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이 그리우면 떠나라고 했다. 지리산(智異山, 1,915m)은 언제나 내게 그리운 산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리산을 아버지산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지리산은 아버지산이 아니라 어머니산이다. 내게도 지리산은 어머니산이다. 어머니의 품처럼 사람이나 짐승을 넉넉하고 포근하게 품어주는 산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고여신(麻姑女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노고단(老姑壇, 1,507m), 천왕봉(天王峰, 1,915m) 통천문(通天門) 인근 성묘사(聖廟祠)에 봉안했던 성모천왕(聖母天王) 등 곳곳에 남아 있는 여산신의 흔적도 지리산이 어머니의 산임을 알 수 있다.
성삼재에서 바라본 구례 산동면과 견두지맥
이른 아침 심원(深遠)마을을 떠나 성삼재(性三峙, 1,102m)에 올라서니 구례(求禮) 상공에 새하얀 솜을 깔아 놓은 듯 운해가 떠 있었다. 운해는 점점 산동면(山東面) 상공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 아래 사바세계가 신기루처럼 아스라이 바라보였다.
성삼재의 유래는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군에 쫓긴 진한왕은 지리산으로 피신했다. 달궁에 왕궁을 세운 진한왕은 사방의 험준한 요충지에 장군들을 파견하여 지키게 했다. 북쪽 능선은 여덟 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팔랑치(八郞峙), 서쪽 능선은 정장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므로 정령치(鄭嶺峙), 동쪽은 황장군으로 맡아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치(黃嶺峙), 남쪽은 군사적 요충지이므로 성(性)이 다른 세 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하게 하여 성삼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 제일봉 천왕봉을 떠난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종석대(鍾石臺, 1,356m)와 이곳 성삼재를 지나 서북능선의 만복대(萬福臺, 1,437m)에 이르고, 만복대에서 백두대간과 갈라진 견두지맥(犬頭枝脈)은 견두산(犬頭山, 774m)-천마산(天馬山, 656m)-깃대봉(691m)-형제봉(兄弟峰, 622m)-천왕봉(695m)-갈미봉(497m)-깃대봉(243m)을 지나 남쪽 섬진강(蟾津江)을 향해 뻗어간다. 종석대에서 시암재를 지나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은 간미봉(艮美峰, 798m)-지초봉(芝草峰, 596m, 할미봉)-성삼봉-까치절산(297m)을 지나 서시천(西施川) 구만제(九灣堤)에서 끝난다. 이 세 산줄기들이 둘러싼 분지에 구례 산동면이 자리잡고 있다. 간미봉에서 갈라진 또 하나의 지능선은 남쪽으로 뻗어내려 천은천(泉隱川) 천은제(泉隱堤)에 이른다.
성삼재에서 바라본 노고단
쪽빛 하늘에는 새하얀 뭉게구름이 한가로이 떠 있었다. 노고단 산마루에도 뭉게구름 한 자락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토록 푸르른 날에 지리산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 자체가 더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말발도리
쪽동백꽃
목란꽃
수수꽃다리
산딸나무꽃
노고단으로 오르는 산기슭에는 말발도리를 비롯해서 병꽃, 쪽동백, 목란(함박꽃나무), 수수꽃다리, 산딸나무, 층층나무꽃들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붓꽃, 덩굴꽃마리, 쥐오줌풀, 승마꽃도 제철을 만났다. 저마다 생명을 구가하는 들꽃 산꽃을 바라보면서 산길을 걷노라면 산행의 고달픔도 시나브로 사라지곤 한다.
무넹기 폭포
화엄사골
코재를 지나 무넹기에 이르렀다. 코재는 화엄사골 최고점으로 노고단길과 만나는 지점에 있다. 가파른 화엄사골에서 이 고개에 올라설 때 코가 땅에 닿는다고 해서 코재다. 코재에는 심원골로 흘러내리는 만수천 상류의 물길을 돌려 화엄사골로 떨어지게 한 무넹기(물넘기->무넘기의 전라도 사투리)가 있다. 코재 전망대에서는 화엄사골과, 구례읍, 구례읍을 휘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날이 좋으면 호남정맥(湖南正脈)의 조계산(曹溪山, 884m)까지도 보인다. 화엄사골 초입에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가 있다.
노고단대피소
노고단대피소에는 언제나 그렇듯 등산객들로 붐빈다. 성삼재에서 가깝고 길도 편해서 접근도가 매우 좋기 때문이다. 산행에 지치고 허기질 때 노고단대피소에서 사먹던 컵라면 맛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는데..... 이젠 봉지라면만 팔고, 컵라면은 취급하지 않는단다.
큰앵초꽃
복주머니난꽃
철쭉꽃
노고단재
노고단대피소에서 노고단재로 오르는 돌계단 지름길을 버리고, 노고단중계소로 이어지는 우회로를 따라가기로 했다. 산기슭에는 앙증맞은 분홍색 큰앵초가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큰앵초는 언제 보아도 깜찍하면도 귀엽고 이쁜 꽃이다.
노고단에서 복주머니난꽃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복주머니난을 만난 것만으로도 지리산에 들어온 보람을 느꼈다. 복주머니난은 고산지대에 사는 저온성 식물로 까다로운 생육 특성 때문에 야생에서 희귀한 꽃이 되고 말았다. 생김새 때문에 요강꽃 또는 개불알꽃이라고도 하는 복주머니난은 꽃이 특이해서 고가에 거래되기에 사람들이 보는 족족 캐 간 결과 지금은 멸종위기종이 되었다. 하지만 복주머니난을 자생지에서 옮겨 심으면 십중팔구는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노고단재에 거의 다 왔을 때 연분홍색의 꽃이 활짝 핀 철쭉 한 그루를 발견했다. 어쩌면 이 철쭉이 올해 마지막 철쭉일 것이었다. 노고단재에는 번개시장이라도 열린 듯 등산객들로 붐볐다.
노고단
노고단 정상 표지석
노고단 돌탑
노고단 정상 표지석에서 필자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백두대간 지리산맥
문수골
노고단에서 만복대에 이르는 백두대간 지리산맥
노고단재와 돌탑봉(1329m)
노고단재에서 노고단 정상부까지는 생태계 보존을 위해 목제 데크 계단길을 설치해 놓았다. 15분 정도 걸었을까? 마침내 백두대간 지리산 노고단 정상에 올라섰다. 정상에는 '老姑壇(노고단)'이라고 새긴 표지석과 돌탑이 세워져 있었다.
노고단의 유래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화랑들은 이곳에 올라 수련을 하면서 돌탑과 제단을 설치하고, 천지신명과 마고여신에게 나라의 번영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당시 화랑들이 쌓은 돌탑과 제단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허물어져 폐허가 된 채 초석 같은 큰돌 몇 개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61년 7월 민족종교인 유불선합일갱정유도(儒彿仙合一更正儒道) 신도들이 돌탑을 다시 쌓아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갱정유도에서는 해마다 중양절(음력 9월9일)에 노고단에서 국태민안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산신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노고단은 지리산에서 전망이 매우 좋은 봉우리 중 한 곳이다. 동쪽으로는 백두대간 지리산맥이 노고단에서 반야봉(1,732m)-삼도봉(1,550m)-토끼봉(1,534m)-명선봉(1,586m)-덕평봉(1,522m)-칠선봉(1,576m)-영신봉(1,651m)-촛대봉(1,703m)-연하봉(1,730m)-제석봉(1,806m)을 지나 천왕봉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간다. 삼각봉(1,462m), 형제봉(1,452m)은 토끼봉과 명선봉 뒤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지리산 이 골 저 골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야만 했던가! 노고단에 서서 바라보는 백두대간 지리산맥이 장엄하면서도 비장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노고단 남쪽으로는 노고단-왕실봉-질매재-질등-문바우등-느진목재-왕시루봉(1,214m)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노고단-밤재-형제봉-형제봉재-월령봉(月嶺峰, 745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나란히 뻗어간다. 그 사이에 있는 계곡이 토지천(土旨川)이 발원하는 문수골이다. 문수골은 상류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동쪽 계곡은 큰진도사골, 서쪽 계곡은 작은진도사골이다. 문수골 서쪽 계곡은 화엄사골, 동쪽 계곡은 피아골이다. 왕시루봉 바로 뒤에 보이는 산이 호남정맥의 백운산(白雲山, 1,218m)이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달려온 백두대간은 서쪽으로 종석대를 지나 성삼재에 이른다. 종석대에는 우번조사(牛飜祖師)의 일화가 전해 온다. 우번조사가 득도하던 순간 저 산봉우리에서 신비롭고 아름다운 돌종소리가 들렸다고 하여 종석대라고 부른다. 종석대는 우번조사가 도를 깨친 곳이라 하여 우번대(牛飜臺), 관세음보살이 현현한 곳이라 하여 관음대(觀音臺), 양쪽 봉우리와 능선의 형상이 마치 차일을 친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차일봉(遮日峯)으로도 불린다.
성삼재를 떠난 백두대간은 북쪽으로 당동고개-작은고리봉-묘봉치-만복대-정령치를 지나 큰고리봉에 이른 다음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원시 주천면과 운봉읍의 경계선을 따라가다가 수정봉(水晶峰, 804.7m)으로 치올라간다. 성삼재에서 북쪽으로 당동고개-작은고리봉-묘봉치-만복대-정령치-큰고리봉-세걸산(世傑山, 1,207m)-세동치(世洞峙)-부운치(浮雲峙)-부운봉-팔랑치-바래봉(1,167m)-덕두산(德頭山, 1,150m)을 지나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 람천에 이르는 산줄기가 지리산 서북능선이다.
노고단에서는 천왕봉에서 큰고리봉에 이르는 백두대간과 성삼재에서 바래봉에 이르는 지리산 서북능선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문수골과 심원골도 내려다보이고, 돌탑봉 뒤로 견두지맥도 보인다. 지리산맥 남쪽으로 운해가 끼는 날에는 구름 위로 머리를 내민 호남정맥의 무등산과 백운산의 장관을 볼 수 있다. 노고단 운해 정말 환상적인 장관이다.
큰 산을 대면하는 그 자체가 깨달음이요, 마음자리 공부가 된다. 티벳의 고원지대에서 고승들이 많이 배출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히말라야산맥의 고봉준령들 자체가 큰 스승이요, 말이 필요없는 큰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내년 이맘때쯤 다시 지리산에 올 수 있을까? 크고도 넓고도 깊은 백두대간을 가슴에 담고 지리산을 떠나다. 다시 보자 지리산아!
2016.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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