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서북능선에서 내려오다가 구룡계곡(九龍溪谷)에 들렀다. 구룡계곡은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에서부터 구룡폭포가 있는 주천면 덕치리까지 약 3km에 이르는 심산유곡이다. 웅장하고 수려한 산세와 깍아지른 듯한 기암절벽, 폭포와 소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구룡계곡을 용호구곡(龍湖九曲)이라고도 한다. 용호구곡의 제1곡은 송력동폭포(松瀝洞瀑布), 제2곡은 용소(龍沼) 일명 불영추(佛影湫), 제3곡은 학서암(鶴棲岩), 제4곡은 서암(瑞岩) 일명 구시소, 제5곡은 유선대(遊仙臺), 제6곡은 지주대(砥柱臺), 제7곡은 비폭동(飛瀑洞), 제8곡은 석문추(石門湫) 일명 경천벽(擎天壁), 제9곡은 교룡담(蛟龍潭) 구룡폭포(九龍瀑布)이다.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무슨무슨 구곡(九曲)이 많다. 남원의 용호구곡을 비롯해서 괴산의 화양구곡(華陽九曲), 선유구곡(仙遊九曲), 쌍곡구곡(雙谷九曲), 고산구곡(孤山九曲), 제천의 용하구곡(用夏九曲), 능강구곡(綾江九曲), 단양의 운선구곡(雲仙九曲), 양평의 벽계구곡(碧溪九曲), 청양의 지천구곡(之川九曲), 공주의 갑사구곡(甲寺九曲), 영덕의 옥계구곡(玉溪九曲), 성주 김천의 무흘구곡(武屹九曲), 영주의 죽계구곡(竹溪九曲), 부안의 봉래구곡(蓬萊九曲) 등이 그것이다. 화천의 곡운구곡(谷雲九谷), 삼척의 무릉구곡(武陵九曲), 가평의 용추구곡(龍湫九曲)도 있다.
왜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면 중국 남송(南宋)의 성리학자 주희(朱熹)의 영향 때문이다. 주희는 무이산(武夷山) 아홉 굽이의 절경을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 칭했다.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동굴을 가진 무이산은 푸젠성(福建省) 제일의 명산이다. 무이구곡은 무이산 구비구비 8㎞에 이른다. 무이구곡 제1곡은 승진동(升眞洞), 제2곡은 옥녀봉(玉女峯), 제3곡은 선기암(仙機巖), 제4곡은 금계암(金鷄巖), 제5곡은 철적정(鐵笛亭), 제6곡은 선장봉(仙掌峯), 제7곡은 석당사(石唐寺), 제8곡은 고루암(鼓樓巖), 제9곡은 신촌시(新村市)이다.
1183년 무이구곡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쓴 주희는 이듬해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圖歌)'를 썼다. '무이구곡도가'는 첫 수를 빼고는 무이구곡 산수(山水)의 절경을 묘사하면서 도학(道學)을 공부하는 단계적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도학은 주희가 당대(唐代) 화엄불교 이론체계에서 영감을 얻고, 북송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등의 학문과 사상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체계화 했기 때문에 주자학(朱子學) 또는 성리학(性理學)이라고도 한다.
주희는 이황(李滉),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 등 조선 성리학자들의 학문적 정신적 스승이었다. 이들은 스승 주희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자신들이 머물던 산수가 뛰어난 곳을 구곡으로 설정했다. 자신들의 구곡에서 이들은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탐구하고 문인들을 양성했다.
이황은 안동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주희의 정신을 계승하는 한편 자신의 철학과 학문적 삶을 담은 '도산잡영(陶山雜詠)', '도산구곡가(陶山九曲歌)'를 썼다. 이이는 해주 석담(石潭)에 설정한 고산구곡(高山九曲)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은거할 때 주희의 무이구곡도가를 본받아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었다.
송시열은 주희, 조광조(趙光祖), 이이를 스승으로 삼은 성리학자로 괴산의 화양동(華陽洞)에 은거했다. 송시열이 죽은 뒤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는 무이구곡을 본받아 화양동 아홉 굽이를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 이름지었다. 청풍(淸風)에 은거하던 권상하는 아름다운 황강(黃江) 일대의 아홉 굽이를 황강구곡(黃江九曲)이라 명명했다. 그의 조카 권섭(權燮)은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를 지었다.
이들 외에도 구곡가를 남긴 사람은 많이 있다. 박하담(朴河淡)의 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 정구(鄭逑)의 무흘구곡가(武屹九曲歌), 이중경(李重慶)의 오대구곡가(梧臺九曲歌), 이형상(李衡祥)의 성고구곡가(城皐九曲歌), 정만양(鄭萬陽)의 횡계구곡가(橫溪九曲歌), 채헌(蔡瀗)의 석문구곡가(石門九曲歌), 이한응(李漢膺)의 춘양구곡가(春陽九曲歌), 이원조(李源祚)의 포천구곡가(布川九曲歌) 등이 그것이다. 류중교(柳重敎)의 옥계구곡가(玉溪九曲歌)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구곡 관련 인문지리, 자연, 문화 유적이 100여 곳이나 있다. 전국 각지에 남아 있는 구곡 관련 유적을 통해서 주희가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주희는 그야말로 신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상수학(象數學)에서 9(九)는 완성수 10(十)에 가장 가까운 수로써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경지를 상징한다. 10은 신의 영역이다. 바둑의 최고수도 10단은 없으며, 9단이 최고다. 성리학자들에게 있어서 구곡의 9는 인격의 수양과 학문의 도야를 통해서 도(道)의 완성에 이른 단계를 상징한다. 주희 이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자신의 구곡에서 학문과 도의 완성을 추구했던 것이다.
춘향묘
춘향묘
육모정 길 건너편 산기슭에는 '춘향전(春香傳)'의 주인공인 춘향묘(春香墓)가 있었다. 춘향묘는 왕후장상의 묘 못지 않게 규모가 매우 컸다. 남원에는 이몽룡(李夢龍)과 성춘향(成春香)이 노닐었다는 광한루(廣寒樓), 춘향 모가 살았다는 월매집, 춘향의 영정을 모신 춘향사(春香祠) 등 춘향전 관련 유적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1962년 이곳에서 '성옥녀지묘(成玉女之墓)’라고 새겨진 지석(誌石)이 발견된 바 있다. 이후 지금의 춘향묘로 묘역을 새로 단장한 것이다. 성옥녀(成玉女)가 성춘향과 동일 인물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춘향이란 인물 자체가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 확인된 바 없다. 묘소 앞에는 ‘만고열녀춘향지묘(萬古烈女春香之墓)’라고 쓴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춘향묘를 바라보면서 사람은 일단 유명해지고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육모정
육모정(六茅亭)은 용호구곡 제2곡 옥룡추(玉龍湫)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은 원동계(源洞契) 관련 유적이다. 원동계는 1572년 남원의 선비들이 용호구곡에 모여 우의와 의리를 다지고, 예와 학문을 논하며, 도의지심을 기르기 위해 결성한 조직이다. 원동계를 결성한 선비들은 극기론(克己論)을 제창한 여대림(呂大臨)과 주희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한편 원동향약(源洞鄕約)을 제정하여 지역 주민들을 선도하였다.
1638년 선비들은 중국에서 주자의 초상화를 들여와 원천동 사당에 봉안하고, 주희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봄가을로 제사를 올렸다. 남원부사가 동참하자 원동계는 더욱 번창했고, 계원들의 모임과 후학 양성소로 육모정과 용호정(龍湖亭)을 건립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는 원동계 선비들을 중심으로 육모정에서 조금 올라간 자리에 용호서원(龍湖書院)을 건립했다.
원래 거북바위 건너편에 있던 육모정은 1961년 수재로 유실되었다. 원동향약(源洞鄕約)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됨에 따라 1997년 육모정을 지금의 위치에 복원했다.
옥룡추 다리에서 바라본 거북바위와 용호구곡
용호정에서 계곡으로 내려가자 넓직한 반석인 거북바위가 있었다. 거북바위에서는 매년 음력 사월 초파일에 춘향명창대회가 열린다고 했는데...... 사월 초파일인데도 명창대회는 커녕 비슷한 대회조차도 없었다.
거북바위는 옛날에 마을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기우제와 관련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마을에 가뭄이 들면 날을 정해 마을 여자들이 모여 알몸으로 솥뚜껑을 들고 거북바위로 올라가면 바로 밑의 옥룡추에 살던 용이 놀라서 승천했다고 한다. 용이 승천하면 일주일 안에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다.
옥룡추
옥룡추
제2곡 옥룡추(玉龍湫)는 용호구곡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길의 흐름이 마치 살아있는 용이 꿈틀거리면서 승천하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옥룡추는 용호석문(龍虎石門) 사이로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 그 아래 깊은 소를 이룬다. 옥룡추를 용이 살았다고 해서 용소(龍沼), 부처의 그림자가 비친다고 해서 불영추라고도 한다. 옥룡추 남서쪽에 우뚝 솟은 옥녀봉은 무이구곡의 제2곡과 동일 지명이다. 주희의 영향이 이곳에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옥룡추 바로 아래 바위절벽에는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쓴 '용호석문(龍虎石門)'과 김두수가 8세 때 썼다는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이 새겨져 있다. '용호석문'과 '방장제일동천' 각자 사이에는 자연 석불이 있다. 이 석불의 그림자가 소에 비친다고 해서 불영추라고도 하는 것이다. 동천(洞天)은 본래 중국의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을 일컫는 말인데, 별천지(別天地)라는 뜻도 담겨 있다. 주희의 '무이구곡도가' 제9곡에 나오는 '이곳 말고 인간 세상에 별천지가 있으랴(除是人間別有天)'라는 마지막 구절과 같은 뜻이다.
용호정
옥룡추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가면 용호정(龍湖亭)이 있다. 용호석문 바로 위 산기슭에 세워진 용호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정자다. 옛날에는 선비들이 저 정자 위에서 시를 읊고 학문을 논했을 것이다.
구룡폭포 하단
구룡폭포 상단
'방장제일동천' 바위글씨
3㎞에 이르는 구룡계곡의 마지막 지점에 용호구곡 제9곡 구룡폭포(九龍瀑布)가 있었다. 남원팔경 중 제1경인 구룡폭포는 음력 4월 초파일이면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각각 아홉 군데 소에서 노닐다가 승천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구룡폭포 아래에는 옛날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용소(龍沼)가 있었다. 구룡폭포 하단은 낙폭 약 40m의 와폭(臥瀑)이었다.
출렁다리를 건너서 철계단을 올라가자 구룡폭포 상단이 나타났다. 낙폭 약 15m의 와폭인 상단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은 교룡담(交龍譚)을 휘돌아 소용돌이치면서 하단폭포로 내려가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상단폭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폭포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무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단폭포 바위절벽에는 '이종묵(李鍾默)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 이종학(李鍾學)'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종묵과 이종학은 아마도 형제간이 아닐까 추측되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 人死留名)'고 했던가!
용호구곡 일부 구간은 시설 정비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2곡과 제9곡 밖에 보지 못했다. 다음에 용호구곡에 다시 오게 되면 제1곡부터 제9곡까지 찬찬히 살펴 보리라고 마음먹었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용호구곡을 떠나다.
2015. 5. 25.
'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운악산에 걸린 등불 현등사를 찾아서 (0) | 2015.06.15 |
---|---|
춘향전의 무대 남원 광한루를 찾아서 (0) | 2015.06.09 |
백두대간 순례의 추억 (0) | 2015.06.01 |
오봉산 배후령에 서다 (0) | 2015.05.15 |
단양팔경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을 찾아서 (0) | 2015.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