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랄타이군이 고려에서 철수한 이후에도 최항은 출륙환도와 입조를 이행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려몽간의 관계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고려 민중들은 장기간에 걸친 몽고군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까닭에 몽고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컸다. 강도에 고립되어 꼼짝도 못하고 있던 최항의 무신정권과 고려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1257년(고종 44) 1월 고려는 연례적으로 몽고에 보내던 신년하례 사절단인 하정사(賀正使)와 공납을 중단하였다. 고려가 수차례나 약속한 강화조건도 이행하지 않고 하정사마저 파견하지 않자 몽고는 재침을 위한 정비를 마치고 고려에 대한 압박을 한층 더 가중시켰다.
이 무렵 최항은 병이 들어 위독한 상태가 되자 선인열(宣仁烈)을 불러 아들 최의(崔竩)가 안전하게 권력을 승계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최항에게는 정실 자식이 없었으며, 최의는 송서(宋壻)의 여종과 정을 통해 낳은 아들이었다. 1257년 윤4월 고려의 최고권력자 최항이 죽자 선인열은 그의 죽음을 비밀로 한 채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유능(柳能), 별장(別將) 최양백(崔良白)과 함께 야별초와 신의군, 서방, 도방을 소집하여 최의를 옹위하였다. 그리고 나서 선인열은 최항의 죽음을 알리고 최의가 정권을 잡도록 도왔다. 최의는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어 고려 최고권력기관인 정방(政房)을 인수하였다. 그러나 최의의 무신정권은 권력 기반을 다지기도 전에 몽고의 정치군사적 압박을 받게 되어 그 취약성을 면할 수 없었다.
4월 원주(原州)의 안열(安悅)은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한 뒤 고성(古城)에 웅거하였다. 고려 민중들은 몽고 침략군의 약탈과 살륙에 치를 떨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 왕실과 무신정권의 압제와 수탈에 대해서도 강한 반발과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고려 조정은 장군 윤군정(尹君正)과 낭장(郞將) 권찬(權贊)에게 군대를 주고 안열의 농민봉기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농민봉기군은 흥원창(興元倉,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서 고려 정부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크게 패하였다. 이때 농민봉기군의 배신자가 안열의 목을 베어 가지고 나와 항복하자 윤군정은 정부군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 봉기군 지도자 송비(松庇), 돈정(敦正), 당로(唐老) 등을 처형했다. 항복한 농민봉기군은 섬으로 유배되었다.
1257년(고종 44) 4월 몽고의 정동원수 자랄타이가 지휘하는 몽고군 별동대가 고려의 동북계를 침공했다. 이로써 제7차 려몽전쟁(자랄타이의 3차 침입)이 일어났다. 몽고군 별동대의 선봉부대는 함주(咸州)->정평(定平)->화주(和州, 금야)->등주(登州, 안변)->평강(平康)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따라 5월 초 동주(東州, 철원)까지 남하하였다. 이들은 영풍(永豊, 함남 안변), 금성(金城, 강원 김화) 등지에서 고려군과 전투를 벌였다. 몽고군 별동대의 주력부대인 기병 3천여 기도 선봉부대를 뒤따라 등주까지 내려왔다.
몽고군이 예상을 뒤엎고 고려의 동북부를 침공한 것은 이 지역의 주진과 성읍을 공격하여 동계 후방지역을 교란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편 몽고군 본대는 전과 같이 북계 방면으로 정면 침공을 시도하였다. 이처럼 몽고군이 전선을 북계와 동계, 척후기병대 등으로 다변화한 것은 고려 방어군을 동서로 분산시킴으로써 고려의 항전 역량을 떨어뜨리고 조기 항복을 받아내려는 전략이었다.
5월 11일 몽고군 본대는 30여 기의 척후기병대를 먼저 내려보내 청천강을 건너 안주(安州)->숙천(肅川, 평원)->함종(咸從, 강서)->용강(龍岡, 남포)->서경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따라 서북면 일대의 방어태세를 정탐하면서 개경으로 남진시켰다. 보포타이가 이끄는 몽고군 본대의 선봉부대는 평안북도 함신진->용주->철주->곽주(郭州, 곽산)->구주를 거쳐 태주로 진출하여 태주부사 최제(崔濟)와 다수의 군민들을 도륙하고 개경으로 향했다. 자랄타이가 이끄는 몽고군 본대는 선봉부대의 뒤를 따라 고려군의 기습에 대비하면서 남진하였다.
몽고군이 동계와 북계로 침공해오자 1257년 5월 20일 최의는 전국의 읍성과 산성에 방호별감을 급파하여 몽고군의 공격에 대비토록 하였다. 5월 29일에는 강화도 일원에 계엄이 선포되었다.
몽고군 본대의 척후기병대는 기수를 서경으로 돌렸다가 황주->봉주->평주를 거쳐 6월 5일 개경에 이르러 선봉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5일 후 보포타이 선봉부대는 개경을 지나 남경까지 진출하였다. 척후기병대는 병력을 증강한 뒤 남경->평택을 지나 직산에 이르러 보포타이 선봉부대의 남진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정찰활동을 강화하였다. 척후기병대는 공주->전주->정주(井州, 정읍)->장성을 거쳐 전라도 서남부의 무안(務安)까지 진출하였다.
몽고군의 공세가 점차 심해지고 강도 함락의 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최의는 강화 교섭을 통해 전쟁을 조속하게 종결지으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몽고군의 척후기병대와 선봉부대가 개경과 남경 일대까지 진출하자 최의는 6월 중순 장작감(將作監) 이응(李凝)을 자랄타이 진영에 보내 남경까지 남진한 몽고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자랄타이는 6월 하순 안북부에 들어와 지휘부를 설치하고 본대 주력부대를 경기도로 내려보냈다. 북계로 침입한 몽고군 본대는 7월 하순 전병력이 강화도 대안에 집결하여 강도를 고립시키는 한편 내륙지방을 초토화하는 작전으로 나갔다. 몽고군은 전과는 달리 고려의 조속한 항복을 유도하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서해도와 경기도 일대의 섬들을 공격하여 수전 수행 능력을 과시하였다.
자랄타이의 진영에 사자로 파견된 이응은 1257년 6월 하순부터 한 달여에 걸쳐 강화 교섭을 벌인 끝에 8월 6일 마침내 려몽간의 화의 체결을 위한 기본적인 현안이 타결되었다. 자랄타이는 고려 태자 왕전(王倎, 왕식)이 몽고에 입조한다면 몽고군이 승천부와 갑곶강 연안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의 교전을 즉각 중단하고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반면에 고려는 선철군 후입조(先撤軍後入朝), 즉 몽고군이 철수를 이행하는 즉시 태자가 몽고에 입조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자랄타이가 고려의 강화조건을 수락함에 따라 몽고군은 9월 7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10월까지 북계와 동계의 국경지대까지 물러갔다. 몽고군은 북계의 함신진과 동계의 국경지대에 진을 치고 고려가 강화조건을 이행하는지 지켜보았다.
제1차 려몽전쟁(1231년)이 발발한 이래 계속된 전쟁으로 고려 민중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또, 고려의 전국토가 초토화됨으로써 국력도 극도로 쇠퇴하였다. 최항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최의는 내외적인 압박으로 그 기초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처럼 고려의 상황이 변하자 최씨 무신정권의 대몽강경노선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야기되었다. 주화론자(主和論者)들은 끈질기게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하여 태자의 입조를 조건으로 강화를 성립시키고 몽고군의 철수를 이끌어 냈던 것이다.
11월 26일 고려 조정은 문무관료회의를 열고 태자의 입조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인 결과 태자 대신 고종의 둘째 아들인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태자가 입조하지 않을 경우 몽고가 취할 군사적 행동에 대한 대응책도 논의하였다.
1258년(고종 45) 3월 대사성(大司成) 유경(柳璥)과 별장(別將) 김인준(金仁俊, 김준), 신의군도령 낭장(神義軍都領郎將) 박희실(朴希實), 이연소(李延紹), 박송비(朴松庇), 김승준(金承俊), 임연(林衍), 이공주(李公柱) 등은 쿠데타를 일으켜 최의를 죽이고 최씨 무신정권을 타도하였다. 이른바 무오정변(戊午政變)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써 최충헌의 집권(1196년) 이래 최우, 최항, 최의까지 4대 63년 동안 유지되어 온 최씨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김준은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도리어 점차 자신이 권력을 장악했다. 고려의 실권은 삼별초를 휘하에 둔 김준의 무신정권이 쥐고 있었지만 이전의 무신정권에 비해 그 위세는 다소 퇴조하고 있었다.
1258년 12월 고려 고종은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봉해진 박희실과 그해 장군직에 제수된 조문주(趙文柱), 산원(散員) 박천식(朴天植) 등을 몽고 헌종 몽케의 행영(行營)에 보내 최의를 제거한 사실을 알렸다. 박희실은 고려 조정의 출륙환도와 태자의 입조를 약속하고 몽고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박희실이 몽케와 체결한 협정 중에서 '출륙환도는 3년을 기한으로 개경복구공사가 완료되면 시행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후에 이 조항은 김준 무신정권이 즉각적인 출륙환도를 거부하고 벼랑끝 외교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무신정권의 교체 등 고려의 정치적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대몽강경론은 점차 세력을 잃고 최자(崔滋), 김보정(金寶鼎) 등을 중심으로 한 대몽강화론(對蒙講和論)이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무신정권 세력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고, 단지 정치적 영향력이 다소 약화된 것 뿐이었다. 무인집단의 군사분야에 대한 발언권은 여전히 강력하였다. 김준은 역대 무신정권의 대몽강경론을 견지한 채 태자의 입조를 반대하고 무력항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고려 무인집단의 대몽강경노선은 또다시 몽고군의 재침을 유발하였다.
북계와 동계의 국경지대로 철수하여 주둔하면서 고려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자랄타이의 몽고군은 1258년 4월부터 군사행동을 재개하였다. 자랄타이는 1천여 기의 척후기병대를 서해도 수안까지 내려보내 서북계에서 개경에 이르는 경로 인근 지역을 유린하면서 백주(白州, 황해 배천), 염주(鹽州, 황해 연안) 등지로 진출시켜 서해도 일대를 유린케 하였다. 6월에는 예쑤타이와 보포타이로 하여금 각각 1천여 기의 선봉부대를 거느리고 가주(평북 박천)와 곽주에서 안주->서경->황주->봉주->서흥->평주를 지나 개경으로 진출할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자랄타이는 본대와 함께 함신진에 주둔하면서 서경에 지휘부를 설치할 준비를 하였다.
자랄타이는 강도의 고려 조정에 사자를 보내 전쟁이 확대되기 전에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자랄타이는 고려의 회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6월 22일 척후기병대로 하여금 서경을 거쳐 서해도 방면으로 남진하도록 했다. 몽고군 척후기병대는 6월 26일 강화도 북쪽 백주와 염주 일대까지 진출한 다음 8월에는 서해도 상원(祥原, 평남 중화)의 요새인 가수굴(佳殊窟)과 양파혈(陽波穴)을 공격했다. 몽고군의 공격으로 수안현령 박임종(朴林宗)과 방호별감 주윤(周尹) 등 다수의 고려 군민이 전사하고, 가수굴방호별감 노극창(盧克昌) 등 많은 군민들이 포로로 잡혔다.
예쑤타이의 선봉부대는 평주의 보산역(寶山驛)까지 남진하였다. 평주에 주둔한 예쑤타이는 고려 조정에 사자를 보내 고려 태자가 서경의 몽고군 본진에 와서 항복한다면 다시 회군할 수도 있다는 절충안을 제시하였다. 예쑤타이의 제안에 대해 고려 조정은 태자의 항복 장소를 보포타이 선봉부대 주둔지인 평주로 할 것인지 자랄타이 본진 주둔지인 서경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타결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몽고군 선봉부대는 7월 하순경 개경에서 경기도로 남하하여 이 지역 일대를 노략질한 다음 광주->이천->장호원을 거쳐 충주 방면으로 향했다. 자랄타이의 본진은 함신진에서 안북부로 이동하여 주둔하다가 8월 13일 개경으로 남진하여 지휘소를 설치하였다. 자랄타이의 본진에서 출격시킨 유격기병대는 승천부와 교하(파주), 봉성(峰城, 파주), 수안(守安, 김포시 통진읍), 동성(童城, 김포) 등지의 강화도 대안 지역에서 약탈과 살륙을 자행하면서 강도로 침공할 준비를 갖추었다.
강도북문(江都北門) 진송루(鎭松樓)
자랄타이는 자신이 제안한 고려 태자의 출륙을 조건으로 한 강화 제의가 거부당하자 9월 1일 강화도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3백여 기의 기병을 갑곶강 대안으로 집결시켜 강도를 공격할 듯 위협하면서 증원군을 계속해서 보내 무력시위를 전개하였다. 9월 24일 돌량으로부터 갑곶강 연안 일대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켜 도하작전을 감행할 준비에 들어감으로써 강도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같은 달 강원도 이천(伊川) 광복산성(廣福山城)에서는 군민들이 방호별감을 사로잡아 몽고군에 항복하는 일이 일어났다.
한편 10월 충주를 통과하여 경상도로 남진하던 몽고군 선봉부대는 충주 북동쪽 박달현(朴達峴, 박달재,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와 봉양읍 원박리 경계)에 매복하고 있던 고려 군민들의 기습을 받고 큰 타격을 입자 영남지역으로의 진출을 포기하였다. 고려 군민들의 맹렬한 유격항쟁으로 인해 몽고군의 군사행동은 강화도 인접 지역과 내륙 중부 이북의 제한된 지역에서만 이루어졌고, 중부 이남은 몽고군의 공격이 미치지 않았다. 11월 하순경 경기도로 후퇴한 몽고군 선봉부대는 서해도로 진출한 척후기병대와 보조를 맞추면서 이 지역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북계 경로를 따라 남진한 몽고군은 서해도와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 고려군의 유격전술에 말려들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몽고군은 고려군의 전투력을 동서 양면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동계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12월 1일 몽고군은 동진국의 수군을 동원하여 동해를 따라 내려와 고성현(高城縣, 강원 고성) 송도(松島)를 포위하고 고려 함선 다수를 불태움으로써 수군의 전력에 큰 타격을 가했다.
12월 14일에는 몽고 황족 산지대왕(散吉大王)과 뷔지르관인(普只官人)이 이끄는 몽고군이 동계 국경으로 침투하여 함주->정평을 거쳐 화주 일대까지 남하하였다. 이는 고려 중부의 서북방면 일대에 집중된 고려군의 공세를 동북방면으로 분산시켜 몽고군 주력부대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시도였다. 또, 고려 동계의 일대의 방어체계를 무너뜨리고, 북계로 남진한 주력부대와 긴밀한 연합작전을 펼쳐 고려 중부지역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킴으로써 강도의 굴복을 조기에 유도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동계 지역에서도 고려 군민들의 완강한 유격항전으로 인해 몽고군의 남진은 예정대로 진척되지 못했다. 12월 중순 화주에서 조휘(趙暉)는 정주인(定州人) 탁청(卓靑), 등주와 문주(文州, 함남 문천) 등지의 군민들과 공모하여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 등주부사(登州副使) 박인기(朴仁起), 화주부사(和州副使) 김선보(金宣甫), 경초군(京抄軍) 등을 죽이고 몽고군에 항복하여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몽고에 바쳤다. 몽고는 화주에 직할령(直轄領)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를 쌍성총관에 임명했다. 12월 23일 서해도 곡산(谷山)의 달보성(達甫城)에서는 군민들이 방호별감 정기(鄭琪) 등을 사로잡아 몽고군에 항복하였다.
려몽전쟁이 장기화되자 고려 민중들은 강도 지배층의 경제적 수탈에 신음하는 한편 군사적으로도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었다. 고려 민중들은 무능한 고려 조정과 국정을 농단하는 무신정권에 대한 불만이 점점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대몽항쟁 후반부로 갈수록 고려 민중들은 방호별감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몽고군에게 넘겨주고 항복하는 것이 그나마 피해를 줄이는 방법임을 깨달았다. 고려 조정과 무신정권은 이제 더 이상 고려 민중에게 희망과 구원의 존재가 아니었다. 고려 조정과 무신정권으로부터 민중이 등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전세는 급격하게 고려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1259년(고종 45) 1월 3일 몽고군이 성주(成州, 평남 성천) 기암성(岐巖城)을 공격하자 야별초가 성안의 군민들과 함께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동계 방면으로 침투한 산지대왕의 몽고군은 화주를 거쳐 고원(高原)->문천(文川)->원산(元山)->통천(通川)->회양(淮陽)->고성(高城) 등지를 차례로 유린하고 금강성(金剛城)을 점령한 다음 인제(麟蹄)의 한계성(寒溪城)까지 남하하여 고려 동부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고려는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몽고와의 강화 교섭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고 원수 자랄타이는 강화도 대안 일대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는 한편 고려 태자의 출륙을 조건으로 강화를 제의하였다. 몽고의 제의는 고려 조정의 출륙환도와 국왕의 입조, 국왕과 태자의 군전항복(軍前降伏) 등 종전의 요구를 모두 철회한 것으로 대고려 강경방침을 완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몽고군의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강화교섭을 진전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제의를 거부하였다.
1231년부터 고려를 침공한 몽고는 단기간에 굴복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는 오판이었다. 몽고는 1259년까지 30여 년 동안 11회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지만 전략상의 시행착오와 전황의 교착으로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의 손실만 입은 채 결국 굴복시키지 못했다. 몽고는 고려가 지금까지 그들이 멸망시킨 아시아와 유럽의 나라들과는 달리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몽고는 고려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몽고는 고려 태자의 출륙과 고려의 복속을 약속받고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강화교섭을 서둘렀다.
몽고의 속셈을 간파한 고려는 이 제안를 거부함으로써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교섭을 성립시키고자 하였다. 고려의 태도에 분개한 몽고는 1258년 8월부터 1259년 1월까지 강화도 대안인 경기도와 서해도 해안 일대에 총공격을 감행하여 초토화시켰다. 강화도 대안 지역에 대한 몽고군의 초토화작전으로 내륙으로부터의 지원이 완전히 봉쇄되자 고려 조정은 강화도를 근거지로 한 대몽항쟁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절감했다. 고려는 국왕이 몽고 조정에 입조하지 않는 선에서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고려 민중의 엄청난 희생과 전국토가 쑥대밭이 되는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국왕의 입조라는 치욕적인 조건이 철회된 이상 고려도 몽고와의 전쟁을 지속하여 피해를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고려는 1259년(고종 46) 3월 몽고군 본진에 사자를 보내 몽고 원수 자랄타이와 강화교섭을 벌이게 하였다. 려몽 양국은 고려 태자의 입조와 몽고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기본조건으로 한 강화교섭을 재개하였다. 3월 8일 강화도에 들어온 자랄타이의 사자가 고려 태자의 입조만을 조건으로 몽고군이 고려에서 철수한다는 제안을 수락한다고 통고함으로써 강화가 성립되었다. 몽고군은 랴오양으로 철수를 개시하여 3월 하순까지 전병력을 고려 영내에서 철수시켰다. 이로써 제7차 려몽전쟁(제3차 자랄타이의 침입)이 끝남과 동시에 30여 년에 걸친 고려와 몽고의 전쟁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몽고는 고려로부터 형식적인 복속과 태자의 입조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고려와 평화적인 국교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는 몽고군 포로 전원을 송환하고 강화도의 성곽을 철거하는 등 강화조건을 이행하여 몽고에 대한 성의를 보였다. 1259년 4월 21일에는 강화체결의 후속조치로 태자 왕전(王倎)과 참지정사 이세재(李世材), 추밀원부사 김보정 등 40여 명의 사신 일행을 몽고 수도 카라코룸(喀喇和林, 和林, 和寧, 몽고 서부 오논 강 상류 우안의 에르데니자오 부근)으로 보냈다.
1259년 5월 18일 랴오양에 도착한 고려 태자 왕전은 몽고 헌종 몽케가 대남송 공격을 총지휘하기 위해 카라코룸을 떠나 간쑤성(甘肅省) 룽더현(隆德縣)의 류판산(六盤山)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5월 19일 랴오양을 떠난 왕전 일행은 옌징(燕京, 베이징)과 시안(西安)을 거쳐 7월 하순 류판산에 이르렀다.
6월 30일 고려 고종이 대사성 유경의 집에서 재위 46년만에 68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7월 20일에는 몽고 헌종 몽케가 쓰촨성(四川省) 허저우(合州, 허촨)의 댜오위산(釣魚山) 진중에서 급병으로 사망했다. 고려 국왕과 몽고 황제가 한 달 사이에 연달아 사망함에 따라 동아시아에 커다란 정치적 환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왕전은 댜오위산의 몽고 황제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서야 강화의 최종 결정권자인 몽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왕전은 몽케의 사망으로 인한 제위의 향방이 불투명한 몽고의 내정을 감지하고 여러 경로를 통해서 정보를 수집한 결과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쿠빌라이가 제위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판단했다. 왕전은 즉시 쿠빌라이군이 주둔하고 있던 후베이성(湖北省) 어저우(鄂州)로 향했다. 윤11월 하순 왕전 일행은 허난성(河南省) 린루현(臨汝縣)에서 북상하고 있던 쿠빌라이군과 조우하였다.
쿠빌라이는 왕전과의 회견을 통해서 강화 성립에 관한 현안에 동의하고, 자신이 제위에 오른 뒤 정식으로 두 나라의 국교를 정상화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그는 고려와의 강화를 환영하면서 '고려는 만리 밖의 먼 나라로서 그 옛날 당나라 황제 태종이 대군을 거느리고 친정(親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지 않았던가! 이제 바로 그 나라의 태자가 스스로 나를 만나러 왔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왕전은 차기 유력한 제위 계승자인 쿠빌라이와의 회견을 통해서 강화의 기본원칙에 합의한 뒤 고종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길에 올랐다.
1260년(원종 1) 1월 석도(席島, 황해남도 과일군)와 가도(假島, 남포직할시 강서구역)의 백성들이 학정에 저항하여 봉기하였다. 고려 조정은 이교(李喬)를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도령(都領) 위득유(韋得柔)를 파견하여 토벌하고 지도자인 내동(來同) 등을 처형했다.
1260년 3월 15일 왕전은 강화도에서 고종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사람이 곧 고려 제24대 왕 원종(元宗)이다. 3월 하순 쿠빌라이도 허베이성(河北省) 카이핑부(開平府)에서 대칸(大汗)에 올라 몽고의 제5대 황제(세종)가 되었다. 몽고 세조 쿠빌라이는 4월 24일 고려에 국서를 보내 원종의 즉위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이후 30여 년 동안 적대관계를 유지해 온 고려와 몽고의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1260년(원종 1) 4월 29일 고려 원종은 영안공(永安公) 왕희(王僖)를 몽고에 보내 쿠빌라이가 몽고 제5대 대칸(황제)에 즉위한 것을 축하하는 국서를 전달하였다. 왕희는 몽고와의 현안에 대해 세부적인 교섭을 벌인 결과 쿠빌라이로부터 '고려인은 복식을 고려의 풍습대로 하되 반드시 몽고식을 따르지 않아도 좋다, 몽고 조정에서 정식으로 파견하는 사신 외에는 몽고인의 고려 출입을 일체 금한다, 고려의 개경 환도는 형편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행한다, 압록강 국경지대에 주둔하는 몽고군은 금년(1260) 가을까지 완전히 철수한다, 고려에 파견된 몽고 사신들은 임무가 끝나는 즉시 모두 귀환한다, 몽고 거주를 희망하는 고려인은 그 거처를 철저하게 파악하여 살게 하되 차후로는 일체의 이주와 거류를 불허한다.'는 등 6개 조항의 약조(約條) 문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1260년 5월 몽고 세조 쿠빌라이는 고려인 포로 및 도망자 440여 호를 고려로 돌려보내면서 고려와의 우호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할 것임을 천명했다. 쿠빌라이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특히 고려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30여 년 동안 7차에 이르는 려몽전쟁에서 고려인들이 치열한 항쟁을 전개한 결과 얻어낸 정신적 승리의 결과였다. 쿠빌라이는 려몽전쟁을 통해서 고려인들이 보여준 불굴의 항전의지를 결코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송에 대한 공격도 중지한 채 내정의 안정을 도모하던 쿠빌라이에게도 고려와의 강화 성립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그 이면에는 몽고가 추진중인 일본 정복전쟁에 고려를 동맹국으로 이용하려는 저의도 깔려 있었다.
1261년(원종 2) 원종의 태자 왕심(王諶, 뒤의 충렬왕)이 몽고에 입조하였고, 1264년(원종 5) 8월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고려 국왕이 원나라 제실에 친조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강화도의 김준 무신정권은 출륙환도를 계속 늦추면서 몽고의 직접적인 간섭이 미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세력을 키워나갔다.
1266년(원종 7) 몽고는 일본정벌 계획을 구체화한 뒤 고려의 협력을 요구하였다. 1268년(원종 9) 3월 몽고는 사신을 보내 징병에 관한 조서를 전하면서 김준 부자 및 아우 김충(金沖)을 모두 옌징(燕京)으로 입조하도록 명했다. 이에 무신정권 내부에서는 몽고 사신을 죽이고 도읍을 탐라(耽羅, 제주)로 옮기자는 해도재천도론(海島再遷都論)과 대몽항쟁론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화의를 주장하는 원종과 문신관료들의 반대로 해도재천도론과 대몽항쟁론은 실행되지 못했다.
원나라의 입조명령에 두려움을 느낀 김준은 장군 차송우(車松佑)와 의논한 뒤 몽고 사신을 죽이고 원종의 제거를 꾀했으나 김충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몽고의 힘을 빌어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던 원종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준의 제거를 바라는 원종의 뜻을 알게 된 추밀원부사 임연(林衍)은 환관 강윤소(康允紹), 김경(金鏡), 최은(崔恩) 등과 함께 궁중에서 김준 일족을 참살하였다. 이로써 10여 년에 걸친 김준의 무신정권은 막을 내리고 임연이 정권을 잡았다.
원종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임연은 왕의 측근인 김경과 최은 등을 살해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 장계열(張季烈), 대장군 기온(奇蘊)을 섬으로 유배보냈다. 몽고와의 화의가 진전되고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를 추진하자 임연의 입지는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이에 임연은 1269년(원종 10) 6월 삼별초와 6번 도방(六番都房)을 거느리고 원종을 폐위시킨 뒤 왕의 아우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는 한편 자신은 교정별감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11월 몽고가 사신을 보내 압력을 가하자 임연은 원종을 복위시키고 왕창을 사저로 돌려보냈다.
1269년 12월 원종은 폐위되었다가 복위된 사정을 쿠빌라이에게 보고하기 위해 몽고로 출발하면서 순안후(順安侯) 왕종(王悰)에게 국사를 맡겼다. 원나라 제실에 친조한 원종은 출륙환도를 약속하고 임연을 제거하기 위한 군대를 요청하였다. 1270년(원종 11) 2월 임연이 자신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근심으로 인해 등창이 나서 죽자 왕종은 임연의 아들 임유무(林惟茂)에게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제수했다.
1270년 5월 몽고는 톡토르(脫朶兒)를 고려의 다루가치로 임명하면서 고려의 내정을 간섭할 의사를 분명히 했다. 봉주에는 몽고의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가 설치되어 몽고군이 고려에 상주하게 되었다.
몽고의 동경행성(東京行省)에서 국왕 두련가(頭輦哥)와 조평장(趙平章)이 지휘하는 몽고군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오던 원종은 먼저 상장군 정자여(鄭子璵)와 대장군 이분희(李汾禧)를 고려로 보내 무신정권의 출륙환도를 명했다. 개경으로의 환도는 곧 무신정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임유무는 원종의 명을 거부하고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 야별초를 전국각지로 보내 백성들을 산성과 해도에 입보시켜 몽고군을 방어하게 했다. 이에 임유무의 매부인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와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 송송례(宋松禮), 장군 김지저(金之氐)는 임유무를 죽인 뒤 서방 3번(書房三番)과 조성도감(造成都監)을 없애고 왕정을 복고시켰다.
개경으로 돌아온 원종은 사판궁(沙坂宮)에 거처를 정했으며 비빈(妃嬪)들도 강도에서 돌아왔다. 이로써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된 이후에도 무신정권이 온갖 구실을 붙여 10여 년 동안이나 미루었던 개경으로의 환도가 마침내 이루어졌다. 환도 이후 고려는 자주성을 상실하고 몽고의 완전한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한제국 말기 을사오적이 국권을 제국주의 일본에 갖다 바친 것처럼 고려 원종도 왕실의 보전과 왕권의 강화를 위해 자진해서 나라를 들어 몽고에 바쳤던 것이다. 왕실과 지배층들에게 있어 민중들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고려궁지(高麗宮址) 승평문(昇平門)
삼별초는 원종의 출륙환도 명령을 거부하고 강화도의 부고(府庫)를 열어 식량과 재물을 탈취했다. 강화도로 파견된 김지저는 환도를 결정하였다는 조정의 방침을 통고하고 삼별초의 해산을 명하면서 삼별초 명부를 압수했다. 그러나 삼별초는 고려 조정이 아니라 무신정권에 충성하는 군대였다. 무신정권이 타도되고 환도가 이루어지자 대몽항쟁의 주역이었던 삼별초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무신정권 치하에서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던 고려 왕실과 문신들은 몽고를 등에 업고 삼별초에 대한 응징과 보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몽고는 대몽항쟁의 선두에 섰던 삼별초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삼별초는 자신들의 명부가 몽고의 손에 들어갈까봐 두려웠다. 결국 삼별초는 계속적인 대몽 무장투쟁의 길로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6월 1일 장군 배중손(裴仲孫)과 지유(指諭) 노영희(盧永禧), 장군 김통정(金通精) 등은 반정부, 반몽고의 기치를 들고 삼별초를 지휘하여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부(官府)를 설치함으로써 새 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삼별초정부는 대장군 유존혁(劉存奕)을 좌승선(左承宣), 상서성좌승(尙書省左丞) 이신손(李信孫)을 우승선(右承宣)에 임명했다.
삼별초정부가 강화도를 중심으로 몽고와 고려에 대항하는 항전태세에 들어가자 문무관료들과 백성들은 앞다투어 육지로 탈출하였다. 강화도의 민심은 흉흉해지고 방어태세는 이완되었다. 강화도의 성곽마저 철거되어 방어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삼별초정부는 새로운 항쟁의 근거지로 진도(珍島)를 선택했다. 1270년 6월 3일 삼별초정부는 1천여 척의 함선에 가족과 재화를 싣고 진도로 향했다. 고려 수군이 삼별초군을 발견했지만 기세에 눌려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두련가국왕은 도라다이(朶刺歹)로 하여금 군사 2천여 명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가게 했다. 강화도로 들어간 도라다이는 군사를 풀어 재물을 약탈했다. 6월 13일 역적추토사(逆賊追討使)에 임명된 김방경(金方慶)은 몽고군과 함께 삼별초군을 추격했다. 8월 두련가국왕이 사람을 시켜 강화도의 민가에 불을 지르자 많은 양곡과 재물이 잿더미로 변했다.
8월 19일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용장산성(龍藏山城)을 쌓아 요새화하는 한편 궁실과 관청 등의 건물을 신축하여 임시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인근 30여 개의 섬과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장악한 삼별초군은 그 세력이 경상도 동래까지 확장되었다. 삼별초군은 몽고 황제의 교지를 위조해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로 하여금 백성들의 추수를 독촉해서 바닷섬으로 옮겨 살게 했다. 불안해진 고려 조정은 9월 초순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전라도토적사(全羅道討賊使)로 임명하고 전주부사 이빈(李彬)과 함께 삼별초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그러나 신사전의 고려군은 삼별초군이 나주로 진출하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9월 고려 조정은 김방경을 전라도추토사(全羅道追討使)로 임명해 몽고 원수 아카이(阿海)와 함께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진도의 삼별초군을 토벌하게 했다. 삼별초정부는 진도가 위기에 처할 경우 탐라를 대몽항전의 새 거점으로 삼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탐라는 본토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큰 섬이었기에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하고 독립성도 강했다. 또한 탐라는 고려와 일본, 남송 등 3국을 연결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어 전략적 가치도 매우 큰 섬이었다.
1270년 11월 3일 진도의 삼별초정부가 탐라를 확보하기 위해 보낸 선발부대장 이문경(李文京) 지휘하의 삼별초군은 탐라의 명일포에 상륙하여 동제원(東濟院, 제주시 화북동 오현고등학교 앞거리)에 진을 쳤다. 이문경의 삼별초군은 송담천(松淡川, 화북천)에서 영암부사(靈巖副使) 김수(金須), 장군 고여림(高汝霖)이 이끄는 1천여 명의 고려 방어군을 격파하고 조천포(朝天浦,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조천항)에 웅거하였다. 삼별초군은 진도에 이어 또 하나의 강력한 거점을 확보하였다. 삼별초군은 여세를 몰아 경상도의 금주(金州, 김해), 밀성(密城, 밀양), 남해, 창선(昌善, 남해군 창선면), 거제, 합포(合浦, 창원시 마산합포구 합포동) 등지를 세력권에 넣었다. 삼별초군에 의해 해로가 차단당하자 전라도 지역의 세곡선들이 서해로 항해할 수가 없어 개경을 비롯한 고려의 여러 도시는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렸다.
1271년(원종 12) 1월 밀성군(密城郡, 경남 밀양)의 방보(方甫), 계년(桂年), 박평(朴平), 박공(朴公), 박경순(朴慶純), 경기(慶琪) 등은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방보 등은 진도의 삼별초군과 호응하기 위해 부사(副使) 이이(李頤)를 죽이고 스스로 개국병마사(改國兵馬使)가 되어 각 군현(郡縣)에 창의문(倡義文)을 보냈다. 개국병마군(改國兵馬軍)의 한 주력부대가 청도감무(淸道監務) 임종(林宗)을 살해하자 청도군(淸道郡) 사람들은 거짓으로 투항하는 체하고 술을 취하도록 마시게 한 뒤 모두 살해했다.
개국병마군에 가담하기로 했던 일선현령(一善縣令) 조천(趙阡)은 봉기군 주력부대가 청도에서 섬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들이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마음을 바꿔 같은 고을 사람 손일(孫逸)과 함께 봉기군 지도자들을 살해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때 안찰사(按察使) 이오(李敖)가 금주방어사(金州防禦使) 김훤(金晅), 경주판관(慶州判官) 엄수안(嚴守安)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개국병마군을 기습하자 조천과 손일은 방보 등의 목을 베어 가지고 투항하였다. 이로써 개국병마군은 결국 평정되고 말았다.
밀성의 개국병마군 봉기가 실패한 며칠 뒤 노예 처지를 비관하던 개경의 숭겸(崇謙), 공덕(功德) 등 관노들은 진도를 중심으로 한 삼별초군의 해방세상을 동경하면서 자유를 갈구했다. 몽고에 대한 적개심이 많았던 이들은 다루가치를 비롯한 개경의 관리들을 죽인 뒤 삼별초군에 합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대정(隊正) 송사균(宋思均)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었다. 2월 고려 조정은 숭겸 등 네 명을 처형해서 저자에 기시하고 나머지는 석방했다. 송사균에게는 섭별장(攝別將)을 제수하고 은병(銀甁)과 나견(羅絹) 등을 상으로 주었다.
1271년 2월 7일 착량(窄梁,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던 몽고군이 대부도(大阜島,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에 쳐들어와서 주민들을 학살하고 노략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개경의 숭겸 등의 관노봉기 소식을 듣자 무기를 들고 몽고군에 대한 항쟁을 전개했다. 고려 조정은 수주부사(水州副使) 안열(安悅)을 파견해 대부도 봉기군을 토벌했다. 대부도 봉기군을 진압한 공로로 안열은 5품으로 승진되고, 수주(水州)는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이처럼 고려 민중들에게 고통을 주는 근본적인 원인은 고려 왕조전제정권이었다. 따라서 고려 민중들이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고려 왕조전제정권을 전복시키고 백성이 주인되는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길 밖에는 없었다. 수많은 민중봉기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 수립은 조선시대에도 불가능했으며,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선거로 뽑는다고 다 민주정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노예정신이 뼛속까지 박힌 유권자들이 뽑은 정부는 절대로 민주정부가 될 수 없다.
1271년 11월 몽고 세조 쿠빌라이는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바꿨다. 몽고군이 유라시아를 석권했음에도 유일하게 일본만은 정복하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일본에게 조공을 바치라고 강요했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남송과의 무역관계를 지속했다. 일본은 고려와도 우호관계에 있었다. 쿠빌라이는 일본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면서 그 비용은 고려에서 충당하도록 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묘안을 짜냈다.
원(元) 세조 쿠빌라이는 일본을 정벌하고 조공을 받아내는 한편 남송과의 무역을 차단함으로써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여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몽고제국의 완성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일본을 정벌하면 종래의 려일(麗日) 친선관계가 적대관계로 바뀌면서 자연스레 이이제이(以夷制夷)가 되어 양국이 동맹을 맺고 원에 대항하지 못할 것이었다. 또, 일본 원정에 소요되는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고려에 지움으로써 몽고에 끝까지 저항한 고려의 저항력을 말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쿠빌라이는 일본 정벌에 삼별초군이 큰 장애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금주둔전경략사(金州屯田經略使) 친두(忻都, 忽敦)로 하여금 고려 주둔 몽고 둔전군(屯田軍) 6천여 명을 동원하여 진도를 공격하도록 명하고, 일본 정벌을 위해 개발한 신병기인 철포(鐵砲)의 사용을 허락했다. 1271년 5월 15일 몽고 원수 아카이(阿海)가 지휘하는 려몽연합군은 진도의 대안인 해남(海南) 삼견원(三堅院)에 집결하여 공격 준비를 마쳤다. 전라도추토사 김방경은 고려군, 친두와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洪茶丘)는 몽고군의 지휘를 맡았다.
려몽연합군의 함대가 진도로 향하자 삼별초군은 이들을 명량해협(鳴梁海峽, 울돌목)에서 맞아 싸웠다. 려몽연합군의 강력한 철포 사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삼별초군은 배를 버리고 진도로 퇴각하여 해안에 구축된 방책을 최후방어선으로 삼아 완강하게 저항했다. 맹렬한 철포 공격으로 해안 방어선이 무너지자 삼별초군은 용장산성으로 들어갔다. 삼별초군은 전력을 다해 항전했지만 철포의 위력에 밀려 궤멸되고 말았다. 용장산성이 함락되자 삼별초군은 금갑포(金甲浦)와 남도포(南桃浦)로 퇴각하였고, 이들을 추격한 려몽연합군은 삼별초정부의 왕인 왕온을 살해하고, 남녀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배중손은 남도포로 이동하여 항전하다가 전사했다. 금갑포로 탈출한 김통정은 나머지 삼별초군을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가 재기를 도모하였다. 삼별초군은 항파두리성(缸波頭里城,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과 애월성(涯月城, 애월읍 애월리) 등 탐라의 해안 3백여 리에 걸쳐 장성을 쌓는 한편 전함을 건조하여 려몽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1971년 말이 되자 삼별초군은 진도 함락 이전과 같은 전력으로 회복되었다.
1272년(원종 12) 6월 삼별초군 함대는 서해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경기만(京畿灣)의 영흥도(靈興島, 인천시 옹진군)까지 진출하여 작전을 전개했다. 이어 강화만을 장악한 삼별초군은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개경으로 진격하려는 기세를 보이면서 고려 조정은 위기에 처하는 듯했다. 그러나 삼별초군이 돌연 북상을 중지하고 남하하여 남해안 일대를 공략함으로써 고려 조정은 위기를 넘겼다.
1272년 8월 삼별초군은 전라도로부터 개경으로 향하던 세곡운반선을 공격하여 세미 8백여 석을 탈취하였다. 9월에는 고란도(高瀾島, 원산도, 충남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리) 부근에서 고려 전함 6척을 침몰시키고, 조선소를 기습하여 일본 정벌을 위해 건조중이던 병선을 모조리 불태웠다. 또, 조선기술자들을 포로로 잡고 인부들을 살해하였다. 11월에는 경상도 합포로 진출하여 고려 전함 20척을 불태우고, 거제도 인근에서 전선 3척을 불사름으로써 려몽연합군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1272년 11월 몽고는 삼별초군을 진압하지 않고서는 일본 정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탐라에 대한 군사작전을 준비하였다. 몽고는 삼별초군을 토벌한 뒤 탐라를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로 삼는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려몽연합군은 고려 주둔 몽고 둔전군(屯田軍) 2천 명과 증원군 2천 명, 무위군(武衛軍) 2천 명, 고려군 6천 명 등 총 1만 2천여 명의 병력과 수수(水手, 선원) 3천 명으로 편성되었다. 나중에는 1만여 명의 병력이 더 증원되었다. 전라도에서는 함선 160척을 소집하였고, 경상도에서는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고려군의 지휘는 김방경, 몽고군의 지휘는 친두와 홍다구가 맡았다.
1273년(원종 13) 1월 삼별초군은 10척의 전함으로 전라도의 낙안군(樂安郡, 전남 순천시 낙안면과 외서면, 벌교읍 일대)을 기습한 뒤, 일본 정벌의 전초기지였던 합포를 공격하여 다수의 몽고군을 죽이고 32척의 전함을 불살랐다. 합포는 전초기지로서의 기능이 거의 상실되다시피 했다. 전함을 이용한 삼별초군의 활발한 해상작전은 려몽연합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삼별초군의 존재는 몽고의 일본 정벌 계획과 고려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큰 장애가 되었다. 쿠빌라이는 려몽연합군에 삼별초군의 조기진압을 명했다.
1273년 4월 9일 2만 2천여 명의 려몽연합군은 전라도 반남현(潘南縣, 나주시 반남면)에서 탐라를 향해 출항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갖춘 려몽연합군은 추자도에 일단 정박한 뒤 본격적인 탐라 공격에 나섰다. 4월 28일 새벽 좌군(左軍)과 우군(右軍), 중군(中軍)으로 편성된 려몽연합군은 탐라에 상륙하여 삼별초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김방경이 지휘하는 중군(中軍)은 항파두리성과 애월성의 삼별초군을 유인해서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양동작전을 전개하여 동쪽의 함덕포(咸德浦,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 상륙하였다.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이끄는 중군의 선봉부대는 함덕포에 매복한 삼별초군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이어 장군 나유(羅裕)가 지휘하는 정예군이 상륙하여 삼별초군 잔여병력을 섬멸했다.
좌군(左軍)은 항파두리성 서북쪽의 비양도(飛揚島,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에서 한림(翰林) 해안으로 상륙한 다음 철포를 동원하여 삼별초군의 지휘부를 공격하였다. 삼별초군은 항파두리성을 사수한다는 각오로 사투를 벌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삼별초군 진영에는 무기와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좌군이 집중적인 포격으로 항파두리 외성(外城)을 돌파하자 1천 3백여 명의 삼별초군은 항파두리 내성(內城)으로 후퇴하여 항전하였다. 삼별초군의 최후거점이었던 항파두리성은 결국 려몽연합국에 의해 함락되고 삼별초군의 지휘관인 이순공(李順恭), 조시적(曹時適)은 투항했다. 김방경이 항파두리성에 들어가 삼별초군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3년간에 걸친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막을 내렸다. 70여명의 부하들과 한라산으로 들어간 김통정은 자결하였다.
삼별초군의 항쟁이 진압된 뒤 제주도에는 몽고군 5백여 명, 고려 경군 8백여 명, 외별초(外別抄) 2백여 명 등 1천 5백여 명의 려몽연합군이 주둔하였다. 삼별초군의 잔여세력 소탕과 치안유지가 목적이었다. 삼별초군을 토벌한 공로로 김방경은 시중, 변윤(邊胤)은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김석(金錫)은 상장군(上將軍)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나유와 송보연(宋甫演)은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1273년 6월 몽고는 탐라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하고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를 파견되었다. 탐라는 몽고의 식민지가 되어 탐라총관부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고려 관군과 몽고군 연합군이 반몽과 반고려의 기치를 들고 봉기한 삼별초군을 토벌한 과정을 보면 구한말 조선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이 위정척사(衛正斥邪)와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부르짖으며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들고 봉기한 동학혁명군(東學革命軍)을 토벌한 과정과 흡사하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전제정권은 왕권의 강화와 왕실의 보호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현재의 우리는 과연 미국, 일본 등 외세로부터 자유로울까?
한반도 역사상 가장 장기간의 대외항쟁이었던 려몽전쟁은 끝났지만 일부 도서지역을 제외한 전국토가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혀 황폐화되었다.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는 엄청난 공물(貢物)과 군량(軍糧), 병선(兵船) 등의 제공을 강요당했다. 고려 민중들은 고려 조정과 원나라에 의한 이중 수탈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오랜 기간 지속된 식량 부족으로 고려 민중들은 아사 직전의 벼랑으로 내몰렸다. 친원세력(親元勢力)과 특권 관료집단의 대토지 사유화로 경작지마저 잃은 고려 민중은 유랑민이 되어 떠돌았다.
원나라는 몽고 제실(帝室)과 고려 왕실의 통혼정책(通婚政策)을 추진하여 고려를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려고 기도하였다. 충렬왕(忠烈王) 이후 공민왕(恭愍王)까지 고려의 역대 왕은 몽고 제실의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었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왕자는 뚤루가(禿魯花, 質子)가 되어 원나라로 들어가 몽고식 교육을 받고 제실의 부마가 되어야만 고려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원 제실과 고려 왕실 사이에 혈통과 풍속의 혼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이런 현상은 고려 귀족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갔다. 고려 귀족의 자제들 가운데 뚤루가가 되어 원나라에 들어간 자도 있었으며, 일반 백성들의 자녀들이 원 제실의 환관(宦官)이나 공녀(貢女)로 들어간 뒤 출세하여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사람도 생겨났다. 고려 조정에서도 원 제실의 공주인 왕비와 그 측근인 환관들이 몽고를 배경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었으며, 이들을 추종하는 문무관료들은 친원세력을 형성하여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다.
고려의 이러한 망국현상은 제국주의 일본을 배경으로 친일매국노들이 부와 권세를 누리면서 날뛰었던 일제강점기에서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탄압한 친일매국노들이 재빨리 친미세력으로 변신하여 남한의 지배세력이 되고, 그 후손들이 쓴 왜곡 투성이 교학사 국사 교과서를 보라! 이 얼마나 땅을 치면서 통곡할 일인가!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면 오늘날의 한국처럼 되는 것이다! 이 땅의 청년들이여!
'세상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면경련으로 대인기피증까지 생긴 할머니 이야기 (0) | 2013.12.04 |
---|---|
안철수 신당 가칭 '국민과 함께하는 새정치 추진위원회'에 바란다 (0) | 2013.12.03 |
제6차 려몽전쟁(第六次麗蒙戰爭) (0) | 2013.12.03 |
제5차 려몽전쟁(第五次麗蒙戰爭) (0) | 2013.12.03 |
제4차 려몽전쟁(第四次麗蒙戰爭) (0) | 2013.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