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려몽전쟁이 종식되자 고려는 동진국과 동맹관계를 맺어 몽고의 재침(再侵)에 대비하려고 하였다. 당시 고려는 남송(南宋)과 금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벌이고 있었다. 고려는 표면적으로는 금나라와 동맹관계였지만 실제적으로는 남송과 협력관계에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금나라와 동진국을 정복하려던 몽고는 고려를 배후의 잠재적 위협 세력으로 인식했다. 몽고는 금나라와 동진국 정벌에 고려가 배후에서 방해하지 못하도록 외교적 압력과 위협을 가하는 등 강온전략을 구사했다. 몽고가 금나라와 동진국 정벌에 힘쓰는 2년 동안 고려는 몽고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
1233년 4월(고종 20) 거복(居卜)과 왕심(往心)은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하여 개경의 서문인 선의문 밖에 위치한 용문창(龍門倉)을 습격하고 양곡을 탈취했다. 식량난으로 아사(餓死) 직전의 위기에 처한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용문창은 부용창(富用倉), 우창(右倉)과 함께 비상시에 대비하기 위한 군량의 비축과 공급을 맡고 있던 창이었다. 고려 조정은 이자성(李子晟)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삼아 거복과 왕심의 농민봉기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거복과 왕심은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식량부족으로 고려 민중들은 굶어 죽어 가고 있는데도 고려 왕실은 무능했고 최우 무신정권은 독재와 부정으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4월 몽고 태종 오고타이는 사신을 보내 고려에 침입한 거란족을 소탕해 주었음에도 사은사(謝恩使)를 보내지 않은 것, 저고여를 죽이고도 거란족 소행이라고 주장하여 책임을 회피한 것, 살리타를 죽이고도 변무주청사(辨誣奏請使)를 보내지 않은 것, 황제의 칙령(勅令)을 전하려고 사신을 보낼 때마다 적대행위를 한 것, 동진국 정벌시 지원군 파견과 고려왕의 입조 명령을 거부하고 강화로 천도한 것, 고려 백성의 호구(戶口) 통계를 보고하라는 명령에 대해 허위로 보고한 것 등에 대한 책임을 추궁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몽고는 고려가 금나라, 동진국과의 동맹관계를 구축하는 것에 대해 제동을 거는 동시에 이런 요구들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정벌의 불가피성을 경고하면서 재침의 명분을 축적했다.
최우는 대장군 정의(鄭毅)와 박록전(朴祿全)을 서경 선유사(宣諭使)로 파견하여 서북면 일대에 남아 있던 몽고군 잔류병들을 소탕하고, 몽고에 투항한 뒤 그 세력을 등에 업고 서경 일대의 고려 진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서경낭장(西京郎將) 홍복원 일당을 제거하려고 기도하였다. 5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홍복원은 낭장(郎將) 필현보(畢賢甫)와 함께 선유사 일행을 기습해서 정의와 박록전을 살해하고 성중의 사람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6월 동경(경북 경주)에서 최산(崔山)과 이유(李儒)는 신라부흥운동을 표방한 토호세력과 강화천도 이후 남도에 부과된 과도한 조세 수취에 분노한 농민군을 이끌고 대규모 반정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고려 조정은 이번에도 이자성을 내려보내 농민봉기를 진압하도록 했다. 이자성의 정부군은 영주성(永州城, 경북 영천) 전투에서 농민봉기군을 궤멸시키고, 최산과 이유 등 주모자 수십 명을 처형했다.
고려와 동진국의 대몽연합전선이 기틀을 잡기도 전인 1233년 6월 푸젠완누가 몽고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수도가 함락되면서 동진국은 멸망하였다. 이로써 동진국과 연합하여 몽고의 침략을 방어하려 했던 고려의 대몽항쟁전략은 큰 차질이 생겼다. 몽고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최우는 오고타이의 요구를 거부하고 대몽강경노선 일변도로 나갔다.
1233년 12월 최우는 자신의 도방군(都房軍) 3천 명을 급파하여 북계병마사 민희(閔曦)와 함께 홍복원 일당의 토벌에 나서 필현보를 사로잡아 개경으로 압송하여 요참형(腰斬刑)에 처했다. 홍복원이 탈출하여 몽고로 도주하자 그의 아비 홍대순과 아우 홍백수(洪百壽) 및 자녀들을 사로잡고, 나머지 백성들을 해도로 이주시키니 서경은 폐허가 되었다. 홍복원은 몽고에 머물면서 려몽관계를 이간질하던 홍복원은 몽고가 고려를 재침하도록 선동했다. 홍복원의 책동으로 려몽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최우는 홍복원의 아비 홍대순에게 대장군, 아우 홍백수에게 낭장을 제수한 뒤 끊임없이 뇌물을 줌으로써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고려가 몽고의 잔당을 소탕하고 서북계 일대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등 반몽행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음에도 몽고는 즉각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고, 국서를 통한 성토문(聲討文)을 보내어 책임을 추궁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금나라에 대한 공격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몽고는 고려에 대한 군사행동을 취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서를 통한 책임 추궁과 외교적 압력은 후일 고려 재침을 위한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1233년 몽고군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하자, 금나라의 마지막 황제 애종(哀宗)은 동남쪽의 채주(蔡州, 하남성 여남현)로 피신하였다. 1234년(고종 21) 1월 금나라 애종(哀宗) 완안수서(完顔守緖)는 채주에서 몽고와 남송 연합군의 포위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하였다. 애종은 최후의 수단으로 궁중대장인 종실 완안승린(完顔承麟)에게 선양 후 탈출하도록 했으나, 그는 도주하다가 몽고군에게 서로잡혀 처형당했다. 채주가 함락당하면서 금나라는 결국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몽고는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손에 넣었다. 거란족과 여진족의 멸망으로 완충지대가 사라지자 고려는 몽고의 침략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밖에 없는 그야말로 순망치한(唇亡齒寒)의 처지가 되었다. 고려가 국제적으로 고립되면서 몽고의 침략 위협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몽고가 침략해 온다면 고려는 고독한 항쟁을 전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금나라와 동진국을 정복한 뒤 강남의 남송을 공격 목표로 삼은 몽고는 려송(麗宋) 동맹관계를 차단할 필요성을 느꼈다. 려송 연합체제가 구축되면 몽고가 남송을 공략할 때 고려가 배후의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불안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몽고는 고려에 대한 재침이 불가피했다. 이때 최우의 사병 집단인 도방군의 북계 출병과 홍복원 일당이 몽고로 도피한 사건은 재침의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2월 몽고군은 동진(東眞)에 백여 명의 기병만 남겨 두고 국경으로부터 철수했다. 고종은 강도(江都)의 봉은사(奉恩寺)에서 열린 연등회에 참석했는데, 이 절은 전 참지정사(參知政事) 차척(車倜)의 집을 고쳐서 만든 것이었다. 강도의 궁전과 격구장, 사찰의 이름은 모두 개경의 원래 이름대로 붙였다. 또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 행향도량(行香道場)도 예전의 법식을 그대로 따랐다. 고려 고종은 나라가 백척간두에 처한 위기를 불력에 의지해서 타개하려고 하였다.
1234년 가을 몽고는 다란바스에서 전략회의를 열고 세계 정복을 위한 전략과 군사행동 방침을 세웠다. 다란바스 전략회의에서 칭기즈칸의 손자인 바투(拔都)와 귀위크(貴由, 구유크), 몽케(蒙哥)는 러시아 동남부와 동유럽 방면에 대한 공략을 맡았다. 코돈과 코츄, 거우온부카는 중국의 남송 정벌을 담당했고, 탕구(唐古)는 고려 정벌을 맡았다. 탕구는 제1, 2차 려몽전쟁 당시 몽고 대장군 살리타를 수행하여 두 차례나 원정군으로 나온 바 있어 고려의 내부사정과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1235년(고종 22) 1월 고종은 맏아들 왕전(王倎)의 관례(冠禮)를 거행하고 태자로 책봉했다. 3월 고려 조정은 정주부사(靜州副使)로 하여금 의주를 함께 다스리도록 명했다. 의주(義州)와 정주(靜州)는 고을이 피폐해지고 거주민들이 강화도로 이주한 까닭에 농경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1235년 봄부터 몽고군은 세계 정복을 위한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바투와 귀위크, 몽케가 이끄는 몽고군은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진격하고, 코돈군은 중국 황하 상류 지역을 점령하였다. 코츄와 거우온부카가 지휘하는 몽고군은 양쯔강(揚子江, 長江) 상류인 회수(淮水) 이남으로 진출하여 양양(襄陽), 떵저우(鄧州) 등지를 공략함으로써 남송을 압박하였다.
1235년 윤7월 몽고군 원수 탕구는 고려 반역자 홍복원을 향도로 삼아 원정군을 이끌고 랴오양(遼陽)으로 진출하였다. 랴오양에서 탕구는 부대를 나눠 북계와 동계(東界, 동북계) 방면으로 향하게 하는 한편 척후기병대를 북계의 함신진(咸新鎭, 평북 의주)으로 침투시켰다. 제3차 려몽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윤7월 15일 서북면병마사로부터 몽고군 기병대가 국경을 넘어 침입한 사실을 보고받은 최우는 경군(京軍)인 5군(좌, 중, 우, 전, 후군)의 진주(陣主, 지휘관)와 지병마사(知兵馬使)로 하여금 강화도 연안을 방어하도록 했다. 그리고 방어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남경(南京, 한성, 서울)과 경기도 광주(廣州)의 백성들을 강화도로 옮겼다. 최우는 몽고군과의 전투에는 경군을 투입하지 않고 소규모 야별초(夜別抄)를 파견하여 백성들과 함께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했다. 이는 경군의 손실 없이 몽고군의 전력을 분산시켜 강화도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최소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최우는 무신정권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고려 최정예군인 경군을 최전선에 투입하지 않고 강화도에만 집중 배치했다.
8월 탕구는 북계로 남진한 주력부대를 북로군(北路軍)과 남로군(南路軍)으로 편성하여 고려를 침략했다. 몽고의 3차 침입은 제1, 2차 려몽전쟁에서의 굴욕적인 패퇴에 대한 보복전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실추된 위신을 만회하기 위해 몽고는 작전계획을 전면 수정하여 공성전(攻城戰)에 주력하지 않고, 기병대를 고려의 전국토에 깊숙히 침투시켜 빠른 기동력에 의한 초토화작전으로 나갔다. 탕구군은 조기에 고려의 항복을 받아낼 목적으로 화의를 제의하는 일도 없이 경상도와 전라도까지 남하하여 닥치는 대로 살륙과 약탈을 저질러 고려 민중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몽고 남로군 선봉부대는 1235년 8월 24일 개경을 거쳐 남경->광주->용인->장호원->충주로 내려가 9월에는 대구까지 남진하여 약탈과 살륙을 자행하였다. 9월 안동(安東, 경북 안동) 사람들이 몽고군을 끌어들여 동경(東京, 경북 경주)으로 쳐들어가려고 하자, 고려 조정은 상장군 김이생(金利生)을 동남도지휘사(東南道指揮使), 충청주도안찰사(忠淸州道按察使) 유석(庾碩)을 부사로 각각 임명했다. 도령(都領) 이유정(李裕貞)이 이끄는 야별초군(夜別抄軍)은 해평(海平, 경북 구미시 해평면)에서 몽고군을 공격하다가 전멸당했다.
9월 동계로 침입한 부대는 동진국 점령지에 주둔하고 있던 몽고군과 여진족으로 편성된 부대와 합류한 다음 국경선을 넘어 정평(定平, 함남 정평)->영흥(永興, 함남 금야)->고원(高原, 함남 고원)을 따라 남진하였다. 이들은 덕원부(德源府, 함남 원산) 동쪽의 용진진(龍津鎭, 함남 문천)과 남쪽의 진명성(鎭溟城, 함남 원산)을 함락시킨 뒤 동해안 일대를 초토화하였다.
몽고군의 초토화작전에 대해 고려 군민은 야별초와 합세하여 유격전을 전개했다. 고려 군민과 삼별초군의 유격전은 몽고군의 예봉을 꺾고 군사적 행동에도 일정 정도 제약을 가했다. 이에 탕구는 1235년 10월 북계와 동계를 통하여 투입된 증원군을 북로군에 배속시킨 다음 서경에서 개경에 이르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정방산성(正方山城, 황해 봉산)과 함께 자비산맥(慈悲山脈) 방어의 요충지인 동주(洞州, 황해 서흥)의 대현산성(大峴山城)을 공격했으나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매우 큰 손실을 입었다.
몽고 북로군은 함신진->삭주->구주->태주(泰州, 평북 태천)->위주(渭州, 평북 영변)->개주(价州, 평남 개천)으로 이어지는 북로를 따라 남하하면서 자주성 등 여러 읍성들을 차례로 점령하고, 1235년 10월에는 동주성(洞州城, 황해 서흥)을공격해서 함락시켰다. 남로군은 함신진->용주->선주->정주->안북부로 이어지는 남로를 따라 청천강 이남의 여러 읍성들을 점령한 뒤 서경->황주->봉주->평주를 거쳐 개경을 향해 남진하였다.
대현산성 전투에서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몽고 북로군은 개경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삭령(朔寧, 경기 연천과 강원 철원 일부)->연천->포천을 거쳐 지평(砥平, 경기 양평)으로 남진하여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을 차단함으로써 고려군의 유격작전을 봉쇄하고자 하였다. 지평에서 야별초와 지역 군민들은 1235년 10월 22일 밤 북로군 진영을 기습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기마(騎馬)와 보급품 운반용 마필을 대량 노획하였다. 전투력을 상실한 몽고군은 결국 안북부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장기전이 될 가능성을 보였다. 1235년 12월 말 몽고군은 원정군을 일단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시켰다. 최우는 1236년(고종 22) 1월 29일 대장군 이영장(李齡長)을 동북면지병마사(東北面知兵馬使),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 손습경(孫襲卿)을 서북면지병마사(西北面知兵馬使)로 임명하는 등 북계와 동계의 방어를 담당할 지휘관의 인사를 단행하고, 변경지역의 주진(州鎭)에 대한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강화도 고려궁지(高麗宮址)
최우는 불력(佛力)으로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강화도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대장경(大藏經)을 다시 판각케 했다. 이것이 바로 해인사(海印寺)에 수장되어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다. 1011년(현종 2)에 려요전쟁(麗遼戰爭) 당시 판각을 시작해서 1087년(선종 4)에 완료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1091년(선종 8)에 의천(義天)이 판각을 시작해서 10년에 걸쳐 완성한 속장경(續藏經)이 몽고군의 병화에 불에 타서 다시 만들 필요가 있었다.
탕구가 이끄는 몽고군은 1236년(고종 23) 6월 압록강을 건너 고려 침입을 재개하였다. 몽고군 척후기병대는 함신진 앞 오물지도(烏勿只島)->영삭진(寧朔鎭, 평북 천마)->가주(嘉州, 평북 박천)->안북부 운암역(雲岩驛, 평북 운전)->황주->재령을 거쳐 신주(信州, 황해 신천)로 남하하였다. 척후기병대를 따라 남하한 몽고군은 주력부대를 북로군과 남로군으로 나누었다.
몽고 북로군은 7월 초 함신진->삭주->귀주->태주->위주->영변을 거쳐 개주로 진출하였다. 중랑장(中郎將) 명준(明俊)과 중앙에서 파견된 교위(校尉) 희경(希景)은 개주의 주진군(州鎭軍)과 경별초(京別抄)를 지휘하여 남진하는 몽고군을 야간에 기습해서 다수를 죽이고 많은 마필과 병장기들을 노획하였다.
몽고 남로군은 북로군의 후속부대로 압록강을 건넌 뒤 북계의 주진들을 철저하게 초토화하면서 느린 속도로 남진하였다. 남로군은 척후기병대의 진로를 따라 함신진->정주->용주->철주를 따라 평안북도의 서해안 지방을 차례로 공략했다. 6월 10일 선주를 점령한 몽고군은 계속 남진하여 안북부 남쪽 30리 지점의 운암역에 전초기지를 구축하였다. 남로군 주력부대는 숙주(肅州, 평남 평원)->순주(順州, 평남 순천)->서경->중화->황주->봉주->평주->개경을 따라 남하하면서 소규모의 유격기병대를 잔류시켜 점령지 주민들의 동태를 감시하도록 하였다. 최우는 각지에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을 파견하여 대몽항전을 독려하였다.
개주 전투에서 패한 북로군은 영변으로 후퇴했다가 다시 남진하여 1236년 7월 18일 자주성을 공격했다. 자주성의 군민들은 자주 부사 최경후(崔景侯)와 판관(判官) 김지저(金之佇)은주(殷州, 평남 순천시 은산)부사 김경희(金景禧)의 지휘하에 치열하게 항전했으나 8월 13일 함락되고 말았다. 최경후, 김지저, 김경희 등은 모두 전사했다. 개주와 자주에서 고려군의 맹렬한 저항을 받은 몽고군은 중부 내륙지방으로의 진출이 지연되었다. 이에 몽고군은 여진족 기병으로 구성된 1백여 명의 동계 별동대를 함경남도의 함흥->정평을 거쳐 화주로 남하시켜 이 지역의 방어군이 북계로 이동하는 것을 견제하였다.
북로군은 고려군의 유격전을 방어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개경과 강화도에 대한 공세를 시도하지도 못했다. 그 대신 북로군은 강동->삼등(三登, 평남 강동)->동주->평주->개경을 경유하여 남경으로 진출하였다. 일부 병력을 양근(楊根, 경기 양평)과 지평으로 보낸 뒤, 몽고군 주력부대는 경기도 광주->용인을 거쳐 군사적 요충지인 죽주(竹州, 경기 안성)에 도달했다.
1236년 8월 하순 북로군 2만 4천여 명은 죽주성(竹州城)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죽주성에는 방호별감 송문주(宋文冑)와 3천여 명의 군민이 지키고 있었다. 송문주는 제1차 려몽전쟁 당시 구주성전투에서 몽고군을 물리친 경험이 있는 장수였다. 죽주성의 군민은 송문주의 지휘에 따라 임기응변의 수성전(守城戰)을 전개하면서 적의 허점이 보이면 즉시 공격하여 수많은 몽고군을 격살했다. 죽주성전투의 공으로 송문주는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을 제수받았다.
한편 남로군은 개경과 강화도를 그대로 통과하여 약탈과 살륙, 방화를 일삼으면서 남경->평택->아주(牙州, 충남 아산)->하양창(河陽倉, 충남 아산)->직산(稷山, 충남 천안)을 거쳐 1236년 9월 3일 온수(溫水, 충남 온양)를 공격했다. 군리(郡吏)인 현려(玄呂)와 온수의 주민들은 몽고군에 맞서 싸워 2백여 명을 죽이고 많은 병장기들을 빼앗았다. 그 공으로 고종은 현려를 온수군 호장(戶長)으로 임명했다. 온수전투는 향리(鄕吏)가 농민과 노비 등 주민들을 지휘하여 거둔 민중들의 승첩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자못 크다.
죽주성 공격에 실패한 몽고 북로군은 장호원->충주->문경->상주->대구->동경(東京, 경북 경주)을 따라 경상도로 남진하면서 인근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온수전투와 대흥성전투에서 패한 남로군과 척후기병대는 전라도 남부지역까지 남하하면서 지나는 곳마다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였다. 남로군 별동부대는 1236년 10월 10일 전주(全州)와 고부(古阜) 등 전라도 북부의 곡창지대를 유린했다. 이에 고려군은 유격전으로 몽고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고려군의 유격전에 시달리면서 많은 피해를 입은 몽고 남로군은 1236년 10월 이후 남진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온수전투에서 패한 몽고 남로군은 12월 20일 대흥성(大興城, 충남 예산)을 포위 공격하였다. 대흥성의 수령과 군민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성(守城)에 총력을 기울였다. 수일간 계속된 공방전으로 몽고군의 공격력이 둔화되자 고려군은 성문을 열고 일제히 돌격해서 몽고군을 대파하고 많은 말과 병장기들을 노획했다.
대흥성 승첩의 주인공은 예산의 농민과 노비들이었다. 최씨 무신정권과 왕씨 조정 등 고려의 지배층은 백성들의 생존은 도외시한 채 오로지 자신들의 안전 도모에만 급급했다. 고려를 지킨 것은 왕씨 왕실과 최씨 무신정권 등 지배층이 아니라 피 흘려 싸운 기층민중이었다. 대흥전투는 처인성전투, 개천(价川, 평북 희천)전투, 죽주성전투와 더불어 농민과 노비 등 고려의 기층민중이 주역이 되어 거둔 승리였다.
1237년(고종 24) 정월 원율(原栗, 전남 담양)의 이연년(李延年) 형제는, 강화도에 틀어박힌 채 팔만대장경 조판을 위한 대민수탈을 자행하는 최우의 무신독재정권에 저항하여 봉기했다. 이연년은 백제도원수(百濟都元帥)를 자칭하고 무능하고 나약한 고려 왕실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최우의 무신정권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을 규합하여 해양(海陽, 전남 광주)을 점령하는 등 큰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백제도원수군이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 김경손(金慶孫)이 진주한 나주성(羅州城)을 포위 공격하다가 이연년이 죽음으로써 민중봉기는 진압되고 말았다.
몽고군의 무차별 약탈과 살륙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고려의 민중은 자신들의 생존은 도외시한 채 팔만대장경 조판 사업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민중들에게 부담시키는 등 대민수탈을 강화한 최우의 무신정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연년 형제의 반정부 무장봉기는 최충헌정권 초기 경주의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 1217년(고종 4) 최광수(崔光秀)의 고구려부흥운동(高句麗復興運動)과 함께 가혹한 탄압과 수탈을 일삼는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세우기 위한 저항이었다.
1237년 최우는 강화도 동쪽 해안을 따라 외성(外城)을 쌓았다. 외성을 쌓은 목적은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수전에 약한 몽고군은 불과 수백 미터에 불과한 강화해협을 건너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1238년(고종 25) 겨울 몽고 북로군은 동경의 황룡사(皇龍寺)를 유린하고 전각과 9층목탑(九層木塔), 장육상(丈六像) 등을 모두 불태웠다. 황룡사를 파괴한 북로군이 더 이상의 남진을 중지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전황이 불리해지고 몽고군의 점령지 초토화작전으로 전국 각지에서 피해가 극에 달하자 최우는 추밀사(樞密使) 김보정(金寶鼎), 어사(御史) 송언기(宋彦琦) 등을 몽고 진영에 보내 강화를 제의하고 철군을 요청했다. 몽고는 조공을 바칠 것과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강화 제의를 수락했다. 1239년(고종 26) 4월 몽고군이 철수를 시작하면서 제3차 려몽전쟁은 끝났다.
제3차 려몽전쟁에서 야별초는 고려 전국 각지의 방어전을 수행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최우가 야간에 도적을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창설한 야별초는 실제로는 자신의 정적과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고용한 사병집단이었다. 야별초는 그 규모가 커지면서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분화되었다. 한편, 제1, 2차 려몽전쟁 중에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고려군 귀환병들은 특히 몽고에 대한 적개심이 많고 용맹하여 별도의 별초로 편성되었는데, 이것을 신의군(神義軍) 또는 신의별초(神義別抄)라 했다. 좌별초와 우별초, 신의군을 통칭 삼별초(三別抄)라고 한다. 대몽항전이 장기화되면서 고려 최강의 정예부대로 성장한 삼별초는 유명무실한 관군을 대신하여 전국 각지의 전투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몽고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고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국왕의 해외 입조가 전례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은 전시(戰時)나 마찬가지였기에 매우 위험했다. 몽고가 강화 조건의 이행을 계속해서 독촉하자 고려는 고종의 모후 유씨(柳氏)의 상중임을 들어 국왕의 입조가 불가능함을 변명하고, 왕족인 신안공(新安公) 왕전(王佺)을 왕의 동생이라고 속여서 몽고로 보냈다. 1240년(고종 27) 몽고는 고려로 귀환하는 왕전과 함께 사신을 딸려 보내 새로운 요구를 해왔다. 몽고의 요구는 해도에 입보하고 있는 백성들을 육지로 돌려보낼 것, 그 수효를 점검해서 보고할 것, 뚤루가(禿魯花, 인질)를 보낼 것, 반몽행위를 한 고려 관원들을 몽고로 압송할 것 등이었다.
1241년(고종 28) 고려는 왕전의 사촌형인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을 왕자로 속여 몽고에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몽고의 요구 가운데 뚤루가를 보내는 것만 이루어졌을 뿐 정작 가장 중요한 국왕의 입조가 이행되지 않아 려몽간 전쟁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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