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운악산에 걸린 등불 현등사를 찾아서

林 山 2015. 6. 15. 20:34

운악산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운악산(雲岳山) 중턱에 절이 하나 걸려 있다던가! 운악계곡(雲岳溪谷)으로 들어가기 전 조종천(朝宗川)에 서서 한참동안 암릉미가 뛰어난 운악산의 산세를 감상했다. 825m봉에서 동봉(東峰, 937.5m) 청학대(靑鶴臺)에 이르는 운악산 주능선과 825m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지능선, 동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지능선이 운악계곡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기암과 암봉으로 이루어진 운악산의 산세는 사납고 드센 느낌이 강했다.


현등사 입구


운악산 표지석


하판리 운악계곡 초입에는 운악산 표지석과 현등사(懸燈寺)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표지석에는 운악산의 절경을 노래한 시조 한 수를 새겨 놓았다. 


雲岳山 萬景臺는 金剛山을 노래하고

懸燈寺 梵鐘소리 솔바람에 날리는데

百年沼 舞雩瀑布에 푸른 안개 오르네


삼충단


삼충단복원기념비


순국열사 최익현, 조병세, 민영환 열사 추모비


현등사 일주문(一柱門) 바로 앞에는 제국주의 깡패 일본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조병세(趙秉世), 최익현(崔益鉉), 민영환(閔泳煥) 등 세 열사의 추모비를 세운 삼충단(三忠壇)이 있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인 1910년에 조성한 삼충단은 오랜 세월 훼손된 상태로 버려졌다가 1989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출입문 왼쪽 모퉁이에는 삼충단복원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삼충단에서는 매년 11월 2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1905년 일제는 강제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조선을 식민지화했다. 가평에 은거하고 있던 의정대신(議政大臣) 조병세는 비보를 듣고 상경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을사오적(乙巳五賊) 매국노(賣國奴)들을 처단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며 항거하였다. 그러나, 왜헌(倭憲)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유서 원문은 안타깝게도 구할 수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리고, 팔도에 포고문을 내어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투쟁의 전개를 호소하였다.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거병한 최익현은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하여 일본의 배신을 맹비난하였다. 그는 의병들을 이끌고 순창(淳昌)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일본인이 주는 음식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한 채 단식 항거하다가 순국했다.


민영환은 부일 매국노들과 대립하면서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다가 한직(閑職)인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으로 좌천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이를 반대하기 위해 조병세와 함께 백관(百官)을 이끌고 대한문 앞에 나아가 국권회복의 상소를 올리려고 했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였다. 민영환은 백관들과 함께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 육의전)에 다시 모여 상소를 논의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 자결하였다.  

  

운악산 현등사 일주문


'한북제일지장극락도량' 편액


삼충단 바로 뒤에 단청이 화려한 현등사 일주문이 있었다. 일주문은 일심(一心) 곧 부처의 마음으로 다리를 건너야 불국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 문이다. 일주문 앞쪽 처마에는 한글로 쓴 '운악산 현등사' 편액이 걸려 있었다. 글씨는 운허(耘虛)의 작품이다. 


일주문 뒤쪽 처마에는 '漢北第一地藏極樂道場(한북제일지장극락도량)'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한강 이북에서는 현등사가 지장보살과 아미타불의 기도빨을 가장 잘 받는다는 뜻이리라. 한북제일의 기도도량은 도대체 누가 인정한 것인지 궁금했다.


현등사는 신라 법흥왕 때 인도에서 온 승려 마라하미(摩羅訶彌)를 위해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 오랜 세월 폐사가 되었다가 898년(신라 효공왕 2)에 도선(道詵)이 재창(再創)했다. 1210년(고려 희종 6)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은 주춧돌만 남은 절터의 석등에서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고 삼창(三創)한 뒤 현등사라 했다. 지눌의 꿈에 등불이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보고 현등사라 했다는 설도 있다.


현등사는 1411년(조선 태종 11) 함허화상(涵虛和尙)이 사창(四創)했다. 1447년(세종 29)에 세종은 현등사에 주석하고 있던 함허대사의 상수제자인 혜각 신미(慧覺 信眉)에게 명해 훈민정음으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케 했다.  


1812년(순조 12)~1826년(순조 26)까지 구암(龜巖)과 취윤(就允), 원빈(圓彬)이 현등사를 오창(五創)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현등사의 당우(堂宇)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지금의 현등사는 1961년 성암(省庵)이 중수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등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적멸보궁이 있다고 한다. 불교인들에게 현등사는 강화도 보문사, 관악산 연주암과 더불이 경기도 3대 기도 성지 중 하나라고 한다.  


현등사 현존 당우로는 보광전(普光殿)과 관음전(觀音殿), 극락전(極樂殿), 지장전(地藏殿), 삼성각(三聖閣), 영산대전(靈山大殿), 만월보전(滿月寶殿), 적멸보궁(寂滅寶宮), 요사(寮舍) 등이 있다. 임진왜란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국교 교섭에 대한 선물로 보낸 금병풍(金屛風)이 보관되어 있었다는데, 한국전쟁 때 분실되었다.


백년폭포


운악계곡에서 처음 만난 폭포는 백년폭포(百年瀑布)였다. 가뭄으로 인해 폭포의 물은 거의 말라붙어 있었다. 백년폭포는 낙폭이 10여m에 이르는 3단 폭포였다. '백년'은 '영원'을 뜻하는 말이니, 영원히 변함없이 흐르는 폭포를 상징한다. 하지만 가뭄으로 물이 끊어졌으니 이름값도 못하는 폭포라고나 할까! 


함박꽃나무꽃


산딸나무꽃


계곡에는 하얀 함박꽃나무꽃과 산딸나무꽃이 피어 있었다. 숲속에는 함박꽃나무꽃의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함박꽃나무는 산목련이라고도 하는데, 꽃이 아름답고 기품이 있다. 북한 즉 조선인민공화국에서는 목란(木蘭)이라 하여 나라꽃으로 지정되어 있다.   


산딸나무꽃은 팔랑개비처럼 생긴 꽃 한가운데 딸기 비슷한 녹색 열매가 달려 있었다. 열매가 딸기처럼 생겨서 '산의 딸기나무' 즉 '산딸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꽃이 특이하고 수형이 아름다워서 정원수나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무우폭포


백년폭포에서 조금 더 올라가자 무우폭포(舞雩瀑布)가 나타났다. 무우폭포는 낙폭이 20m로 백년폭포와 더불어 운악계곡의 대표적인 폭포이다. 무우폭포도 물이 거의 말라붙어 있었다. 무우(舞雩)는 안개처럼 뿌옇게 내리는 비를 뜻하는데, 폭포수가 쏟아지면서 물보라가 이는 모습에서 딴 이름일 수도 있다. 무우는 기우제(祈雨祭) 또는 기우제를 지내는 곳을 뜻하기도 한다. 옛날에 심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을지도 모르겠다. 


민영환 바위


'민영환' 암각


무우폭포에서 더 올라가면 큼직한 바위가 있는데, 이름하여 '민영환 바위'다. '민영환 암각(岩刻)'이라고도 한다. 바위 윗부분에는 세로로 '閔泳煥'이라고 큼지막하게 새긴 암각 글자가 있다. 1906년 내시부지사(內侍府知事) 나세환(羅世煥) 등 12명이 새긴 것이다. 세 글자의 길이는 민영환 선생의 키와 같다는 설이 있다. 선생은 가평군 하면 현리에 은둔하고 있을 때 이 바위에 올라 기울어가는 조선의 국운을 탄식하면서 통곡했다고 전한다.


현등사 불이문


현등사 일주문과 불이문(不二門)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일주문에서부터 시작된 연등은 현등사 경내까지 이어져 있었다. 불탄일이 지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연등은 아직도 걸려 있었다. 


'불이(不二)'는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존재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너와 나, 중생과 부처, 선과 악, 유와 무, 아름다움과 추함, 세간과 출세간 등 모든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다. 불이사상(不二思想)은 불교에서 매우 중요하다. 화엄학(華嚴學)의 핵심인 연기설(緣起說)을 모르면 불이사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불이사상의 근본 바탕이 연기사상이기 때문이다. 


연기(緣起) 삼라만상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요소들이 만나고 흩어지는 조건 하에서 생성,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삼라만상은 다른 존재들에 의해서만 현상계(現象界)에 존재할 수 있다. 다른 존재가 없다면 삼라만상도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없으면 너도 없고, 내가 없으면 사회도 없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사회와 내가 둘이 아니다. 정의가 사라지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우리 사회가 불만족스러운가? 불만족스러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가 먼저 정의롭고 깨끗한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 나만 변해서는 안된다. 너도 정의롭고 깨끗한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변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 이것이 불이사상이다. 


불교사상이 고차원적인 혁명사상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 사회를 보다 진보한 이상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는 혁명사상이 바로 불이사상에 담겨 있는 것이다. 


운악산방


지진탑


불이문을 떠나 번뇌를 여의면서 108계단을 올라갔다. 108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찻집인 운악산방(雲岳山房)이 있었고, 그 앞에 지진탑(地鎭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호)이 있었다. 언뜻 봐도 탑은 온전하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지진탑은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현등사를 재창하고 절터의 땅기운를 진정시키기 위해 칠층의 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는 삼층만 남아 있다. 


지진탑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세운 것이다. 현등사가 운악산의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잡고 있기에 쏟아져서 새나가기 쉬운 땅기운을 누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지진탑은 보조국사의 사리탑이라는 설도 있으나 신빙성은 없다.


현등사 3층석탑


지진탑에서 현등사 경내로 올라서자 현등사 삼층석탑(三層石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이 앞을 가로막듯 서 있었다. 이 탑은 방형(方形)의 지대석(址臺石) 위에 단층기단(單層基壇)을 놓고, 그 위에 탑신부(塔身部)와 상륜부(相輪部)를 얹은 일반적인 석탑이다. 기단부에는 종횡선문(縱橫線紋)과 연주문(連珠紋), 연화문(蓮花紋) 등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탑신부에는 상하층 감축이 있어 안정감이 있고, 옥개석(屋蓋石)의 받침돌은 낮은 편이다. 상륜부는 연화문과 연주문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현등사 삼층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말~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 말 도선이 창건주 마라가미를 위해 이 탑을 조성했다는 설은 신빙성이 없다. 이 탑은 원래는 오층석탑이었으나 이층의 탑신과 옥개석이 없어졌다. 탑 울타리가 너무 높아서 탑이 작아보이고 또 다소 답답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아쉽다.   


현지 안내문은 '1470년(성종 1) 세종의 8남인 영웅대군의 부인 송씨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탑을 개탑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 5과를 봉안했다. 사리구는 1979년에 도굴되었다. 삼성문화재단에 보관되어 있던 은제 원통형사리외함과 수정사리내함, 사리 2과를 현등사로 다시 모셔왔다. 2008년 4월 초하루에 사리방광이 일었다. 환희심을 내어 보니 사리 3과가 순신되어 나투셨다. 1과는 정골사리, 2과는 피사리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왕실의 발원으로 현등사 탑의 중창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현등사 보광전


대자대비전


보광전 법고


보광전은 ㄷ자형의 다소 특이한 전각이었다. 보광전의 좌우로 튀어나온 건물의 처마에는 각각 '雲岳山懸燈寺(운악산현등사)', '保合太和樓(보합태화루)', 뒤쪽 처마에는 한글로 '대자대비전'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바깥쪽 건물은 관음전이었다. 대자대비전 복도 천정에는 


보광전은 동방유리광세계(東方瑠璃光世界)의 교주인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 일명 대의왕불(大醫王佛)을 모신 법당으로 유리광전(瑠璃光殿), 약사전(藥師殿), 만월전(滿月殿)이라고도 한다. 약사유리광여래를 줄여서 약사여래(藥師如來) 또는 약사불(藥師佛)이라고 한다. 약사여래의 협시(脇侍)는 일광변조보살(日光遍照菩薩)과 월광변조보살(月光遍照菩薩)이며, 불상 뒤에는 약사회상도(藥師會上圖)를 건다.


약사여래는 동방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에 있으면서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시키며, 부처의 원만행(圓滿行)을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묘과(妙果)를 증득케 하는 부처이다. 그는 과거세에 약왕보살(藥王菩薩)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고통을 소멸시키기 위한 12대원(大願)을 세웠다.


보광전 수월관음도


보광전 법당에는 백의관음상(白衣觀音像) 뒤에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8호)가 후불탱화로 봉안되어 있다. 현등사 수월관음도는 검은색 바탕에 금은니(金銀泥)로 그린 점이 특징이다. 조성 시기는 20세기로 보인다. 정확한 제작 연도와 제작자는 알 수 없다. 전체적으로 연기에 그을린 듯 심하게 퇴색되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자유자재로 현신할 수 있는 신통력을 지닌 존재로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수월관음도는 물 속의 달을 바라보고 있는 관세음보살을 표현한 것이다. 화면 중앙에는 관세음보살이 원형의 두광(頭光)을 지고 달을 배경으로 기암괴석 위에 앉아 있고,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보관 중앙의 두광과 신광(身光)을 갖춘 불좌상(佛座像)은 화불(化佛)을 표현한 것이다. 얼굴은 네모지고, 코는 길고 작으며, 입은 조그맣게 오므렸다. 


하늘에는 구름 위에 올라선 10명의 백의관음(白衣觀音)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였다. 하늘과 물의 경계는 구름으로 나누고, 사천왕(四天王)의 모습을 한 신장(神將)들이 그려져 있다. 화면의 왼쪽 하단에는 천녀(天女)와 공양자상(供養者像), 동자상(童子像), 오른쪽에는 두 손으로 용을 잡은 인물과 합장한 인물이 그려져 있다.


관음전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원력을 가졌기에 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대비전(大悲殿), 보타전(菩陀殿),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보광전 반대편의 대자대비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보광전 기둥에는 큰 목탁이 하나 걸려 있는데, 매년 봄 곤줄박이가 찾아와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아기새들을 키워 나가서 방송에도 보도된 바 있다. 약사여래와 관세음보살의 가호가 있었음인가!


현등사 극락전


극락전은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의 주재자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시는 전각이다. 서방정토 또는 극락정토를 안양(安養), 안양국(安養國), 안락세계(安樂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불토(無量光佛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한다.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아미타회상도 후불탱화


현등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양식의 건물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렸다. 1984년 기와 교체 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극락전은 1746년(영조 22)에 조성되었다. 법당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3호)을 봉안하고, 그 위에 닫집을 달았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759년(영조 35)에 제작된 것이다.  


극락전에는 아미타회상도(彌陀會相圖,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5호)가 후불탱화로 걸려 맀고, 좌우 벽에는 신중도(神衆圖,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가 걸려 있다. 아미타회상도와 지장시왕도는 1759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제작될 때 함께 조성된 것다. 


아미타회상도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근거해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관장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아미타불의 설법 장면을 그린 탱화이다. 화기에는 오관(悟寬) 등 9명의 화원이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락(剝落)이 많이 진행되어 보존 상태는 좋지 않은 편이다.


중앙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한 아미타여래는 거신광배(擧身光背)를 지고 있고, 광배는 두광과 신광 이중으로 표현되어 있다. 거신광배 주위를 여러 인물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화면 상단에는 용왕, 용녀, 아수라, 가루라, 건달바, 긴나라, 금강역사 등 팔부중이 배치되어 있다. 중단과 하단에는 제석, 범천, 4보살과 좌우 협시인 백의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이 표현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지장보살은 빠져 있다.


극락전 신중도


신중도는 극락전에 봉안된 아미타회상도(彌陀會相圖) 좌우에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와 함께 걸려 있다. 신중도는 1790년(정조 14) 지장암(地藏庵)에서 조성된 뒤 현등사 극락전으로 옮겨 왔다.  


신중도는 불교가 토착화하면서 토속신들이 불교의 신으로 수용되면서 나타난 탱화다. 우리나라에서는 시왕신과 칠성신, 산신 등이 불교의 신으로 수용되었는데, 이러한 신들을 표현한 그림을 신중도라고 한다. 신중도에는 제석도(帝釋圖), 제석범천도(帝釋梵天圖), 천룡도(天龍圖), 제석천룡도(帝釋天龍圖), 제석금강도(帝釋金剛圖), 39위신중도(三十九位神衆圖)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현등사 신중도는 범천과 제석을 중심으로 좌우 2단으로 나뉘어 있다. 상단에는 주존(主尊), 하단에는 화엄팔부중(華嚴八部衆)으로 보이는 무장한 권속들을 배치하였다. 범천과 제석 좌우로는 도교의 신인 일월천자(日月天子)와 동자(童子)가 배치되어 있다. 동자상은 화엄팔부중의 중간에 배치되어 좌우를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극락전 지장시왕도


현등사 극락전 지장시왕도는 1830년(순조 30)에 제작되었다. 화면 중앙 이중의 원형광배(圓形光背) 안에 본존인 지장보살이 있으며, 승려 모습의 도명존자(道明尊者), 관을 쓴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합장을 하고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다. 그 옆으로 시왕(十王)과 판관(判官), 사자(使者), 우두(牛頭), 마두(馬頭), 앙발(仰髮), 선악동자(善惡童子) 등의 권속이 4단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단에는 홀(笏)을 든 판관과 옥졸(우두, 마두, 앙발), 본존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두루마리 1개를 든 문관형의 판관이 각각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중단에는 판관과 선악동자, 상단 2줄에는 시왕과 동녀(童女)들이 배치되어 있다. 


지장보살은 2겹의 윤광(輪光),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은 원형 두광을 지고 있다.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사이의 위쪽 공간에는 작은 부처를 배치하였다. 인물의 위에는 8폭 병풍이 있는데 본존 쪽의 양끝 폭을 접어서 원근감을 표현하고 있다.

병풍의 뒤쪽으로는 지장보살의 머리 위까지 도식화된 구름문양을 표현하였다. 극락전 지장시왕도는 중앙 하단부에 떨어져 나간 곳이 있는 등 아미타회상도보다도 보존 상태가 더 좋지 않다. 


현등사 동종


극락전에는 1619년(광해군 11) 봉선사(奉先寺)에서 만들어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현등사로 옮겨온 동종(銅鐘, 보물 제1793호)이 보관되어 있다. 종의 배 부분에는 해서체로 주종기(鑄鐘記)를 돋을새김하였다. 천보(天寶)가 만든 73.5cm 크기의 이 동종은 종신(鍾身)을 여러 개의 구획선으로 나누고, 그 안에 연엽문(蓮葉文)과 당초문(唐草紋), 파도문(波濤文) 등을 화려하게 새겨 넣었다. 현등사 동종은 남양주 봉선사 동종((南陽州 奉先寺 銅鍾, 1469년 제작, 보물 제397호)이나 흥천사명 동종(興天寺銘 銅鍾, 1462년 제작, 보물 제1460호), 합천 해인사 동종(陜川 海印寺 銅鍾, 1491년 제작, 보물 제1253호) 등 조선 전기의 왕실발원 범종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또, 고려 후기 연복사종(演福寺鐘)에서 비롯된 중국종 양식도 따르고 있다.


현등사 지장전


지장전은 명부세계(冥府世界)의 왕인 염라대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부전(冥府殿), 염라대왕 뿐만 아니라 지옥에 있어서 죄의 경중(輕重)을 정하는 열 분의 왕(十王)을 모신 곳이라 하여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부른다. 지장전에서는 중앙에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왼쪽에 도명존자, 오른쪽에 무독귀왕을 봉안하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 동자상, 판관 2인, 녹사(錄事) 2인, 장군 2인을 ㄷ자형으로 배치한다.


현등사 지장전에는 청동지장보살좌상(靑銅地藏菩薩坐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4호)과 후불탱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4호)가 봉안되어 있다. 


지장전 청동지장보살좌상과 지장시왕도


현등사 청동지장보살좌상은 조선 후기의 보살상 가운데 소형에 속한다. 원래는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지장전을 새로 지으면서 옮겨 왔다. 바닥면에 새겨진 조성기(造成記)에 따르면 이 불상은 1790년(정조 14) 관허당 설훈(觀虛堂 雪訓)과 용봉당 경환(龍峰堂 敬還)이 지장암에 봉안하기 위하여 제작한 것이다. 


머리는 앞으로 약간 숙이고 눈을 반쯤 감은 상태에서 선정(禪定)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입은 미소를 살짝 머금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고,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편 채로 무릎 위에 댄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지장전 지장시왕도는 아미타회상도와 같은 1759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청동지장보살좌상의 후불탱화로 걸려 있다. 중앙의 높은 대좌 위에 지장보살이 반가좌로 있으며, 발은 분홍색의 연화 봉오리가 받쳐 들고 있다. 이중원형광배를 두르고 오른손을 어깨 높이만큼 들었으며, 왼손은 무릎까지 내려 옷자락을 잡고 있다.



현등사 삼성각


현등사 삼성각은 극락전 뒤에 있었다. 산신(山神), 독성(獨聖), 칠성(七星) 등 삼성신앙(三聖信仰)은 불교가 한반도에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고유의 토속신앙이 수용되어 생긴 것이다. 삼성각은 보통 사찰의 뒤쪽이나 구석진 자리에 세워진다. 삼성을 따로 모실 경우에는 산신각(山神閣), 독성각(獨聖閣), 칠성각(七星閣) 등의 전각 명칭을 붙인다. 삼성을 함께 모실 때는 정면 3칸, 측면 1칸, 따로 모실 때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을 짓는다.


 삼성각 칠성탱화


현등사 삼성각 칠성탱화도(七星幀畵圖,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5호)는 1861년(철종 12)에 삼각산 화계사에서 조성된 뒤 나중에 독성도와 함께 현등사로 옮겨 왔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와 두산백과에는 '칠성정화도'로 잘못 표기되어 잇다. 칠성탱화(七星幀畵) 또는 칠성도(七星圖)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다. 


삼성각 칠성탱화는 본존인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 북극성)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좌우에 협시하고 있으며, 그 좌우에 북두칠성을 부처로 표현한 칠여래(七如來), 도교와 관련된 칠원성군(七元星君), 남극노인상(南極老人像, 동자칠원성군(童子七元星君), 삼태육성(三台六星), 이십팔수(二十八宿), 자미대제(紫薇大帝) 등의 권속들이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어 있다. 칠여래를 사선으로 배치하고, 동자칠원성군 등을 상단, 칠원성군을 하단에 배치하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인물들을 작게 묘사함으로써 안정감과 원근감을 준다. 


칠성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을 뜻한다. 칠성신앙은 중국의 도교사상과 불교가 융합되어 생긴 신앙이다. 대개는 손에 금륜을 든 치성광여래를 본존으로 하고,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 협시로 둔다.


삼성각 독성탱화


현등사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6호)는 1875년(고종 12) 삼각산(三角山) 화계사(華溪寺)에서 상궁 장씨(張氏)가 순종과 왕비, 그리고 그해에 태어난 정씨(鄭氏)를 위하여 그린 것이다. 나중에 치성광여래도(熾星光如來圖)와 함께 현등사로 이전되었다.


현등사 독성도에는 녹색의 원형 두광을 진 노비구가 녹색 두루마기 위로 붉은 가사를 걸치고 기암괴석 위에 앉아 있다. 양옆에는 소나무가 있고, 그 주위에 바위 절벽이 있다. 오른쪽에는 모란꽃과 새 한 마리, 왼쪽에는 바위 위에 향로와 필통이 그려져 있으며, 바위 밑으로는 폭포와 강이 묘사되어 있다.


독성은 독수성(獨修聖)이라고도 하는데, 천태산(天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은 나반존자(那畔尊子)를 가리킨다. 사찰에서는 수독성탱(修獨聖幀), 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는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모신다. 탱화는 천태산과 소나무, 구름 등을 배경으로 희고 긴 눈썹을 드리운 비구가 오른손에는 석장(錫杖), 왼손에는 염주 또는 불로초를 들고 반석 위에 정좌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때로는 독성 외에 차를 달이는 동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동자와 문신(文臣)이 양쪽 협시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삼성각 산신탱화


산신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이다. 탱화에는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 호랑이로 나타난다. 산신은 대개 백발 수염을 한 도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현등사 산신도는 화법이나 색감으로 보아 근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현등사 영산보전


현등사 영산보전 석가모니삼존불


현등사 영산보전은 건물에 단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최근에 지어진 듯했다. 영산보전 용마루 양쪽 끝에는 치미(鴟尾)가 장식되어 있었다. 치미는 길상(吉祥)과 벽사(辟邪)의 의미가 있으며, 외양은 상상의 새인 봉황을 본뜬 것이다. 


치미는 고대의 목조건축에서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장식하던 기와이다. 일반적으로 앞면은 굴곡된 능골이 반전되고 있으며, 뒷면은 무늬가 전혀 없거나 연꽃무늬 등이 새겨져 있다. 옆면은 봉황의 몸통과 깃 부분을 구획하는 굵은 돌대를 설정하여 그 안쪽에는 침선(沈線)이나 꽃무늬를 배치하고, 바깥쪽에는 날개깃과 같은 단열(段列)이 층을 이루면서 호형(弧形)으로 길게 뻗어 있다. 


영산전은 고타마 싯다르타(瞿曇悉達多, Gotama Siddhrtha, 석가모니)와 갈라보살(羯羅菩薩)과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좌우 협시로 봉안한 전각이다. 후불탱화(後佛幀畫)로는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던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봉안한다. 


영산전에는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瑜城出家相), 설산고행상(雪山苦行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등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여덟 시기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八相圖)도 봉안한다. 그래서 영산전을 팔상전(相殿)이라고도 한다. '捌'은 ‘八’의 갖은자이다. 


영산(靈山)은 영취산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했던 영산불국(靈山佛國)을 상징한다. 불교의 성지 영산불국을 재현한 것이 영산전이다. 영산전에 참배하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불국토인 영산회상에 참배하는 것이 된다. 천태종(天台宗)을 계승한 사찰에서는 대개 영산전을 본전으로 삼는다. 


현등사 만월보전


현등사 만월보전


현등사 만월보전 약사여래삼존불


만월보전은 2층목탑 형식의 전각이었다. 만월보전도 지어진 지 멀마 안된 듯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어쩌면 영산보전과 함께 애초부터 무단청 전각으로 지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부안 능가산(楞伽山) 내소사(來蘇寺) 무단청 대웅전도 유명하지 않은가! 법당에는 석조약사여래삼존불(石造藥師如來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었다. 약사여래의 좌우 협시 보살은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일 터였다. 


현등사 적멸보궁


현등사 적멸보궁


현등사 적멸보궁 편액


현등사 적멸보궁 법당


적멸보궁에서 바라본 현등사 전경


현등사 적멸보궁은 영산보전 위 가파른 절벽 위에 있었다. 바위절벽에 계단을 파서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을 만들었다. 터도 상당히 비좁았다.  


적멸보궁은 법당에 부처의 불상을 모시는 대신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궁(宮)이다. 궁은 전(殿), 각(閣)보다 우위에 있다. 사리탑(舍利塔)은 보통 법당의 바깥이나 뒷쪽에 봉안하고, 언덕 모양의 계단(戒壇)을 설치한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뒤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으로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를 열었던 금강좌(金剛座)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석가모니는 해탈한 뒤 처음 7일 동안 시방세계(十方世界) 불보살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기 위한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들어갔다. 이때 많은 보살들이 모여 석가모니의 공덕을 칭송하자, 그는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한몸이 되었다.


따라서 적멸보궁은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곳이다. 진신사리는 곧 부처와 동일체로 간주되었으며, 부처의 열반 이후 불상이 조성될 때까지 가장 경건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불상이 조성된 이후에도 적멸보궁은 불자들에게 가장 신성한 순례지이자 기도처로서 신봉되고 있다. 


643년 신라의 자장(慈藏)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부처의 사리와 정골(頂骨)을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태백산 정암사(淨巖寺),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에 나누어 봉안했다고 한다. 이른바 5대 적멸보궁이다. 대구 달성군의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경남 사천시 다솔사(多率寺)에도 적멸보궁이 있다. 현등사에 적멸보궁이 있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처음 알았다. 


함허당득통탑과 석등


보봉당충현지탑과 무명 부도


현등사에서 절고개 방향 등산로쪽으로 조금 떠를 따라 조금 걷다 보면 함허당득통탑 및 석등(涵虛堂得通塔, 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9호)을 만난다. 함허당득통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보봉당충현지탑(寶峰堂忠鉉之塔)과 명문이 없는 석종형 부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무명 부도는 기록에 보이는 북악부도(北岳浮屠)가 아닌지 모르겠다. 화담당경화탑(華潭堂敬和塔, 가평군 향토유적 제1호)은 현등사 보광전과 극락전 사이로 난 비탈길을 따라 약 300m쯤 떨어진 거리에 있다.  


함허당득통탑은 1411년(조선 태종 11)에 현등사를 중창했던 함허 기화(涵虛 己和)의 팔각원당형부도(八角圓堂型浮屠)이다. 팔각형의 지대석에 2단의 팔각형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둥근 탑신을 얹은 형태이다. 탑신에는 세로로 '涵虛堂得通塔'이 전서체(篆書體)로 음각되어 있다. 팔모지붕의 옥개석은 물매가 급하게 내려갔다. 상륜부의 노반과 복발, 보륜과 보주는 각각 하나의 석재로 만들었다. 이 탑은 조선 초기 부도의 양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다. 


함허당득통탑 앞에는 작은 석등이 세워져 있다. 방형의 이 석등은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장명등(長明燈)과 비슷하다. 석등 몸체에는 '涵虛'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하지만, 마멸이 심해 확인할 수가 없다. 부도 앞에 석등을 세운 예는 고려 말~조선 초의 부도에서 찾을 수 있다. 


함허화상(涵虛和尙)은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하던 벗의 죽음을 보고 인생무상을 느껴 1396년(태조 5)에 출가했다. 1397년 회암사(檜巖寺)에서 무학(無學)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1404년(태종 4)에 깨달음을 얻었다.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의 법통을 이은 함허화상은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원각경소(圓覺經疏), 영가집설의(永嘉集說誼), 현정론(顯正論), 윤관(綸貫),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 등의 저서를 남겼다.


화담당경화탑은 말년에 현등사에 들어와 불법을 강론하고 수도에 전념하다가 1848년에 입적한 화담당 박경화 스님의 부도탑이다. 팔각형의 지대석과 그 위에 올린 2단의 팔각형 기단은 함허당특통탑과 같은 양식이다. 화담당경화탑은 기단 위에 석종형 탑신을 올렸다. 기단석 앞면에는 '華潭堂敬和塔'이란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이 탑의 건립연대는 '戊申 十月 立'이란 음각으로 보아 조선 헌종 14년 10월임을 알 수 있다. 


화담당은 1803년(순조 3)에 화양사(華陽寺) 성찬(性讚)에게 출가하여, 율봉 청고(栗峯 靑杲)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화악 지탁(華嶽 知濯)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40년간 솔잎과 죽만 먹고 밤낮으로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을 한 것으로 알려진 화담당은 55회의 화엄강론(華嚴講論)을 펼친 화엄강백(華嚴講伯)으로도 유명하다. 


보봉당충현지탑은 1984년 극락전, 보광전 등을 개축한 보봉당 충현의 부도탑이다.


구름바위 구비구비 산길을 돌아서 법계를 두루 밝힐 등불을 찾아 왔다. 하지만 마음 속에 꺼진 등을 밝히려 하지 않고 밖에서 등불을 찾는 일은 헛되고 또 헛된 일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생각하면서 현등사를 내려가다.

   


2015. 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