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 순례기

설악산 상봉능선 성인대에 오르다

林 山 2015. 10. 27. 19:07

동해 해돋이와 설악산 울산바위(780m, 명승 제100호)가 가장 잘 바라보이는 곳은 어디일까? 설악산 북주능선의 상봉(1,244m)에서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지능선의 성인대(645m, 聖人臺, 또는 石人臺, 현지인들은 神仙臺라고 부름)가 동해 해돋이와 울산바위 조망 명소라고 들었다. 민초들 사이에 풍문으로 들려오는 소식은 언제나 사실로 드러났다.    


성인대에서 바라본 속초와 고성의 새벽 풍경


성인대에서 바라본 동해 해돋이


새벽에 화암사에서 출발하여 수바위능선을 타고 올라 성인재(643m, 석인재, 선인재)에 오른 다음 성인대에 이르렀다. 성인대는 3단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 현지인들은 성인대를 신선대라고 한단다. 성인대 하단바위로 내려가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속초의 아름다운 야경 사이로 영랑호와 청초호가 거울처럼 빛나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동해의 수평선에는 아쉽게도 구름이 깔려 있었다. 


오전 06시 30분경쯤 되자 드디어 동해 해돋이가 시작되었다. 붉은 해가 구름을 뚫고 솟아 오르더니 온세상에 찬란한 햇살을 비추었다.    


성인대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성인대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성인대에서 필자


성인대에서 바라본 1,092m봉과 설악산 북주릉의 황철봉


아침 햇살을 받은 울산바위가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백두대간 설악산 북주릉에서 1092m봉을 지나 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에 거대한 병풍처럼 솟은 울산바위는 공룡릉과 화채릉, 용아릉과 더불어 그야말로 설악의 압권(壓卷)이었다. 울산바위 뒤로는 설악산 제일봉 대청봉(1,708m)과 중청봉(1,664m), 화채봉(1,320m)이 급어보고 있었다. 울산바위 남동쪽으로는 달마봉(526.4m) 암봉이 솟아 있었다. 울산바위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1,092m봉이 솟아 있고, 그 뒤로 백두대간 설악산 북주릉의 황철봉(1,381m)과 황철북봉(1,319m)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1,092m봉에는 울긋불긋 고운 물감을 쏟아 부은 듯 산마루부터 단풍이 붉게 물들면서 산발치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과 고성군 토성면의 경계선에 솟아 있는 울산바위는 6개의 거대한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레는 약 4㎞이고, 정상부에는 항아리 모양의 구멍이 5개 있다. 전설에는 울산 땅에 있던 바위가 조물주의 호출을 받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다가 설악산에 주저앉아 울산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울산바위에 대해 '울산(蔚山)이라는 명칭은 기이한 봉우리가 울타리(蔚)를 설치한 것과 같은 데서 유래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산(籬山), 울암(蔚岩)으로 표기된 문헌도 있다. 해동지도(海東地圖)와 광여도(廣輿圖)에는 울산바위가 천고산(天叩山), 일제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울산암(蔚山巖)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도(朝鮮地圖)와 여지도서(輿地圖書) 등 고지도에는 울산바위가 천후산(天吼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암릉 첨봉에서 바람이 불어 나오면 하늘이 울부짖는 것 같고, 천둥이 치면 하늘이 울린다고 해서 천후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강원도지 - 양양 산천조'에는 '큰 바람이 장차 불려고 하면 산이 먼저 울기 때문에 이름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인대에도 엄청나게 강한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바람이 얼마나 거세게 볼어오는지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였다. 거의 태풍 수준의 바람이었다. 어떨 때는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아서 바위 위에 주저앉아야만 했다.


성인대에서 바라본 미시령


설악산 북주릉은 잠시 미시령(826m)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상봉과 신선봉(1,214m)을 향해 치달아 올라가고 있었다. 미시령 옛길이 미시령계곡을 이리저리 휘감고 돌아가고 있었다.  


성인대

  

성인대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설악산 북주릉의 상봉


성인대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설악산 북주릉의 상봉과 신선봉


성인대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성인대에서 바라본 수바위


성인대에서 바라본 수바위


아침 햇살을 받은 성인대에는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성인대는 3단으로 이루어진 암릉지대였다. 하단바위에는 돌확처럼 움푹 패인 구덩이들이 여러 개 있었다. 구덩이에는 꽤 많은 물이 고여 있었다. 하단바위에서는 중단바위가 마치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였다. 상단바위에는 기묘한 바위 두 개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성인대 상단바위에서는 북서쪽으로 뻗어올라간 능선의 끝에는 설악산 북주릉의 상봉이 솟아 있었다. 화암재를 사이에 두고 상봉과 신선봉이 정답게 앉아 있었다. 상봉과 신선봉 산마루에도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고 있었다. 설악산 북주릉을 바라보면서 백두대간 순례를 떠난 내가 2001년 7월 10일 상봉에서 신선봉을 향해 마룻금을 홀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기억의 저편에서 어슴프레 떠올랐다.


성인대에서는 수바위(穗岩, 또는 秀岩)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상봉의 남동능선인 성인대능선은 성인재에서 다시 두 줄기의 지능선으로 갈라진다. 두 지능선 사이에 있는 계곡이 수바위골이다. 수바위골 북쪽 지능선에는 수바위, 남쪽 지능선에는 성인대가 있다. 수암은 볏가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화암(禾岩)이라고 불렸고, 화암사(禾巖寺)라는 절이름도 저 바위에서 유래한 것이다. 수바위능선 북쪽에 있는 계곡이 화암사가 있는 화암사골이다.   


수바위에는 욕심 많은 객승에 얽힌 전설이 하나 전한다. 옛날 화암사에는 승려 두 명이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수행을 하면서 탁발을 하러 다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겨울이 닥치면 끼니가 걱정이었다. 수바위에서 수행을 하면서 민가로 탁발을 하러 다니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수행승의 꿈에 백발도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작은 구멍이 있으니 그곳을 찾아가 끼니 때마다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면 쌀이 나올 것이다'라고 계시했다. 이튿날 두 수행승은 꿈을 생각하면서 수바위로 달려가 백발도인이 시킨 대로 했더니 정말로 두 사람분의 쌀이 나왔다. 이후 수행승들은 끼니 걱정 없이 불도에 정진할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욕심 많은 객승(客僧)이 수바위를 찾아와 ‘3번 흔들면 2인분의 쌀이 나오니 6번 흔들면 4인분의 쌀이 나오리라’ 생각하고 지팡이를 구멍에 넣고 6번 흔들었다. 객승의 욕심에 산신이 노하여 바위 구멍에서는 피가 나왔고, 이후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수바위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볏짚으로 위장한 화암사 수바위를 본 왜군들은 군량미를 쌓아둔 것으로 착각해 군사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알고 지레 겁을 먹고 이곳을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수바위 꼭대기에는 깊이 1m, 둘레 5m의 샘이 있다. 이 샘이 마르면 이 고장에 가뭄이 든다고 하여 당시 부사가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성인대는 명실공히 동해 해돋이와 울산바위 조망 명소였다. 성인대를 떠나기 전 울산바위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거대한 성벽처럼 솟아 있는 울산바위에서 추상같은 기상이 느껴졌다. 울산바위는 이제 내게 산을 내려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성인재 정상


성인재에서 바라본 화암사


성인대에서 성인재까지는 1분도 채 안 걸린는 거리였다. 성인재 정상에는 바위들이 선돌처럼 서 있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성인재를 통해서 화암사골과 미시령계곡을 넘나들었다고 한다. 성인재를 성인봉 또는 선인봉이라고도 한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 근처에서 성인이 많이 출현할 것이라고 해서 성인봉이라고 했단다. 성인재 바위에 올라가자 화암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성인재와 성인대


백두대간 설악산 북주능선의 상봉과 신선봉


성인재에서 산림치유길로 내려가기로 했다. 얼마쯤 내려왔을까 큰 바위가 선돌처럼 서 있는 곳에서 성인재, 성인대와 작별했다. 상봉, 신선봉과도 작별했다.     


화암사골 신선계곡 옥문바위 와폭


화암사골 신선계곡의 실폭포


산부추꽃


구절초꽃


꽃향유


신선계곡 단풍


화암사 바로 앞 신선계곡에는 옥문바위가 있었다. 옥문바위 와폭에는 옥류수처럼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실폭포도 있었다. 옥문바위에는 구절초와 꽃향유, 산부추 꽃이 피어 있었다. 냇가의 단풍나무에는 단풍이 더없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신선계곡에도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금강산 화암사 전경


화암사에서 바라본 수바위


신선계곡에 놓인 금강교를 건너 화암사 경내로 들어갔다. 화암사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수바위는 성인대에서 바라볼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사물은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아야만 제대로 볼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화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769년(혜공왕 5)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이 절을 창건할 당시에는 사명(寺名)을 금강산 화엄사(華嚴寺)라고 하였다. 사명을 화엄사라고 한 까닭은 이곳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講)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했기 때문이다. 진표율사는 또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친견한 자리에 지장암(地藏庵)을 창건하여 이 절의 부속 암자로 삼았다. 1401년(조선 태종 1)에는 지장암을 동쪽으로 옮기고 미타암(彌陀庵)으로 개명했다. 


1864년(고종 1) 절이 산불로 소실되자 수바위 아래로 옮겨 중건한 뒤 바위의 이름을 따서 수암사(穗岩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2년 일제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의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전국 31본산 중 하나인 건봉사(乾鳳寺)의 말사가 되면서 화암사로 개명했다.


화암사는 2014년 절 뒤편 산봉우리에 미륵대불입상(彌勒大佛立像)을 세웠다. 미륵대불을 조성한 것은 이 절이 1400여년 전 진표율사가 미륵신앙을 선양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진표율사는 당시 화암사를 발연사와 함께 미륵도량으로 창건했다. 미륵대불을 건립하면서 화암사는 용화도량의 맥을 다시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륵하생(彌勒下生)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미륵하생의 의미를 혁명이요, 천지개벽이라고 본다. 신앙의 대상으로서 미륵불은 의미가 없다. 저마다 미륵불이 되어 썩은 세상을 뒤집어 엎고 용화세상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미륵하생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미륵불을 생각하면서 귀로에 오르다.   


2015.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