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충주 창동리 유적을 찾아서

林 山 2016. 5. 12. 11:59

충주시내에서 달천에 놓인 탄금교를 건너 탄금로를 따라가면 중앙탑면 창동리(倉洞里) 탄금호반에 자리잡은 창골이 나타난다. 옛날 수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때 이곳에는 큰 창고가 있어서 창골 또는 창동(倉洞)이라 불렸다. 


창골에는 탄금호 물가에 작은 동산이 하나 솟아 있다. 이름하여 청금대(聽琴臺)이다. 청금대라는 이름은 가야국(伽倻國)에서 온 우륵(于勒)이 탄금대에서 가야금 타는 소리를 이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청금대 어딘가에 있었다는 청금정(聽琴亭)이라는 정자는 언제 사라졌는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청금산장이라는 장어집이 청금이라는 이름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창동리 청금대


청금대 5층석탑


금호


청금대 정상에 오르면 세운 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5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석탑 주변에는 민박집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서너 채 숲속에 흩어져 있다. 청금대에서는 탄금호와 건너편의 금가면 원포리, 오석리, 유송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탄금대가 있는 대문산 뒤로 지등산과 계명산, 금봉산도 다 조망된다. 남한강에는 창동리와 유송리를 연결하는 우륵대교, 달천 두물머리에는 칠금동과 창동리를 연결하는 탄금교와 탄금대교가 나란히 가설되어 있다.     


충주 창동리 마애여래상


동산에서 남한강변으로 이어진 가파른 계단길을 내려가면 암벽에 새겨진 충주 창동리 마애여래상(忠州倉洞里磨崖如來像)이 있다. 마애여래상의 하단부와 왼쪽 일부는 이미 떨어져 나갔고, 가슴 부위에는 금이 가 있어 언제 허물어져 내릴지 모르는 상황이다. 암벽도 여러 군데 심하게 갈라져 있어 낙반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균열이 생긴 부분에서 흘러내린 철 성분으로 인해 불상의 중심부는 붉은색을 띠고 있다. 이를 두고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신립(申砬) 장군의 피눈물이라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다. 


청금대 마애여래상은 비스듬한 자세로 남한강 상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청금대 근처에는 조선시대 금천나루가 있었던 곳이다. 중앙탑면의 옛 이름은 가금면(可金面)인데, 일제시대 가흥면(可興面)과 금천면(金遷面)을 통합해서 가금면을 만들었다. 금천나루는 옛 금천면에 속했던 창동리에 있었다.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금천나루에 대해 '영남의 물산을 받아들이고 서북으로 한양의 생선과 소금을 받아들여 여염집이 즐비하였다. 마치 한양의 강마을처럼 배의 고물과 고물이 잇닿아 늘어서 하나의 커다란 도회를 이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금대 마애여래상 주변은 당시 수운과 관련하여 매우 번창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애여래상은 남한강변의 암벽에 조성되어 있어 강물 위에 뜬 배나 뗏목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따라서 창동리 마애여래상은 수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창동리 마애여래상은 4m 크기의 비교적 규모가 큰 마애불이다. 하단부가 떨어져 나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좌상으로 보이며, 하부에는 연화좌가 보인다. 머리와 얼굴 부분은 낮게 양각하였고, 어깨 이하는 도드라진 선각으로 처리하였다. 소발 머리에 얼굴은 둥글고 통통하며, 코는 주먹코처럼 뭉툭하고 큼직하게 표현했다.


눈썹은 코의 상단부에서 양쪽으로 둥글고 긴 곡선으로 나타냈고, 눈은 비대칭 일직선으로 표현했다. 꼭 다문 입술과 찢어진 눈, 주먹코 등으로 인해 표정이 다소 근엄한 편이다. 귀는 길게 어깨 가까이 닿아 있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양 어깨는 다소 좁은 편이다. 불의는 통견으로 가슴에서 시작된 U자형 옷주름이 겹을 이루면서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려와 있다. 옷주름은 도드라진 선각으로 구불구불하게 표현하였다. 손은 새기지 않았다. 


창동리 마애여래상은 전체적으로 얕은 부조로 새기고, 손을 표현하지 않는 조각 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청금대 암벽은 붕괴될 위험성이 커서 창동리 마애여래상의 보존 대책이 시급해 보인다.


충주 창동리 오층석탑과 약사여래입상


청금대 바로 위에는 탄금호반에 매운탕, 장어구이집 청금산장이 자리잡고 있다.  청금산장 앞 마당에는 충주 창동리 오층석탑(忠州創洞里五層石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호)과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71호)이 있다. 청금산장 앞뜰에는 아름드리 회화나무(충주시 보호수 제52호) 한 그루가 서 있다.   


충주 창동리 오층석탑


창동리 오층석탑은 원래 북쪽 민가의 뒷뜰에 있던 것을 1977년경 정남방 60여m 지금의 자리로 옮겨서 복원해 놓은 것이다. 석탑 이건 당시 3층 옥개석 상면 중앙부에 지름 22㎝, 깊이 15㎝의 원형 사리공에는 고운 모래가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석탑이 있었던 자리에는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창동리 오층석탑은 상하 이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 꼭대기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지고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하층기단은 2매의 부재로 결구하였는데, 상층기단에 비하여 상당히 넓다. 상층기단 위에 1층 탑신석을 받치는 괴임돌이 두툼한 것이 다소 특이하다. 탑신석(塔身石, 몸돌)은 2층부터 그 규모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상층기단과 탑신석의 면석부에는 우주(偶柱)와 탱주(撑柱)를 모각했다. 옥개석(屋蓋石, 지붕돌)과 탑신석은 다른 돌로 조성되어 있는데, 5층만 한 돌로 되어 있다. 옥개석 낙수면의 경사는 비교적 완만하고, 네 귀퉁이 합각(合角)은 살짝 반전되어 있다. 층급받침은 위로 올라갈수록 받침수가 줄어들고 있다.   


기단부는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양식이지만, 상대갑석 상면에 별도의 괴임단을 마련하지 않고 별석형의 높은 받침대를 올린 것은 고려시대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탑 양식이다. 석탑의 조성 양식으로 볼 때 창동리 오층석탑은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충주 창동리 석조약사여래입상


주 창동리 석조약사여래입상(忠州倉洞里石造藥師如來立像)은 오층석탑 바로 옆에 있다. 이 불상은 청금산장 근처의 광산에서 작업을 하다가 발견되어 1978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약사여래입상은 화강암 판석에 보주형 광배와 불신을 부조한 불상이다. 머리는 소발 위에 육계를 큼직하게 표현하였다. 몸체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큰 편이다. 이마에 백호는 없다. 얼굴은 통통하고, 눈썹과 눈은 부드러운 반원형으로 표현되어 있어 표정이 미소를 띤 듯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이다. 두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닿았고, 목에는 삼도가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옷자락이 길게 늘어져 있다. 왼손은 가슴에 댄 채 약합을 들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위까지 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댄 아미타정인의 중품중생인을 취하고 있다. 소매는 길게 내려와 있고, 배 아래로는 둥근 옷주름이 수평으로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장방형 판석에 두 겹의 연화문을 새기고, 불상을 끼우도록 되어 있다. 불상과 석질이 다른 것으로 보아 대좌는 원래의 것이 아닌 듯하다.


창동리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조각 기법 양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창동리 마애여래상과 마찬가지로 수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충주 창동리 회화나무 보호수


청금산장 바로 앞에 서 있는 회화나무에서는 이제 막 새 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이 나무는 1982년 11월 11일 충주시 보호수 제52호로 지정되었다. 1982년 당시 수령 310년이었으니까 지금은 344,5년 정도 되었겠다. 회화나무의 수고는 20m, 둘레는 340cm이다. 


청금산장에 들러 주인장과 인사를 나누고 창동리를 떠나다. 장어구이는 다음 기회에.....


2016.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