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을 찾아서

林 山 2014. 3. 21. 15:55

변산바람꽃을 만나러 가야산으로 들어가던 날 충청남도(忠淸南道) 예산군(禮山郡) 봉산면(鳳山面) 화전리(花田里) 뒷산에 있는 백제시대의 석조사면불상(石造四面佛像, 보물 제794호)을 찾았다. 사면불상으로 오르는 길가 잔디밭에는 파란 봄까치꽃이 앙증맞게 피어 있었다.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각(石造四面佛像閣)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은 1983년에 발견된 백제 유일의 사면불이다. 원래는 암반 위에 솟아 있는 돌기둥의 사면에 불상을 새긴 것인데, 발견될 당시 머리와 손이 손상된 상태로 땅속에 묻혀 있었다. 땅 위에 드러나 있던 서면상은 마멸이 심해서 알아보기 어렵고, 나머지 불상은 머리와 손을 잃었을 뿐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석조사방불인 이 불상은 백제 미술 연구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사면불상을 새긴 돌기둥의 남북면은 넓고 동서면은 보다 좁은 편이다. 가장 넓은 남면에는 사면불의 주불(主佛)로 보이는 불좌상(佛像)을 새기고, 나머지 면에는 불입상(佛像)을 새겼다. 각 불상의 주위를 감(龕)처럼 파서 원각상(圓刻像)에 가깝게 부조(浮彫)한 것이 특징이다. 두상은 현재 공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얼굴은 볼이 도톰하고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일명 '백제의 미소'라 일컫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국보 제84호)과 비견된다고나 할까! 


사면불상의 옷주름은 매우 깊고 양감이 풍부하며, 가슴아래에서 U자형으로 겹쳐 있다. 머리 뒤에는 연꽃무늬(蓮花紋)와 빗살무늬(櫛紋), 덩굴무늬(唐草紋)가 새겨진 광배(光背)가 있다. 남면의 불상과 광배 주위에는 불꽃무늬(火紋)를 조각했다. 모든 불상은 양쪽 어깨에 옷을 걸치고 있으며 가슴에 띠매듭이 있다. 불꽃무늬와 연꽃무늬로 구성된 원형의 머리 광배는 백제 특유의 양식이다. 


남방을 제외한 동북서 삼면의 불입상은 거의 같은 모습이다. 날씬한 몸에 걸친 대의(大衣, 僧伽梨)는 가슴 앞에서 많이 벌어져 있어 시원한 느낌을 주고, 끝자락은 왼쪽 어깨 뒤로 넘겨져 있다. 백제의 불입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대의 사이에는 내의와 둥근 띠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배에서 다리까지 늘어진 옷주름은 두텁게 층단을 이루면서 물결 모양을 이루고 있고, 대좌(臺座) 위에까지 늘어진 치마는 세로로 주름이 잡혀 있다. 이런 특징은 7세기 불상들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중국 용문석굴(龍門石窟, 494∼525년) 양식과 서로 통하며, 공현석굴(鞏縣石窟) 1, 3, 4굴(517∼528년) 양식과도 친연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화전리 사면불상은 백제의 불입상 가운데 부여 가탑리 사지출토 금동불입상(扶餘佳塔里寺址出土金銅佛立像)과 그 양식이 가장 유사하며, 이후 태안과 서산의 마애불입상들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화전리 사면불상이 만들어진 시기는 태안 마애삼존불상(泰安磨崖三尊佛, 국보 제307호)보다 이른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백제 성왕(聖王)이 무녕왕릉(武寧王陵)을 완성한 뒤인 527년경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화전리 사면불상을 조성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남방 석불좌상


남방 석불좌상은 높이 120cm로 돌기둥의 삼분의 일 정도 파들어가서 원각상에 가깝게 조각했다. 상반신은 광배에서 떨어져 입체적으로 조각했으며, 머리와 손은 따로 만들어서 부착했다. 머리, 두 손, 오른쪽 무릎 부분은 파손되었다. 발굴할 당시 머리의 발견으로 원래의 모습을 복원하여 볼 수 있다. 하지만 파손이 심해 얼굴에 표현된 미묘한 표정은 잘 알아보기 어렵다.


광배는 주형(舟形) 거신광(擧身光)으로 170cm에 이른다. 두광(頭光)은 연꽃무늬와 빗살무늬, 덩굴무늬로 이루어져 있다. 광배 주위로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무늬가 깊게 새겨져 있어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광배와 두광은 서산 마애삼존불상이나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益山蓮洞里石佛坐像, 보물 제45호)과 그 양식이 유사하다.   


수인(手印)은 손을 끼웠던 구멍자리와 출토된 손 모양으로 보아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원인과 시무외인, 선정인(禪定印)은 모든 불상이 취할 수 있는 통인(通印 )이다. 시무외인(施無畏印)은 이포외인(離怖畏印)이라고도 하며, 가슴까지 들어올린 오른손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수인이다. 부처가 중생들의 두려움과 우환, 고난 등을 소멸시켜 주는 대자대비의 덕을 상징한다. 여원인은 시원인(施願印) 또는 만원인(滿願印)이라고도 하며, 왼손을 내려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 손모양이다. 한국에서는 4, 5번째 손가락을 구부리는 것이 특징이다. 부처가 중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준다는 의미의 수인이다.     


불의(佛衣)는 통견의(通肩衣)로 왼쪽 어깨에 걸친 대의 자락은 평행계단식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가슴을 거쳐 배 아래로 흘러내렸다.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 자락은 수직에 가깝게 흘러내려 결가부좌한 다리를 덮으면서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옷주름도 직선적이다. 이런 주름의 양식은 인도 굽타 불상에 기원을 둔 중국의 운강석굴(雲岡石窟) 불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상현좌 부분은 파손이 심하여 주름의 형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대의 속에는 중의(中衣, 鬱多羅僧)를 입었다. 중의는 윗옷으로 편삼(偏衫)을 말한다. 가슴에는 내의와 둥근고리 모양의 띠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이런 양식은 백제시대 석불인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에서도 보인다. 


동방 석불입상


동방 석불입상은 크기 130cm로 역시 머리와 손이 없다. 광배는 8엽의 홑잎 연꽃잎무늬(單瓣蓮花文)를 새긴 두광만 있다. 불의는 통견의로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남방 석불좌상보다 소박하고 단순한 편이다.  


북방 석불입상


북방 석불입상은 높이 168cm이고, 동방 석불입상과 대체로 비슷하다. 하지만 노출되었던 부분도 있어서 원래의 모습에서 다소 변형되었다.


 서방 석불입상


서방 석불입상은 발굴될 당시 전면 노출되어 있었던 탓에 사방불상 가운데 가장 파손이 심하다. 오랜 세월 마멸과 풍화로 인해 이 불상은 원래의 모습을 상당히 잃어버렸다. 


사면불은 사방불(四方佛)이라고도 한다. 사방불은 사방 정토(淨土)에 살면서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방위불(方位佛)이다. 대승불교(大乘佛敎) 이전에는 한 시대에 한 명의 부처만 존재한다는 개념이 주류를 이루었다. 서기 1세기경 대승불교가 발흥하면서 동서남북 사방은 물론 6방, 8방에도 존재하고, 과거세는 물론 현세와 미래세에도 부처가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시공간을 망라해서 모든 세계에 존재하는 부처들을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이라고 한다. 시방삼세제불은 특히 밀교(密敎) 계통에서 발전하였다. 


사방불은 소의(所依)경전이나 종파에 따라 그 명칭이 다르다. 대승불교 경전인 금광명경(金光明經)에는 동방 향적세계(香積世界)의 아촉불(阿閦佛), 서방 안락세계(安樂世界)의 아미타불(阿彌陀佛, 無量壽佛), 남방 환희세계(歡喜世界)의 보상불(寶相佛), 북방 연화장엄세계(蓮華莊嚴世界)의 미묘성불(微妙聲佛)로 구성된다. 밀교 경전인 공작왕주경(孔雀王呪經, 孔雀明王陀羅尼經)이 약사신앙(藥師信仰)과 함께 유행하면서 동방에 약사불(藥師佛)이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 


밀교에서는 사방불사상(四方佛思想)을 더욱 발전시켰다. 밀교 경전인 금강정경(金剛頂經)을 근거로 한 금강계(金剛界)에서는 동방에 아촉불, 서방에 아미타불, 남방에 보생불(寶生佛), 북방에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이 각각 배치된다. 역시 밀교 경전인 대일경(大日經, 大毘盧舍那成佛神變加持經)을 근거로 한 태장계(胎藏界)에서는 동방 보당불(寶幢佛), 서방 아미타불, 남방 개부화왕불(開敷華王佛), 북방 천고음불(天鼓音佛)로 구성된다. 서방의 아미타불만 항상 일정하고 동남북의 부처는 변화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6세기 초 북위(北魏)부터 수대(隋代)에 비상(碑像) 형식의 사방불 조성이 크게 유행하였다. 비상은 네모난 돌기둥에 불상을 조각하고 비문(碑文)을 새긴 다음 개석(蓋石)을 덮은 것이다. 처음에는 앞면이나 뒷면을 중심으로 불상을 새겼으나 점차 측면 또는 사면에 불상을 새겨 마침내 사방불로 발전했다. 비상은 수, 당대까지 제작되었지만 8세기 후반 이후 불교미술의 퇴조와 함께 점차 쇠퇴하였다. 


한국의 경우는 풍수지리설과 오행사상의 영향으로 사방불에 중앙을 더하여 오방불사상(五方佛思想)으로 발전했다. 8세기까지 오방불은 동방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서방 아미타불, 남방 지장보살(地藏菩薩), 북방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중앙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盧舍那佛, 大日如來)로 구성되어 있었다. 8세기 이후에는 약사신앙의 발달로 동방 약사불, 서방 아미타불, 남방 미륵불(彌勒佛), 북방 석가모니불, 중앙 비로자니불로 재편되었다. 하지만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은 형상이 없으므로 실제로는 사방불이나 마찬가지다. 사방불은 경전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삼국유사 사불산조(四佛山條)에 따르면 587년(신라 진평왕 9) 문경의 대승사(大乘寺)에 있었다는 사방불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지금은 그 소재를 확인할 수 없다. 현존하는 사방불은 6세기 중엽의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굴불사지석조사면불상(慶州掘佛寺址四面佛, 보물 제121호)과 경주 남산 칠불암석조사면불상(慶州南山七佛庵四面佛像) 등이 유명하다. 


중국의 경우처럼 한국에서도 석조비상이 유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청남도 연기군에서는 7세기 중엽에서 8세기 중엽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비상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석조비상의 앞면에는 보통 부처를 중심으로 보살과 나한상(羅漢像)이 배치되거나 또는 불상,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단독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현존 유물로는 세종특별자치시(세종시) 전의면 비암사(碑巖寺)에서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국보 제106호)과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銘阿彌陀佛碑像, 보물 제367호),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跏思惟碑像, 보물 제368호), 세종시 연서면 월하리 연화사(蓮華寺)에 있는 무인명불(아미타)비상[戊寅銘佛(阿彌陀)碑像, 보물 제649호]과 칠존불비상(七尊佛碑像, 보물 제650호), 세종시 조치원읍 서창리 서광암(瑞光庵)에서 발견된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 국보 제108호), 공주 정안면에서 발견된 삼존불비상(三尊佛碑像, 보물 제742호) 등 모두 7개가 알려져 있다. 모두 납석제(蠟石製)인 이 비상들은 백제계 유민이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9세기경에는 석탑의 각 면에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불상을 조각하는 양식이 유행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사방불은 이곳의 석조사면불상과 경주 남산 칠불암 석조사면불상,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외에도 문경 사불산(四佛山) 윤필암(潤筆庵) 사방불(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3호), 영주 신암리 사면석불(보물 제680호) 등이 있다. 


두상과 양손이 없는 화전리 사면불상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굴불사지 사면불상이나 경주 남산 칠불암 사면불상의 보존 상태는 온전한데 백제시대의 예산 화전리 사면불상은 어쩌다 이렇게 파괴된 것인지 그 까닭이 자못 궁금했다.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의 소행이었을까? 사막 잡신을 믿는 광신자들의 만행일까? 오직 화전리 사면불상만은 그 진실을 알고 있으리라. 머리와 손이 떨어져나간 화전리 사면불상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 백제의 운명이 오버랩되어 나타났다.


서글픈 마음을 안고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을 떠나다.



2014.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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