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8년부터 1251년까지 몽고의 섭정 카이미쉬는 사신을 보내 출륙환도와 고려 국왕의 입조 등 양국간의 현안을 점진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조건으로 려몽전쟁의 종식과 관계 개선을 요구하였다. 몽고의 외교 노선이 온건론으로 바뀌자 고려도 성의를 보이는 차원에서 강화도 대안인 승천부(承天府) 백마산(白馬山,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천리)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최항이 승천부에 출륙환도의 형식을 갖춘 것은 몽고측에 재침의 명분을 주지 않는 한편 몽고군 재침시 즉시 강화도로 다시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의 이중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몽고는 제위를 둘러싼 권력투쟁으로 인해 군사적 행동을 취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경기도 개풍군과 개성특별시의 경계선에 자리잡은 백마봉(白馬峰)
귀위크 사후 제위 계승 문제로 혼란에 빠졌던 몽고는 1251년(고종 38) 6월 바투와 연합한 툴루이 가문의 장자 몽케(蒙哥)가 오고타이 가문의 시라문을 물리치고 제4대 황제(헌종, 憲宗)가 되었다. 몽케는 쿠빌라이(忽必烈)와 훌라구(旭烈兀)의 맏형이었다. 오고타이 이후 제위가 순조롭게 이어지지 못하고 오랜 기간의 공백과 권력투쟁을 거쳐 가까스로 이루어짐으로써 몽고 제국은 분열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몽케의 제위 계승으로 안정을 되찾은 몽고는 1251년 10월 사신을 보내 출륙환도와 고려 국왕의 입조를 재촉하면서 불이행시 무력에 의한 응징을 경고했다. 이에 최항이 문무관료회의를 소집해서 대책을 논의한 결과 몽고에 사신을 보내 이듬해 6월까지 출륙환도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몽고군의 출병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60세의 고령으로 와병중인 고종 대신 태자가 입조할 수 있도록 양해를 구하게 했다.
1252년(고종 39) 1월 최항은 추밀원부사 이현(李峴)을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 출륙환도와 입조문제를 절충케 했다. 몽고 헌종 몽케는 이현과의 면담을 통해서 고려가 출륙환도와 국왕의 입조를 이행할 의지가 있는지 물었다. 몽케는 사신 일행을 억류하고 서장관(書狀官) 장일(張鎰)을 몽고 사신 도케(多哥), 아투(阿土)와 함께 고려로 보내 출륙환도의 진의를 확인코자 했다. 몽케는 도케 일행에게 만약 고려 왕이 직접 영접하지 않으면 출륙환도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즉시 돌아오라는 밀령을 내렸다.
1252년 7월 몽고 사신 일행이 승천부에 도착했다. 7월 16일 고려 조정은 어전회의를 열고 고종이 직접 승천부로 나가 몽고 사신을 영접함으로써 성의를 보여주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무인집정 최항은 신안공(新安公) 왕전(王佺)을 승천부로 보내 몽고 사신을 강화도의 제포관(梯浦館)으로 맞아들인 뒤, 여기서 고종의 환영연을 베풀자고 주장했다. 최항의 말은 곧 고려의 법이었다. 최항의 주장에 따라 영접 절차를 밟자 몽고 사신은 고려 국왕의 환영연을 거부하고 갑곶강(甲串江)을 건너 몽고로 되돌아갔다.
만약 이때라도 최항이 고종으로 하여금 몽고 사신을 출륙친영(出陸親迎)케 했더라면 고려 민중들은 몽고군의 병화를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최항의 대몽강경론은 고려 민중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족과 도당의 안위만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몽고 사신이 영접 절차를 문제 삼아 귀국하자 최항은 몽고군의 재침을 예상하고 전국 각지의 산성과 요새에 방호별감을 파견하여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1252년 8월 최항은 징병기관인 충실도감(充實都監)을 설치함으로써 한인(閑人, 예비병력)과 백정(白丁, 양민)을 점검하고 중앙군에 소속된 각 영(領)의 병력을 보충하는 업무를 전담토록 하였다. 그리고 각지의 백성들을 해도로 입보시켜 전쟁에 대비했다.
몽케는 몽고로 돌아온 도케 일행으로부터 고려의 출륙환도와 국왕의 입조 의사가 없음을 보고받고 고려 정벌을 결심했다. 몽케는 1253년(고종 40) 4월 랴오양에 주둔하고 있던 장군 아모간과 몽케의 동생 쑹주(松柱)에게 명하여 몽고군을 이끌고 고려 북계 방면으로 진출시켜 무력시위를 벌이도록 하는 한편 5월까지 출륙환도와 입조를 이행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그러나 최항은 몽고의 최후통첩을 무시하였다.
1253년 7월 몽고 헌종 몽케는 황족인 예케(也窟, 也古)를 원정군 원수에 임명하고 고려 침공을 명했다. 예케의 부장은 장군 아모간과 고려 반역자 홍복원이었다. 몽고에 억류되어 있던 이현은 예케에게 '강도(江都)는 해도(海島)에 있고 공조(貢租)는 내륙의 주군(州郡)에서 나오므로 추수가 끝나기 전에 내륙을 기습하면 강도는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다'는 말로 고려의 약점을 알려 주었다. 이현은 몽케로부터 금패(金牌)를 받고 예케의 군사고문이 되었다.
1253년(고종 40) 7월 3일 예케의 몽고군은 압록강을 도하하여 고려 북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제5차 려몽전쟁이 발발했다. 몽고군은 고려군의 청야작전으로 무인지경이 된 북계의 남로를 따라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7월 15일에는 서경에 도달하였다. 몽고군은 서경에서 부대를 동군(東軍)과 서군(西軍)으로 나눈 뒤, 쏭주가 이끄는 동군으로 하여금 고려 동부 내륙지방을 종단하면서 초토화하도록 하였다. 예케가 이끄는 몽고군 본진인 서군은 서경->황주->봉주->평주->개경으로 이어지는 진로를 따라 고려 서부 내륙지방을 종단하면서 초토화할 계획이었다. 몽고군의 동서 양면 공격작전은 고려 내륙의 동부와 서부 지역을 동시에 초토화함으로써 강도를 고립시켜 조기에 항복을 받아야 한다는 이현의 계책에 따른 것이었다.
홍복원, 이현과 같은 매국노 부류들은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다. 만주에서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 대한독립군을 토벌하던 민족반역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해방이 되었을 때 박정희, 이주일, 이한림, 강문봉, 김윤근(이상 만주군관학교), 정일권(봉천군관학교), 백선엽, 이범익(이상 간도특설대), 이선근(만주국 혁파위 위원), 강영훈(만주건국대학), 최규하(대동학원), 박흥식 등 만주의 친일파 매국노들은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했어야 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독재정권이 친미파로 변신한 친일파들을 중용한 결과 이들이 이후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이 되었으니 천추의 한이 아닐 수 없다. 배반의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몽고 원수 예케와 부장 아모간, 홍복원이 이끄는 몽고의 서군 본진은 남진하여 8월 초순 황주에 도달했다. 황주에서 서군은 별동대를 편성해서 서해도 안악 서쪽의 양산성(椋山城)을 공격하게 했다. 예케가 지휘하는 서군 본진은 남동진하여 1253년 8월 7일 서해도 금천(金川)에 이르러 부대를 금교, 홍안 등지에 산개시켰다.
이때도 최항은 몽고군이 강화도 해협을 건너 공격해올 것을 대비해 수전훈련만 하고 있었다. 그는 교위(校尉) 대금취(大金就)에게 우봉(牛峰, 황해 금천)의 야별초 30여 명을 주어 육지로 보냈을 뿐이었다. 대금취는 야별초를 이끌고 야간에 몽고 진영을 기습해서 수십 명을 죽임으로써 몽고군을 큰 혼란에 빠트렸다. 대금취는 934년(태조 17) 유민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한 발해 세자 대광현(大光顯)의 후손이었다.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였던 서해도 양산성(椋山城)에는 방호별감 권세후(權世侯)와 군민 4천 7백여 명이 지키고 있었다. 8월 12일 몽고군은 투석기로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한편 사다리를 놓고 성벽을 타고 올라와 불화살을 쏘아댔다. 성안의 관아와 민가에 화재가 나면서 군민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권세후는 성안으로 난입한 몽고병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말 위에서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4천 7백여 명의 군민도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전멸하였다.
쑹주의 동군은 척후기병대를 서경에서 동계의 화주(영흥, 함남 금야)->안변(安邊)->동주(東州, 강원 철원)->춘주(春州, 강원 춘천)->광주로 이어지는 진로를 따라 내려보내 북계로부터 남진하고 있던 예케의 서군과 연락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동군 주력부대는 척후기병대의 뒤를 따라 삼등과 양덕(陽德)을 지나 8월 14일 화주를 함락시켰다.
쏭주의 동군 주력부대는 안변에서 척후기병대가 남진한 경로를 따라 8월 하순 동주성 북쪽 근처까지 이르렀다. 동주성에는 방호별감 백돈명(白敦明)과 동주부사, 판관, 인근의 금성(金城, 강원 김화), 금화(金化, 강원 김화)의 수령 및 군민들이 들어와 농성하고 있었다. 이때 추수를 위해 백성들을 성밖으로 내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방호별감과 현지 수령들 사이에 이견이 발생했다. 백돈명은 몽고병이 가까이 있으므로 백성들의 출입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고집했고, 현지 수령과 주리(州吏)들은 몽고군이 더 접근하기 전에 성을 나가 신속하게 추수를 마쳐 식량을 비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돈명은 출성추수(出城秋收)를 주장하는 주리의 목을 벰으로써 군민들의 원망을 샀다.
8월 27일 몽고 동군은 동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몽고군의 공격에 대한 대응전략을 놓고 백돈명과 현지 수령들은 또 한차례 의견이 충돌했다. 현지 수령들은 험준한 동주성의 지세를 이용하여 농성하다가 몽고군이 약점을 보일 때 기습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백돈명은 몽고군이 포위망을 굳히기 전에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돈명은 현지 수령과 참모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6백여 명의 정병(精兵)을 출전시켰다. 평소 백돈명의 지휘방침에 불만을 품고 있던 병사들은 성밖으로 나오자마자 인근의 산악지대로 흩어져 달아났다. 고려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몽고군은 동주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이 전투에서 백돈명과 동주부사, 판관, 금성현령 등이 모두 전사하고 다수의 부녀자들이 포로로 잡혔다.
무능한 자가 지도자가 되면 이런 꼴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 남한이 처한 상황은 고려시대와 비교해서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투표권이 있음에도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고 사지로 내모는 자들을 자치단체장, 국회의원, 대통령으로 뽑는 사람들은 스스로 노예가 되고 싶은 것인가!
대금취의 기습으로 신중해진 몽고 서군은 토산(兎山, 황해 금천)에서 상원(祥原, 평남 중화)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산개하여 점령지역을 확대하였다. 예케는 3백여 기의 척후기병대를 편성하여 전라도 지방으로 내려보냈다. 척후기병대로 하여금 중부와 남부 지역의 연락을 차단시켜 서군 본진이 고려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남진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8월 하순경 몽고 서군의 척후기병대는 전주 남쪽의 반석역(班石驛)에서 별초지유(別抄指諭) 이주(李柱)가 이끄는 삼별초 부대의 기습을 받고 150여 명 이상이 죽고 말 20여 마리를 빼앗김으로써 예케의 전략에 차질이 생겼다.
예케의 몽고 서군 본진은 개경에서 병력의 일부를 부대로 편성하여 강화도 대안인 풍덕(豊德, 경기 개풍)과 통진으로 진출시켜 강도를 위협하게 하였다. 서군 본진은 남경->광주->여주를 거쳐 9월 9일 충주까지 내려왔다. 충주창정(忠州倉正) 최수(崔守)는 금당협(金堂峽, 일설 충주시 동량면,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분지, 여주 동쪽 10리)에서 매복작전으로 몽고군을 기습하여 15명을 죽이고, 고려인 포로 2백여 명을 구출했다. 금당협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몽고군은 충주 인근 지역을 유린하면서 초토화시켰다.
예케는 몽고 서군 본진의 병력 일부를 충주 서쪽의 천룡성(天龍城, 보련산성, 봉황성, 충북 충주시 노은면)으로 보내 포위 공격하게 함으로써 충주산성(忠州山城)을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몽고군이 몰려오자 천룡성 방호별감 조방언(趙邦彦)과 황려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은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동주성을 격파한 몽고 동군은 동남진하여 춘주성(봉의산성)을 포위했다. 춘주성에는 춘주안찰사(春州按察使) 박천기(朴天器)와 문학(文學) 조효립(曹孝立)이 춘주와 인근 고을의 군민들을 이끌고 들어와 농성하고 있었다. 9월 초부터 몽고군은 고려인 포로들을 동원하여 춘주성 주위에 이중의 목책을 설치하고, 목책 뒤로는 해자(垓子)를 파서 고려군의 기습에 대비하였다. 몽고군은 춘주성을 봉쇄하고 고립시켜서 조기 항복을 유도할 속셈이었다. 몽고군의 포위 공격이 장기화됨에 따라 춘주성의 군민들은 비축식량과 방어용 시석(矢石)이 떨어져 더 이상 수성전을 전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성안의 우물도 말라버려 도살한 소와 말의 피를 마셔야 하는 지경이었다. 수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조효립은 아내와 함께 불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1253년 9월 20일 안찰사 박천기는 6백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가 몽고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시도하였다. 춘주성 결사대는 이중의 목책은 뚫었으나 해자를 돌파하지 못한 채 몽고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박천기를 비롯한 결사대 전원이 전사하였다. 춘주성의 군민들은 최후의 항전을 벌였으나 동쪽과 남쪽의 성문을 부수고 들어온 몽고군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몽고군은 끝까지 항전한 춘주성의 군민 3백여 명을 도륙하였다.
몽고 동군의 별동부대는 8월 중순부터 공격을 시작한 안변성을 10월 1일 악전고투 끝에 함락시켰다. 춘주성에서 승전한 몽고 동군은 부대를 다시 본군(本軍)과 별군(別軍)으로 나눠 본군은 양근성(楊根城, 경기 양평), 별군은 원주로 진출시켰다. 춘주에서 남서진한 동군의 본군은 10월 4일 양근성(楊根城, 경기 양평)을 포위 공격하였다. 양근성 방호별감 윤춘(尹椿)은 성밖으로 나가 싸우다가 몽고군에게 항복했다. 몽고군은 성안의 정예병 6백여 명을 뽑아 윤춘을 지휘관으로 삼고 몽고병 3백여 명을 남겨 성을 지키는 한편 벼를 거두어 군량미를 비축하였다.
춘주로부터 남진한 동군의 별군은 10월 초 원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윤춘이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음에도 원주성 방호별감 정지린(鄭至麟)은 군민들과 함께 몽고군에 끝까지 항전하였다. 원주성을 조기에 함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몽고군은 정면 공격을 피한 채 원주 주변을 노략질하면서 고려군을 성밖으로 유인해 내려고 기도하였다. 동군의 별동부대는 안변에서 통천(通川)->고성(高城)->간성(杆城)을 지나 10월 21일 양양(襄陽), 10월 하순 강릉(江陵)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를 유린하였다.
천룡성을 점령한 몽고군은 충주 인근 지역을 초토화하여 충주산성을 고립시켰다. 몽고 원수 예케는 동군의 주력부대와 서군의 주력부대를 합류시킨 대군을 이끌고 10월 10일경 충주로 내려왔다. 예케군은 영남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충주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충주산성에는 처인성 전투에서 몽고 장군 살리타를 사살하여 제2차 려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김윤후가 충주산성방호별감(忠州山城防護別監)으로 와 있었다.
충주산성 전투를 지휘하던 몽고군 원수 예케는 갑자기 병이 들어 본대의 일부 병력만을 이끌고 평주로 돌아갔다. 1253년 11월 중순 교위 장자방(張子邦)이 이끄는 교동(喬桐, 강화도 서북쪽의 섬)의 별초군이 평주의 예케 본진을 기습하여 십호장(十戶長) 20여 명을 비롯한 수십 명을 죽이고, 다수의 말과 병장기를 노획하였다. 교동 별초군의 기습으로 큰 충격을 받은 예케는 고려에서 안전하게 철군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강화교섭을 추진하였다.
몽고는 고려 국왕의 출륙환도와 강화도에 쌓은 성곽의 철거, 고종의 차남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몽고에 인질로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종전(終戰)에 합의하였다. 화의가 체결됨에 따라 고려 고종은 11월 16일 갑곶강을 건너 승천부에 신축한 궁궐로 나가 예케가 보낸 몽고 사신을 맞이했다. 그러나 시중(侍中) 최항과 상서(尙書) 이응렬(李應烈), 주영규(周永珪), 유경(柳璥) 등 무신정권의 실권자들은 강도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고려는 이를 출륙환도라고 주장했으며, 몽고도 고려가 출륙환도를 이행하려는 성의를 보인 것으로 인정했다.
고려와 몽고의 화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충주산성에서는 예케의 부장 아모간과 홍복원이 지휘하는 몽고군의 포위 공격은 70여 일 이상이나 지속되고 있었다. 충주산성 안의 비축식량과 방어용 시석은 바닥나고 군민들의 사기도 저하되어 더 이상 수성전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충주산성이 함락의 위기에 처하자 김윤후는 군민과 노비들을 모아놓고 '누구든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면 귀천의 차별 없이 벼슬을 주겠다'고 선포하고 이들이 보는 앞에서 노비문서를 모조리 불살라버린 뒤 몽고군으로부터 노획한 소, 말들을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이에 사기가 오른 충주산성의 군민들은 죽을 힘을 다해 성을 지켰다. 충주산성 전투의 결과는 방호별감 등 지휘관의 전투 준비와 지휘 능력이 전투의 성패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준다.
충주산성 전투에 발이 묶인 몽고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한 채 고려와 화의를 서두르면서 철군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몽고군은 영남지방으로 남진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경상도의 군민들은 몽고군의 무자비한 약탈과 살륙을 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고려의 동서지역을 양단하여 초토화시킴으로써 강도의 조기항복을 유도하려던 몽고군의 전략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전세가 고려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내륙 깊숙히 진출했던 몽고군은 도처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고려군의 기습을 받고 고전을 면치 못했다.
1253년 12월 3일 안경공 왕창은 고종을 대신해서 몽고에 입조하러 길을 떠났다. 이에 몽고군은 12월 8일부터 충주산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철수를 개시하였다. 1254년(고종 41) 1월까지 몽고군은 고려 영내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몽고는 고려 국왕의 형식적 출륙환도 외에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이로써 제5차 려몽전쟁은 막을 내렸다.
충주산성을 지킨 공로로 김윤후는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제수받았다. 또, 전공을 세운 사람들은 관노, 백정을 막론하고 모두 관작이 제수되었다. 고려 조정은 충주산성을 지킨 공로로 충주목(忠州牧)을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시켰다.
충주산성은 본래 둘레가 1,145m였지만 중간중간 무너지고 775m만이 남아 있었는데, 최근 무너진 성벽 일부를 복원하였다. 대몽항쟁 최대승전지였던 충주산성이 하루빨리 복원되기를 바란다. 역사를 소중히 여긴다면 예산을 새만금방조제나 4대강사업 같은 자연을 망치는 헛된 곳에 쓰지 말고 충주산성 복원 같은 사업에 먼저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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