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立冬)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가을을 만나러 충주호(忠州湖) 둘레길로 떠났다. 나를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충주호반에는 차마 떠나지 못한 가을이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불타고 있었다.
월악교에서 바라본 충주호 월악나루
월악교에서 바라보는 충주호반의 풍경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다왔다. 계명산(鷄鳴 山)과 지등산(地燈山), 금봉산(錦鳳山, 남산) 등 크고 작은 산들로 아늑하게 에워싸인 호수에는 작은 섬 하나가 외로이 떠 있었다.
忠州湖畔紅葉燒(충주호반홍엽소)
潺潺微波浮小島(잔잔미파부소도)
近水遠山萬古畵(근수원산만고화)
秋尋過客忘紅塵(추심과객망홍진)
충주호반에는 단풍이 불타 오르는 듯
잔잔한 물결에 작은 섬 하나 떠 있네
근수원산은 그대로 만고의 그림인 듯
가을 찾아 떠난 나그네 홍진을 잊누나
월악교에서 바라본 가는골
가는골(細谷)을 병풍처럼 둘러싼 악어봉, 큰악어봉, 월악수리봉, 수리봉도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옷을 입고 있었다. 가는골은 1985년 충주댐이 완공되면서 물속에 잠겼다.
꽤 오래전 가을 송이 풍년이 들었던 해였을 것이다. 가파른 악어봉 산발치에 걸려 있는 오솔길을 따라 가는골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떠나간 빈 골짜기엔 쓸쓸함과 황량감만이 감돌고 있었다.
탄지리에서 바라본 월악산 영봉
탄지(炭枝) 호숫가에 서서 월악산(月嶽山)을 바라보다. 월악 주봉인 영봉(靈峰)이 충주호를 말없이 굽어보고 있었다. '영봉'이라는 신령스러운 이름이 붙은 산은 월악산과 백두산 단 두 곳 밖에 없다. 월악은 설악(雪嶽), 치악(雉嶽)과 더불어 한국의 3악(嶽)으로 꼽히는 명산이다.
월악산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은 동달천(東達川)이 흐르는 송계계곡(松界溪谷), 왼쪽은 광천(廣川)이 흐르는 용하구곡(用夏九曲, 억수계곡)이다. 동달천과 광천은 각각 백두대간 부봉(釜峰)과 대미산(大美山)에서 발원한다. 동달천과 광천은 한수면 복평리 두물머리에서 만나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월악산은 원래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이 곧추 솟아 있다고 해서 '와락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 산에 궁궐을 지으려던 꿈이 무너져서 '와락산'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와락'이 세월이 흐르면서 '워락'->'월악'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월악'이라는 이름이 '영봉에 걸린 달'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달바위뫼'는 멋진 이름이 아닌가!
월악산 서쪽의 미륵리 미륵사지(彌勒寺址)와 송계리 덕주사(德周寺)에는 비운의 마의태자(麻衣太子, 金鎰)와 덕주공주(德周公主)의 애사(哀史)가 전해오고 있다. 신라 부흥운동을 두려워한 고려 조정은 마의태자를 미륵사, 덕주공주를 덕주사에 가두어 볼모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 덕주공주가 조성케 했다고 알려진 문화재가 덕주사마애불(보물 제406호)이다. 두 사람은 미륵사지 미륵불과 덕주사마애불을 마주보게 조성하여 서로의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덕주산성은 고려 고종 때 충주민이 입보(入保)하여 몽골군을 물리친 전적지이다. 송계리에는 구한말 민비(閔妃)가 별궁을 짓다가 일본 낭인에게 암살되면서 중지되었다는 터가 남아 있다.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난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접(南接)의 대부 서장옥(徐璋玉)은 월악산으로 들어와 훗날을 도모하다가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6.25전쟁 직후 남부군(南部軍, 조선인민유격대남부군단) 사령관 이현상(李鉉相)이 전사하자 빨치산(partisan) 잔여부대는 북상하여 월악산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소멸되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빨치산의 투쟁을 그린 권운상의 대하소설 '녹슬은 해방구'(백산서당)의 무대도 월악산이다. 오랜 세월 이 모든 사연들을 월악 영봉은 말없이 지켜보았으리!
송계리에서 월악산 하봉-중봉-영봉을 바라보면 누워 있는 여성의 얼굴 형상이 나타난다. 풍만한 여인 같은 그 자태는 자못 고혹적이기까지 하다. 실제로 월악산은 한반도의 대표적인 음산으로 알려져 있다. 풍수인(風水人)들은 암봉(岩峰)인 영봉이 달을 지향하기에 월악산은 음기(陰氣)가 충만한 음산(陰山)이요, 여자산(女子山)이라고 한다.
무속인들은 월악산을 여산신(女山神)의 상주처로 여긴다. 송계리 월악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자리에는 삼신을 모시는 삼신당(三神堂)이 있었다. 삼신은 지리산 여산신인 마고(麻姑)와 두 딸 궁희(穹姬), 소희(巢姬)로 아기를 점지하고 출산과 육아를 관장하는 신이다. 이처럼 월악산은 음기가 왕성한 산이다. 덕주사에 남근석(男根石)을 세운 것도 양기를 북돋아 음기를 눌러 음양의 조화와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옥순대교에서 바라본 충주호
옥순대교(玉荀大橋) 한가운데 서자 충주호의 환상적인 가을 경치가 펼쳐졌다. 충주호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는 가은산(加隱山)과 말목산(馬項山), 오른쪽에는 옥순봉(玉荀峰)과 구담봉(龜潭峯)이 마주보고 솟아 있었다. 장회나루를 떠난 유람선은 푸르른 물살을 가르며 충주나루를 향해 한가로이 떠가고 있었다.
제천시에서는 제천시 행정구역에 속하는 충주호를 청풍호(淸風湖)로 부르고 있다. 제천시청은 지역 내 도로 안내 표지판의 표기도 청풍호로 바꾸었다. 제천의 시민단체들은 제천시 청풍면 지역이 가장 많이 수몰되었기 때문에 충주호를 청풍호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최근 단양 사람들도 수중보를 경계로 단양호(丹陽湖) 또는 도담삼봉호(嶋潭三峰湖)로 불러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충주시는 인공 호수의 명칭은 댐의 명칭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호수의 명칭을 놓고 지역간 갈등으로 번지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가은산에서 바라본 옥순봉과 구담봉
가은산 기슭의 전망 좋은 바위에 올라서니 옥순봉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을 제대로 보려면 그 산을 떠나야 한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지 않으면 그 산의 전체적인 모습을 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을 살아가다가 난제를 만나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는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는 것이 좋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의외로 쉽게 답을 찾는 경우가 많다.
새바위
새바위
가은산의 명물 새바위를 찾았다. 위쪽에서는 어미새의 모습만 그럴 듯하게 나타났는데, 아래쪽에서 바라보니 어미새 곁에 앙증맞은 새끼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새끼새의 모습이 어쩌면 저리도 귀여울까! 자연이 빚어낸 예술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바위에서 바라본 구담봉과 제비봉
새바위는 둥지봉과 더불어 옥순봉과 구담봉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Viewpoint)다. 수직으로 쭉쭉 뻗은 희고 푸른 바위기둥들이 꼭 죽순을 닮았다고 해서 옥순봉, 절벽 위의 바위가 거북이를 닮았다고 해서 구담봉이다.
구담봉과 말목산 사이로 제비봉이 산세도 좋게 솟아 있었다. 백두대간 대미산에서 갈라진 산줄기는 북쪽으로 문수봉(文殊峰)에 이른 다음 다시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큰두리봉-작은두리봉-석이봉-용두산(龍頭山)-사봉(沙峰)을 지나 제비봉으로 이어진다.
둥지봉 발치에는 마치 벼락을 맞아서 쪼개지기라도 한 듯 두쪽으로 갈라진 벼락맞은바위가 있다. 새바위에서 동남쪽 바로 아래로 보이는 바위다. 둥지봉 정상부에는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진 병풍바위가 있다.
말목산 동쪽 산자락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의 슬픈 사랑 이야기로 유명한 관기(官妓) 두향(杜香)의 묘가 있다.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 그의 나이 48세, 두향은 18세였다. 단양군수를 지내다가 풍기군수로 전임하는 이황을 정성스레 모신 두향은 흰 속치마를 벗어 글 한 줄을 청했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님이었다. 붓을 잡은 이황은 두향의 속치마에다 두보(杜甫)가 꿈에 본 이백(李白)을 그리워하면서 쓴 '夢李白二首(몽이백이수)'를 빌어 이별의 소회를 전했다.
死別已呑聲(사별이탄성) 사별은 울음조차 삼키게 하고
生別常惻惻(생별상측측) 생이별 또한 서럽고 서럽구나
수절한 두향은 말목산 강선대 아래 움막을 짓고 살았다. 이황과의 사랑을 추억하면서..... 20년이란 세월이 흘러 두향 38세, 이황 68세 되던 해였다. 얼마나 이황이 그리웠을까? 두향은 옛 이방한테 부탁해서 홍매(紅梅) 화분 하나와 전별시를 적은 속치마를 안동 도산서원에 기거하던 이황에게 보냈다. 두향을 하루도 잊지 못했던 이황은 5언시(五言詩) 옆에 7언시(七言詩)를 덧붙였다.
相看一笑天應許(상간일소천응허) 서로 만나 한번 웃은 것도 하늘이 허락했음일세
有待不來春慾去(유대불래춘욕거) 기다려도 오지 않고 봄날은 다 가려고 하는구나
이황도 두향을 몹시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다. 이황은 속치마와 함께 도산서원 계곡에서 뜬 물 한 동이를 이방편에 보냈다. 두향의 나이 40세 되던 해, 물에서 역한 냄새가 나고 물동이가 깨지는 일이 일어났다.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예감한 두향은 안동으로 이황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황은 이미 죽고 없었다. '매화 화분에 물을 잘 주라'는 유언과 시 한 수를 남긴 채.....
黃券中間對聖賢(황권중간대성현) 옛 책을 펴서 성현을 마주하고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 텅 빈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소식) 매화 핀 창은 봄소식을 전하는데
莫向瑤琴嘆絶絃(막향요금탄절현) 요금 안고 줄 끊겼다 한탄 마라
*梅 - 두향이 이황에게 보내준 홍매 화분
*絶絃 -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을 상징함
문상도 못하고 도산서원 뒤편 언덕에서 눈물만 흘리다가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자신이 죽으면 이황과 노닐던 강선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곡기를 끊었다. 사랑하는 이가 없는 세상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리! 그로부터 150여년 뒤 조선 영정조 때의 학자이자 문인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는 두향의 묘소를 찾아 추모시를 남겼다.
孤墳臨官道(고분임관도) 외로운 무덤 하나 한길가에 있는데
頹沙暎紅萼(퇴사영홍악) 황량한 모래밭엔 붉은 꽃이 피었네
杜香名盡時(두향명진시) 두향이라는 이름 들리지 않을 때면
仙臺石應落(선대석응낙) 강선대 바윗돌도 사라지고 없으리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그만큼 더 안타깝고 애절했던 두향의 사랑은 당세의 시인 이광려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단양군에서는 1987년부터 매년 5월 두향제를 올려 두향의 넋을 기리고 있다.
새바위에서 바라본 옥순봉과 옥순대교
어느덧 월악산과 사무산(두무산) 사이로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충주호에도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옥순봉 뒤로 백두대간 대미산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북서쪽으로 문수봉-매두막봉-하설산(夏雪山)-어래산(御來山)을 지나 다랑산(多朗山)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새바위에서 바라본 월악산 해넘이
서녘 하늘에 석양이 찬란하게 불타고 있었다. 소멸하기 전 활활 타올랐다가 일순간에 사그라드는 마지막 불꽃처럼..... 저녁 해넘이는 아침 해돋이와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소멸(消滅)의 미학에서 느끼는 비장함이라고나 할까! 머지않아 삭풍한설이 몰아치면 이 가을도 패잔병처럼 소리없이 떠나가리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옥순봉에 뜬 달
해가 지자 땅거미가 순식간에 밀려오고, 옥순봉에는 둥근 달이 떴다. 달을 등진 옥순봉이 실루엣으로 다가왔다. 하늘에 뜬 별들이 한가롭게 흘러가는 뭉게구름 사이로 숨바꼭질하고 있었다. 호수의 수면은 달빛을 받아 금비단빛 잔물결이 일고 있었다.
충주호반에서 찾은 가을은 지난해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우주 자연은 상주불변(常住不變)함이 없어 일체무상(一切無常)함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충주호반을 떠나면서 두향과 이황을 생각하다.
2014.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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