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동안 찬바람만 불기 시작하면 나를 괴롭혀 온 것이 있다. 바로 한냉 알레르기로 인한 아토피 피부염이다. 날씨만 추워지면 팔과 다리에 구진(丘疹)이 오톨도톨 돋아나면서 몹시 가려운 증상이 나타난다. 한번 가렵기 시작하면 피가 나도록 미친듯이 긁어야만 가려움증이 가라앉는다. 어떨 때는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다리를 벅벅 긁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토피 피부염을 치료하기 전
겨울만 되면 반복되는 이 지독한 아토피 피부염을 명색이 한의사라는 사람이 지금까지 왜 방치했을까? 그것은 내가 워낙 게으르기 때문이다. 아토피 피부염은 삶의 질을 상당히 떨어뜨리기는 하지만 죽을 병은 아니다. 가려움증도 계속되는 것이 아니고 하루에 한두 번 내지 세네 번 정도 발작한다. 그런데 가려움증이 발작할 때마다 손가락을 세워 벅벅 긁으면 엄청 시원하면서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진다. 또, 너무 가려워서 견딜 수 없을 때는 샤워기로 아주 뜨거운 물을 환부에 뿌려주면 가려움증이 싹 사라지면서 쾌감까지 느낄 정도다. 이런 나를 마조히스트(masochist, 자학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난 자학자(自虐者)는 아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돌아오면 나의 완고한 아토피 피부염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시나브로 사라진다. 정말 매번 거짓말처럼 쏙 들어간다. 내가 아토피 피부염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 또 하나의 이유다. 한약을 처방하고 달이는 귀찮음도 한몫 작용했다.
내가 가려운 곳을 벅벅 긁을 때마다 집사람이 어떻게 한의사씩이나 되어 가지고 자기 몸 하나도 치료하지 못하느냐고 비아냥거려도 그냥 버텼다. 다른 사람의 병은 고치면서 정작 자기 몸의 병은 못 고치는 나를 보고 혹시 돌팔이가 아니냐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내 자신의 고질을 고칠 생각도 하지 않은 나는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생일을 맞아 부천에 사는 딸네 집에 갔을 때였다. 갑자기 가려움증이 발작해서 넓적다리를 드러내 놓고 무심코 벅벅 긁었다. 내 모습을 본 딸이 언제적 아토피 피부염인데 아직까지 한약으로 치료하지 않고 뭐했느냐고 성화를 부렸다. 딸도 한의사인지라 내가 넓적다리를 벅벅 긁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한심하게 보였을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내 고질(痼疾)인 아토피 피부염을 치료하기로 결심했다.
충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소풍산(消風散)에 사물탕(四物湯)을 가미한 한약 한 제(120CC 40파우치)를 달였다. 소풍산은 소음인(少陰人) 약 7 가지, 소양인(少陽人) 약 5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방제(方劑)다. 풍사(風邪)로 인한 소양증(搔痒症)을 치료하는 대표적인 한약이다. 소풍활혈(消風活血), 청열제습(淸熱除濕)의 효능으로 풍독(風毒)으로 인한 피부 가려움증, 습열로 인한 반진(斑疹), 풍사가 경락에 울체된 병증을 치료한다. 풍진(風疹), 습진(濕疹), 진물이 나는 피부병 등의 치료에 상용한다. 만성 피부염, 두드러기, 땀띠, 아토피 등에도 응용할 수 있다. 혈허증(血虛症)에 열감이 있고, 심한 가려움증에 진물이 나오기도 하면서 특히 야간에 더 심해지는 증상에 많이 사용한다.
사물탕은 소음인 약 3 가지, 소양인 약 1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보혈화혈(補血和血), 조경(調經)의 효능으로 모든 혈증(血症)을 다스리는 대표적인 한약이다. 혈허증과 빈혈(貧血)의 한약 필용방(必用方)이다. 사물탕을 가미한 것은 바싹 마른 나무에 물기를 부어 준다는 의미다. 나무에 물기가 부족하면 껍질이 일어나고 갈라진다. 같은 이치로 사람도 음혈(陰血)이 부족하면 피부가 건조해지면서 거칠게 갈라지고, 가려운 현상이 나타나는 법이다. 물기 즉 음혈을 보충한다는 의미에서 사물탕을 합방한 것이다.
체질약 10 가지, 증치약 6 가지로 구성된 사물소풍산(四物消風散)은 소음인인 내 체질과 증상에 딱 맞는 한약이었다. 언젠가 내 아토피 피부염을 치료하기 위해 한약을 쓴다면 바로 이 사물소풍산을 쓰리라 마음먹고 있던 터였다.
아토피 피부염에 대한 치료 효과는 한약을 복용한 그날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약효가 너무나 신속하게 나타나서 도리어 이상할 지경이었다. 가려움증이 가라앉으면서 긁었던 곳에 난 상처도 아물었다. 가끔 가려울 때도 있었지만 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내 고질 아토피 피부염은 확실히 치료가 되어 가고 있었다.
치료된 아토피 피부염
사물소풍산을 아침과 저녁으로 한 봉씩 먹었다. 이 한약은 약맛도 좋은 편이었다. 한약이 병증에 맞으면 일반적으로 약맛이 좋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환자에게 한약을 처방했을 때는 반드시 약맛을 물어본다. 한약은 기미(氣味)로 치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려움증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사물소풍산을 며칠 더 복용했다. 혹시라도 재발할까 염려가 되어서였다. 한약을 복용한 지 열흘째 되는 날 나는 아토피 피부염이 완전히 치료되었음을 선언했다. 나의 고질 아토피 피부염 완치를 통해서 한의학과 한약의 우수성을 다시 한 번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는 밤이 되어도 가렵지 않아서 너무 좋다. 한밤중에 자다가 말고 벌떡 일어나 넓적다리를 벅벅 긁고 있는 청승맞은 모습은 이제 더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내 사전에 아토피 피부염은 없다. 한냉 알레르기도 없다.
2014.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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