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오대산 선재길을 걷다

林 山 2014. 2. 25. 10:36

주말을 맞아 설악산 토왕폭에서 열리는 국제빙벽등반대회를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강원도 일대에 24년만의 가장 큰 기록이라는 눈폭탄이 내리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강릉 110㎝, 속초 80㎝, 대관령 74㎝의 적설량이 예상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눈폭탄으로 인해 국제빙벽등반대회는 취소되고 설악산 일대에 입산금지령이 내려졌다. 


할 수 없이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행히도 오대산 적멸보궁(寂滅寶宮)까지는 입산이 허용된다는 소식이었다. 월정사(月精寺)로 가는 길에 '청와삼대 명이칼국수'에 들러 만두국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청와대에서 조리장을 했다는 사람이 운영하는 음식점이라고 했다. 그런데, 만두국에 들어 있는 만두는 가게에서 산 만두 같았고, 육수도 그저 그랬다. 청와대 조리장의 음식 솜씨라고 하기엔 수준 이하였다. '차라리 명이칼국수를 먹을 걸' 하고 후회했다.   


오대산 선재길


선재길에서 필자


월장사 금강연과 금강교


오대산 선재길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선재길은 월정사 일주문(一柱門)에서 오대천을 따라 상원사(上院寺)에 이르는 8.6km의 산책로다. 이 길은 아름드리 전나무 숲과 단풍으로 유명하다. 월정사 앞 금강연(金剛淵)에도 눈이 쌓여 순백색의 벌판으로 변해 있었다. 동대의 청계수(靑溪水)와 서대의 우통수(于筒水), 남대의 총명수(聰明水), 북대의 감로수(甘露水), 중대의 옥계수(玉溪水)가 오대천을 따라 모여서 저 금강연으로 흘러든다.


고려의 문신 정추(鄭樞, 1333~1382)는 관동지방을 유람할 때 오대산에 들러 저 금강연을 바라보면서 시 한 수를 남겼다. 


금강연 물은 푸르게 일렁거려

갓 위 묵은 먼지를 씻어 내는구나. 

월정사에 가 옛 탑을 보려 하는데

석양 花竹이 날 근심스럽게 하누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선재동자(善財童子)처럼 나도 구도자가 되어 선재길을 걸었다. 선재동자는 53선지식을 두루 찾아본 뒤 마지막으로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만나 10대원(十大願)을 듣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淨土)에 왕생하여 입법계의 큰 뜻을 성취했다고 한다. 선재동자는 깨달음을 얻으려고 길을 떠난 방랑자였다. 선재동자가 보현보살을 만나 10대원을 들었을 때 얼마나 큰 희열을 느겼을까? 인생은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나그네길이 아니던가! 선재동자처럼 살다가 가고 싶다.   


월정사 천왕문


천왕문(天王門) 지붕에도 눈이 한 뼘 이상 쌓여 있었다. 천왕문 통로 양쪽에는 칼을 든 동방 지국천(持國天)과 용을 쥔 남방 증장천(增長天), 탑을 든 서방 광목천(廣目天), 비파(琵琶)를 든 북방 다문천(多聞天) 등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四天王)이 부리부리한 눈을 치뜨고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데 누가 감히 불법을 침탈할 수 있으랴! 


사천왕은 원래 고대 인도의 신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에 수용된 사천왕은 부처의 교화를 받고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천왕(護法天王)으로 자리를 잡았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토착신이었던 산신(山神)과 칠성신(七星神)을 수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불교가 토착신들을 수용한 것은 신앙 또는 종교간의 갈등과 마찰을 피하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어쨌든 천상계의 가장 낮은 곳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사천왕은 수미산(須彌山)의 중턱 사방을 지키면서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중생들이 불도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사찰의 가장 맨앞에 위치한 일주문이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한 사바세계와 안락하고 행복한 이상향인 극락세계(極樂世界)의 경계, 즉 속계(俗界)와 진계(眞界)의 경계를 상징한다면 천왕문은 수미산 중턱의 청정한 경지, 즉 수호신들에 의해서 모든 악귀가 물러난 청정도량에 들어섰음을 상징한다.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금강문(金剛門)을 세우는 경우도 있다. 보통은 천왕문의 입구 문에 금강역사(金剛力士)을 그리거나 따로 금강역사상을 봉안하여 금강문을 대신하기도 하며, 때로는 인왕상(仁王像)을 봉안하기도 한다. 인도의 약사신(藥師神)에서 유래된 인왕(仁王)은 금강역사(金剛力士), 이왕(二王), 집금강신(執金剛神)이라고도 한다. 인왕은 금강역사와 밀적역사(密跡力士)로 분류되기도 한다. 


금강역사는 사찰의 좌우에서 서로 마주보도록 배치된다. 사찰의 왼쪽에서 입을 벌리고 한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는 금강역사를 밀적금강(密迹金剛) 또는 아금강(阿金剛像), 오른쪽에서 입을 꽉 다문 채 주먹으로 권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금강역사를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또는 음금강(吽金剛)이라고 한다. 금강역사가 반라(半裸)의 몸에 천의를 두르고 험상궂은 표정과 힘이 센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은 사찰의 경내로 들어오는 악귀를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월정사 금강루 윤장대


천왕문을 지나 금강루(金剛樓)에 이르렀다. 양쪽 문에는 나라연금강과 밀적금강을 부조(浮彫)해 놓았다. 2층 누각으로 올라가니 경전을 넣어 두는 회전식 서가(書架)인 화려한 윤장대(輪藏臺)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윤장대는 팔각형으로 된 책장 밑에 바퀴를 달고 중앙에는 기둥을 세워 궤를 돌리면서 경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대좌에는 석가모니불을 정근(精勤)하면서 윤장대를 돌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부처와 보살의 명호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부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리라. 나를 위해서는 소원을 빌 것이 없는지라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의 평화와 행복을 빌어주기 위해 윤장대를 돌리려고 하는 순간 불전함에 '5천원을 넣고 돌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왠지 불교가 상업화된 것은 아닌지 생각되어 윤장대 돌리는 것을 포기하였다. 시주라고 생각하면 되겠지만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윤장대를 돌리면서 소원을 빌고 싶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게 진정 고타마 싯다르타의 가르침에 맞는 것일까! 


월정사 적광전


금강루를 지나 월정사 중정으로 들어서니 여기도 백설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눈이 쌓인 절 마당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의 눈싸움을 바라보면서 나도 잠시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산세가 빼어나고 풍광이 아름다운 오대산은 예로부터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의 성지로서 불자들에게 신성시 되어 왔다. 월정사는 오대산 동대(東臺) 만월산(滿月山)의 정기가 모인 곳에 자리잡고 있다. 만월(滿月)의 정기가 모인 곳에 지은 절이라서 이름도 월정사다. 


월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로 강원도 중남부 6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가 중국 당나라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감응으로 얻은 석가모니(釋迦牟尼) 진신사리(眞身舍利)와 대장경(大藏經) 일부를 가지고 돌아와 통도사(通度寺)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후 1400여년 동안 월정사는 오대산의 중심 사찰로서 개산조(開山祖) 자장율사를 비롯해서 근대의 한암(漢岩), 탄허(呑虛) 등 수많은 선지식들이 머물렀던 명찰이다. 


사적기(寺蹟記)에 의하면 1307년(충렬왕 33)에 화재로 타버렸으나 이일(而一) 스님이 중창했고, 1833년(순조 33) 다시 화재로 타버린 것을 1844년(헌종 10)에 영담(瀛潭), 정암(淨庵) 스님 등이 재건했다. 1·4후퇴 때 국군이 작전상의 이유로 칠불보전(七佛寶殿)을 비롯한 10여 채의 전각을 불태웠다. 이때 월정사에서 보관하고 있던 통일신라시대의 선림원지(禪林院址) 동종(804)도 파손되었다. 1964년에 탄허 스님이 적광전(寂光殿)을 중창하고, 이어 만화(萬和) 스님이 중건했다. 


현재는 적광전, 수광전(壽光殿)/지장전(地藏殿)대법륜전(大法輪殿), 개산조각(開山祖閣), 진영각(眞影閣), 삼성각(三聖閣), 설선당(說禪堂, 동별당), 대강당(大講堂, 서별당), 보장각(寶藏閣, 성보박물관), 용금루(湧金樓), 금강루, 해행당(解行堂), 향적당(香寂堂), 성적당(性寂堂), 심검당(尋劍堂), 황화당(黃華堂), 호지각(護持覺), 불유각(佛乳閣), 요사채, 석경원(碩經院)/종고루(鐘鼓樓), 청류다원(淸流茶園), 천왕문, 일주문, 불교수행관 등의 전각이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석조보살좌상 모조품


월정사의 본당인 적광전의 앞뜰에는 높이 15.2m의 팔각구층석탑(八角九層石塔, 국보 제48호)이 서 있었다. 기단부(基壇部)의 갑석(甲石)과 탑신부(塔身部)의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머리에 흰 눈을 인 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 모조품은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다리를 세운 채 두 손을 모으고 탑에 대해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진품은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팔각구층석탑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한국의 팔각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연꽃무늬로 장식한 이층의 기단과 날씬하고 우아한 조형미를 갖춘 탑신, 화려한 금동장식의 상륜부 등이 잘 조화되어 조형미가 매우 뛰어난 석탑이다. 특히 상륜부는 복발(覆鉢)과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烟), 용차(龍車), 보주(寶珠), 찰주(刹柱)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어 그 장엄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석탑의 양식으로 볼 때 신라의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설은 신빙성이 없다. 신라시대의 탑들이 일반적으로 평면이 정방형에 층수가 삼층 또는 오층의 탑인데 비해 이 탑은 평면이 팔각형이며 층수도 구층에 이르는 등 고려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층의 기단은 부처가 앉는 연꽃 대좌처럼 장식이 되었다. 연꽃은 처염상정(處染常淨), 개화즉과(開花卽果)의 꽃으로 불교를 상징한다. 연꽃이 진흙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듯이 나쁜 환경에 처하더라도 그 자성(自性)은 결코 더렵혀지지 않고, 개화와 동시에 열매를 맺듯이 모든 중생은 태어남과 동시에 불성(佛性)을 가지며, 또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불교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기단의 연꽃 대좌 위에 있는 탑신은 부처를 상징한다. 탑신 안에 봉안된 사리는 부처의 진신과 다름없으니 부처가 앉을 자리인 기단을 연꽃 대좌로 만드는 것이다. 탑신을 부처와 동일체로 보기 때문에 석조보살좌상이 공손하게 공양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른쪽 무릎을 꿇은 것은 자신을 낮추면서 스승에게 최상의 존경을 표하는 고대 인도의 관습이다


옥신(屋身, 몸돌)과 지붕돌의 팔각은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수행의 올바른 길인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팔정도란 바르게 보기(正見), 바르게 생각하기(正思), 바르게 말하기(正語), 바르게 행동하기(正業), 바르게 생활하기(正命), 바르게 정진하기(正精進), 바르게 깨어 있기(正念), 바르게 삼매하기(正定) 등 여덟 가지를 말한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우주(隅柱, 귀기둥)가 새겨지고, 살짝 위로 솟아 날렵해 보이는 지붕돌의 추녀 끝마다 풍탁(風鐸)이 달려 있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불법의 향기를 전한다. 풍탁 속의 울림쇠 끝에 달려 있는 물고기 형상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물고기는 살아서도 눈을 감지 않고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그런 물고기처럼 수행자도 일심으로 용맹정진하라는 뜻이다. 


정추는 또 월정사의 자취를 이렇게 노래했다. 


자장이 지은 옛 절에 문수보살 있으니

탑 위에 천년 동안 새가 날지 못한다. 

금당은 문을 닫았고 향연은 싸늘한데

늙은 스님은 동냥하러 어디로 갔는가?


석조보살좌상 진품


월정사가 소장하고 있는 불교 문화재를 관람하기 위해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에 들렀다. 성보박물관에는 상원사 중창권선문(上院寺重創勸善文, 국보 제292호), 월정사 석조보살좌상(月精寺石造菩薩坐像, 보물 제139호),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上院寺木彫文殊童子坐像腹藏遺物, 보물 제793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사리장엄구(月精寺八角九層石塔舍利莊嚴具, 보물1375호)를 비롯해서 불교 경전과 불상, 불화, 목탑 등 많은 유물이 전시되고 있었다.


상원사 중창권선문은 세조 10년(1464) 왕사인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대사(信眉大師)가 학조(學祖), 학열(學悅) 스님과 함께 왕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해 상원사를 중창하면서 지은 글이다. 이에 세조는 친필로 쓴 글과 함께 쌀, 무명, 베와 철 등을 보내주었다. 각각 한문 원문과 번역으로 되어 있는데, 한글로 번역된 것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이다. 세조와 상원사, 신미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인 동시에 당시의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은 원래 팔각구층석탑 앞에 있던 것을 보존을 위해 박물관으로 옮겨 왔다. 중판연화문(重辦蓮花文)을 조각한 대좌에 오른쪽으로 약간 치우쳐  앉아 있는 이 보살상은 높이 1.8m로 상체에 비해 하체가 다소 빈약한 편이다. 보살상의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冠)을 쓰고 있으며, 보발(寶髮)은 길게 늘어져 양쪽 어깨를 덮고 있다. 복스러운 얼굴에 눈을 지그시 감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새기고, 앞가슴은 영락(瓔珞)을 섬세하게 장식하였다. 옷주름은 희미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보살좌상은 개태사(開泰寺)와 신복사지(神福寺址) 탑 공양상과 더불어 고려시대 화엄종 계통의 사찰에서 만든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월정사 사적기'에 의하면 탑 앞에는 향로를 들고 무릎을 꿇어앉아 공양하는 약왕보살상(藥王菩薩像)이 있었다고 한다. 법화경(法華經)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에 희견보살(喜見菩薩)은 과거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로부터 법화경 설법을 듣고 모든 색신(色身)을 볼 수 있는 현일체색신삼매(炫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 삼매를 얻은 보살은 더없는 환희심으로 1200년 동안 향을 먹고 몸에 바른 후 자신의 몸을 태우며 공양하였다. 그 과보로 다시 몸을 받아 일월정명덕국(日月淨明德國)의 왕자로 태어나자 일월정명덕불은 그가 장차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 희견보살은 부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만든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서 장엄하게 꾸몄다. 그것도 모자라 사리탑 앞에서 자신의 두 팔을 태우며 칠만이천년 동안 공양하였다. 이가 곧 약왕보살이다.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은 1984년 7월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에서 발견된 2개의 발원문(發願文)과 조선 전기의 복식, 불경과 진언 같은 전적류 등 23점의 유물이다. 그 밖에 구슬 3개와 사리도 발견되었다. 유물 중 발원문은 상원사 문수동자상을 비롯한 여러 불상, 보살상의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전적 중 진언은 조선 전기 필사본으로는 유례가 드문 것이다. 복식은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된 귀중한 자료이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사리장엄구는 1970년 팔각구층석탑을 해체 보수할 당시 1층과 5층에서 발견된 은제도금여래입상(銀製鍍金如來立像) 1구와 청동거울 4점, 청동사리외합(靑銅舍利外盒)과 은제내합(銀製內盒), 호리병 모양의 수정사리병(水晶舍利甁)금동방형향갑(金銅方形香匣), 수라향갑낭(繡羅香匣囊)전신사리경(全身舍利經), 명주보자기 등 9종 12점의 사리구 유물들로 2003년 6월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유물들은 10∼11세기 경에 제작되어 석탑이 건립될 때 함께 내장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 초기의 불교사상과 교류사, 금속공예사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한암선사 좌탈입망상


보장각 지하 1층에 봉안된 한암 중원선사(漢岩重遠禪師1876~1951)의 좌탈입망상(坐脫入亡像) 앞에서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으로 합장 삼배를 올렸다. 어쩌면 저리도 평온한 모습으로 잠들 듯 열반에 들 수가 있을까! 


불교의 중흥조(重興祖) 경허 성우(鏡虛惺牛), 불교 교문(敎門)의 거봉 박한영사(朴漢永師)와 함께 근세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사는 22세에 금강산 장안사(長安寺)로 출가하여 행름노사(行凜老師)에게 수도했다. 1899~1902년에는 경북 김천의 청암사(靑巖寺) 수도암(修道庵)에서 경허화상(鏡虛和尙)에게 설법을 들었다. 스승 경허는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는 금강경의 한 구절로 젊은 제자 한암의 심안을 열어주었다.


경허는 바람처럼 한곳에 머무는 법이 없었으며, 그 누구에게도 집착하는 법이 없었다. 말년에 머리를 기르고 함경도 삼수갑산에 숨어든 경허는 애제자 수월(水月)이 찾아왔을 때도 방문을 열지 않은 채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는 말 한마디로 돌려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 경허도 한암에게만은 예외였다. 수도암과 해인사(海印寺)에서 1년을 함께한 스승 경허는 제자 한암과의 이별을 너무나 아쉬워했다.


경허화상은 한암선사에게 "나는 천성이 인간 세상에 섞여 살기를 좋아하고 겸하여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삽살개 뒷다리처럼 너절하게 44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우연히 해인정사에서 한암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성행(性行)은 순직하고 학문이 고명하여 1년을 같이 지내는 동안에도 평생에 처음 만난 사람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다가 오늘 서로 이별을 하는 마당을 당하게 되니 조모(朝暮)의 연운(煙雲)과 산해(山海)의 원근(遠近)이 진실로 영송(迎送)하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하물며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즉, 이별의 섭섭한 마음이야 더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고 하지 않았는가.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그러므로 여기 시 한 수를 지어서 뒷날에 서로 잊지 말자는 부탁을 하노라"는 전별사(餞別辭)를 남겼다. 


捲將窮髮垂天翼 북해에 높이 뜬 붕새같은 포부를 가진 채                

向槍楡且幾時 변변찮은 곳에서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냈던가!           

分離尙矣非難事 이별은 예사라서 어려운 일 아니지만           

所慮浮生杳後期 떠돌이 삶 묘연하니 어찌 뒷날을 기약하리오!  


경허화상의 전별사를 받아서 읽어 본 한암선사도 답시(答詩)로 한 수를 남겼다.  


霜菊雪梅過了 서릿국화 설중매화는 겨우 지나갔는데             

如何承侍不多時 어이하여 오랫동안 모실 수가 없을까요?          

萬古光明心月在 만고에 늘 밝게 비치는 마음의 달 있으니          

更何浮世謾留期 뜬구름 같은 세상 뒷날을 기약해 무엇하리오!


한암선사는 이별을 아쉬워했을 뿐 경허화상을 좇지는 않았다. 그뒤 경허화상의 입적으로 두 사람은 사바세계에서는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한암선사는 1905년부터 양산 통도사의 내원선원(內院禪院) 조실(祖室)로 추대되었다. 1910년에는 용맹정진을 위해 평남 맹산군의 우두암(牛頭庵)에 들어간 어느 날 부엌에서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1914년 승림(勝林)에게서 비구계(比丘戒)를 받고 선승으로서 법을 강론한 선사는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을 거쳐 1925년 서울 봉은사(奉恩寺) 조실이 되었다. 당시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통치에 협조할 것을 요청하자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익히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갔다. 이후 입적할 때까지 27년 동안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1941년 선사는 불교계의 중앙통일기관으로 설립된 조계종(曹溪宗)의 초대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었다. 


6.25 내전이 발발하자 다른 사람들은 피난을 떠났으나 선사는 홀로 남아 상원사를 지켰다. 당시의 일화는 유명하다. 1951년 1.4후퇴 때 월정사와 상원사가 인민군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국군이 월정사를 불태운 뒤 상원사에 올라와 법당마저 불태우려고 했다. 선사는 군인들에게 잠깐 기다리라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갖춰 입고 법당에 들어가 정좌한 뒤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당신이 군인의 본분에 따라 명령에 복종하듯이 절을 지키는 것도 나의 도리이다. 중이 죽으면 어차피 화장을 해야 하는 것, 이제 불을 지르시오' 했다. 선사의 법력에 감복한 국군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불을 붙여 연기만 내고는 떠났다고 한다. 


선사는 입적(入寂)하기 15일 전부터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인연이 다했음을 알고 물 외에는 일체 먹지 않았다. 1951년 3월 21일 아침 선사는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시고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서 입고 단정히 앉은 채 세수 75세, 법랍 54세로 선정(禪定)에 들 듯이 열반(涅槃)에 들었다. 한국불교의 큰 별이 지는 순간이었다. 


월정사 부도전


월정사 부도전 앞 전나무 숲길에서


월정사에서 오대천을 따라 상원사를 향해 500m쯤 올라가자 월정사 부도전(浮屠田, 강원도문화재자료 제42호)이 나타났다. 전나무 숲에 둘러싸인 부도전은 눈을 뒤집어쓴 채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죽어서도 영원히 선정에 들어간 선승들의 부도를 향해 합장삼배를 올렸다. 부도를 보는 것 자체가 한 소식이요, 깨달음이었다. 나도 전나무 숲길 한가운데서 잠시 하나의 부도가 되어 서 있었다. 


월정사 부도전에는 월정사에 머물렀던 스님들의 부도 23기와 탑비(塔碑)가 세워져 있었다. 대부분 석종형(石鐘形) 부도이지만 더러 원탑형(圓塔型)의 부도도 보였다. 이중 기단과 옥개를 갖춘 혼합형 부도도 있었다. 화강암 석재로 단순하면서도 소박하게 만들어진 부도들은 선사들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듯했다. 부도밭을 서성이면서 '이 뭣꼬(是甚麽)?' 화두(話頭)를 떠올렸다. 하지만 불목하니 그릇도 못되는 자가 '이 뭣꼬?'를 붙잡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상원사 전경


상원사 오층석탑


상원사를 향해 갈수록 눈은 점점 더 많이 쌓여 있었다. 눈폭탄 소식에도 단체 산행을 온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선재길을 걷고 있었다. 10여km에 이르는 선재길의 끝에 자리잡은 상원사가 산길 나그네를 맞이했다. 상원사로 오르는 돌계단 초입의 사자상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언덕배기에는 부도전이 있었다. 눈밭으로 변해버린 부도전에는 상원사 3대 선사인 한암, 탄허 택성(呑虛宅成)만화 희찬(萬化燦) 선사의 부도와 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상원사는 그야말로 눈속에 빠진 듯 했다. 절 마당과 전각의 지붕, 오층석탑의 지붕돌에도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스님은 보이지 않고 분주하게 오가는 관광객들의 발걸음만이 산사의 고요를 깨뜨리고 있었다. 


눈길을 뚫고 상원사에 와 어찌 시 한 수 남기지 않을 수 있으리!   


온 세상 눈 속에 가라앉아 적막강산인데

주지 스님은 어데 가고 석탑만 우두커니 

텅 빈 절 마당에 나그네 발길만 분주하네


상원사는 월정사의 말사(末寺)이다. 신라 32대 왕인 효소왕(孝昭王, 재위 692~701) 때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의 아들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은 오대산에 들어와 동대 만월산(滿月山)의 일만관음보살(一萬觀音菩薩), 서대(西臺) 장령산(長嶺山)의 일만대세지보살(一萬大勢至菩薩), 남대(南臺) 기린산(麒麟山)의 일만지장보살(一萬地藏菩薩), 북대(北臺) 상왕산(象王山)의 일만미륵보살(一萬彌勒菩薩), 중대(中臺) 지로산(地盧山)의 일만문수보살(一萬文殊菩薩)을 친견하고 예배를 올렸다.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 두 사람은 매일 아침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신문왕이 죽자 대신들이 오대산으로 보천을 찾아와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했다. 보천이 한사코 사양하자 효명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이다. 성덕왕과 보천은 705년 3월 8일 오대산 중대 남쪽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자리, 곧 지금의 상원사 입구의 부도전에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하고 문수보살상을 봉안하였다.    


그 뒤 보천은 오대산을 호국(護國) 신행결사도량(信行結社道場)으로 만들 것을 유언하였다. 유언에 따라 진여원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낮에는 반야경(般若經)과 화엄경(華嚴經)을 독송하였으며,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였다. 결사의 이름은 화엄사(華嚴社)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상원사에 대해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다만 동문선(東文選)에 고려 말 이색(李穡)의 '오대상원사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에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 ~ 1376)의 제자 영령암(英靈庵)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영령암은 판서 최백청(崔伯淸)과 부인 김씨(金氏)의 시주를 받아 1376년(우왕 2)에 진여원 윗자리에 터를 잡고 상원사 중창 공사를 시작해서 이듬해 가을에 낙성했다. 그 해 겨울 선객(禪客) 33명을 모아 10년 좌선(坐禪)을 시작하였다. 1381년 5주년 기념법회에서 법당의 불상이 빛을 발하고 향내음을 풍기는 광격을 목도한 중창주 김씨는 토지와 노비를 더 시주하여 상원사가 존속에 기여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교는 암흑기를 맞이했다. 고려 말 유학(儒學)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로부터 시작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심해져서 불교는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태종(太宗)은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불교의 11종파(宗派)를 7종으로 통폐합했다. 그런 태종도 상원사만큼은 각별하게 생각했다. 태종은 즉위년 11월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중대 사자암(獅子庵)을 중창하고, 1401년 봄에는 불상을 봉안했다. 그 해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행차하여 성대한 법요식(法要式)과 낙성식을 올렸다. 만년에는 사자암을 자신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상원사는 세조와 인연이 많은 절이다. 조카 단종(端宗)을 죽이고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世祖)는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여 많은 불사를 일으켰다. 그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 각종 불서를 간행했다. 


상원사에는 문수동자 친견 전설과 목숨을 구한 고양이 전설 등 세조와 관련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 온다. 1464년(세조 10) 고질인 악창을 고치려고 오대산에 행차한 세조는 어느 날 상원사 앞 개울에서 목욕을 하다가 지나가던 동자를 불러 등을 밀어달라고 하면서 '어디 가서 임금의 옥체를 보았다는 소리를 하지 말거라'라고 명했다. 그러자 동자는 '어디 가서 문수동자를 보았다고 말하지 마시오'라고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악창이 깨끗이 낫자 세조는 자신이 본 그대로 문수동자상을 그리도록 하였다.  


하루는 세조가 예불을 올리기 위해 상원사 법당에 들어가려 하자 갑자기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 바짓가랑이를 물고는 들어가지 못하게 잡아끄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세조는 호위무사들에게 법당을 수색하라고 명했다. 호위무사들은 세조를 암살하기 위해 법당에 숨어 있던 자객을 찾아내 체포했다. 전설을 입증이라도 하듯 상원사 입구에는 지금도 세조가 옷과 관을 벗어서 걸었다는 관대걸이가 있으며, 문수전(文殊殿) 아래 계단 옆에는 고양이 석상이 쌍으로 세워져 있다. 


1465년 세조는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의 권유로 상원사를 중창한 뒤 전답을 하사하고, 영산부원군 김수온(金守溫)에게 상원사중창권선문(上院寺重創勸善文)을 기록하도록 했다. 인수대비(仁粹大妃)는 쌀 5백 석과 비단 천 필을 시주하여 공사비를 충당하게 하였다. 1466년에는 상원사의 낙성식을 올렸다. 남쪽에는 다섯 칸의 누각에 범종을 안치하였고, 동쪽에는 나한전(羅漢殿), 서쪽에는 청련당(淸蓮堂)이 자리잡았다. 이때 세조의 딸 의숙공주(懿淑公主) 부부는 아들을 낳기를 기원하면서 세조의 명으로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을 조성하고 봉안 발원문과 함께 옷, 불경, 진언, 구슬, 사리 등을 복장(腹藏)했다. 세조가 죽자 예종(睿宗)은 1469년 상원사를 부왕의 원찰로 삼았다. 


1904년 상원사에 선원(禪院)이 개설되고, 1907년부터 근세불교의 고승인 수월화상(水月和尙, 1855~1928)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경허의 세 달' 가운데 한 사람인 수월화상은 천수대비주삼매(千手大悲呪三昧)와 불망념지(不忘念智)를 중득한 '까막눈 선사'로 유명하다. 천수삼매를 증득한 뒤 그는 평생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 원명(曉峰元明), 초대 총무원장 청담 순호(靑潭淳浩), 2대 종정 동산 혜일(東山慧日), 2대 부종정 금오 태전(金烏 太田) 선사는 그의 제자들이다. 


1934년 22세에 한암선사를 은사로 상원사에서 출가한 탄허선사는 3년간 묵언(默言) 참선(參禪)하면서 용맹정진했다. 이후 선사는 15년간 오대산 밖을 나오지 않은 채 수행에 정진했다. 월정사 조실과 오대산연수원장, 동국대학교 대학선원장을 역임하였다. 조계종 초대 중앙역경원장 재임시 선사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한글 번역 작업에 투신하여 '한글대장경'을 간행하였다. 선사는 1983년 월정사 방산굴(方山窟)에서 세수 71세, 법랍 49세로 입적하였다.


탄허선사는 주역의 원리에 따라 미래상을 예측하기도 하였다. 선사는 자연재해와 핵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의 70% 정도가 타격을 입을 때 한국도 피해를 보지만 결국 한국이 세계사의 주역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임을 예언했다. 선사가 자신이 열반할 날짜와 시간(1983년 6월 5일 오후 6시 15분)을 정확하게 맞힌 것도 매우 놀랄 만한 일이다.  


1939년 18세에 탄허선사를 은사로 상원사에서 출가한 만화선사는 노사인 한암선사를 시봉(侍奉)했다. 1946년에는 선원 뒤에 있던 조실(祖室)에서 시봉의 실수로 불이 나 건물이 전소되었으나 이듬해년 월정사 주지 이종욱(李鍾郁, 일본명 廣田種郁, 히로다 쇼이쿠)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을 본떠서 전면 8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을 중창하였다. 


1950년 6.25 내전이 일어났을 때 한암선사는 모든 승려들에게 피란하라고 하였으나 만화선사는 끝까지 남아서 노사의 좌탈입망을 지켜보았다. 상원사, 월장사, 신흥사 주지를 거쳐 1959년 다시 월정사 주지로 취임한 선사는 전쟁으로 불탄 대웅전을 웅장한 모습으로 중건하였으니, 곧 지금의 월정사 적광전(寂光殿)이다. 적광전 외에도 종무소, 동별당, 서별당, 용금루, 사천왕문, 일주문, 진영각, 방산굴 등을 중건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선사는 1983년 12월 11일 상원사에서 세수 62세, 법랍 44세로 입적했다. 


상원사의 현존 건물로는 문수전을 비롯해서 청량선원(淸凉禪院), 소림초당(小林草堂), 동정각(動靜閣), 영산전(靈山殿), 후원(後院) 등이 있다. 청량선원은 오대산을 일명 청량산(淸凉山)이라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문수전에는 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살상, 목조문수동자좌상, 3구의 소형 동자상, 서대에서 옮겨온 목조대세지보살상(木彫大勢至菩薩像)이 봉안되어 있다. 문수동자좌상은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주처(住處)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세조가 친견한 문수동자의 진상(眞像)을 조각했다고 한다. 문수전 바깥 마루에 안치된 신중상(神衆像) 조상(彫像)은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고도 하는데, 세조가 상원사를 중건할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전은 상원사 화재 당시 불길을 피한 유일한 건물로 산내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의 맞배집이다. 영산전에는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 세조가 희사한 39함의 '고려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다. 


상원사가 보유하고 있는 중요문화재에는 문수전에 봉안된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 동정각에 안치된 국내 최고(最古)의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이 있다. 문수동자좌상에서 나온 복장유물과 상원사중창권선문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목조문수동자좌상은 반가부좌 자세로 아미타 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하고 있다. 이 좌상은 조각 기법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넘어가는 불상의 조성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상원사 동종은 신라시대인 725년에 주조된 청동종으로 높이는 1.7m이다. 천판(天板)의 명문(銘文)에는 휴도리(休道里)라는 귀부인이 기증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무늬대(紋樣帶)는 모두 당초문(唐草紋)과 반원형의 구획 안에 천인상(天人象)으로 장식했고, 종신(鐘身)에는 당초문 띠를 바깥에 두른 연화문 당좌(撞座)와 병좌주악천인상(竝座奏樂天人象)을 두 곳에 배치했다. 바람에 날리는 천의자락이 매우 아름답게 표현된 신라종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상원사에서 비로봉을 오르는 방향으로 0.9km의 거리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의 수호암자인 중대 사자암이 있다. 사자암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하여 일만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비로전(毘盧殿)에는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 본존불(本尊佛), 문수보살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좌우 협시보살로 봉안되어 있다. 양각으로 새긴 극락보수(極樂寶樹) 삼존불상 후불탱화(後佛幀畵)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장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비로전 내 벽체 사방 8면에는 각각 다섯 사자좌의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상계(上界)에 5백 문수보살상, 하계(下界)에 5백 문수동자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중대 사자암에서 비로봉 방향으로 0.6km 올라가면 지로산(地盧山) 정상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의 적멸보궁(지방 유형문화재 제28호)이 자리잡고 있다. 지붕은 청기와를 얹었고, 용마루와 합각마루에는 용머리를 올렸다. 공포(栱包)의 형태로 볼 때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적멸보궁은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얻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을 적멸보궁이라고 하는데, 적멸은 번뇌가 사라져 고요한 상태 곧 열반의 경지, 보궁은 보배스러운 궁전이란 뜻이다. 따라서 적멸보궁은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여의고 해탈한 부처의 경지를 나타낸다. 사리가 적멸보궁의 어디에 안치되었는지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적멸보궁 뒤 언덕에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양각으로 5층탑을 새긴 84cm 크기의 마애불탑이 있을 뿐이다.


지로산은 오대산 비로봉에서 뻗어내린 산맥들이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싼 중앙에 솟아 있다. 적멸보궁 터는 여의주를 희롱하는 용의 정수리에 해당된다. 적멸보궁 바로 밑 용의 눈에 해당하는 자리에서 솟아나는 두 개의 샘을 일러 용안수(龍眼水)라 부른다. 


오대산 선재길을 되밟아 오면서 지혜의 보살 문수보살은 누구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 마음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보살심을 일깨워야 한다. 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다. 오대산 선재길에서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삼법인(三法印)이 적멸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다.    


2014.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