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제4차 려몽전쟁(第四次麗蒙戰爭)

林 山 2013. 12. 3. 17:37

1241년(고종 28) 11월 몽고 태종 오고타이가 돌연 사망하자 5년 동안 황제의 자리를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주치의 아들인 바투(拔都)는 자기 가문이 제위 계승에서 소외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때 오고타이가 죽자 바투와 오고타이의 장남 귀위크(貴由) 사이에 제위 쟁탈전이 벌어졌고, 귀위크는 1246년(고종 33) 7월 바투를 배제한 채 쿠릴타이를 열어 제3대 황제(정종, 定宗)에 올랐다. 귀위크의 변칙적 제위 계승은 주치 가문뿐만 아니라 오고타이에게서 차기 제위를 약속 받았던 툴루이 가문의 불만도 불러왔다. 


치열한 제위 쟁탈전으로 인해 몽고는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정복전쟁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몇 년 동안 동아시아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제위에 오른 귀위크는 제3차 려몽전쟁 당시 강화 체결 조건인 출륙환도와 고려 국왕의 입조가 이행되지 않을 경우 무력으로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고려는 여러 가지 핑계를 들어 강화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

 

1247년(고종 34) 6월 중이 된 최우의 서자 최만종(崔萬宗), 최만전(崔萬全) 형제와 이들 휘하의 무뢰배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 강간을 일삼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갔다. 이에 최우는 만전을 환속시켜 이름을 '항(沆)'으로 고치고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임명하였다. 또 최우는 외손자인 김치(金偫)를 환속시켜 이름을 '미(敉)'로 고치고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정1품의 최고위직인 사공은 태위(太尉), 사도(司徒)와 함께 삼공(三公)의 하나로 왕족이 아니면 임명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김미가 사공에 임명된 것은 그의 아내가 신종(神宗)의 아들인 양양공(襄陽公)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우 일족은 고려 왕실 등 권문세족과의 혼맥을 통해 권력기반을 다져나갔다. 오늘날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등 권력자들과 삼성, 현대, LG 등 재벌들의 혼맥도를 보면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고려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왕족이나 권문세가로서 불가에 출가하여 승려가 된 자들 가운데는 고리대금업으로 백성들을 착취하여 부를 축적하거나 부녀자들을 강간하는 무뢰배들이 상당히 많았다. 고려 민중들은 고려 왕실과 무신정권, 왕족이나 호족 출신 승려들에 의한 이중삼중의 압제와 수탈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몽고군의 약탈과 살륙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고려 민중들은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렸다.          


1247년 7월 몽고 황제 귀위크는 원수 아모간(阿母侃)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 정벌의 명령을 내렸다.  제4차 려몽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모간이 이끄는 몽고군은 고려 귀순자 홍복원을 향도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북계의 창성(昌城)->삭주->귀주에 이르는 북로를 따라 남진하였다. 몽고군은 이어 위주->평로성(平虜城, 자강도 동신군 신평)->맹산(孟山)->성천(成川)-강동->삼등->수안(遂安)->평주->백주(白州, 황해 연백)에 이르는 주진과 성들을 점령하면서 맹렬한 기세로 남하하였다. 


강화도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경기도 개풍군과 개성의 송악산 


몽고군이 이처럼 지형이 험준한 북로를 택한 것은 남로보다 방어태세가 취약하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몽고군은 강화로부터 불과 50여 리에 불과한 서해도(황해도)의 요충지 염주(鹽州, 황해 연안, 연백)까지 남진하여 강도(江都, 강화 임시수도)를 넘보았다. 몽고군 별동대는 경기도 일대를 초토화하고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로 남하하여 강진까지 도달했다.  


몽고는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전인 지난 겨울 사냥꾼으로 위장한 첩자 4백여 명을 북계 변방의 여러 성에서 수안현(遂安縣)에 이르는 곳까지 내려보내 수달(獺) 사냥을 핑계로 각지의 지형을 상세하게 파악하였다. 고려는 몽고와 화의를 맺었다고 안심하여 이들의 행동을 특별히 제지하지 않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몽고병들이 오지에 숨어 있는 백성들까지 쉽게 찾아내어 살륙을 자행하는 바람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247년 8월 최우는 몽고군이 염주에 주둔한 채 강도를 압박하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기거사인(起居舍人) 김수정(金守精)을 보내 몽고 원수 아모간에게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1248년(고종 35) 2월 최우는 몽고군의 철병을 요청하기 위해 추밀원사(樞密院使) 손변(孫抃)과 비서감(秘書監) 환공숙(桓公叔)을 몽고에 사절로 보냈다.


1248년(고종 35) 3월 최우는 아들 최항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삼고 가병(家兵) 5백여 명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노연(盧演)에게 명하여 북로 연변 주진의 군민들을 은율(殷栗), 안악(安岳) 등 서해도 해안지방과 도서지역으로 옮겨 섬과 하천을 방어기지로 삼아 몽고군에 항전하도록 했다. 또, 남로 연변 주진의 군민들을 식량과 병장기들과 함께 안북부 관내 정주(定州, 평북 운전) 동쪽 50리 청천강 하구의 위도(葦島)로 옮기고 몽고군이 군수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들판의 곡식을 모조리 불태우는 청야작전(淸野作戰)을 펼쳤다.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방경(金方慶)은 위도의 군민들을 지휘하여 제방을 쌓고 간척을 해서 농사를 짓게 했다. 또 빗물을 저장하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었다. 식량과 물을 자급하게 된 위도는 이후 난공불락의 요새로서 대몽항전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고려군의 청야작전으로 몽고군은 본국으로부터 증원부대와 식량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작전 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몽고군의 처지를 간파한 최우는 염주의 아모간 본진에 사자를 보내 강화교섭을 추진하는 한편 몽고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최우는 먼저 몽고군이 철수하면 이후 출륙환도와 고려 국왕의 입조를 단계적으로 실행하겠다는 종전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아모간은 출륙환도를 확인한 뒤에 철군하겠다고 주장함으로써 강화교섭은 결렬되었다. 고려군과 몽고군 사이에 이렇다 할 전투도 없이 대치상태가 지속되었다.  


1248년 3월 황제권을 강화하면서 대외원정을 계속한 몽고 정종 귀위크는 킵차크한국을 건국한 바투를 정벌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던 중 돌연 사망하였다. 귀위크가 죽자 대권을 장악한 황후 카이미쉬(海迷失)가 섭정을 한 4년 동안 몽고에서는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황족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몽고의 정정이 불안해지자 아모간은 최우의 강화조건을 일방적으로 수락하고 몽고군의 철수를 단행했다. 고려군은 철수하는 몽고군을 추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몽고군은 고려 원정에서 막대한 손실만 입은 채 아무런 소득도 없이 랴오양으로 철수했다. 따라서 전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지 않았고, 고려의 피해도 크니 않ㅆ다. 이로써 제4차 려몽전쟁은 끝났다.    


고려에서도 최우의 무신정권 후계자를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최우가 아들 최항과 외손자 김미를 불러들일 때 장군 유정(劉鼎) 등은 서장(書狀)을 만들어 김미를 후계자로 삼도록 청했다. 최우는 이를 불문(不問)에 붙였다. 김미는 최항이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먼저 선수를 치기 위해 백부(伯父)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경손(金慶孫)에게 서찰을 보내 사태의 위급함을 알렸다.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웠던 김경손은 이 사실을 최우에게 밀고했다. 1249년 윤2월 최우는 서장에 서명한 무리들을 모두 잡아들여 유정 등을 강물에 던져 죽이고, 김미를 고란도(高瀾島)에 유배하였다. 그 나머지도 죽이거나 유배하고, 벼슬을 깎아서 내쫓았다. 


1249년(고종 36) 11월 최우가 죽자 내외도방(內外都房)의 장군들은 모두 최항에게로 몰려가 그를 에워싸고 호위하였다. 12.12 군사반란의 수괴 전두환이 최고권력자가 되자 대부분의 장성들이 그의 앞에 줄을 섰던 것처럼 고려의 장군들도 최항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던 것이다. 최항은 장례를 치르고 나서 이틀만에 상복을 벗고 문을 닫은 채 부친의 미첩(美妾)들과 간음하면서 주지육림의 세월을 보냈다. 5.16 군사반란의 수괴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권력을 이용하여 수많은 미모의 여성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은 것과 마찬가지로 최항도 고려 미인들을 마음껏 취해 향락을 일삼았다. 


최항이 정권을 잡자 고종은 '황고(皇考)께서 임금의 자리에 계실 때와 과인이 즉위한 이후로 진양공(晉陽公) 최이(최우)가 좌우에서 보필하였기 때문에 삼한(三韓)에서 부모를 우러러보는 것처럼 하였는데, 이제 갑자기 세상을 떠나서 의뢰할 곳이 없게 되었다. 그의 아들 추밀원부사 최항이 대를 이어 진정(鎭定)하니, 품계를 건너뛰어 정승의 직위를 제수한다.'는 칙지(勅旨)를 내리고 그를 추밀원부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樞密院副使吏兵部尙書御史大夫) 겸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를 제수했다. 12.12 군사반란의 수괴 전두환을 몇 달만에 소장->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중장->중앙정보부장 서리->국보위 상임위원장->대장으로 초고속 승진시킨 최규하 허수아비 정권이나 마찬가지로 고려 조정도 최씨 무신정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조부인 최충헌과 부 최우에 이어 최항은 고려의 최고권력을 3대 세습했다. 조부와 부에 이어 최항도 대몽강령론을 고수했다. 대몽강경론의 고수는 언제든지 몽고의 재침을 초래할 수 있는 불씨를 안고 있었다. 


최항의 집권으로부터 760여 년 뒤 권력을 3대 세습하여 해외 토픽을 장식하면서 전세계인의 화제가 된 사건이 한반도에서 또 일어났다. 2011년 12월 17일 조부 김일성, 부 김정일에 이어 북한의 최고권력을 3대 세습한 김정은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종신집권을 꾀했던 남한의 독재자 박정희도 암살되지만 않았더라면 권력을 세습시켰을지도 모른다. 당시 박정희는 아들 박지만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시켜 후계자로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을 동원한 불법 선거운동을 통해서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남한도 부녀 2대가 최고권력자 자리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