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2001년 5월 12일부터 7월 10일까지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순례한 바 있다. 60일 동안 걸은 거리는 지리산-진부령까지 640km 천육백 리였다. 백두대간 순례를 마치고 진부령에 도착하던 날 나는 북쪽을 바라보면서 북한쪽 백두대간 마룻금을 걷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절실하게 느꼈었다. 백두대간 진부령에 서서 한겨레임에도 자유롭게 오가지 못하는 남북 분단의 현실을 직면하고는 한없이 슬펐었다.
한반도에는 1대간(大幹)과 대간에서 갈라진 1정간(正幹), 13정맥(正脈)이 흐른다.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은 지리산-백두산까지 약 1,625km, 지리산-향로봉까지의 남한 구간은 약 690km에 이른다.
장백정간(長白正幹)은 북쪽으로 두만강, 남쪽으로 어랑천과 수성천의 분수령이 되는 산줄기이다. 백두대간의 두류산(頭流山, 2,309m) 북쪽 산허리에서 시작해서 동북쪽으로 괘상봉(掛上峰, 2,136m)과 궤상봉(櫃上峰, 2,541m), 관모봉(冠帽峰, 2,541m), 고성산(高城山, 1,756m), 차유령, 차유봉(車踰峰, 1,559m), 슬봉(1,048m), 백사봉(白沙峰, 1,138m), 송진산(松眞山, 1,164m), 조산(造山)을 지나 서수라(西水羅) 해안까지 이어진다.
13정맥(正脈)은 북한에 4정맥, 남한에 9정맥이 있다. 남한의 9정맥은 한북정맥(漢北正脈)과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한남정맥(漢南正脈), 금북정맥(錦北正脈),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금남정맥(錦南正脈), 호남정맥(湖南正脈), 낙동정맥(洛東正脈), 낙남정맥(洛南正脈) 등이다. 북한의 4정맥은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과 해서정맥(海西正脈), 청남정맥(靑南正脈), 청북정맥(靑北正脈) 등이다.
남한 9정맥 중 가장 북쪽에 있는 한북정맥은 북쪽으로 임진강, 남쪽으로는 한강의 분수령이 된다. 백두대간의 추가령(楸哥嶺)에서 갈라져 화천의 백암산(白巖山, 1,179m)과 철원의 적근산(赤根山, 1,071m), 말고개(馬峴, 568m), 대성산(大成山, 1,174m), 수피령(水皮嶺, 780m), 촛대봉(1,010m), 복주산(伏主山, 1,152m), 광덕산(廣德山, 1,046m), 백운산(白雲山, 904m), 도마봉(道馬峰, 883m), 국망봉(國望峰, 1,168m), 개이빨봉(犬齒峰, 1,110m), 민둥산(1,023m), 강씨봉(姜氏峰, 830m), 청계산(淸溪山, 849m), 원통산(圓通山, 567m), 운악산(雲岳山, 937.5m), 수원산(水源山, 710m), 죽엽산(竹葉山, 622m), 불곡산 임꺽정봉, 호명산, 한강봉, 사패산, 도봉산(道峰山, 717m), 상장봉, 노고산(老姑山, 487m), 현달산(峴達山, 139m), 고봉산(高峰山, 206m), 장명산(長命山, 102m)으로 뻗어가 한강 하구에 이른다.
북한 땅에 있는 추가령은 현실적으로 갈 수 없는 곳이다. 남한의 민간인 통제선(民統線, Civilian Control Line) 이북에 있는 백암산과 적근산, 민통선 이남에 있지만 군부대가 관할하고 있는 대성산 입산이 가능한지 여부를 알기 위해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과 화천군 상서면으로 현지 답사를 떠났다.
타일랜드 참전기념비
타일랜드 참전기념비 안내판
태국식 사원
타일랜드 참전기념비에서 바라본 불무산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문암리를 지나가다가 43호선 국도변에 자리잡은 태국군참전기념비(泰國軍參戰紀念碑)에 들렀다. 국도 43호선 건너편에는 불무산(佛舞山, 669m)이 솟아 있었다. M1 소총 개머리판 형상의 기념비 옆에는 군인과 민간인이 어깨동무를 한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기념비에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타일랜드의 육, 해, 공군 용사들! 여기 그들의 마지막 주둔지에 피 흘린 1,296명의 뜻을 길이 새긴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태국은 한국전쟁 당시 지상군 1개 대대와 군함 3척, 수송기 1개 편대를 파병하였다. 태국군은 1951년 7월 31일~9월 7일 연천 지역 방어 전투에서 주저항선 전방에 초소를 설치하고 정찰을 실시하다가 조선인민군(朝鮮人民軍)을 돕기 위해 파병된 중국인민해방군(中國人民解放軍, People's Liberation Army, PLA) 2개 중대를 기습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52년 11월 1일~11일에는 포크찹고지전투(Battle of Pork Chop Hill)에서 미 제2사단에 배속된 태국군은 연천 서북방을 방어하던 중 PLA가 야간에 세 차례에 걸쳐 234고지를 공격하자 백병전까지 감행하면서 전초 고지를 사수하였다. 정전협정으로 태국 육해공 파병군이 철수한 뒤에도 잔류부대 1개 중대는 1972년 6월까지 한국에 주둔하였다.
태국군 참전 기념비는 태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기념하고, 전쟁 중 희생된 장병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74년 10월 1일 태국군의 마지막 주둔지였던 포천시 영북면 문암리에 세워졌다. 기념비 구역 오른쪽에는 불상을 모신 태국식 사원이 있었다. 이 사원은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희생된 태국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태국 국왕의 기증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안내판의 설명문에 보이는 '북한괴뢰집단(北韓傀儡集團)', '공비(共匪)' 등의 용어는 남북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분위기 조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부 기관이 세운 시설물의 안내판에 비공식적이고 호전적인 용어를 사용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남한이 북한을 '북한괴뢰집단'이라고 부르면서 북한이 남한을 '남한괴뢰집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비판하기는 어렵다. '괴뢰'는 '허수아비'나 '꼭두각시'의 뜻으로 식민지 피지배국이나 피점령국을 말한다. 괴뢰 논쟁이 벌어지면 누가 더 불리할까?
'공비'도 조선인민유격대(朝鮮人民遊擊隊, Partisans in Korean War, 빨치산) 또는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南部軍團, 남부군)이라는 공식 명칭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비'는 '공산주의 비적(匪賊, bandit, 떼도둑)'이란 뜻이다. 남북간 평화적 통일을 바란다면 정부 당국자들부터 언어를 신중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말고개(馬峴)
금성지구전투전적비
금성지구전투전적비
15사단 순직 장병 23명의 추모비
광장에 전시된 전차
국도 5호선(영서로)을 따라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에서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를 연결하는 한북정맥 말고개(馬峴, 590m)에 올랐다. 고갯마루에는 탱크 등 중무장 차량 저지용의 도로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이 최전방 지역이라는 것이 새삼 실감나면서 약간의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말고개는 옛날에 말을 몰고 가던 사람들이 하도 고개가 높아 정상에서 쉬어가곤 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말고개 바로 북쪽과 남쪽에는 한북정맥의 적근산과 대성산이 솟아 있다.
말고개에는 금성지구전투전적비(金城地區戰鬪戰蹟碑)가 세워져 있었다. 비석의 뒷면에는 당시의 전투 상황과 희생된 장병들의 넋을 기린다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금성지구전투는 한국전쟁 당시 최후의 전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52년 10월 초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진행되던 휴전회담은 포로교환 방법에 대한 이견으로 결렬되었다. 휴전회담이 결렬되자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白馬高地, 395m)와 지금은 북한 땅인 김화 오성산(五聖山, 1,062m) 동북방 능선인 저격능선(狙擊稜線, Sniper Ridge, 피의 능선) 등에서 다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클라크(Mark Wayne Clark) 유엔군 사령관은 휴전회담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북한군에 대한 총공세를 준비했지만 1953년 초 취임한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미 대통령의 강력한 종전 의지 때문에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대대적으로 반공포로들을 석방하는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나자 휴전회담은 다시 결렬되고 전선은 초긴장 상태로 돌변하였다.
PLA는 1953년 6월 10일부터 18일까지 중동부 전선에 돌출된 국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PLA 24군과 60군, 67군, 68군 등 4개 군 산하 12개 사단 23만6100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 5사단, 6사단, 8사단 등 5개 사단의 방어 지역인 화천의 금성(金城) 돌출부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 키로 하고 우리 측에 대한 공격을 실시했다. 그 결과 PLA는 금성천(金城川) 일대의 주요 고지들을 확보했다.
PLA는 또 1953년 7월 13일부터 19일까지 20병단 예하 54군과 60군, 67군, 68군 등 4개 군 총 12개 사단이 정면 공격과 포위 공격을 배합한 대규모 공격작전으로 금성 지구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한 7월 대공세를 감행했다. 690고지와 485고지 등 주요 고지를 피탈당한 국군은 7월 15일부터 2군단 예하 5사단과 8사단, 11사단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뒤 반격을 개시하여 7월 19일 금성천 이남을 탈환했다.
금성지구전투에서 국군은 PLA 사살 2만7216명, 부상 3만8700명, 생포 186명, 무기 노획 1428정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에 비해 국군은 1만4373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한국전쟁사상 초유의 승리로 국군은 PLA를 격퇴하고 금성 지구 탈환에 성공했다.
금성지구전투전적비 광장 왼쪽 한켠에는 추모비 하나가 서 있었다. 이 추모비는 지난 1996년 7월 27일 집중호우로 일어난 산사태가 내무반을 덥쳐 순직한 장병 23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추모비 앞 제단에는 누군가 갖다 놓은 막걸리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전적비 광장 오른쪽 한켠에는 전차 한 대가 전시되어 있었다. 전차 위로 올라가 내부를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한국전쟁 때 사용된 전차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말고개를 떠나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로 가는 도중에 군 검문소 두 곳을 통과했다. 백암산은 칠성부대(7사단) 관할이었다. 칠성부대 검문소 초병에게 백암산 입산 절차를 물었다. 민간인의 입산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칠성전망대 견학은 산양리에 있는 군장병안내소에서 신청하고 수속을 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산양리 군장병안내소 직원에게 칠성전망대 견학을 신청했지만 다음 주부터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화천군에서는 현재 관광사업 활성화의 일환으로 백암산 정상까지 2km의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2018년에 완공된다고 하니 백암산을 오르려면 아직도 3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적근산은 승리부대(15사단) 관할이었다. 승리부대 검문소 초병에게 적근산 입산 절차를 물었다. 역시 칠성부대 초병과 같은 대답이었다. 김화에도 승리전망대가 있었지만 견학을 포기하고, 대성산 입산 가능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철원군 근남면으로 향했다.
고 김수현 병장 추모비
수피령 고갯마루
대성산지구전적비
대성산에서 수피령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
한북정맥 대성산
수피령에서 바라본 실내고개
까치수염
국도 56선(수피령로)을 따라 철원군 근남면 육단리와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를 연결하는 한북정맥 수피령(水皮嶺, 780m)으로 향했다. 육단리 수피령 고갯길 중턱에는 병장김수현충혼비가 세워져 있었다. 충혼비 앞에는 고 김수현 병장의 사진과 국화꽃이 놓여 있었다. 비명 밑에는 ‘나를 버려 겨레를 구하고 목숨을 던져 조국을 수호하는 군인의 길, 그것은 정녕 한 인간이 그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공헌인 것이다’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었다.
1964년 11월 14일 당시 15사단 50연대 수색중대원이었던 김수현 일병은 수피골 대침투작전에 투입됐다. 그날 자정 매복선에 투입된 그는 2명의 무장간첩과 조우했다. 1명을 사살한 그는 부상을 입고 도주하는 남은 1명을 추격하다가 총격을 받고 복부 관통상으로 현장에서 전사했다. 그 전공으로 김수현 일병은 2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이 추서됐다. 1973년 6월 김수현이 전사한 바로 그 자리에 그의 애국심과 군인정신을 기리는 충혼비가 세워졌다. 경남 하동군 진교면 백련리 출신의 청년 김수현은 그렇게 수피령에서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었다.
충혼비를 떠나 계곡을 구비구비 돌아서 수피령에 올라섰다. 수피령에는 대성산지구전적비(大成山地區戰蹟碑)가 세워져 있었다. 대성산은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대성산지구전투는 철원의 백마고지전투, 양구의 펀치볼 도솔산지구전투와 함께 한국전쟁 3대 격전지로 꼽힌다.
1951년 6월 9일 국군 제2사단 17연대는 대성산 1,042고지를 점령한 PLA 제58사단 177연대를 섬멸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국군은 대성산 1042고지와 865고지를 탈환한데 이어 6월 14일에는 승암고개와 삼진봉, 바조봉 일대까지 PLA를 밀어냈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PLA 사살 453명, 생포 19명, 무기 노획 55점 등의 큰 전과를 올렸다. 국군은 38명이 전사했고, 123명이 부상을 당했다. 15사단에서는 1980년 8월 15일 대성산지구전투에 참가한 국군 장병들의 전공을 기리고, 고귀한 생명을 전장에 바친 전사자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이 전적비를 세웠다.
수피령 전적비에서 소위 계급장을 단 15사단 소속의 초급 장교를 만났다. 올해 소위로 임관한 ROTC 53기 후배 장교였다. 내가 ROTC 17기로 임관했으니 까마득한 후배였다. 반가운 마음에 후배 장교에게 '대성산이 15사단 관할 구역이라던데 민간인이 들어갈 수 있나요?' 하고 묻자, '민간인의 대성산 입산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등산 루트는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후배 장교는 3월에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해서 4개월 동안 육군 장교 초등군사교육(Officer‘s Basic Course, OBC)을 마치고 며칠 전 자대 배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아직 부대나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후배 장교에게서 36년 전의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수피령 남서쪽에 솟은 한북정맥 촛대봉(1,010m) 능선에 올라 대성산을 바라보았다. 대성산 정상부에는 군부대 막사로 보이는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성산을 눈앞에 두고도 오르지 못하는 것이 몹시 안타까왔다. 한북정맥은 대성산에서 수피령을 건너뛰어 춧대봉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촛대봉 능선에 서서 백두대간에서 한북정맥으로 전해지는 산줄기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산기슭에는 까치수염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대성산은 철원군 근남면과 화천군 상서면의 경계에 솟아 있는 산이다. 예로부터 위대한 성인이 이곳에 출현한다는 예언이 있어서 대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대성산 남쪽에 이름난 절이 있어 절골이라 하였다. 절골고개, 중고개 등의 지명은 지금도 남아 있으나 절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남쪽으로는 상서면 다목리와 사내면 명월리를 잇는 실내고개((實乃峴)가 두류단맥(頭流短脈)을 넘어가고 있었다. 두류단맥은 한북정맥의 1070봉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실내고개를 지나 만산현-재치고개-재치봉-861봉-936봉-명지현-놀미뒷산으로 뻗어가는 산줄기다. 다목리는 한북정맥과 두류단맥에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수피령을 떠나면서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 남과 북의 산과 들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했다. 통일이여, 어서 오라~!
2015.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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