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서북능선에서 내려와 평양의 부벽루(浮碧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조선의 4대 누각이라고 일컫는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에 들렀다. 솟을삼문에 풍판(風板)을 단 정문 건물 처마에는 '청허부(淸虛府)' 편액이 걸려 있었다.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산다는 달나라 옥경(玉京)인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에서 청허부라 했을 것이다. 편액 글씨는 서예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작품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마침 광한루원에서는 5월 22일부터 시작된 제85회 춘향제(春香祭) 마지막날 행사인 제42회 대한민국춘향국악대전(大韓民國春香國樂大典)이 열리고 있어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광한루
호남제일루
광한루(보물 제281호) 본루(本樓)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누마루 건물이다. 월랑(月廊)은 정면 1칸에 측면 3칸, 본루 동편의 익루(翼樓)는 정면 3칸에 측면 3칸 규모다. 규모로 보나 건축 양식으로 보나 광한루는 조선 4대 누각 중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1419년 남원에 유배된 황희(黃喜)는 요천(蓼川)가에 누각을 짓고 광통루(廣通樓)라 하였다. 1444년 충청 전라 경상 삼도순찰사였던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가 광통루에 올라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다가 '호남의 승경으로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지부(廣寒淸虛之府)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 하고 감탄한 뒤 이름을 광한루로 고쳤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청병(淸兵)에 의해 광한루는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건물은 1626년 남원부사 신감(申鑑)이 복원한 것이다.
누각 정면 처마에는 '광한루(廣寒樓)', 뒤편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끝에는 '계관(桂觀)' 편액이 걸려 있었다. '호남제일루'는 말 그대로 호남에서 으뜸가는 누각이라는 뜻이고, '광한청허지부'는 옥황상제가 산다는 하늘나라 월궁(月宮)의 옥경이다. 따라서 광한루는 지상에 재현한 옥황상제의 궁전인 광한청허부를 상징한다. '계관'은 달나라에 있다는 전설상의 계수나무 신궁(神宮)을 상징한다.
'광한루' 편액은 신흠(申欽)의 아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호남제일루'와 '계관' 편액은 1855년 남원부사 이상억(李象億)이 누각을 중수하면서 썼다. '계관' 편액은 동학혁명 때 없어진 것을 1930년대 광한루를 보수할 때 강대형(姜大炯)이 다시 써서 걸었다. '광한루' 편액도 1935년 전 민의원 조정훈(趙定勳)이 다시 쓴 것이다.
1879년 광한루가 북쪽으로 기울어지자 누각의 북쪽에 하층 5단, 상층 5단의 2층 월랑(다락)을 세워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월랑의 양쪽 난간에는 칸살을 설치하였다. 현관의 작은 지붕은 본루와 익루의 높고 큰 지붕과 조화를 이루어 누각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준다. 광한루 월랑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누각에 월랑을 설치한 것으로 건축사상 큰 의의가 있다. 이전까지의 누각들은 누상을 오르내리는 사다리만 설치했었다. 월랑의 가설로 광한루는 기울음을 바로잡고 외관적으로도 훨씬 더 화려한 건축물이 되었다.
누각의 동쪽으로 연달아 낸 익루는 1795년 남원부사 이만길(李萬吉)이 광한루를 중수할 때 가설했다고 한다. 3면에는 퇴를 둘러 개방하였고, 그 안쪽에 2칸의 온돌방을 만들었다. 남원지(南原誌, 1960)나 증보남원지(增補南原誌, 1972)에는 익루가 1925년 보수공사 때 만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느 설이 맞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광한루는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春香傳)'의 무대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李夢龍)은 오월 단옷날 광한루에 올라 봄경치를 구경하다가 그네를 타던 기생 월매의 딸 성춘향(成春香)을 보고는 홀딱 반하게 된다. 춘향이가 그네를 타던 곳은 어디쯤이었을까? 생각하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허구인 소설을 역사적 사실로 착각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성춘향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지자체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관광수입을 위해 역사적 사실까지 왜곡한다면 그건 아니라고 본다. 다른 지자체들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려면 우리가 먼저 역사 앞에 떳떳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역사 앞에 떳떳한가? 우리나라의 역사는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는 부일민족반역자들과 그 후손들에 의해 끊임없는 조작과 왜곡이 시도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두 눈 부릅뜨고 도도한 민중의 역사를 지켜내야 한다.
오작교
광한루 앞 연지(蓮池) 한가운데에는 오작교(烏鵲橋)가 놓여 있었다. 오작교는 음력 칠월 칠석에 까마귀와 까치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서로 만나게 하기 위해 은하수에 모여서 서로 몸을 연결하여 만든다는 전설 속의 다리이다. 일년에 단 하루 밖에 만날 수 없는 견우와 직녀의 애틋한 사랑과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이몽룡과 성춘향의 운명적인 사랑은 서로 닮은 점이 있다. 그래서 몽룡과 춘향이 사랑이 어린 다리 이름을 오작교라 했을 것이다. 예로부터 오작교를 밟으면 부부 금슬이 좋아진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또, 처녀가 아닌 여자가 오작교를 건너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믿거나 말거나다.
1582년(선조 15) 남원부사 장의국(張義國)은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요천(蓼川)의 물을 끌어와 연지를 만든 다음 호수 한가운데에 홍예교(虹霓橋)를 새로 가설하고 오작교라 명명했다.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광한루는 1626년에 복원되었지만, 오작교는 처음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길이 57m, 폭 2.4m, 4개의 홍예경간(虹霓徑間)으로 이루어진 오작교는 국내 현존 연지교(蓮池橋) 중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영주각
연지에는 신선이 산다는 신화 속의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하는 영주(瀛洲, 봉래(逢萊), 방장(方丈) 등 세 개의 섬이 떠 있었다. 삼신산은 도교(道敎)에서 신선이 산다는 신산(神山)이다.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에 '6국을 합병하고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불로초를 얻으려고 서복(徐福, 사기에는 徐市)에게 동남동녀(童男童女 ) 500명을 데리고 바다 건너 삼신산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삼신산을 본떠 금강산과 지리산, 한라산을 각각 봉래산과 방장산, 영주산으로 불렀다.
영주섬(瀛洲島)에는 단층 누각인 영주각(瀛洲閣)이 세워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무 그늘이 시원한 누 위에 올라 바로 앞 완월정(玩月亭) 무대에서 열리고 있는 춘향국악대전을 감상하고 있었다. 연지에는 잉어와 비단잉어들이 떼를 지어 유영하고 있었다. 알을 깔 때라서 그런지 잉어들이 물가에까지 나와 텀벙거렸다.
방두천(房斗天)이 편찬한 남원군 읍지인 '용성지(龍城誌)' 누정(樓亭) 편에 보면 '전라관찰사 정철(鄭澈)이 요천에서 끌어온 물이 누 앞을 좁다랗게 흐르던 개울을 넓혀서 평호로 하고 은하수를 상징케 했다. 호수 주위에는 석축을 쌓았다. 호수에는 세 개의 섬을 만들어 하나에는 녹죽(綠竹)을 심고, 하나에는 백일홍(百日紅)을 심었으며, 다른 하나에는 연정(蓮亭)을 세웠다. 섬 안에 여러 종류의 꽃을 가득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영주각은 정철이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영주섬을 당시에는 한주섬(漢州島)이라 불렀던 것 같다.
'증보남원지'에 의하면 지금의 영주각은 1795년(정조 19)에 남원부사 이만길(李萬吉)이 재건한 것이다. '영주각' 편액도 이만길이 손수 써서 걸었다. 1965년 제36회 춘향제를 준비하면서 영주각은 지금과 같은 단청이 되었다.
영주섬에서 연지교를 건너면 봉래섬이다. 연지교 다릿발은 돌기둥, 교판(橋板)과 난간(欄干)은 나무로 만들었다. 봉래섬에는 대나무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
방장정
봉래섬에서 연지교를 건너면 방장섬이다. 방장섬에 있는 육각형 정자인 방장정(方丈亭)이 세워져 있었다. 지금의 방장정은 1963년경 도편수(都邊首) 이한봉(李漢鳳)이 건축하였다. '방장정' 편액 글씨는 강암(剛岩) 송성용(宋成鏞)의 작품이다. 방장정 마루에는 유람객들이 피곤한 다리를 쉬고 있었다.
완월정에서 열린 제42회 대한민국춘향국악대전
완월정(玩月亭) 앞 무대에서는 제42회 대한민국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날 판소리 명창대회에서 전북 남원 출신의 양은주씨가 심청가(沈淸歌) 중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을 완벽하게 불러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았다. 최우수상에는 심청가 중 ‘심청이 물에 빠지는 대목’을 부른 이연정씨, 우수상에는 춘향가(春香歌) 중 ‘십장가(十杖歌)’를 부른 김지숙씨가 각각 받았다.
춘향국악대전이 한낮의 땡볕에서 열린 탓인지 무대 앞 객석은 텅텅 비어 있었다. 나무 그늘이 진 곳에만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명창대회를 감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큰 대회를 꼭 햇빛이 쨍쨍 내려쬐는 땡볕 아래에서 열어야만 했을까? 관객을 고려하지 않은 주최측의 대회 운영 방식이 아쉬웠다. 관객이 없으면 공연예술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완월정'은 '달나라를 완상(玩賞)하는 정자'란 뜻이다. 완월정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은 바로 달을 완상하기 위해서다. 옥황상제가 산다는 달나라 옥경의 광한청허부를 중심으로 그 아래 오작교가 있고 은하수가 굽이치며, 계관의 절경 속에서 선녀들이 노니는 월궁을 완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정자가 완월정이다. 풍류(風流)의 극치라고나 할까! 광한루원은 완월정으로 인해 한층 더 멋진 정원이 될 수 있었다. 아무리 기막힌 절경이라도 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완월정은 1971년에 신축된 정면 6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각지붕 5량의 굴도리집이다. 인공 장방형 호수를 판 뒤 2층의 수중누각(水中樓閣)을 세웠다. 누각의 이름은 옛날 남원성 남문의 문루(門樓)인 완월루(翫月樓)에서 따온 것이다. 남원성의 남문인 완월루는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봉기(東學農民蜂起) 이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스탠다드차터드은행 네거리에 있었다. 완월루에서는 해마다 5월 대한민국춘향국악대전이 열리고 있다.
왕버드나무 보호수
연지 가에는 수백년 묵은 왕버드나무 보호수가 서 있었다. 일설에는 1582년 오작교를 만들 때 왕버드나무도 함께 심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령이 최소한 400살 이상 되었다고 봐야 한다. 엄청나게 큰 왕버드나무 보호수는 사진 촬영의 명소였다. 왕버드나무 보호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인생은 짧고 사진은 길다'는 말이 떠올랐다.
광한루 동쪽 대나무숲 속에는 춘향의 영정각인 춘향사(春香祠)가 있었다. 처마에는 '열녀춘향사(烈女春香祠)'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대나무는 절개를 상징하는 나무가 아니던가! 춘향사는 이몽룡을 향한 춘향의 일편단심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세웠다. 사당에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춘향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해마다 5월 5일에는 춘향제가 열린다. 춘향의 영정은 나로 하여금 소설 속의 가공인물을 마치 실존인물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광한루 서쪽에는 춘향관이 있었다. 1992년에 개관한 춘향관은 춘향의 일대기를 9폭의 대형 화폭에 담아 전시한 건물이다. 페미니스트(feminist)들은 여성의 절개를 강조하는 봉건주의 시대의 윤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소설 '춘향전'의 무대가 된 월매집은 광한루원 서남쪽 모퉁이에 있었다. 광한루를 구경하다가 그네를 뛰고 있던 춘향에게 홀딱 반한 이몽룡이 그녀와 백년가약을 맺은 부용당과 행랑채를 재현해 놓았다.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게 밀랍인형과 생활 도구들도 전시해 놓았다. 사랑의 맹세판과 장원급제 기원단도 있으며, 춘향의 캐릭터 상품도 판매한다.
비석군
광한루와 춘향사 사이에는 30기의 비석이 담장을 따라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있는 비석군(碑石群)이 있었다. 동헌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해방 후에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이들 비석은 남원에 부임했던 부사나 군수 등 벼슬아치들의 선정비(善政碑) 또는 송덕비(頌德碑)들이다.
물론 비석의 주인공 가운데 선정을 베푼 벼슬아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관매직(賣官賣職)이 행해지고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이 판을 치던 조선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저런 선정비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조선시대에는 학정(虐政)과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은 탐관오리들이 선정비의 주인공으로 둔갑한 경우가 허다하게 많았다. 탐관오리들은 선정비를 통해서 자신의 학정을 감추고 마치 선정을 베푼 벼슬아치인 양 행적을 세탁했던 것이다.
탐관오리들은 아전(衙前)들을 앞세워 자신의 선정비를 세우도록 했다. 아전들은 선정비 건립 비용과 노동력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부담시켰다. 당시 아전들의 부정부패와 횡포는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만큼 심했다. 조선시대 선정비들 대부분이 가난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서 세운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조선 고종대 만석보(萬石洑) 사건으로 유명한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은 탐학비행(貪虐非行)으로 유명했다. 조병갑의 학정은 동학농민봉기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판사가 된 조병갑은 1898년 7월 18일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 최시형(崔時亨)에게 사형을 선고하기까지 했다. 조병갑의 예만 보더라도 당시 조선이 얼마나 썩은 나라였던가를 알 수 있다. 조병갑의 증손녀 가운데 청와대 홍보수석 비서관을 지낸 사람도 있으니 참 세상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경상남도 함양읍 상림 북쪽 역사인물공원 앞에는 '군수조후병갑청덕선정비(郡守趙侯秉甲淸德善政碑)'라는 이름의 조병갑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선정비는 김해시 생림면사무소 정문 오른쪽 담장 앞에도 있다. 조병갑과 그의 후손들은 다소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당시 조선 왕조정권 하에서 돈을 주고 벼슬을 산 지방관들은 거의 대부분이 탐관오리였으니 말이다.
탐관오리들이 선정을 베푼 목민관으로 둔갑한 뻔뻔하고 낯두꺼운 비석들을 볼 때마다 소설 춘향전 작가가 이몽룡의 입을 빌어 변학도의 잔치판에서 탐관오리들을 준엄하게 꾸짖었던 시가 생각난다.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 금술잔을 가득 채운 술은 천사람의 핏물이요
옥반가효만성고(玉盤佳肴萬性膏) 옥쟁반의 맛있는 술안주는 백성들의 살점이네
촉루락시민루락(燭淚落時民淚落) 촛농물 떨어질 때마다 백성들 눈물도 떨어지고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 노래소리 시끄럽게 나는 곳 원망 소리도 드높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위정자들이 정치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말은 언제나 진리다. 노예 정신이 뼛속 깊이 박힌 사람들은 자신들을 하찮게 여기고 우습게 보는 양아치 독재정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2015. 5. 25
'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북정맥 말고개 대성산 수피령 답사 (0) | 2015.07.09 |
---|---|
운악산에 걸린 등불 현등사를 찾아서 (0) | 2015.06.15 |
지리산 용호구곡을 찾아서 (0) | 2015.06.05 |
백두대간 순례의 추억 (0) | 2015.06.01 |
오봉산 배후령에 서다 (0) | 2015.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