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바위와 몽돌해변으로 알려진 황금산(黃金山, 156m)을 찾아가기로 한 날이다. 황금산은 대산반도(大山半島)의 북서쪽 끝에 있는 산이다. 황금산이 있는 충청남도(忠淸南道) 서산시(瑞山市) 대산읍(大山邑) 독곶리(獨串里)로 향했다.
홍성 안회당요양센터
홍성을 지나가는 길에 후배가 홍성읍 고암리에 설립한 안회당요양센터(安懷堂療養中心)에 잠깐 들렀다. 마침 주말이라 후배는 서울 집에 다니러 가고 자리에 없었다. 안회당(安懷堂)은 조선왕조시대 홍주목사(洪州牧使)가 근무하던 홍주군(洪州君)의 동헌(東軒) 이름이기도 하다. '안회(安懷)'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로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대하며,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안회당'은 노인요양시설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독곶리 남쪽 바닷가에는 횟집과 조개구이집들이 해안을 따라서 늘어서 있었다. 맨 끝에 있는 '덕수네가리비'에서 해물칼국수를 한 그릇 먹고 선행을 하기로 했다. 해물칼국수를 끓이는 냄비에 산낙지도 한 마리 넣었다. 바지락과 새우, 게, 매생이, 낙지 등이 끓으면서 우러난 육수가 참 구수하고 시원했다. 다만 한 가지 면발이 칼국수가 아니라 물국수여서 아쉬웠다.
몽돌해변에서 바라본 황금산
황금산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자. '1872년 지방지도(地方地圖)'에는 항금산(項金山),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지형도(朝鮮地形圖, 1918)'에는 황금산(黃金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서산군지(瑞山郡誌, 1926)'에는 '기은리 자지산(紫芝山)에서 세 지맥으로 나뉜다. 한 지맥은 서쪽으로 뻗어 독곶리 황금산이 되어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나왔으며 크고 작은 용굴이 있다. 원래 이름이 항금산(亢金山)이었고, 산이 있는 전체를 총칭해서 항금이라고 했다. 황금은 평범한 금이고, 항금은 고귀한 금을 뜻하므로 마을의 옛 선비들은 고집스럽게 항금산으로 표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 항금산(項金山)이었던 산 이름을 일제가 황금산으로 바꿨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산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황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서쪽 바위 절벽에 있는 2개의 동굴이 금을 캐던 굴로 알려져 있다.
황금산은 원래 일부만 동쪽의 독곳리와 사빈(砂濱)으로 연결되어 있어 섬이나 다름없던 곳이었다. 대산산업단지에 현대석유화학과 현대오일뱅크에 이어 삼성종합화학(현 한화토탈) 공장이 들어서면서 황금산은 완전히 육지와 이어진 육계도(陸繫島)가 되었다. 대산산업단지와 황금산 사이는 육계사주(陸繫砂洲)와 호수, 습지로 이루어져 있다.
황금산 서쪽 해안에는 해식애(海蝕崖)와 파식대(波蝕臺)가 발달되어 있다. 그리고, 해식애와 파식대가 만나는 부분에는 파도, 조류에 의한 침식, 풍화 작용으로 생긴 해식동(海蝕洞)과 시아치(sea arch), 시스택(sea stack) 등이 발견되고 있다. 산의 앞바다를 일명 황금목(黃金項)이라고 한다. 황금목은 수심이 깊을 뿐만 아니라 간조 때 유속이 빠르고 파도가 높아서 예로부터 험한 뱃길로 알려져 있다.
황금산은 코끼리바위와 굴금이 있는 몽돌해변의 풍광이 뛰어나다. 황금산 정상에는 황금산사(黃金山祠)가 있다. 황금산에는 또 빈대 때문에 망했다는 절터, 옹달샘 등이 있다. 남쪽 주눙선에서 바라보는 가로림만(加露林灣)의 조망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둘이 황금산을 찾고 있다. 또, 황금산 동쪽 산기슭에서는 대산산업단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황금산에서 바라본 벌천포
황금산 남쪽 끝에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황금산 등산로 초입은 서산시의 친환경 트레킹 코스인 ‘서산 아라메길’의 제 3코스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주능선에 올라서자 벌천포와 이원반도(梨園半島) 사이에 펼쳐진 드넓은 가로림만(加露林灣)이 한눈에 들어왔다.
남동쪽 대산읍 오지리에는 황금산과 해발고도가 비슷한 자용산(紫容山, 152m)이 솟아 있었다. 자용산은 황금산, 망일산(望日山, 302.3m), 몰니산(沒泥山, 170m)과 함께 대산의 4대 명산 중 하나이다. 원래 저 산은 머루와 다래 넝쿨에 단풍이 들면 경치가 매우 아름답기에 자객산(紫客山)이라 불렸다고 한다. '대산읍지(大山邑誌)'에는 '서해의 낙조가 산에 비치어 자기(紫氣)의 절경을 이루므로 자각산(紫閣山)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산군지'에도 '몰니산에서 한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 오지리 자각산이 되고.....'라는 기록이 있다. 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자객산의 '객(客)'이 '용(容)'으로 잘못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 산의 원래 이름을 되찾아 주어야 하지 않을까?
벌천포(일명 벌말)는 자객산에서 북서쪽으로 뻗어나온 반도의 끝에 자리잡고 있었다. 벌천포에는 서산 유일의 내륙 해수욕장인 벌천포해수욕장과 벌말포구, 염전, 벌말섬 파식대의 기암괴석 등이 있다. 벌천포는 한때 석화로 유명했다.
황금산에서 바라본 가로림만
가로림만(加露林灣)은 충남 서산시와 태안군(泰安郡)의 해안으로 둘러싸인 반폐쇄성 내만(內灣)으로 입구가 북쪽으로 열려 있다. 남쪽으로는 태안읍, 서쪽으로는 원북면(遠北面)과 이원면(梨園面)과 접한다. 동쪽으로는 서산시 팔봉면(八峰面)과 지곡면(地谷面), 대산읍으로 둘러싸여 있다. 태안반도(泰安半島)의 북쪽에 가로림만, 남쪽에 천수만(淺水灣)이 있다. 태안군의 반계천과 갈두천, 삭선천, 서산시의 방길천과 황곡천 등의 하천수가 가로림만으로 유입된다.
가로림만은 멀리 북쪽으로 승봉도(昇鳳島), 대이작도(大伊作島), 소이작도(小伊作島), 북서쪽으로 소야도(蘇爺島), 덕적도(德積島), 문갑도(文甲島), 선갑도(仙甲島), 지도(池島), 울도(蔚島) 등 덕적군도(德積群島)가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어 예로부터 어업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가로림만은 어족의 산란장으로 유명하고, 굴이나 김 등의 양식도 활발하다.
가로림만에는 고파도와 웅도 등 유인도와 율도와 피도, 조도, 대우도 등 무인도가 있다. 가로림만에서 가장 큰 섬인 웅도는 썰물때마다 바닷길이 열려 육지와 하나가 된다. 웅도는 바지락 조개잡이로 유명하다.
가로림만은 낙지 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가로림만 낙지는 전남 무안의 세발낙지와 달리 다리가 통통하고 짧은 것이 특징이다. 맛은 비슷하다고 한다. 서산과 태안에서는 육수에 박속을 넣고 가로림만에서 잡은 낙지를 데쳐서 먹은 다음 그 국물에 칼국수를 넣어서 다시 끓여먹는 박속밀국낙지가 유명하다. 서산시 지곡면 중왕리에는 낙지마을이 있다.
황금산에서 바라본 이원반도와 만대항
태안군은 하나의 반도로 이루어져 있다. 태안반도는 북쪽의 이원반도, 서쪽의 소원반도(所遠半島)와 근흥반도(近興半島), 남쪽의 남면반도(南面半島)와 안면도(安眠島)로 갈라져 있다. 이원반도의 최북단에는 태안의 땅끝마을 만대포구가 있다. 만대포구는 가로림만을 사이에 두고 서산 벌천포와 마주보고 있다.
이원반도에는 꾸지나무골, 사목 등의 해수욕장과 작은구매, 큰구매 등의 모래 해변이 있다. 꾸지나무골은 꾸지나무가 많아서 생겨난 지명인데, 옛날 소금을 굽기 위해 땔감으로 써버려 지금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썰물 때에는 작은구매에서 바로 앞바다에 떠 있는 삼형제바위까지 걸어서 갈 수 있고, 만대포구에서는 큰구매로 들어갈 수 있다. 이원반도에는 염전과 대하양식장, 굴양식장이 흩어져 있다. 볏가리마을에서는 염전체험과 갯벌체험을 할 수 있다.
황금산 정상의 돌탑
황금산사
황금산 정상에서 필자
황금산 남쪽 주능선에서 정상까지는 금방이었다. 정상의 봉수대 터에는 돌탑이 세워져 있었다. 돌탑의 표지석에는 '황금산 156m'라고 새겨져 있었다. 정상 주변에는 아름드리 굴참나무와 떡갈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전망은 별로 좋지 않았다.
돌탑 바로 밑에는 산신령(山神靈)과 임경업(林慶業) 장군, 박활량 등 3위의 초상을 모신 황금산사가 있었다. 사당 입구에는 당목으로 치성을 받았던 아름드리 거목 두 그루가 서 있었다. 정면 한칸, 측면 한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황금산사는 가로림만이 있는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사당 정면 처마에는 ‘黃金山祠(황금산사), 丙子初冬金基豊(병자 초동 김기풍)’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우측에는 ‘黃金山祠附記虛笑人(황금산사부기허소인)’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황금산당을 잘 아는 독곶리 원주민에 따르면 독곶리 마을에서는 당집에 모신 신위를 임장군당, 신령당, 범당, 각시당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 각시당에는 매년 폐백으로 올린 실과 바느질 도구가 안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예전에 황금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가면 사당에 동전을 놓고 절을 했는데, 거기서 종종 똬리를 틀고 있는 커다란 황구렁이를 보았다고 한다.
독곶리에서는 해마다 음력 3월 중 택일한 날이나 4월 초파일에 마을의 안녕과 물길이 사나운 황금목에서의 안전한 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황금산사 당제(堂祭)를 지내오다가 어업이 쇠퇴하면서 30여년 전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996년 서산시에서 황금산 정상에 황금산사를 복원한 이후 매년 봄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어민들은 출어하기 전 황금산사에서 뱃길의 안전과 만선을 기원하는 뱃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친명배청(親明背淸)주의자였던 조선의 임경업 장군은 김자점(金自點)의 종 우금의 도움으로 배 한 척을 얻어 1643년 5월 26일 태안(일설에는 마포)에서 명나라를 향해 떠났다. 청나라를 치는데 필요한 구원병을 명나라에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그는 태안 앞바다에서 가시나무로 황금조기를 잡아 군사들을 먹였다고 한다. 임경업 장군은 황해로 빠져 중국 제남부(濟南府)의 해풍도(海豊島)에 도착, 명나라 등주(현 산둥성)도독(登州都督) 황종예(黃宗裔)의 총병(總兵) 마등고(馬騰高)로부터 4만 명의 군사를 받았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와 싸우다 생포된 임경업 장군은 인조의 요청으로 조선에 압송되어 형틀에서 장살(杖殺)됨으로써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박활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4백여년 전 황금산 앞바다는 물고기들이 풍부하여 이곳의 어부들은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었다. 황금산 앞 갯골 건너편 자각산 아래에는 명궁수(名弓手)로 명성이 자자한 박씨 성을 가진 활량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무예를 닦던 박활량은 잠시 쉬는 동안 마당바위에서 잠이 들었다. 꿈에 황룡이 나타나 이르기를 '나는 황금산 앞바다를 지키는 용신으로 이곳의 어부들이 지내는 고사밥을 받아먹고 살고 있노라. 그런데, 연평도에 살고 있는 청룡이 황금산 조기떼를 몰고 가려고 해 이를 막으려고 며칠째 황금산 앞바다의 하늘에서 싸움을 하고 있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는 이기기 어렵다. 그래서 내일 새벽에 청룡을 이곳 마당바위 상공으로 유인해 올 테니 너의 활 솜씨로 청룡을 쏴 죽여 달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튿날 황룡은 과연 청룡을 마당바위 상공으로 유인했다. 박활량은 재빨리 청룡을 향해 활을 쏘았다. 그때 갑자기 황룡이 몸을 뒤트는 바람에 화살이 그만 황룡의 몸통에 꽂이고 말았다. 황룡은 비명을 지르며 바닷물 속으로 떨어져 죽었다. 그날 밤 꿈에 황룡이 피를 흘리며 나타나 '내가 죽은 것은 활을 잘못 쏘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다. 다만 내가 애석해 하는 것은 황금목에 있는 큰 동굴이 연평도와 연결되어 있어 청룡이 이 굴을 통해 황금목 조기떼를 연평도 앞바다로 모두 몰고 가서 이곳 어민들의 생활이 빈곤하게 되었음이 한이 될 뿐이다.'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다. 믿거나 말거나다
사당에 임경업 장군을 모시게 된 것은 그가 구원병을 요청하러 명나라로 떠날 때 태안을 거쳐 갔던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임경업 장군이 황금조기를 잡아 군사들의 허기를 면하게 했다는 이야기에서 황금산 당제가 서해안 조기잡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풍어제였음을 알 수 있다. 박활량의 전설에서도 그는 황금목의 조기떼를 지키려는 인물로 등장한다. 조선 후기인 17~18세기에 이미 임경업 장군은 박활량과 함께 서해안 일대에서 ‘조기의 신’, ‘풍어의 신’으로 숭앙되고 있었던 것이다.
황금산 몽돌해변
황금산 코끼리바위
황금산 코끼리바위
황금산 몽돌해변
황금산 몽돌해변
바위섬
황금산 굴금해변
굴금해변의 해식동굴
굴금해변의 해넘이
황금산 서쪽에는 두 곳의 몽돌해변이 있다. 바닷물이 빠지면 두 몽돌해변을 걸어서 오갈 수 있지만, 바닷물이 들어오면 산등성이로 돌아서 가야 한다. 몽돌해변에는 황금산의 명물 코끼리바위와 굴금, 끝굴 등의 해식동굴이 있다. 굴금과 끝굴은 옛날에 금을 캐던 동굴이라고 한다. 황금산 앞바다에는 작은 바위섬들이 떠 있어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황금산 몽돌해변의 해넘이도 볼만하다. 이원반도 끝에서 서쪽 하늘과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석양이 장관이다. 특히 코끼리바위가 있는 몽돌해변은 해넘이 명소로 알려져 있다.
대산석유화학공단
굴금이 있는 몽돌해변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보고 나서 산등성이를 넘어 황금산을 내려왔다. 대산산업단지의 높이 솟은 굴뚝에서는 석유를 정제하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황금산은 현재 가야산 산수계류(伽倻山山水溪流), 석문봉 하일숙운(石門峯夏日宿雲), 개심사 정적지경(靜寂之境), 용비동 춘색만곡(龍飛洞春色滿谷), 여미리 여월미야(餘美里餘月美也), 옥녀봉 조양송림(玉女峰朝陽松林), 도비산 만하채운(島飛山晩霞彩雲), 간월호 동절후조(看月湖冬節候鳥) 등 서산팔경(瑞山八景)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서산구경(瑞山九景)이라면 단연 황금산이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5.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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