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간(司諫) 벼슬에서 잠시 물러난 송순은 고향에 머물면서 면앙정 주변 산수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읊은 가사(歌辭) '면앙정가(俛仰亭歌)'를 지었다. '면앙정가'를 일명 '무등곡(無等曲)'이라고도 한다. '면앙정가' 일부를 새긴 면앙정가비가 면앙정 앞 한쪽에 세워져 있다.
송순의 '면앙정가' 비
면앙정가(俛仰亭歌)-송순
'无等山(무등산) 한 활기 뫼히 동다히로 버더 이셔, 멀리 떼쳐 와 霽月峯(제월봉)이 되여거날 無邊大野(무변 대야)의 므삼 짐쟉 하노라. 닐곱 구배 함대 움쳐 므득므득 버럿난 닷. 가온대 구배난 굼긔 든 늘근 뇽이 선잠을 갓 깨야 머리랄 언쳐시니, 너라바회 우해 松竹(송죽)을 헤혀고 亭子(정자)랄 언쳐시니 구름 탄 靑鶴(청학)이 千里(천 리)를 가리라 두 나래 버렷난 닷.(무등산 한 줄기 산이 동쪽으로 뻗어 있어, 무등산을 멀리 떼어버리고 나와 제월봉이 되었거늘, 끝없는 넓은 들에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일곱 굽이가 한데 움츠리어 우뚝우뚝 벌여놓은 듯, 그 가운데 굽이는 구멍에 든 늙은 용이 선잠을 막 깨어 머리를 앉혀 놓은 듯하며, 넓은 반석 위에 송죽(松竹)을 헤치고 정자를 앉혀놓았으니, 마치 구름 탄 푸른 학이 천 리를 가려고 날개를 벌린 듯하다.)
玉泉山(옥천산) 龍泉山(용천산) 나린 믈이 亭子 압 너븐 들해 올올히 펴진 드시 넙꺼든 기노라 프르거든 희디마나, 雙龍(쌍룡)이 뒤트난 닷 긴 깁을 채 ?난 닷 어드러로 가노라 므삼 일 배얏바 닫난 닷 따로난 닷 밤낫즈로 흐르난 닷. 므조친 沙汀(사정)은 눈갓치 펴?거든 어즈러온 기러기난 므스거슬 어르노라. 안즈락 나리락 모드락 흣트락 蘆花(노화)를 사이 두고 우러곰 좃니난뇨.(옥천산 용천산에서 흐르는 냇물이, 정자 앞 너른 들에 잇달아 퍼져 있으니, 넓거든 길지를 말거나, 푸르거든 희지나 말 것이지. 마치 쌍룡이 몸을 뒤트는 듯도 하고, 긴 비단을 펼쳐 놓은 듯도 하니, 대체 어디로 가려고 무슨 일이 바빠서 달려가는 듯, 따라가는 듯 밤낮을 쉬지 않고 흐르는 듯하다. 물 따라 벌여 있는 물가의 모래밭은 눈같이 하얗게 퍼졌는데, 어지러운 기러기는 무엇을 통정(通情)하려고 앉았다 내려갔다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갈대꽃을 사이에 두고 울면서 서로 따라다니는고?)
너븐 길 밧기오 긴 하날 아래 두르고 꼬잔 거슨 뫼힌가 屛風(병풍)인가 그림가 아닌가. 노픈 닷 나즌 닷 근난 닷 닛난 닷 숨거니 뵈거니 가거니 머물거니 어즈러온 가온대 일흠 난 양하야 하날도 젓티 아녀 웃독이 셧난 거시 秋月山(추월산) 머리 짓고 龍龜山(용구산) 夢仙山(몽선산) 佛臺山(불대산) 魚登山(어등산) 湧珍山(용진산) 錦城山(금성산)이 虛空(허공)에 버러거든 遠近(원근) 蒼崖(창애)의 머믄 것도 하도 할샤.(넓은 길 저쪽의 긴 하늘 아래 두르고 꽂은 듯한 것은 산인가 병풍인가, 그림인가 아닌가, 높은 듯 낮은 듯, 끊어지는 듯 잇는 듯, 숨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며, 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며, 어지러운 가운데 유명한 체 뽐내며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뚝 선 것이 여러 산봉인데, 그 중 추월산을 머리 삼고 용귀산, 봉선산, 불대산, 어등산, 용진산, 금성산이 허공에 벌어져 있는데, 원근의 푸른 언덕에 펼쳐진 모양이 많기도 많구나.)
흰구름 브흰 煙霞(연하) 프르니난 山嵐(산람)이라. 千巖(천암) 萬壑(만학)을 제 집을 삼아 두고 나명셩 들명셩 일해도 구난지고. 오르거니 나리거니 長空(장공)의 떠나거니 廣野(광야)로 거너거니프르락 블그락 여트락 디트락 斜陽(사양)과 섯거디어 細雨(세우)조차 쁘리난다.(흰구름과 뿌연 안개와 놀, 푸른 것은 산 아지랑이. 많은 바위와 골짜기를 제 집으로 삼아 두고, 들락날락하며 아양도 떠는구나.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넓고 먼 하늘에 떠나가기도 하고, 넓은 벌판으로 건너가기도 하여, 푸르락 붉으락, 옅으락 짙으락 저녁 때 지는 해와 섞이어 실비마저 뿌리는구나.)
籃輿(남여)랄 배야 타고 솔 아래 구븐 길노오며 가며 하난 적의 綠楊(녹양)의 우난 黃鶯(황앵) 嬌態(교태) 겨워 하난고야. 나모 새 자자지어 綠陰(녹음)이 얼린 적의 百尺(백 척) 欄干(난간)의 긴 조으름 내여 펴니 水面(수면) 凉風(양풍)이야 긋칠 줄 모르난가.(지붕 없는 가마를 재촉해 타고 소나무 아래 굽은 길로 오가는 때에 푸른 버들에서 우는 노랑 꾀꼬리는 흥에 겨워 아양을 떠는구나. 나뭇가지 사이가 서로 엇갈리어 뒤섞여져 푸른 나무 그늘이 한창인 때에 긴 난간에서 긴 졸음을 내어 펴니, 물 위에 서늘한 바람이야 그칠 줄 모르는구나.)
즌 서리 빠딘 후의 산 빗치 錦繡(금수)로다. 黃雲(황운)은 또 엇디 萬頃(만경)의 펴겨 디오. 漁笛(어적)도 흥을 계워 달랄 따롸 브니난다.(된서리 걷힌 후에 산 빛이 수놓은 비단 물결 같구나. 누렇게 익은 곡식은 또 어찌 넓은 들에 파져 있는고? 고기잡이의 피리도 흥을 이기지 못하여 달을 따라 부는구나.)
草木(초목) 다 진 후의 江山(강산)이 매몰커날 造物(조물)리 헌사하야 氷雪(빙설)로 꾸며내니 瓊宮瑤臺(경궁요대)와 玉海銀山(옥해은산)이 眼低(안저)의 버러셰라. 乾坤(건곤)도 가암열사 간 대마다 겨를 업다.(초목이 다 떨어진 후에 강과 산이 묻혀 있거늘 조물주가 야단스러워 얼음과 눈으로 자연을 꾸며내니, 눈에 덮인 아름다운 자연이 눈 아래 펼쳐 있구나. 자연도 풍성하여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경치로다.)
人間(인간)알 떠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업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져것도 드르려코 바람도 혀려 하고 달도 마즈려코 밤으란 언제 줍고 고기란 언제 낙고 柴扉(시비)란 뉘 다드며 딘 곳츠란 뉘 쓸려뇨. 아참이 낫브거니 나조해라 슬흘소냐. 오날리 不足(부족)커니 來日(내일)리라 有餘(유여)하랴. 이 뫼해 안자 보고 뎌 뫼해 거러 보니 煩勞(번로)한 마암의 바릴 일이 아조 업다. 쉴 사이 업거든 길히나 젼하리야. 다만 한 靑藜杖(청려장)이 다 므듸여 가노매라.(인간 세상을 떠나와도 내 몸이 틈이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쏘이고 달도 맞이하려고 하니, 밤은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으며, 사립문은 누가 닫고 떨어진 꽃은 누가 쓸 것인가? 아름다운 자연 구경하느라 아침 시간도 모자란데 저녁이라고 자연이 아름답지 아니할까. 오늘도 구경할 시간이 부족한데 내일이라고 시간이 넉넉할까? 이 산에 앉아보고, 저 산을 걸어보니, 번거로운 마음이면서도 아름다운 자연은 버릴 것이 전혀 없다. 쉴 사이가 없는데 이 아름다운 자연을 구경하러 올 길이나마 전할 틈이 있으랴. 다만 하나의 푸른 명아주 지팡이가 다 못 쓰게 되어 가는구나.)
술이 닉어거니 벗지라 업슬소냐. 블내며 타이며 혀이며 이아며 온가짓 소래로 醉興(취흥)을 배야거니 근심이라 이시며 시람이라 브트시랴. 누으락 안즈락 구브락 져츠락 을프락 파람하락 노혜로 놀거니 天地(천지)도 넙고넙고 日月(일월)도 한가하다.(술이 익었는데 벗이 없을손가. 노래를 부르게 하며, 가야금을 타게 하며, 해금을 켜게 하며, 방울을 흔들면서 온갖 아름다운 소리로 취흥을 재촉하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라 붙었으랴, 누웠다 앉았다가, 굽으렷다 젖혔다가, 시를 읊었다 휘파람 불었다 하며 마음 놓고 노니, 천지도 넓고 넓으며 세월도 한가하다.)
羲皇(희황) 모랄러니 이적이야 긔로고야 神仙(신선)이 엇더턴지 이 몸이야 긔로고야. 江山風月(강산 풍월) 거날리고 내 百年(백 년)을 다 누리면 岳陽樓(악양루) 샹의 李太白(이태백)이 사라오다. 浩蕩(호탕) 情懷(정회)야 이에서 더할소냐. 이 몸이 이렁 굼도 亦君恩(역군은)이샷다.(태평성대를 모르고 자내더니 이 때야말로 태평성대로구나. 신선이 어떻던고, 이 몸이 곧 신선이로다. 강산 풍월에 묻혀 내 평생을 다 누리면, 악양루 위에 이태백이 살아오더라도 넓고 끝없는 정다운 회포야말로 이보다 더할 것인가. 이 몸이 이렇게 지내는 것도 역시 임금의 은혜로다.)'
송순이 '면앙정가'를 통해서 펼쳐 보여주고 있는 것은 면앙우주(俛仰宇宙)이다. 사적 화자는 면앙정 주변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술과 음악,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풍류생활을 즐기면서 '주역(周易)' 항괘(恒卦)의 정신과 중용(中庸)의 도를 구현하고 있다. 초야에 묻혀 사계에 순응하며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은 바로 사대부의 자세인 것이다.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반복법과 점층법, 댓구법 등을 적절히 사용해서 경치를 실감나게 묘사한 가사다.
송순이 '면앙정가'를 쓴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총 146구에 달하는 '면앙정가'는 '면앙집' 권4 '잡저(雜著)'에 한역되어 '신번면앙정장가일편(新翻俛仰亭長歌一篇)'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면앙정가'는 강호가도를 구현한 가사의 선구적 작품이자 누정문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 홍만종(洪萬宗)은 '순오지(旬五志)'에서 '면앙정가'에 대해 '호연지기를 유감없이 표현했으며, 어사(語辭)가 청완(淸婉)하고 유창하다'고 평가했다. 이 가사는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과 함께 호남 가사문학의 원류가 되었다. 또한, 그 내용과 형식, 묘사 등에서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정철은 송순으로부터 우리말을 절묘하고도 아름답게 구사하는 표현법을 많이 배웠다.
담양 소쇄원
1534년(중종 28) 면앙정을 지은 그 이듬해 송순은 창평(昌平)의 소쇄원(瀟灑園)에 들러 '제외제양처사언진산보소쇄정(題外弟梁處士彦鎭山甫瀟灑亭)' 4수를 지었다. 이 시가 소쇄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제외제양처사언진산보소쇄정(題外弟梁處士彦鎭山甫瀟灑亭)
고종사촌동생 처사 양언진 산보의 소쇄정에서 읊다 - 송순
小閣玲瓏起(소각영롱기) 아담한 누각 멋지게 세워져 있어
坐來生隱心(좌래생은심) 앉아 있으니 숨어살 마음 생기네
池魚依竹影(지어의죽영) 못의 물고기 대 그림자에 노닐고
山瀑瀉梧陰(산폭사오음) 오동 그늘 밑으로 폭포 떨어지네
愛石頻回步(애석빈회보) 사랑스런 돌길 바삐 돌아 걸으며
憐梅累送吟(련매루송음) 가련한 매화 나도 몰래 한숨짓네
欲知幽意熟(욕지유의숙) 숨어사는 깊은 뜻을 알고 싶어서
看取近床禽(간취근상금) 날지 않는 새 가까이 들여다보네
緣崖開一逕(연애개일경) 벼랑을 따라서 오솔길 나 있는데
臨澗閉雙扉(임간폐쌍비) 시냇가의 사립문은 닫힌 채 있네
巖老苔平鋪(암노태평포) 바위엔 묵은 이끼 가득 끼어있고
亭深竹亂圍(정심죽난위) 대숲 둘러싼 정자는 깊어 보이네
風來高枕滿(풍래고침만) 바람은 베개 높이 가득 불어오나
人到小橋稀(인도소교희) 작은 다리 건너는 사람도 없구나
寂寂看花處(적적간화처) 홀로 고요히 꽃을 보고 있노라니
閑雲下翠微(한운하취미) 산 중허리 아래 구름도 한가하네
偶入方壺境(우입방호경) 우연히 방장의 경계 들어가 보니
無端洗俗心(무단세속심) 끝없이 속된 마음 깨끗이 씻기네
溪圍雙砌響(계위쌍체향) 계류는 두 섬돌을 돌돌돌 감돌고
竹覆一墻陰(죽부일장음) 대숲은 온 담장에 그늘 드리웠네
地淨寧容唾(지정영용타) 깨끗한 땅이라 어찌 침 뱉으리요
軒幽可着吟(헌유가착음) 정자 그윽하니 노래 절로 나오네
塵冠彈未了(진관탄미료) 갓에 앉은 먼지 털어내기도 전에
高樹有嘲禽(고수유조금) 새가 높은 나무에서 조롱을 하네
世故違芳約(세고위방약) 세상일 때문에 좋은 약속 어기어
經春始叩扉(경춘시고비) 새봄 다 지나서 사립문 두드렸네
笑談開寸抱(소담개촌포) 담소 나누며 작은 회포 풀어보고
愁恨破重圍(수한파중위) 쌓인 근심과 한을 깨트려 보노라
境遠塵常絶(경원진상절) 속세 멀어 티끌조차 끊어진 이곳
心閑事亦稀(심한사역희) 마음 한가하여 일 또한 드물다네
臨溪仍待月(임계잉대월) 냇가에 나와 달 뜨기를 기다리니
雲外暮鐘微(운외모종미) 구름 너머 저녁 종소리 은은하네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는 송순의 고종사촌동생으로 10살 연하였다. 송순의 고모가 바로 양산보의 어머니였다. 양산보는 스승 조광조가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자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맑고 깨끗하며 시원하다'는 뜻을 담아 소쇄원을 조성하였다.
송순은 또 지정(池亭) 이윤공(李允恭, 1489~1571)의 초대를 받고 월산리 지정(池亭)에 들러 '월산이상사윤온이국청작(月山李上舍允溫移菊請酌)'이란 시를 지었다. 이윤온과 이윤공은 형제로 보인다.
월산리상사윤온이국청작(月山李上舍允溫移菊請酌)
월산의 상사 이윤온이 국화를 옮겨와 술을 청하다
野老有佳期(야로유가기) 시골 늙은이에게 좋은 때 있어
移花開竹扉(이화개죽비) 옮겨 온 꽃 대사립에 피어나네
挽衫要客醉(만삼요객취) 손님 옷 당기며 취하기 바라니
深淺兩心知(심천량심지) 두 사람의 마음 깊이를 알겠네
주인과 손님 두 사람이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정담을 나누는 정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소박한 풍류와 따뜻한 우정이 느껴지는 시다.
지정은 이윤공이 담양군 월산면 월산리 장재마을에 세운 정자다. 정자 이름이 곧 이윤공의 호다. 이윤공은 중종 때 안당(安塘)의 천거로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송순 등과 교유하면서 지냈다. 이윤온(李允溫)은 1525년(중종 20)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二等)으로 합격했다. 이윤공이 창건한 지정은 조일전쟁 때 불타버리고, 지금의 정자는 그의 10대손 이경엽이 1848년에 중건한 것이다.
송순은 505수의 한시를 남겼다. 한시 '어부(漁父)', '야중즉사(夜中卽事)', '산야영회(山夜詠懷)'도 감상해보자. '어부(漁父)'는 칠언율시와 오언율시 각각 한 수가 전한다.
어부(漁父)-송순
秋江百里正平虛(추강백리정평허) 백 리 기인 가을 강은 잔잔하고 고요한데
泛泛輕舠聽所如(범범경도청소여) 둥둥 뜬 거룻배 가는 곳 가만히 들어보네
莫學群兒爭笑餌(막학군아쟁소이) 사람들이여 낚싯밥에 다투어 웃지 마시라
渭翕竿下不歸魚(위흡간하부귀어) 위수가에 모인 낚싯대엔 물고기 안문다네
조정에서 기묘사화를 직접 목격한 송순이 정의로운 세상을 바라면서 당시의 세태를 풍자한 시다. 낚시 바늘을 달지 않고 위수(渭水)에 낚싯대를 드리운 것을 비웃지 말라는 것이다.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중국 위수에서 빈 낚시로 세월을 낚았다는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송순은 은근히 자신을 강태공에 비유하고 있다.
어부(漁父)-송순
皓髮滄浪叟(호발창랑수) 호호 백발 머리의 창랑 노인이
斜陽三尺竿(사양삼척간) 석양에 석자 낚싯대를 드리웠네
跡與鷗鳥沒(적여구조몰) 발자췬 갈매기와 함께 사라졌고
心共雲海寬(심공운해관) 마음은 운해처럼 너그러워졌네
長風萬里舟(장풍만리주) 거센 바람에 멀리 떠가는 배는
出入輕波蘭(출입경파란) 가벼운 물결에도 흔들리고 있네
志願不在魚(지원부재어) 바라는 바 물고기에 있지 않으니
何地非吾安(하지비오안) 어디인들 내가 편하지 않으리오
강호자연에 묻혀 안분자족하는 삶의 경지를 읊고 있는 시다. '창랑(滄浪)'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재상이자 대시인 굴원(屈原)의 시 '어부사(漁父词)'의 마지막 구절 '滄浪之水淸兮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창랑의 물결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세상에 바른 도가 행해지면 나아가 벼슬을 하고, 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물러나 은거한다.'는 뜻이다. 북송(北宋)의 시인 소순흠(蘇舜欽)은 쉬저우(蘇州)에 정자를 짓고 굴원의 '어부사' 싯구를 빌려 그 이름을 창랑정(滄浪亭)이라고 하였다. 시인은 은근히 자신을 굴원의 '어부사'에 나오는 노인에 비유하고 있다.
야중즉사(夜中卽事)-밤에 느낀 대로(송순)
渚宿舟人半夜喧(저숙주인반야훤) 강가에 사는 어부 한밤중에 시끄러워
遙知急雨沒江濆(요지급우몰강분) 멀리 소나기 쏟아지니 물가 잠겼겠네
波聲遠駕南陵外(파성원가남릉외) 물결소리에 먼 남쪽 언덕을 가는 수레
兼送山窓喚客魂(겸송산창환객혼) 산창으로 보내 나그네의 넋 불러 오다
'야중즉사'는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란 뜻으로, 생각나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시상을 전개한 시다. 강가에서 사는 어부는 멀리서 소나기가 내리는 것을 보면 한밤중에 나가보지 않아도 물가가 잠겼음을 안다는 것이다. 멀리 남쪽 언덕을 넘어가는 수레를 보고 나그네의 넋을 불러오고 싶다는 것에서 시적 화자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에는 중의적인 의미도 있다. 멀리서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은 훈구파 척신들이 일으킨 기묘사화나 을사사화, 먼 남쪽 언덕을 가는 수레는 유배를 가는 사림파 선비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산야영회(山夜詠懷)-산에서 밤에 감회를 읊다(송순)
林梢寒月報幽櫺(림초한월보유령) 나무끝에 걸린 차가운 달은 창문에 어리고
夜靜天高淡臭聲(야정천고담취성) 고요한 밤에 하늘은 높아 분위기 소슬하네
百慮空來心始定(백려공래심시정) 온갖 근심 헛되이 일어나다 마음 진정되니
精神從此向全淸(정신종차향전청) 이로부터 정신은 온전히 맑디 맑아만 가네
차가운 달이 뜬 밤 산에서 마음에 떠오르는 감회를 읊은 시다. 시적 화자는 강호에 묻혀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은일자(隱逸者)다. 달 밝은 고요한 밤 산중에서 온갖 근심 다 버리니 정신이 맑고 깨끗해진다는 심경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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