 잃고 낙오한 몽고군 다수는 포로가 되었다. 


다급해진 몽고는 고려와 강화를 체결함으로써 몽고군을 수습하여 병력 손실 없이 철수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였다. 몽고군 부원수이자 제1군사령관인 테케(鐵哥, 데구)는 사신을 강화도로 보내 강화(講和)를 요청하는 한편 고려인 포로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고려도 각지에서 약탈과 살륙을 저지르는 몽고군 패잔병들의 조속한 귀환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강화 제의를 수락하였다. 강화가 체결되자 고려는 몽고군 포로 전원을 송환하고, 몽고군도 1233(고종 20)년 1월 고려로부터 철수함으로써 제2차 려몽전쟁은 막을 내렸다.

 

고려 조정은 살리타를 사살한 공로로 김윤후에게 무반으로서는 최고 품계인 정3품의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김윤후는 '當戰時, 吾無弓箭, 豈敢虛受重賞(전투 당시 제게는 활과 화살이 없었으니 어찌 감히 하잘 것 없는 공으로 큰 상을 받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사양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다시 김윤후에게 섭랑장(攝郎將)을 제수하고, 부곡민의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처인부곡을 처인현(處仁縣)으로 승격시켰다.  


김윤후와 처인부곡의 군민을 과소평가한 살리타는 용장(勇將)이었을지는 몰라도 지장(智將)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금물이지만, 만약 살리타가 몽고 제4군 주력부대를 통진으로 보내지 않고 처인성 포위 공격에 전력투구했더라면 결과는 참혹한 비극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살리타의 판단착오와 경솔한 행동이 김윤후에게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행운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