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제6차 려몽전쟁(第六次麗蒙戰爭)

林 山 2013. 12. 3. 17:48

몽고 제국은 칭기즈칸이 대외 정복전쟁을 일으킨 이래 헌종 몽케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유럽 일대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했다. 수많은 국가들이 멸망했음에도 국체를 유지한 나라는 오직 고려와 남송뿐이었다. 특히 수차례의 정벌에도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한 몽고는 대제국의 체면과 자존심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했다.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한 려몽간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몽고는 남송 정벌의 배후 위협을 제거하고 자존심의 회복을 위해 고려에 대한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예케의 몽고군이 철수한 직후인 1254년(고종41) 1월 10일 최항은 강도의 계엄을 해제하고 전후 처리를 시작했다. 몽고에 들어가 려몽관계를 악화시키고, 몽고의 고려 원정군 향도가 되어 수많은 반역행위를 한 추밀원부사 이현은 몽고군의 철수 이후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남았다가 체포되어 최항의 명으로 저자에서 처형되었다. 이현의 다섯 아들은 바다에 수장되었고, 누이들과 사위는 모두 섬으로 유배되었다. 천룡성에서 항복한 방호별감 조방언과 황려현령 정신단 등은 지휘책임을 물어 해도에 유배되었다. 이들과 유사한 실책을 저지른 수령들도 중벌을 받고, 해당 군현은 하급 행정단위로 강등 또는 폐지되었다. 이들을 엄벌한 것은 몽고에 대한 최항의 적개심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려의 친몽세력은 친몽반역자들과 몽고군에 항복한 수령들에 대해 철저한 숙청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몽고에 제공하였다. 몽고는 고려의 숙청작업을 대몽강경노선에 의한 도전으로 인식했다. 1254년 7월 몽고는 사신을 보내 황제의 칙서(勅書)를 전달하고 몽고에 대한 고려의 적대행위와 강화조건의 불이행을 추궁하였다. 이들은 또 이현의 처형과 몽고에 항복한 수령들을 처벌한 것에 대해 강력하게 힐난하였다. 몽고 황제는 칙서에서 고려 국왕의 형식적인 출륙과 왕자의 입조만으로는 양국간의 평화가 유지될 수 없으며, 최소한 최항과 고려 조정의 출륙환도가 이루어져야만 정벌을 면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이것은 선전포고와도 같은 최후통첩이었다. 고러나, 최항은 몽고 황제의 최후통첩을 묵살함으로써 전쟁의 재발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254년 음력 7월 22일 몽고 헌종 몽케는 자랄타이(車羅大, 札剋兒帶, 차라대)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임명하고 고려 정벌을 명했다. 자랄타이가 예쑤타이(余速達)와 보포타이(甫波大), 홍복원(洪福源) 등의 부장들과 함께 기병 5천여 기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 침공을 개시하면서 제6차 려몽전쟁(자랄타이의 1차 침입)이 발발했다. 고려에 최후통첩을 보내기 전에 몽고군은 이미 랴오둥(遼東)에서 원정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자랄타이는 본진이 고려 영내로 진입하기 전에 척후기병대를 서해도와 경기도, 충청도로 진출시켜 중부 이남의 내륙지방에 대한 교란작전을 전개하여 주력부대의 남진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미리 제거하도록 하였다.  


몽고군 척후기병대는 북계의 함신진->철주->안주->서경으로 이어지는 남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남하하였다. 7월 24일 서해도로 들어온 몽고 척후기병대는 협계(俠溪, 황해 신계), 관산역(冠山驛, 황해 봉산 동쪽 10리)까지 진출하였다. 몽고 원수 자랄타이는 부장 예쑤타이와 보포타이로 하여금 병력 일부로 편성한 후속부대를 맡겨 후방을 경계하도록 한 뒤, 자신은 본진을 이끌고 8월 4일부터 척후기병대의 진로를 따라 본격적인 남진을 시작했다. 척후기병대는 8월 6일 경기도 광주로 진출한 뒤 이천->장호원->음성을 거쳐 8월 20일에는 충청도 괴주(槐州, 충북 괴산)까지 내려오면서 무자비한 살륙과 파괴를 자행하여 고려 내륙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몽고군 척후기병대가 괴주성(槐州城) 부근에 진을 치자 산원(散員) 장자방(張子邦)이 별초군을 이끌고 격파했다. 


자랄타이의 본진은 8월 22일 개경을 거쳐 경기도 장단(長湍) 남쪽 25리 지점의 보현원(普賢院)에 도달하여 강도를 직접 공격할 태세에 들어갔다. 위기를 느낀 최항은 사자를 보현원의 자랄타이 진영에 보내 강화를 제의하고 몽고군의 철수를 요청했다. 그러나 자랄타이는 고려 왕과 신하, 백성들이 모두 강도에서 출륙해야 하며, 두발도 몽고식 변발(辮髮)로 해야 한다는 강경한 요구를 함으로써 고려의 강화와 철군 제의를 거부하였다. 


8월 하순 충청도로 남하한 몽고군은 진주(鎭州, 충북 진천)를 공격하였다. 진주에는 대장군(大將軍) 송언상(宋彦祥) 밑에서 군졸로 있다가 고향에 돌아와 있던 임연(林衍)이 있었다. 임연은 진주의 군민들을 지휘하여 인근의 만노산성(萬弩山城, 충북 진천 만뢰산)으로 들어가 몽고군을 막았다. 만노산성 전투는 중앙정부의 도움없이 지방세력의 힘으로 몽고군을 물리친 사례였다. 임연은 그 공로로 종9품의 대정(隊正)에 임명되었으며, 이를 발판으로 훗날 자신의 야심을 펼쳐 나갔다.


몽고의 척후기병대는 괴주와 진주에서 고려군에 참패함에 따라 제5차 려몽전쟁 당시 예케군이 점령하지 못한 충주성을 배후에서 위협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자랄타이는 몽고군 본진을 이끌고 개경->양근->여주(驪州)->이천(利川)->음성(陰城) 등 한강을 우회하는 경로를 따라 9월 중순경 충주로 내려왔다. 자랄타이군은 충주성을 근처의 군현으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충주 인근 지역에 대한 무차별 살륙과 파괴, 노략질을 자행하였다.


충주 서쪽에 있는 다인철소(多仁鐵所)의 천민(賤民)들은 철광석과 제련된 철, 제련 도구, 무기 제조 시설 등을 몽고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유학산성(遊鶴山城, 충주시 대소원면 장성리)으로 옮겼다. 자랄타이가 지휘하는 5천여 명의 몽고군은 제철기술자와 철, 무기 등을 탈취하기 위해 유학산성을 공격하였다. 다인철소민들은 향리 지씨(池氏)와 어씨(魚氏)를 중심으로 민중항전을 전개하여 몽고군을 물리쳤다. 그 공으로 다인철소는 이듬해(1255년) 익안현(翼安縣)으로 승격되었고, 소민(所民)들도 양인으로 신분이 상승하였다. 몽고군이 충주를 주요 공격 목표로 삼은 것은 충주가 영남과 호서를 잇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무기의 제작과 공급지인 다인철소가 있었기에 전략적 중요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9월 14일 자랄타이군은 충주성을 포위하고 투석기(投石機)와 운제(雲梯, 사다리차), 당차(撞車, 충차) 등을 성의 4면에 배치하고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충주성을 공격할 찰나 갑자기 휘몰아친 폭풍우로 인해 몽고군이 큰 혼란에 빠지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고려군은 정예병을 성문 밖으로 출진시켜 기습을 감행하였다. 자랄타이군은 큰 타격을 받고 충주성 공격을 포기한 채 대원령(大院嶺, 계립령, 마골재, 하늘재)을 넘어 황급하게 경상도로 이동하였다. 


몽고군이 문경(聞慶)->점촌(店村)을 거쳐 1254년 10월 중순 상주(尙州)로 진출하자 상주의 군민들은 상주산성(尙州山城, 경북 상주시 모동면, 백화산성, 금돌성)으로 들어가 장기간의 수성전을 준비하였다. 10월 19일 몽고군은 상주산성을 포위하고 성을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이때 황령사(黃嶺寺, 경북 상주시 농암면 칠봉산)의 승장(僧將) 홍지(洪之)가 수백 명의 승군(僧軍)을 이끌고 상주산성으로 오다가 몽고군의 배후를 기습 공격하였다. 몽고군이 혼란에 빠지자 상주산성의 군민들도 성문을 열고 공격을 감행하였다. 협공을 받은 몽고군은 고급지휘관인 제4관인(第四官人)이 사살되고, 과반수에 이르는 병력이 전사하는 등 고려군에 참패를 당했다. 


상주산성 전투에서 패한 차랄타이군은 포위를 풀고 대구->합주(陜州, 경남 합천)를 거쳐 단계(丹溪, 경남 산청) 방면으로 남진하면서 노략질을 하였다. 12월 초순부터 몽고군은 경상도 내륙 산간벽지를 유린하였다.  최항은 몽고 진영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최린(崔璘)을 사자로 급파하여 군사행동의 중지와 강화교섭을 요청하였다. 자랄타이는 '최항이 고려 왕과 함께 육지로 나오면 군사를 파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몽고군이 고려 영토의 내륙 깊숙히 침투함에 따라 고려 군민들은 전국 각지의 산성을 거점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부터 자랄타이군은 거점 확보나 점령지 주둔 방식을 버리고 소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신속하게 이동하면서 내륙지방의 곳곳을 초토화하는 전략으로 전환하였다. 몽고군과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려 민중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254년 한해 동안 몽고군에 포로가 된 고려인 남녀는 무려 20만 6천 8백여 명을 헤아렸다. 몽고군에 살륙당한 고려 민중의 인명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으며, 이들이 지나간 주군(州郡)은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다. 


강도남문(江都南門) 안파루(晏波樓)


최린과 자랄타이의 강화회담 결과 고려와 몽고간의 강화가 체결되었다. 강화가 성립되자 자랄타이군은 더 이상의 남진을 멈추고 12월 말부터 군사를 되돌려 북상하기 시작했다. 1255년(고종 42) 1월 20일 개경에 도착한 자랄타이는 대규모 부대를 승천부와 교하(交河, 경기 파주) 등지에 배치하고 언제든지 강도를 공격할 능력이 있음을 과시하면서 인근 지역을 짓밟았다. 2월 초 자랄타이는 강도에 사자를 보내 애초에 약속한 대로 최항이 고종과 함께 출륙환도한다는 강화조건을 이행하라고 촉구하였다. 


강화 체결로 경상도와 전라도까지 내려간 자랄타이군을 경기지역 이북까지 북상시킴으로써 고려는 삼남지방의 방어 준비를 갖출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일단 위기를 벗어나자 최항은 몽고의 요구에 대해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강화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 결과 려몽간의 강화는 또 다시 결렬되었지만 자랄타이군은 병사들과 말의 휴식, 보급의 확충 등 전열의 재정비를 위해 고려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고군은 1255년 2월 하순부터 개경 인근 지역에 주둔한 부대를 선발대로 하여 철수를 시작해서 4월 25일까지 압록강 남안의 함신진, 정주 일대로 집결을 완료하였다. 이후 몽고군은 전열을 정비하는 한편 일부 병력을 청천강 이남까지 진출시켜 살륙과 파괴를 자행함으로써 고려와의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 


1255년 6월 고려 조정은 시어사(侍御史) 김수강(金守剛)과 낭장(郞將) 유자필(庾資弼)을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김수강은 몽고 황제 몽케를 따라 북막(北漠, 내몽고 고원 사막지대)의 화림성(和林城)으로 들어가 몽고군이 철군하면 출륙환도와 입조를 이행하겠다고 설득하였다. 몽케는 고종의 출륙환도가 이행되지 않았음을 이유로 몽고군의 철군을 거부했다. 


압록강 남안에서 전열 정비를 마친 몽고군이 1255년 8월 초순부터 다시 남진하면서 자랄타이의 2차 침입이 시작되었다. 8월 24일 몽고군의 척후기병대는 강화도의 북쪽 대안인 승천부에 이르고, 주력 선봉부대도 척후기병대의 진로를 따라 개경 북쪽 근교인 금교역(金郊驛, 황해 금천)까지 내려왔다. 몽고군 선봉부대는 개경->남경->충주를 지나, 영남과 호서(湖西) 지방의 주요 교통로인 백두대간 대원령(大院嶺, 계립령, 마골재, 하늘재,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을 넘어 경상도 지역을 침략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10월 2일 충주성에서 출동한 고려 정예병은 대원령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경상도 지역을 초토화한 뒤 북상하는 몽고군을 기습하여 1천여 명을 격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자랄타이군의 본대는 선봉부대를 뒤따라오다가 남경에서 진로를 바꿔 평택->공주->전주로 이어지는 경로를 따라 정주(井州, 전북 정읍)까지 남진하였다. 자랄타이군의 선발 척후기병대는 1256년(고종 43) 1월 초순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전라도 장성(長城), 영광(靈光)까지 진출하였다. 자랄타이의 본진 주력부대가 전라도를 집중 공격함에 따라 이 지역은 제6차 려몽전쟁의 주전장이 되었다. 장성, 영광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몽고군 주력부대는 3월 입암산성(笠巖山城, 전남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을 포위 공격하였다. 전라도의 섬들을 수비하기 위해 수군 3백여 명과 함께 영광에 와 있던 송군비(宋君斐)는 입암산성으로 들어가 일부러 노인과 병자들을 성밖으로 내보냈다. 성안의 식량이 떨어진 것으로 착각한 몽고군이 성 아래까지 진격해 오자 송군비는 정예병을 이끌고 돌격을 감행하여 많은 적병을 살상하고 4명의 적장을 포로로 잡았다.  

   

한편 충주 대원령 전투에서 패한 몽고군 선봉부대는 문경->상주->김천->성주를 1256년 4월 초순에는 낙동강 중류의 현풍(玄風, 대구 달성)까지 남하하였다. 몽고군은 낙동강 연안에서 피난민들이 타고 온 배 30여 척을 불태우는 등 현풍 인근 여러 고을들을 초토화시켰다. 대구 일대를 노략질한 몽고군은 4월 중순 다시 북상하여 충주를 공격하였다. 


이때 몽고군 선봉부대가 충주성을 도륙하고 충주산성을 공격하자 충주의 군민들은 동남쪽으로 45리 떨어진 월악산(月岳山,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의 덕주산성(德周山城)으로 들어갔다. 충주성과 충주산성을 점령한 몽고군 선봉부대는 충주 군민을 추격하여 월악산으로 진격하였다. 몽고군이 덕주산성을 공격하려 하자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졌다. 이에 몽고군은 월악산신(月岳山神)이 덕주산성의 군민들을 돕는 것이라 여겨 공격을 포기하고 충주성으로 물러갔다.


자랄타이군 주력부대는 1256년 4월 초순 담양(潭陽)으로 진출하여 3개월간 주둔하고 있다가 7월 다시 주둔지를 해양(海陽, 전남 광주)의 무등산(無等山)으로 옮겼다. 몽고군 주력부대는 자랄타이의 지휘하에 압해도(押海島, 전남 신안) 등 목포 인접 주요 도서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는 한편 서남해안 지역 일대를 유린하였다.


자랄타이군 주력부대는 강도를 공격하기 위해 7월 말부터 북상을 시작해서 8월 23일 강화도 대안으로 집결하였다. 충주에 주둔하고 있던 몽고군 선봉부대도 몽고군 본대에 합류하자 자랄타이는 강도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바야흐로 강화도 함락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지난해 6월 몽고에 사신으로 갔던 김수강이 몽고 헌종 몽케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마침내 몽고군의 철수를 약속받았다. 몽케는 1256년 9월 하순 서지(徐趾)를 자랄타이에게 보내 철수를 명령하였다. 몽케의 명령에 따라 10월 자랄타이는 원정군 전체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철수하였다. 이로써 제6차 려몽전쟁(자랄타이의 1, 2차 침입)은 막을 내렸다. 자랄타이군은 두 번에 걸친 침공을 통해서 상당수의 병력과 말, 병장기 손실만 입었을 뿐 고려 왕의 출륙환도나 입조 등 어느 한 가지 목표도 달성하지 못한 채 돌아갔다. 그러나 몽고가 끈질기게 요구해 온 강화조건인 고려 왕의 출륙환도와 입조가 이행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몽고군이 재침할 수 있는 불씨는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