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김영삼 전 대통령 유명을 달리하다

林 山 2015. 11. 23. 16:06

2015년 11월 22일 0시 21분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김 전 대통령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때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삼가고인의명복을빈다.



고려대 운동장에서 열린 거국중립내각쟁취실천대회에 참석한 김대중과 김영삼(1987. 10. 25.)


수구보수대연합 3당야합의 주역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1990. 1. 22.)


한국정치사에서 김대중을 빼놓고 김영삼을 논할 수는 없다.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정치적 동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점차 정치적 라이벌이 되어 치열한 대권 경쟁을 벌였다. 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애증도 깊어갔다.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인 이른바 6월항쟁이 일어났다. 그해 10월 25일 고려대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거국중립내각쟁취실천대회에 김대중, 김영삼도 참석했지만 두 사람은 끝내 서로를 외면했다. 이후 두 사람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대통령 후보단일화 요구를 무시하고 각자의 길을 갔다. 결국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골적인 관권선거와 부정선거를 저질렀음에도 겨우 36.6%를 얻은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죽 쒀서 개를 준 격이었다.


1990년 1월 22일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은 민주정의당 총재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과 3당합당을을 선언하고 수구보수세력의 품에 안겼다. 6월항쟁의 산물이었던 여소야대의 정치지형도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여대야소로 회귀하고 말았다. 김영삼은 1992년 5월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그해 12월 18일 실시된 대선에서 김대중을 물리치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됐다.


3당야합으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6월항쟁으로 쟁취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전두환과 노태우 군사정권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설상가상으로 김영삼 정권 하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던 국가 디폴트(Default, 채무불이행)사태가 터졌다. 국가 디폴트 사태를 계기로 한국은 결국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편입되었고, 국민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


한국 정치민주화의 상징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우리 현대사에서 명암이 엇갈리는 또 한 명의 전직 대총령이 유명을 달리했다. 김염삼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서 이 땅에 진정한 경제민주화가 실현되기를 고대한다.


2015.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