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순이 면앙정을 증축하자 임억령과 고경명은 '면앙정삼십영(俛仰亭三十詠)'을 지었다. '면앙정삼십영'은 면앙정 주변에 펼쳐진 추월취벽(秋月翠壁), 용구만운(龍龜晩雲), 몽선창송(夢仙蒼松), 불대낙조(佛臺落照), 어등모우(魚登暮雨), 용진기봉(湧珍奇峰), 금성묘애(錦城杳靄), 서석청람(瑞石晴嵐), 금성고적(金城古跡), 옹암고표(甕巖孤慓), 죽오청풍(竹塢淸風), 평교제설(平郊霽雪), 원수취연(遠樹炊煙), 광야황도(曠野黃稻), 극포평사(極浦平沙), 대추초가(大秋樵歌), 목산어적(木山漁笛), 석불소종(石佛疎種), 칠수귀안(漆水歸雁), 혈포효무(穴浦曉霧), 신통수죽(神通脩竹), 산성조각(山城早角), 이천추월(二川秋月), 칠곡춘화(七曲春花), 후림유조(後林幽鳥), 청파도어(淸波跳魚), 사두면로(沙頭眠鷺), 간곡홍료(澗曲紅蓼), 송림세경(松林細逕), 전계소교(前溪小橋) 등 30경을 각인각색으로 노래한 장편 연작시이다. 김인후와 박순도 '면앙정삼십영'을 지었다고 하는데, 면앙정에는 임억령과 고경명의 편액만 걸려 있다.
임억령의 '면앙정30영' 편액
'면앙정삼십영' 중 제1영 '추월취벽(秋月翠壁)'은 임억령, 김인후, 고경명이 오언절구로 읊었고, 박순은 칠언절구로 지었다. 먼저 식영정의 주인 임억령의 '추월취벽'을 감상하도록 하자.
추월취벽(秋月翠壁)-추월산의 푸른 절벽(임억령)
皎皎蓮初出(교교연초출) 갓 피어난 연꽃마냥 맑고도 밝으면서
蒼蒼墨未乾(창창묵미건) 마르지 않은 먹물처럼 짙푸르기도 해
淸光思遠贈(청광사원증) 맑은 달빛 멀리까지 보내주고 싶지만
飛鳥度應難(비조도응난) 새도 날아서 이곳 넘기는 어려울 거야
시인은 추월산에 떠오른 달을 바라보면서 푸르고 흰, 맑고 시원한 달빛을 멀리 보내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다. 하지만 절벽이 너무 높아 가로막고 있음을 안타까와하고 있다.
'추월(秋月)'은 추월산(731m)을 가리킨다. 추월산은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과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면앙정에서도 보인다. 전라남도 5대 명산이자 전라남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추월산 아래에는 푸르른 담양호가 가을 하늘처럼 누워 있다. 추월산이라는 이름도 보름달이 산에 닿을 듯 드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추월산은 숲이 우거져 있고,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마치 성을 쌓은 듯이 둘러 있어 멋진 경치를 연출한다. 가을에는 추월산 암봉 아래 일대의 단풍이 아름답다.
박상의 문하에서 송순과 동문수학한 임억령은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했으며, 곤궁한 백성들 편에 섰던 선비였다. 그는 시문을 좋아하고 사장(詞章)에 탁월했으므로 호남의 사조(詞祖), 호남 시학의 스승으로 일컬어졌다.
임억령의 사위가 바로 김성원이다. 김성원의 당숙이 누구냐 하면 환벽당(環碧堂)의 주인 사촌(沙村) 김윤재(金允梓, 1501∼1572)다. 임억령과 김성원, 고경명, 정철은 식영정(息影亭) 사선(四仙)으로 불릴 정도로 친교가 잦았던 사람들이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이다. 정철은 김성원, 고경명과 친구처럼 지냈고, 임제와도 친하게 지냈다.
임억령의 저서에는 '석천집(石川集)'이 있다. 그의 묘소는 전라남도 해남 마산면 장촌리에 있다.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과 해남의 석천사(石川祠), 해촌사(海村祠), 창평의 성산사(星山祠)에 배향되었다.
추월취벽(秋月翠壁)-추월산의 푸른 절벽(고경명)
鐵壁上蒼然(철벽상창연) 무쇠 같은 절벽 위에 푸르게 솟은 듯
層嶺尺去天(층령척거천) 층층 절벽 산봉우리 하늘까지 닿는 듯
秋風衣軟振(추풍의연진) 가을 바람 불어와 옷깃이 팔랑거릴 때
直待桂輪圓(직대계륜원) 둥근 달 곧장 떠오르기를 기다리리라
우뚝 솟은 추월산에 가을 보름달이 뜨기를 기다리겠다는 시정을 읊은 시다. 고경명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의병장이다. 1592년 조일전쟁이 일어나자 고경명은 6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錦山)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아들 인후(仁厚),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 등과 함께 전사했다. 조일전쟁 당시 고경명이 말을 타고 가면서 지었다는 '마상격문(馬上檄文)'은 최치원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만큼이나 유명하다.
고경명은 조선의 누정시인(樓亭詩人) 중 으뜸이라고 할 만큼 누정제영(樓亭題詠)을 많이 남겼다. 그의 문집에는 '제봉집(霽峰集)', 저서에 '유서석록(遊瑞石錄)' 등이 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광주 포충사(褒忠祠), 금산 성곡서원(星谷書院)과 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추월취벽(秋月翠壁)-추월산의 푸른 절벽(김인후)
秋月山名好(추월산명호) 가을달뫼 추월산 이름도 아름다운데
蒼蒼削四圍(창창삭사위) 깍아지른 봉 푸르게 사방을 에웠구나
溪雲莫謾起(계운막만기) 계곡에 구름 공연히 일으키지 말거니
夜夜輾淸輝(야야전청휘) 밤마다 맑은 빛 돌고 돌기 때문일세
가을 보름달이 뜬 추월산의 아름다운 야경을 노래한 시다.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난 김인후는 조선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성리학자(性理學者)이자 전라도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에 선정된 대철학자이다. 그는 이항(李恒)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는 한편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인후의 학설은 훗날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제자에는 정철, 변성온(卞成溫), 기효간(奇孝諫), 조희문(趙希文), 오건(吳健) 등이 있다.
김인후의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그는 1796년(정조 20)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다. 후에 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兼領慶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추월취벽(秋月翠壁)-추월산의 푸른 절벽(박순)
鐵作蒼崖立半天(철작창안입반천) 푸른 벼랑은 쇠로 만든 듯 하늘에 우뚝하고
層城雲日望依然(층성운일망의연) 구름 개어 높은 성을 바라보니 의연도 하네
他年倘得從公後(타년당득종공후) 이 다음에 혹시라도 당신 뒤를 따르게 되면
萬丈丹梯尙可緣(만장단제상가연) 만길의 붉은 사다리를 함께 오를 수 있으리
임억령과 고경명, 김인후는 '추월취벽'을 오언절구로 지었는데, 박순만 칠언절구로 읊었다. 추월산의 웅장한 모습을 묘사한 뒤 다음에 혹시 송순의 뒤를 따르게 된다면 선계로 함께 오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읊었다. 그는 존경하는 송순과 함께 조정에서 벼슬살이 하기를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단제(丹梯)'는 '붉은 사다리'로 선경(仙境)에 들어가는 길을 뜻한다. 또는 '붉은 계단'의 뜻으로 조정(朝廷)을 의미하기도 한다.
면앙정에서 바라본 추월산
박순은 광주시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박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눌재 박상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중년에는 이황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도 공부했다. 그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교체기에 사림운동을 이끌면서 명종의 외삼촌이자 훈구파의 대부였던 윤원형을 축출함으로써 조선 역사에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만년에는 이이(李珥), 성혼(成渾)과 깊이 사겼고, 동향의 기대승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박순의 저서에는 '사암집(思菴集)' 7권이 있다. 그는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의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용구만운(龍龜晩雲)-용구산의 저녁 구름(임억령)
有欲曾遭醢(유욕증조해) 욕심 있어 일찍이 젓이 되기도 했었고
誇靈未免燒(과령미면소) 영험함 자랑하다 타는 것 면치 못했네
何如丘壑底(하여구학저) 어찌해 골짜기에 은거하는 사람들처럼
長以野雲韜(장이야운도) 오래도록 저 구름 속에 숨어만 있는고
불대낙조(佛臺落照)-불대산의 낙조(임억령)
古殿唯餘佛(고전유여불) 옛 불전에는 불상만 남았고
生臺未見僧(생대미견승) 생대엔 스님도 안 보이는데
年年啣落照(연년함낙조) 해마다 낙조 머금은 모습은
髣髴是傳燈(방불시전등) 법등을 전하려는 것 같구나
시적 화자는 퇴락한 산사에 불상만 쓸쓸히 남아 있는데, 그 불상에 비친 낙조는 마치 법등을 전하는 신도들의 행렬 같다고 읊고 있다. 불대산의 저녁 노을을 회고조로 노래한 시이다.
'생대(生臺)'는 사람의 왕래가 드문 곳에 생반을 올려놓고 짐승들이 자유롭게 먹을 수 있도록 설치한 대를 말한다. '전등(傳燈)'은 불교에서 법등을 받아 전하는 의식, 또는 불법의 전수를 뜻한다.
불대낙조(佛臺落照)-불대산의 낙조(고경명)
石屛銜落照(석병함낙조) 병풍 같은 바위 낙조를 머금으니
西望正悠悠(서망정유유) 서쪽을 보면 정말 아득하기만 해
鴉背金爭閃(아배금쟁섬) 까마귀 등 뒤로 햇빛 번쩍이는데
波光永欲流(파광영욕류) 빛나는 저 물결 멀리 흐르려나봐
이 시도 평이해서 별도의 풀이가 필요없다. '불대(佛臺)'는 불대산(佛臺山, 602m)으로 담양군 대전면에 있는 산이다. 불대산을 불태산(佛台山)이라고도 부른다.
어등모우(魚登暮雨)-어등산의 저녁비(임억령)
急雨橫林壑(급우횡림학) 소낙비가 숲 골짜기에 쏟아지니
溪流沒石稜(계류몰석릉) 시냇물에 바위 모서리 잠기지만
潛波誠可樂(잠파성가락) 물속에 있는 게 참 즐거울 테니
高處不須登(고처불수등) 높은 곳에 오를 필요 없을 게야
어등산에 내리는 저녁비를 읊은 시다. 소나기로 불어난 급류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시인의 호방한 시정이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하늘 끝까지 올라가 내려올 줄 모르면 위험하다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당시 조선은 사화로 인해 많은 사림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아마도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경계하는 뜻을 담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 황하(黃河)에 사는 황어(黃魚)가 해마다 3월이면 강줄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데, 용문(龍門)의 급류를 통과해야만 용이 된다는 고사와 연관지어 시상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어등모우(魚登暮雨)-어등산의 저녁비(고경명)
山雨明殘日(산우명잔일) 산 비로 지는 해는 밝기도 하건만
山前雨氣昏(산전우기혼) 산 앞은 비올 기세에 어두워지니
依然畫未就(의연화미취) 그림 같은 풍경을 이루진 못해도
水墨半邊痕(수묵반변흔) 못다 그린 수묵화 그 모습이로세
'어등(魚登)'은 어등산(魚登山, 338m)을 말한다. 어등산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정동에 있다. 잉어가 용으로 변하여 승천하였다는 전설에서 산 이름이 유래한다.
용진기봉(湧珍奇峰)-용진산의 기이한 산봉우리(임억령)
和氏抱奇璞(화씨포기박) 진기한 옥을 손에 넣은 화씨는
徒勞三獻君(도로삼헌군) 임금께 바치느라 고생만 세 번
不如深韞櫝(불여심온독) 귀한 것은 상자 깊이 감추라고
夫子有云云(부자유운운) 공자께서도 말씀하지 않았던가
임억령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등으로 조광조,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등 학식이 높고 재능이 뛰어난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가슴 아파했다. 용진산의 기이한 산봉우리를 노래하면서 함부로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중용되지도 못한 채 도리어 고초를 겪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현명한 임금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양명(揚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은근히 담고 있다.
'화씨(和氏)'는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변(卞) 땅에 살았던 화(和)를 말한다. 그는 형산(荊山)에서 진기한 옥돌을 구하여 임금에게 바친 화씨지벽(和氏之壁) 고사의 주인공이다. 화씨는 옥돌을 먼저 초나라 여왕(廬王)에게 바쳤는데 가짜라 하여 왼쪽 발을 잘렸고, 그 다음에 무왕(武王)에게 바쳤더니 또 옥이 아니라 하여 오른쪽 발마저 잘렸다. 마지막으로 문왕(文王)에게 바쳤더니 마침내 진기한 보옥으로 인정받았다는 고사가 있다. '용진산(湧珍山)'의 '진(珍)' 자에서 화씨지벽 고사를 떠올린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다.
용진기봉(湧珍奇峰)-용진산의 기이한 산봉우리(고경명)
贊皇空好石(찬황공호석) 괜스레 기이한 바위만 좋아했던 찬황은
珍怪費幽探(진괴비유탐) 진기한 것 찾는답시고 헛심만 썼는가봐
坐對雙尖秀(좌대쌍첨수) 저 뾰족한 두 봉우리 마주 대하고 보니
知公寶不貪(지공보불식) 그대여 보배를 탐하지 않아도 되겠구려
'용진(湧珍)'은 용진산(湧珍山, 聳珍山, 349m)을 가리킨다. 용진산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북방 50리쯤 본량면과 임곡면에 걸쳐 있다. '찬황(贊皇)은 당나라 무종(武宗) 때 재상을 지낸 이덕유(李德裕, 787~849)의 출생지 지명이자 호다.
금성묘애(錦城杳靄)-금성산의 저녁놀(임억령)
野遠茫難辨(야원망난변) 아득한 들도 분간하기 어려운데
干雲散作霏(간운산작비) 자욱한 구름 안개비처럼 흩날려
落霞添五色(낙하첨오색) 저녁 노을 오색으로 물들어가니
欲補舜裳衣(욕보순상의) 성상의 옷을 기우기라도 하려나
나주 금성산(錦城山, 451m)의 저녁놀을 노래한 시다. '금성(錦城)'은 금성산과 중국의 사천성(四川省)의 금성((錦城)을 가리키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적 화자는 금성산을 바라보면서 비단으로 유명한 사천성의 금성을 떠올리고 있다. 중국의 금성은 사천성의 성도(成都) 곧 성도성(成都成)을 가리키는데, 비단으로 유명하여 금관성(錦官城)이라고도 부른다. 시적 화자는 고대하던 미인 곧 어진 임금이 출현하는 날 오색 비단옷을 지어 바치고 싶은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기묘사화 때의 중종, 을사사화 때의 명종은 어진 임금이 아니라는 것이다.
금성산은 전라남도 나주시 경현리에 있는 산으로 면앙정에서는 직접 보이지 않는다. 옛날에는 이 산의 모습이 한양의 삼각산(三角山)과 같다고 하여 나주를 소경(小京)이라고 불렀다.
금성묘애(錦城杳靄)-금성산의 저녁놀(고경명)
明滅難全見(명멸난전견) 나타났다 사라져 온전히 보이지도 않고
陰晴少定姿(음청소정자) 흐렸다가 개이니 일정한 모양도 없건만
賦歸眞不淺(부귀진불천) 그대 전원 돌아가려는 뜻 참 깊었던 건
山色遠尤奇(산색원우기) 멀리 저 산 빛이 너무 신기해 그랬구려
금성산의 아름다운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송순이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에 묻혀 사는 참뜻을 알겠다는 것이다. '부귀(賦歸)'는 은퇴해서 고향으로 돌아가 사는 것을 말한다.
관수정에서 바라본 광주호와 무등산
서석청람(瑞石晴嵐)-서석대의 아지랑이(임억령)
廋骨蘬然橫(수골규연횡) 앙상한 뼈처럼 높이도 솟구쳐서
石之次玉者(석지차옥자) 옥에 버금가는 봉우리인 듯한데
日蒸精氣升(일증정기승) 햇살 받아 오르는 저 묘한 기운
非是晴嵐也(비시청람야) 맑게 어리는 아지랑이 아니던가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명산을 유람하고 산행시나 산행기를 남기는 것이 유행이었다. 임억령도 무등산에 올라 봄날의 아지랑이와 저녁놀에 물든 서석대의 황홀한 풍경을 바라보았음이 틀림없다. 무등산의 정기를 아지랑이로 표현한 구절이 새롭게 느껴진다.
'서석(瑞石)'은 광주와 담양, 화순에 걸쳐 있는 무등산(無等山, 1,187m)의 정상 천왕봉 남서쪽 기슭에 있는 서석대(瑞石臺)를 말한다. 광주의 진산 무등산은 천왕봉과 남동쪽의 규봉(圭峰), 서석대와 남서쪽의 입석대(立石臺)가 그 비경을 자랑하고 있다. 서석대는 석양이 비치면 수정처럼 빛난다 하여 일명 수정병풍(水晶屛風)이라고도 불린다. 둘째 구의 '옥'은 바로 '수정'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서석청운(瑞石晴雲)-서석대의 맑은 구름(고경명)
矗矗飄香篆(촉촉표향전) 뾰족한 산마루에 안개가 나부끼니
叢叢插玉筓(총총삽옥계) 빽빽한 숲은 옥비녀를 꽂은 듯 해
地靈偏愛寶(지령편애보) 땅의 신도 보배로 여긴 듯 아끼니
雲氣晝常迷(운기주상미) 낮에는 언제나 구름으로 가려주네
서석대에 맑은 구름이 끼었을 때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이다. '향전(香篆)'은 불을 붙여 그 탄 양으로 시간을 재는 전자체(篆字體) 모양의 향이다. 여기서는 안개를 표현했다.
금성고적(金城古跡)-금성산성의 옛 자취(임억령)
埋沒古城堞(매몰고성첩) 옛 성벽은 다 허물어지고
至今流水聲(지금유수성) 지금은 흐르는 물소리 뿐
聖朝無一事(성조무일사) 태평성대라 아무 일 없어
高下入新耕(고하입신경) 모두 밭갈이 시작했구나
시적 화자는 허물어진 금성산성에 올라 이천골(二千谷)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백성들이 어진 임금을 만나 태평성대를 누릴 것을 바라고 있다. 임억령의 경세제민(經世濟民), 애민위민(愛民爲民) 사상이 드러나 있는 시다.
금성고적(金城古跡)-금성산성의 옛 자취(고경명)
蔓草狌鼯竄(만초성오찬) 덩굴 숲으로 날다람쥐 몰려 다니고
斜陽睥睨明(사양비예명) 저물녘 햇빛은 비스듬히 비치는데
客來空弔古(객래공조고) 길손은 괜스레 옛 일을 슬퍼하다가
詩壘入呑幷(시루입탄병) 시상도 거기에 빠져들고 말았구나
금성산성에서 벌어졌던 비극적인 사건들을 생각하면서 감상에 젖는 시다. '조고(弔古)'는 조일전쟁, 동학농민혁명 때 금성산성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고 슬퍼한 것이다.
'금성(金城)'은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와 용면 도림리에 걸쳐 있는 금성산성(사적 제353호)을 말한다. 삼국시대 또는 고려시대에 축성되었다고 한다. 금성산성은 산성산(603m)과 연대봉, 노적봉 등의 능선을 따라 쌓은 석성으로 전체 길이는 7km에 달한다.
옹암고표(甕巖孤慓)-옹성산 독바위의 우뚝한 모습(임억령)
天今已出甕(천금이출옹) 하늘은 이미 독을 만들어 놓았는데
地奚不生泉(지해불생천) 땅에서 어찌 샘물이 나지 않겠는가
昭代多和氣(소대다화기) 태평한 세상에 온화한 기운 넘치니
思爲吏部眠(사위이부면) 관리들도 잠 편히 잘 수 있을 게야
옹성산의 독바위에 샘물을 담아 목마른 백성들을 구원하고 싶다는 애민정신이 담겨 있는 시다. 동시에 임금과 관리들도 덕목을 갖추고 수신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소대(昭代)'는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 태평한 세상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미화한 것이다.
옹암고표(甕巖孤慓)-옹성산 독바위의 우뚝한 모습(고경명)
壯拔雲根碧(장발운근벽) 저 푸르른 바위는 우뚝 솟구쳐서
高撑日轂紅(고탱일곡홍) 붉은 해를 높이 떠받치고 있구나
流霞應滿腹(유하응만복) 맛 좋은 유하주 배부르게 마시고
一醉俯鴻濛(일취부홍몽) 취한 김에 티끌세상 굽어 봐야지
옹성산 독바위처럼 높은 곳에 고고하게 서서 속세를 내려다보겠다는 대장부의 호연지기를 읊은 시다. '일곡(日轂)'은 해바퀴, 태양의 뜻이다. '유하(流霞)'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신선들이 즐겨 마셨다는 유하주(流霞酒)를 말한다. '홍몽(鴻濛)'은 하늘과 땅이 아직 갈리지 않은 상태이다.
'옹암(甕巖)'은 전남 화순군의 이서면과 동복면에 걸쳐 있는 옹성산(甕城山, 573m)에 있는 바위이다. 독바위, 술독바위라고도 한다. '운근(雲根)'은 돌이라는 뜻이다.
죽오청풍(竹塢淸風)-대나무 언덕의 시원한 바람(임억령)
傳聞孤竹子(전문고죽자) 듣자하니 고죽 임금의 자식은
餓死西山谷(아사서산곡) 서산 골에서 굶주려 죽었다지
眞箇聖之淸(진개성지청) 참으로 성인의 청렴이란 것은
使人膚起粟(사인부기속) 사람들을 놀래킬 정도네 그려
시적 화자는 상(商)나라의 충신으로 지조와 절의를 굳게 지킨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상기하면서 그러한 성인들을 본받겠다는 다짐을 노래하고 있다. 임억령의 시에는 고대 중국의 역사적 사실들이 시적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그가 중국 고대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죽자(孤竹子)'는 중국 주(周)나라 때 고죽군(孤竹君)의 아들 백이와 숙제를 말한다. 주 무왕(武王)이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상나라를 칠 때 백이와 숙제는 말고삐를 잡고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만류하였다. 무왕이 간청을 들어주지 않자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숨어 살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서산(西山)'은 곧 수양산을 가리킨다.
죽곡청풍(竹谷淸風)-댓골의 시원한 바람(고경명)
瀏瀏風生壑(류류풍생학) 바람은 산들산들 산골에서 일어나고
蒼蒼竹擁簷(창창죽옹첨) 대나무는 푸릇푸릇 처마까지 가렸네
餘涼來午枕(여량래오침) 선선한 기운 낮잠 자는 데 스며드니
淸籟洗蒸炎(청뢰세증염) 맑은 바람 찌는 더위 식혀 주는구나
한여름에 낮잠을 자는데 댓골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더위를 식혀 준다. 얼마나 시원할까? 공감이 가는 시다. 고경명의 시는 소박하고 평이해서 어렵지 않다. 담양은 대숲이 많아 곳곳이 댓골이다.
평교제설(平郊霽雪)-들판에 개인 눈(임억령)
天上玉龍鱗(천상옥룡린) 하늘에 그 옥룡 비늘 같은 눈이
散落人間世(산락인간세) 인간 세상에 흩어져 떨어지는데
北闕賀班催(북궐하반최) 궁궐에선 하례하라 재촉 하지만
南山柴戶閉(남산시호폐) 남산 사립문은 굳게 닫혀 있구나
시적 화자는 면앙정 앞 들판에 내린 눈을 하늘에 사는 옥룡린이 인간 세상에 귀양을 온 것으로 그 상서로움을 미화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어 북궐(北闕)로 상징되는 임금과 벼슬아치들은 서설(瑞雪)이라고 야단법석을 떨지만, 남산(南山)으로 상징되는 가난한 백성들은 폭설로 고립무원의 막막한 처지가 되었음을 한탄하고 있다. 백성들의 고통은 곧 위정자들의 잘못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시다.
평교제설(平郊霽雪)-들판에 개인 눈(고경명)
野雪平如拭(야설평여식) 들판의 눈은 반듯이 닦아 놓은 듯
銀濤萬里長(은도만리장) 만 리로 이어진 은빛 물결 같구나
吟壇酣戰白(음단감전백) 시객들은 솜씨 겨루느라 한창이고
獵騎擁牽黃(엽기옹견황) 사냥하는 말은 사냥개를 데려가네
면앙정 앞 들판에는 눈이 하얗게 내렸는데, 문객들은 시를 읊고 있고, 한편에서는 사냥을 나가는 풍경을 노래한 시다. '감전(酣戰)'은 '전투나 경기 등에서 한창 치열하게 싸움'의 뜻이다.
고경명의 '면앙정30영' 편액
원수취연(遠樹炊煙)-먼 숲에 이는 밥짓는 연기(임억령)
漠漠蒼烟色(막막창연색) 밥 짓는 연기인지 푸르스름한 게
依依遠樹間(의의원수간) 저 멀리 숲 사이로 피어오르는데
田家不堪苦(전가불감고) 농가는 그 고통 견디기 어려워도
人作畵圖看(인작화도간) 딴 사람에겐 그림 속 풍경이라네
멀리 나무들 사이로 피어오르는 촌가의 밥짓는 연기는 전원적이면서도 서정적인 풍경이다. 나그네들은 전원적이고 서정적인 풍경을 한 폭의 동양화처럼 바라본다. 하지만 시인은 그 이면에 지방 수령들의 가렴주구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이 있음을 알고 있다. 나그네는 곧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지방 수령이나 고달픈 농촌 현실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시인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탐관오리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의 정점이 바로 임금이라는 인식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던 것 같다.
원수취연(遠樹炊煙)-먼 숲에 이는 밥짓는 연기(고경명)
樹色分村勢(수색분촌세) 수풀 빛깔과 마을이 구별되는 때에
煙生萬戶炊(연생만호취)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 피어나는데
朝昏工變態(조혼공변태) 아침 저녁 그 모습 수시로 바뀌어도
濃淡摠相宜(농담총상의) 진하든 옅든 모두 서로 어울리구나
농가에서 밥 짓는 연기가 솟아오르는 풍경을 낭만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다. 고경명의 시는 평이해서 더 이상 설명할 것이 없다. 고경명의 시는 저녁 연기를 바라보면서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을 떠올린 임억령의 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광야황도(曠野黃稻)-넓은 들판의 황금물결(임억령)
昭代無湯旱(소대무탕한) 태평한 시대엔 큰 가뭄도 없으니
蒼生喜屢豊(창생희루풍) 거듭 풍년 들어 백성들도 기쁜데
前村酒價賤(전촌주가천) 앞마을 술집에는 술값도 싼 터라
擊壤和豳風(격양화빈풍) 격양가와 빈풍 시만 부르네 그려
시적 화자는 넓은 들판의 황금물결을 바라보면서 백성들이 가뭄도 들지 않고 풍년이 계속되어 저렴한 술값으로 상징되는 태평성대를 누리며 격양가(擊壤歌)와 빈풍 시를 부르는 그런 세상을 상상하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은 그런 태평성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시인의 애민정신이 잘 드러난 시이다.
'격양(擊壤)'은 고대 중국 도당(陶唐)의 요(堯)와 우(虞)나라의 순(舜) 시절 농부들이 땅을 두들기면서 태평성대를 노래한 데서 나온 말이다. '빈풍(豳風)'은 '시경(詩經)' 가운데 국풍(國風)의 편명으로 빈(豳) 지방 농민들의 세시풍속과 농촌의 정경을 노래한 것이다. 농사짓는 어려움을 노래한 농부가이다.
광야황도(曠野黃稻)-넓은 들판의 황금물결(고경명)
沃壤彌南極(옥양미남극) 남쪽으로 탁 트인 기름진 토지에
黃雲一望齊(황운일망제) 누런 벼들 한 눈에도 가지런하네
田家多喜氣(전가다희기) 농가의 기쁨이 하 많기도 많아서
秋社賽豚蹄(추사새돈제) 돼지다리 놓고 제사 지내는가 봐
너른 들판에 누렇게 익은 벼들을 바라보면서 풍년을 노래하고 있는 시다. 누렇게 익은 벼를 '황운(黃雲)'으로 비유한 표현이 재미있다. 임억령이 농사짓는 어려움을 노래했다면 고경명은 황금들판의 풍요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극포평사(極浦平沙)-먼 포구의 모래사장(임억령)
沙色細如篩(사색세여사) 체로 거른 듯이 고운 모래 빛깔
月明江上時(월명강상시) 강물엔 밝은 달빛까지 비치는데
深思蒸作飯(심사증작반) 저 모래로 밥 지을 수만 있다면
一慰遠村飢(일위원촌기) 먼 시골 기근도 위로 될 터인데
시적 화자는 먼 포구의 고운 모래사장과 강 위에 달이 뜬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면서 문득 그 모래가 쌀이어서 그것으로 밥을 지어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위정자들의 학정과 가렴주구로 굶주림으로 신음하는 백성들의 참상이 드러나 있는 시다. 백성들에 대한 시인의 측은지심이 느껴진다.
극포평사(極浦平沙)-먼 포구의 모래사장(고경명)
浩浩沙如海(호호사여해) 바다 같이 넓고 넓은 저 모래사장
天淸浦影寒(천청포영한) 하늘이 맑아도 물가는 서늘하도다
抨弓豪興發(평궁호흥발) 활 당기며 호탕한 흥취 돋고 보니
千里暮鵰盤(천리모조반) 저물녘 멀리 나는 수리 있네 그려
멀리 떨어진 드넓은 모래사장을 바라보면서 활을 쏘는 대장부의 호탕한 기개를 노래하고 있다. 문신이었지만 무인으로서의 기개를 가지고 있었던 고경명다운 시다.
'극포(極浦)'는 옥천산(玉泉山)에서 발원한 여계천(餘溪川)과 용천산(龍天山)에서 내려온 백탄(白灘)이 만나는 이수를 휘돌아 나가면 거기에 포구가 있다는 말인 듯하다. 포구의 정확한 이름과 위치는 알 수 없다.
대추초가(大秋樵歌)-대추리의 나뭇꾼 노래소리(임억령)
自是陳勞事(자시진로사) 일이 힘들다는 소리만 있으니
安知詠大平(안지영대평) 어이 태평한 노래를 읊조릴까
誰能和此曲(수능화차곡) 이런 곡에 누가 화답할까마는
林表有啼鸎(임표유제앵) 숲에는 꾀꼬리만 울고 있구나
대추 마을 뒷산에서 들려오는 나뭇꾼의 노래소리를 들으면서 태평가를 아는 사람도 없고, 그 노래에 화답하는 사람도 없어 꾀꼬리만이 울음으로 화답할 뿐인 농촌의 현실을 노래한 시다. 시적 화자는 태평가를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궁핍하고 비참한 농촌 현실을 안타까와하면서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위정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담양부사 시절 임억령은 위정자들의 가혹한 전정(田政, 토지세), 군정(軍政, 군역세), 환정(還政, 환곡이자세) 등 삼정(三政)의 문란과 온갖 명목의 부역 동원으로 아사 직전의 극한상황으로 내몰린 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가슴 아파했다. 그는 늘 백성들의 편에 서서 고민했다. 그는 담양부에 가뭄이 들어도 그것을 자신의 부덕 탓으로 돌릴 만큼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한 목민관이었다.
대추초가(大秋樵歌)-대추리의 나뭇꾼 노래소리(고경명)
籬落繞平楚(리락요평초) 너른 벌로 둘러싸인 촌락들에는
樵蘇同四隣(초소동사린) 그 누구 할 것 없이 나무꾼이니
勞歌時互答(노가시호답) 가끔 노동요로 서로 화답하는데
一一畫中人(일일화중인) 저 마다 그림 속 신선만 같구나
나무꾼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나무를 하는 모습을 낭만적인 선경으로 그리고 있는 시다. '이락(籬落)'은 집이나 일정한 공간의 둘레에 담 대신에 풀이나 나무 따위를 얽어서 경계를 지어 막은 구조물이다. '평초(平楚)'는 평야, 평지에 있는 숲이다. '초소(樵蘇)'는 나무하고 풀을 베는 일, 시골사람의 삶의 방식을 말한다.
'대추(大秋)'는 면앙정이 있는 봉산면 대추리(大秋里)를 말한다. 대추리에는 대추(大秋), 도고(都古), 곡정(曲亭) 등 3개 마을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대추 마을을 가리키는 듯하다.
목산어적(木山漁笛)-목산 어부의 피리소리(임억령)
無譜又無調(무보우무조) 악보도 없고 곡조도 없건만
聲如布穀鳥(성여포곡조) 소리는 뻐꾸기 울음만 같아
遊魚自驚猜(유어자경시) 놀던 물고기 이에 놀랐는지
深入波間藻(심입파간조) 물에 뜬 수초에 숨어 버리네
목산 어부가 부는 소박한 피리소리가 뻐꾸기 울음처럼 들려온다. 그런데, 물고기는 어부의 피리소리를 듣고는 도리어 수초 사이로 숨어버린다. 왜일까? 물고기는 그 어부가 세상의 뜻을 버리고 자연에 동화되어 안빈낙도하면서 세월을 낚는 어부가 아니라 강호에 숨어산다는 소문을 내서 고결함을 인정받아 이름을 낚으려는 어부, 즉 뻐꾸기 은사(隱士)로 보였던 것이다. 물고기는 자신도 그런 뻐꾸기 은사로 여겨질까봐 물 속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물고기는 바로 시인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어적(漁笛)'은 어부의 피리소리이다. '포곡(布穀)'은 '뻐꾹'의 한자식 표현으로 '포곡조'는 '뻐꾹뻐꾹 우는 새' 곧 '뻐꾸기'를 말한다.
목산어적(木山漁笛)-목산 어부의 피리소리(고경명)
漁子臥橫笛(어자와횡적) 한가로이 부는 어부의 피리 소리
曲中無一愁(곡중무일수) 가락에는 시름 걱정도 전혀 없네
煙霜平野暮(연상평야모) 저물녘 들판엔 하얀 서리 내리고
風雨小溪秋(풍우소계추) 가을 냇가엔 비바람만 불어오네
목산 어부의 피리소리를 들으면서 시골의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풍경을 노래한 시다. 임억령이 쓴 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목산(木山)'은 담양군 월산면(月山面)의 옛 이름이다. 월산면은 담양군 북서부에 있는 면으로 면소재지는 월산리이다. 북서부에는 노령산맥의 영향으로 장군봉(558m), 병풍산(822m), 투구봉(535m) 등이 솟아 있고, 동남부의 하천 연안에는 평야가 분포한다.
석불소종(石佛疎種)-석불에서 울리는 외로운 종소리(임억령)
十載爲朝士(십재위조사) 조정 벼슬살이만 십여 년
聞鐘夢每驚(문종몽매경) 늘 종소리에 놀라 깨는데
如今林下睡(여금임하수) 이제 초야에 머무는 터라
何似昔年聲(하사석년성) 어찌 이전 소리만 같을까
조정에서의 십 년 벼슬살이를 버리고 귀거래(歸去來)를 생각하고 있는 시적 화자는 산사의 범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현실적인 문제로 이를 실천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자신을 깨닫고 깜짝깜짝 놀란다. 하지만 모든 것을 정리하고 마침내 조정을 떠나 강호에서 유유자적하는 날이 오면 석불에서 울리는 종소리도 그윽하고 운치있게 들리리라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미래의 귀거래를 상상하면서 그때의 심회를 읊은 것이다.
임억령은 1557년 담양부사로 내려와 2년 동안 재직하다가 스스로 물러나 성산동 지금의 담양군 남면 지곡리의 식영정에 머물면서 수신과 시작(詩作)으로 세월을 보냈다. 이 시는 그가 담양부사로 내려오기 4년 전에 지은 것이다. 담양부사로 내려오기 오래전부터 임억령은 이미 귀거래를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불(石佛)'은 담양군 고서면 금현리 노채 마을에 있던 금현리사지 불상으로 추정된다. 금현리사지에는 현재 영은사(靈隱寺)라는 사찰이 들어서 있다. 영은사 대웅전에는 영은사석조여래좌상(靈隱寺石造如來坐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 영산전에는 영은사석불좌상(靈隱寺石佛坐像,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5호)이 있다. 금현리사지에서 범종을 치면 그 소리가 면앙정까지 들렸을 것이다. '소종(疎鍾)'은 이따금 들려오는 아련한 종소리, '조사(朝士)'는 조정의 벼슬아치, '임하(林下)'는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있는 곳을 말한다.
석불소종(石佛疎種)-석불에서 울리는 외로운 종소리(고경명)
蕭寺煙蘿外(소사연라외) 무성한 넝쿨 밖 한적한 절간이건만
霜鍾數杵疏(상종수저소) 절구소리처럼 가끔 새벽종 울릴 제
十年憂國念(십년우국념) 십 수 년 나라 걱정했던 그 마음이
深省定何如(심성정하여) 정녕 어떠한지 깊은 반성하는구나
고경명의 우국충정이 담겨 있는 시다. '연라(煙蘿)'는 안개가 끼고 덩굴풀이 무성한 숲, 깊숙한 은거처나 수도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송강정 앞을 흐르는 증암천
칠수귀안(漆水歸雁)-칠수로 돌아오는 기러기(임억령)
遵著非謀稻(준저비모도) 물가 따르는 건 모이 때문 아니고
啣蘆爲避矰(함노위피증) 갈대 물어 화살 피하려 한 것이라
南歸不獨汝(남귀불독여) 너 혼자 남쪽에서 가는 건 아니나
莫道見何曾(막도견하증) 전에 본 이곳 일일랑 말하지 말게
기러기는 신의(信義)와 지혜(智慧), 전령사(傳令使)를 상징하는 새다. 시인은 기러기가 신의와 지혜가 있는 새일 뿐만 아니라 전령사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이곳에서 본 일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다. 무엇을 말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강호에 숨어 살면서 신선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소문내지 말라는 것이다. 임금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당부다. 헛된 이름을 추구하는 뻐꾸기 은사는 결코 되지 않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드러나 있는 시다.
'함로(啣蘆)'는 갈대를 입에 무는 것이다. 기러기는 먹이가 풍부한 강남으로 날아왔다가 하북(河北)으로 돌아갈 때쯤 살이 너무 쪄서 높이 날 수 없는 까닭에 사람에게 잡힐까봐 두려워 입에 갈대를 물고 주살을 피한다고 한다.
'칠수(漆水)'는 칠천(漆川)으로 광산현(지금의 광산구) 북쪽 30리에 있다. 담양과 창평의 물이 합쳐져 서쪽으로 흐른 물이 곧 칠천이다. 칠천은 벽진(碧津), 생압도(生鴨渡), 선암도(仙岩渡), 병화노진(幷火老津)을 거쳐 극락강(極樂江)으로 흘러들어 간다.
칠천귀안(漆川歸雁)-칠천을 떠나가는 기러기(고경명)
霜信初橫塞(상신초횡색) 서리 내려 북쪽으로 간 터에
蕭蕭水國秋(소소수국추) 물가 가을 쓸쓸할 만도 하네
隨陽自南去(수양자남거) 남쪽에서 볕 찾아 떠난 거니
未必稻粱謀(미필도량모) 꼭 곡식 때문만은 아닌 거라
가을이 되어 북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담담하게 읊고 있는 시다. '상신(霜信)'은 기러기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가을이 깊어 북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는 곧 서리가 내릴 소식을 미리 전해 준다는 것이다. '서리', '남쪽'과 '볕', '북쪽, '곡식' 등은 중의적으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다.
혈포효무(穴浦曉霧)-혈포의 새벽 안개(임억령)
蒼起川中霧(창기천중무) 푸르른 안개 내에서 일어나는데
紅沈屋角暾(홍침옥각돈) 붉은 햇살 처마 끝에 물드는구나
輕風須掃去(경풍수소거) 산들바람이 저 안개 걷어 버리고
短景恐催昏(단경공최혼) 눈부신 아침 햇살 못볼까 두려워
짙은 물안개에 가려 아침 햇살은 간신히 처마 끝에만 물든다. 안개는 가벼운 바람에도 쓸려가겠지만 아름다운 아침 햇살을 보지 못할까봐 두렵다는 시정을 노래하고 있다. '안개'는 '혼돈의 세계', '미지의 세계', '간신배' 등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안개'는 강호에서 자연과 벗이 되어 살아가는 시인의 시야를 가리는 방해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는 순수 서정시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혈포(穴浦)'는 칠천에서 동쪽으로 갈라진 곳에 있는 포구 이름이다. '단경(短景)'은 잠깐 사이에 사라지는 아름다운 아침 햇살을 뜻한다.
혈포효무(穴浦曉霧)-혈포의 새벽 안개(고경명)
橐籥長川曉(탁약장천효) 풀무질한 듯 긴 내에 새벽이 오니
空濛大塊噓(공몽대괴허) 대지는 자욱한 안개를 뿜어 대는데
澆書時俯檻(요서시부함) 새벽 술 마시며 난간에서 굽어보니
一笑混元初(일소혼원초) 온통 태초의 시절인가 껄껄 웃노라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한바탕 웃는 대장부의 호연지기를 읊은 시다. 시 전편에서 시인의 호방한 기개가 느껴진다. 아마도 이런 무인 기질이 있었기에 고경명은 조일전쟁 때 의병장이 되어 나라를 구하러 달려 나갔을 것이다.
'탁약(橐籥)'은 풀무이다. '공몽(空濛)'은 '(안개비 따위가 내려) 희미하다, 뿌옇다'의 뜻이다. '요서(澆書)'는 새벽에 술 마시는 것을 말한다. '혼원(混元)'은 천지나 우주의 뜻이다.
소쇄원의 죽림
신통수죽(神通脩竹)-신통사의 긴 대나무(임억령)
曾是給孤園(증시급고원) 예전 부처 모신 곳이던 이 절간이
今爲脩竹村(금위수죽촌) 이젠 대숲 무성한 마을 되고 보니
有心威鳳待(유심위봉대) 내 맘 알 점잖은 봉황 기다렸건만
無緖暮鴉喧(무서모아훤) 괜스레 저녁 까마귀만 시끄럽구나
예전에 절이었던 곳에 신성한 대숲이 우거졌는데, 기다리는 봉황은 오지 않고 까마귀떼만 시끄럽게 우짖고 있음을 안타까와하는 시정을 읊은 시다. 대나무는 지조와 군자, 선비 등을 상징한다. 유교에서는 대나무가 성스러운 인물의 출현을 예고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도교에서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에는 붉은색의 대나무가 자라는데, 그 대나무에는 큰 구슬 크기의 열매가 열리고, 봉황과 난새가 날아와 놀며, 신선들이 찾아와 즐긴다. 봉황은 오상(五常)을 두루 갖추었기에 덕치를 베풀어 태평성대를 가져올 성군(聖君)의 출현을 상징한다.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깃들고,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 절터에 대나무숲이 우거졌으니 이제 봉황이 출현할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시인은 경세제민(經世濟民)에 뜻을 둔 선비로서 성군을 고대하고 있다. 하지만, 기다리던 성군은 오지 않고, 소인배들만 시끄럽게 우글거린다는 것이다.
전제왕조정권 시대에 성군을 기다리는 것은 백년하청이다. 차라리 무능한 왕과 탐관오리들의 목을 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 올바른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학사상에 철저하게 물든 선비들은 봉건적 모순의 근본적 원인인 왕의 목을 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사상적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통(神通)'은 면앙정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신통사(神通寺)를 가리킨다. 신통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급고원(給孤園)'은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준말로 사원(寺院)을 뜻하는 말이다.
심통수죽(心通脩竹)-심통사의 긴 대나무(고경명)
千畝梢雲竹(천묘초운죽) 천 이랑 대숲은 구름에 닿을 듯해
心通古寺墟(심통고사허) 심통사라는 옛적의 절터 있다네
風吹兼雨洗(풍취겸우세) 바람 불어대고 비에 씻기면서도
長護地仙居(장호지선거) 신선의 거처 오래도 지키는구나
절이 없어진 자리에 대숲만 무성하다는 것이다. 세월이 무상함을 읊은 시다. '심통(心通)'은 고려 말까지 존재했던 심통산 심통사(心通寺)를 말한다. 심통산은 그 후 신통산(神通山)으로 와전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산성조각(山城早角)-산성마을의 이른 화각소리(임억령)
嫋嫋風吹野(뇨뇨풍취야) 바람은 벌판에 산들산들 불고
嗚嗚角起樓(오오각기루) 화각 소리 성루에서 들리는데
海邊聲一槩(해변성일개) 변방 해안에서 듣던 그 소리라
老耳不禁愁(노이불금수) 늙은이 귀엔 시름만 이는구나
시적 화자의 귀에 산성에서 군사들 훈련하는 화각(畫角)소리가 벌판에 불어오는 바람결에 들린다. 그런데, 화각소리는 변방 바닷가에서 듣던 귀에 익은 그 소리다. 시인은 화각소리를 듣고는 문득 왜구들이 남해안에 침입하여 노략질하던 악몽이 떠올라서 시름이 인다. 고향 생각에 시름이 이는 것일 수도 있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이 드러난 시다.
1515년 부산포, 내이포, 염포 등 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대마도의 왜인들과 연합하여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일으켰다. 1555년에는 왜인들이 전라도 남부 지역에 침입하여 약탈과 살인, 납치를 자행한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났다. 임억령은 왜구들에 의해 국토의 남단이 유린된 것에 대해 매우 치욕스럽게 여겼으며, 언젠가는 왜구들을 한칼에 평정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산성(山城)'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면앙정과 관련해서는 먼저 담양군 용면 도림리와 금성면 금성리의 금성산성을 생각할 수 있다. 아니면 담양군 무정면 오봉리의 담주산성(潭州山城)일 수도 있고,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와 도곡면 내대곡의 비봉산성(飛鳳山城)일 수도 있다. '각(角)'은 화각(畵角)을 말하며, 모양은 죽통(竹筒)과 비슷하다. 대나무 또는 가죽으로 만드는데 표면에 채색 그림이 있으므로 화각이라 부른다. 소리가 애절하고 우렁차서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거나 대오를 정돈할 때 쓴다. 왕이나 관리가 행차할 때도 쓴디. '뇨뇨(嫋嫋)'는 바람이 솔솔 부는 모양, '오오(嗚嗚)'는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뜻한다.
산성조각(山城早角)-산성의 이른 호각소리(고경명)
小風吹澹月(소풍취담월) 산들바람 불어오고 달빛은 밝은데
寒角調山城(한각조산성) 새벽 산성에서 호각소리 들려오네
不管蜂衙鬧(불관봉아뇨) 속세의 시끄러운 소릴랑 상관 않고
藜床睡到明(여상수도명) 침상에서 날이 밝도록 잘 뿐이로세
산성에서 들려오는 호각소리를 들으면서 번잡한 속세에서 초탈하고 싶은 심경을 읊고 있다. 세상일에 상관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겠다는 의지가 드러나 있는 시다.
'한각(寒角)은 차가운 호각소리, 긴박한 호각소리를 말한다. '봉아(蜂衙)'는 '벌이 알을 낳고 먹이와 꿀을 저장하며 생활하는 육각형 모양의 집'이다. '여상(藜床)'은 '명아주로 엮어 만든 침대'로 소박한 잠자리를 뜻한다.
이천추월(二川秋月)-이천에 비친 가을 달(임억령)
由來千里共(유래천리공) 천리를 비추는 가을 달이기에
不獨二川圓(불독이천원) 이천에서만 둥근 게 아니건만
皓首江湖客(호수강호객) 강호를 유람하는 백발 나그네
憑欄自未眠(빙란자미면) 난간 의지한 채 잠 못 이루네
소슬한 가을 밤 이천에 비친 둥근 달이 쓸쓸하다. 시적 화자인 백발의 나그네는 강호를 유람하다가 이천에 비친 둥근 달을 바라보면서 난간에 기대어 잠을 못 이루고 있다. 가을 달밤에 고독한 나그네의 심사를 읊은 시다.
임억령은 58세 때인 1553년 10월에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6월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벼슬에서 물러났다. 관찰사 직무에 충실하지 않고 병조리를 이유로 방안에 들어앉아 시를 짓고 읊는 것만 좋아한다는 것이 탄핵 사유였다. 이것으로 보아 임억령은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시 짓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그가 강원도관찰사에서 물러난 직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탄핵을 받은데다가 건강도 좋지 않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우울한 심사를 읊은 것으로 보인다.
이천추월(二川秋月)-이천의 가을 달(고경명)
露洗秋空淨(로세추공정) 이슬이 가을 하늘 말끔히 씻어
川分月體同(천분월체동) 하나의 달이 냇물엔 두 개라네
浩然乘灝氣(호연승호기) 그런 맑은 기운 넉넉히 받고서
長嘯冷光中(장소냉광중) 찬 달빛에 휘파람 길게 부누나
대장부의 호연지기를 읊은 시다. '호연(浩然)'은 '넓고 성대한 모양, 정대(正大)하고 강직한 모양, 마음이 넓고 뜻이 아주 큰 모양'이다. '호기(灝氣)'는 대자연의 기운이다.
'이천(二川)'은 두 시내를 말하는데, 구체적인 이름은 알 수 없다. 옥천산에서 발원한 대교천(大橋川)과 용천산에서 흘러내린 북천(北川)이 만나는 죽록천(竹綠川)일 수도 있고, 용천산에서 흐르는 백탄(白灘)과 서석산에서 발원한 증암천(甑岩川)의 합류일 수도 있다. 옥천산에서 흐르는 여기연(女妓淵)이 완사계(浣沙溪)와 합쳐져 면앙정 앞에서 백탄과 합류하는데, 이천은 곧 완사계와 백탄일 수도 있다.
칠곡춘화(七曲春花)-칠곡의 봄꽃(임억령)
不是春工巧(불시춘공교) 봄의 솜씨가 기묘하지 않은가
由來帝杼機(유래제저기) 상제의 베틀에서 나온 듯하니
織成雲錦幛(직성운금장) 아름다운 비단 장막 짜내어서
遙向小亭圍(요향소정위) 멀리 정자 주위까지 둘렀구나
만물이 생동하는 화창한 봄철 아름다운 꽃들이 마치 선녀가 짠 화려한 구름비단처럼 울긋불긋 산에 들에 피었다. 시적 화자는 작은 정자에서 주변에 펼쳐진 황홀한 봄경치를 만끽하고 있다. 우주에 가득한 봄의 생명 기운에 동화된 시인의 정취를 읊은 시이다.
칠곡춘화(七曲春花)-칠곡의 봄꽃(고경명)
七谷中分地(칠곡중분지) 땅은 골짜기져 일곱 굽이 내리는데
三春次第花(삼춘차제화) 봄은 무르익어 꽃들이 차례로 피네
花源迷遠近(화원미원근) 가깝든 멀든 무릉도원처럼 아득하니
何許羽衣家(하허우의가) 신선 사는 곳 어디쯤인지 모르겠네
칠곡의 환상적인 봄경치를 노래한 시다. 시인은 봄꽃이 만발한 칠곡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처럼 아름답다고 읊고 있다. 화려하고 낭만적인 봄의 정취가 느껴지는 시다.
'삼춘(三春)'은 '(음력으로) 봄의 삼 개월, (음력의) 삼월, 세 번의 봄'이다. '화원(花源)'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뜻한다. '우의(羽衣)'는 신선이 입었다는 예상우의(霓裳羽衣)를 말한다.
'칠곡(七曲)'은 '일곱 굽이'란 뜻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기대승의 '면앙정기'에 나오는 '이 삼십리 사이에 여섯 골짜기가 보이고', 임제의 '면앙정부'에 나오는 '용이 서린 듯한 일곱 굽이'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림유조(後林幽鳥)-뒷동산 숲에 사는 새(임억령)
鸚以能言泄(앵이능언설) 앵무새는 말할 줄 알아서 갇히고
鷄緣啄粟烹(계연탁속팽) 닭은 곡식 먹어서 솥에 삶기지만
而今集於苑(이금집어원) 자네들은 지금 숲에 모여 있으니
嗟爾得全生(차이득전생) 오호 온전한 삶을 누리게 생겼네
앵무새는 말을 할 줄 알아서 새장에 갇히고, 닭은 귀한 곡식을 먹어 없애서 솥에 삶기는 신세다. 어설픈 재주나 능력 때문에 해를 당하고, 벼슬길에 나아가 봉록을 먹은 것이 화근이 되어 목숨까지 잃는 지경에 이름을 풍자한 것이다. 하지만 뒷동산 숲속에 깃들어 사는 새들은 그럴 위험이 없기에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뒷동산 숲에 사는 새는 바로 시인 자신을 가리킨다. 시인은 잔재주도 버리고 벼슬의 녹을 먹는 것도 버려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리게 되었음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식영정(息影亭)의 주인이다. 식영(息影)은 휴영(休影)과 식적(息迹)의 준말로 매우 철학적인 말이다. '그림자조차 쉬게 한다', '그림자조차 끊는다'는 말이다. 식영정신은 바로 허상을 버리고 사물의 본성을 깨닫는 성(誠)에 이르는 것이다. 식영정신을 구현한 사람은 곧 성인(聖人)이다. 불가의 부처, 도가의 진인(眞人)이다. 시인은 성(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식영정신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후림유조(後林幽鳥)-뒷동산의 새(고경명)
窈窕煙林遠(요조연림원) 안개 자욱한 저 먼 숲 속이라도
知還擇木深(지환택목심) 깊은 나무 택해 돌아갈 줄 아네
好音纔可聽(호음재가청) 새들 노래 소린 들을 만했는데
飛去杳難尋(비거묘난심) 멀리 날아갔는지 찾기 어렵구나
더 이상 풀이가 필요없는 시다. '요조(窈窕)'는 '요조하다, (장식, 풍채가) 아름답다, (궁궐, 산골짜기 따위가) 깊숙하고 그윽하다, 여인이 얌전하고 곱다, 유심(幽深)하다'의 뜻이다.
청파도어(淸波跳魚)-맑은 물에서 뛰는 물고기(임억령)
跳躍非魚樂(도약비어락) 물고기는 즐거워 뛰는 게 아니라
人言避獺驅(인언피달구) 수달이 쫒는 걸 피하려 그런다지
何如隨雨電(하여수우전) 어찌하면 저 번개 속 비를 닮아서
萬里泳江湖(만리영강호) 만 리 강호 헤엄쳐 갈 수 있을까
맑은 물에서 뛰는 물고기는 즐거워서 뛰는 것이 아니라 수달을 피하기 위해서 뛴다는 것이다. 여기서 '청파(淸波)'는 험난한 벼슬길을 뜻한다.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라는 말이 있다. 물이 너무 맑으면 숨을 곳이 없어 물고기가 살기에 험난하다는 뜻이다. 물고기는 시인 같은 선비, 수달은 국정을 농단하는 권신(權臣)을 상징한다. 물고기가 살려면 수달보다 빨라야 한다. 권신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번개 속의 비처럼 빨리 강호로 돌아가야 한다는 시인의 절박한 심정이 드러나 있다. 강호로 돌아가겠다는 시인의 결심이 엿보이는 시이다. 물고기가 뛰는 모습에서 벼슬살이의 험난함을 떠올린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다.
청파도어(淸波跳魚)-맑은 물에서 뛰는 물고기(고경명)
細浪搖斜日(세랑요사일) 잔잔한 물결에 석양 빛 일렁이고
潛鱗潑剌時(잠린발랄시) 물고기 물위로 뛰어 오를 때인가
相忘應共樂(상망응공락) 다른 건 잊고서들 즐기는 듯한데
濠上未全知(호상미전지) 물 밖에 나로선 알 수가 없네그려
물고기가 물 위로 뛰어오르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잠린(潛鱗)'은 '물속에 깊이 잠겨 있는 물고기'이다. '발랄(潑剌)'은 '유쾌하고 활기가 있음'의 뜻이다. '공락(共樂)'은 '다른 사람과 함께 즐김'의 뜻이다.
사두면로(沙頭眠鷺)-모래톱에서 조는 해오라기(임억령)
烏向田中啄(오향전중탁) 까마귀는 밭에서 먹이 쪼고 있는데
渠又沙上蹺(거우사상교) 저 놈은 또 모래 위에 졸고 있다가
人驚遠飛去(인경원비거) 사람들에게 놀라서 저 멀리 날더니
直割碧山腰(직할벽산요) 곧장 푸른 산허리 가로질러 가누나
까마귀는 밭에서 부지런히 모이를 쪼고 있는데, 해오라기는 모래톱에서 한 발로 선 채 졸고 있다가 사람들에게 놀라서 산허리를 가로질러 둥지로 날아간다. 해오라기가 있을 곳은 모래톱이 아니라 푸른 산속 즉 강호자연이라는 것이다.
까마귀로 상징되는 벼슬아치들은 벼슬살이하느라 분주한데, 해오라기로 상징되는 시인은 벼슬길에 들었지만 벼슬살이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다가 사화 같은 큰 풍파가 닥치자 시인은 놀라서 벼슬을 버리고 강호로 돌아왔음을 밝히고 있다. 사대부들이 벼슬길에 나아가 경세제민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결국 그것은 해오라기의 모래톱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한 시이다.
사두면로(沙頭眠鷺)-모래언덕에서 조는 해오라기(고경명)
玉立圓沙岸(옥립원사안) 모래언덕에 서있는 저 해오라기
風標炯自如(풍표형자여) 풍채도 환하고 태연자약하건만
聯拳睡一霎(연권수일삽) 발 모은 채 순간 졸기라도 하면
寒影不驚魚(한영불경어) 물고기도 그림자에 놀라지 않지
이 시는 그대로 풀이할 수도 있지만, 중의적으로도 읽을 수 있는 시다. '옥립(玉立)'은 '(절개, 지조 따위가) 곧다, 모양이 미끈하고 곧다, 고상하다'의 뜻이다. '풍표(風標)'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사람의 모양새'를 말한다. '자여(自如)'는 '자유자재하다'의 뜻이다. '연권(聯拳)'은 해오라기 무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양을 말한다. '일삽(一霎)'은 '삽시간, 순식간, 잠깐 동안'이다.
'사두(沙頭)'는 '모래톱'의 뜻이다. 모래톱의 위치는 면앙정 바로 앞을 흐르는 여계천(지금의 오례천) 근처가 아닌가 생각된다.
간곡홍료(澗曲紅蓼)-시냇가의 붉은 여뀌꽃(임억령)
秋江傳石黛(추강전석대) 가을 강에 석대를 퍼뜨렸나
水蓼染成紅(수료염성홍) 물여뀌 물들어 온통 발가네
畫出無窮景(화출무궁경) 그림 같은 경치가 한없으니
方知帝筆工(방지제필공) 아 상제의 그림 솜씨로구나
미인의 눈썹 단장에 쓰는 석대를 퍼뜨린 것처럼 가을 강에 물여뀌의 꽃이 발갛게 피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온 산에 들에 불이 붙은 듯 단풍이 화려한 그림 같은 경치는 신의 솜씨로 그린 듯 절경임을 노래하고 있다. 가을날의 황홀하게 아름다운 풍경을 찬탄한 시이다.
'간곡(澗曲)'은 어느 곳의 시냇가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홍료(紅蓼)'는 '붉은 여뀌꽃'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여뀌 또는 여뀌꽃을 통해서 가을철의 계곡이나 물가의 풍경을 노래하곤 했다. '석대(石黛)'는 고대인들이 눈썹을 그리는 염료로 사용했던 청흑색 광석이다.
환벽당 가는 길
간곡홍료(澗曲紅蓼)-시냇가의 붉은 여귀꽃(고경명)
澗水悲鳴處(간수비명처) 시냇물 졸졸 흐르는 곳에
新霜着冷花(신상착냉화) 찬 꽃에 무서리 어렸구나
夕陽紅一抹(석양홍일말) 한 줄기 석양이 붉디 붉어
秋色襯餘霞(추색친여하) 여뀌에 노을빛 묻혔나보다
여뀌꽃이 노을빛 물들어서 붉은색이 되었다는 표현이 참신하다. '간수(澗水)'는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다. '일말(一抹)'은 한 번 바르거나 지우는 정도라는 뜻으로, 얼마 되지 않는 정도를 나타내는 말이다. '추색(秋色)'은 가을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단풍의 빛깔을 말한다.
송림세경(松林細逕)-송림의 오솔길(임억령)
落葉何須掃(낙엽하수소) 왜 낙엽을 쓸어야만 하는지요?
蒼苔不必除(창태불필제) 이끼도 꼭 없애야만 하는가요?
高門萬馬散(고문만마산) 부귀한 집 좋은 말도 놓아 두고
幽逕一筇徐(유경일공서) 오솔길엔 지팡이 하나면 그 뿐!
동양의 문학에서 소나무는 지조와 절개, 장수, 신선과 은둔을 상징한다. 송림 사이로 뻗은 오솔길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최고의 이상향이자 안식처에 이르는 길이다. 낙엽도 떨어져 있지 않고, 이끼도 끼어 있지 않는 길이라면 선경에 이르는 오솔길이 아니다. 다만 대궐 같은 집이나 천리마로 상징되는 화려한 벼슬살이는 다 필요없고, 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시인은 지팡이 하나만 들고서 오솔길 입구에 서 있다. 오솔길의 끝은 말하지 않았지만 식영에 이르는 길임을 알 수 있다.
'고문(高門)'은 중국 한나라 때 미앙궁(未央宮) 안에 있던 고문전(高門殿)을 말한다. 기원전 200년에 세워진 미앙궁은 산시성(陕西省) 시안시(西安市) 장안성(長安城) 서남쪽에 있다. 미앙궁은 장락궁(長樂宮)과 함께 한대의 2대 궁전 중 하나다. 부귀한 집을 상징하는 말이다. '만마(萬馬)'는 천리마, 좋은 말이다.
송림세경(松林細逕)-송림의 오솔길(고경명)
路轉松陰出(로전송음출) 길이 솔 그늘을 돌고 돌아 나가니
微風杖屨淸(미풍장구청) 산들바람에 거니는 맛도 상쾌한데
香塵烏帽底(향진오모저) 온 몸에 은은한 솔향기 풍겨 오니
誰解此閑行(수해차한행) 느긋한 이 흥치를 그 누가 알리오
시적 화자는 송림의 오솔길을 거닐며 느끼는 흥취를 읊고 있다. 강호자연에 묻혀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가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다.
'장구(杖屨)'는 지팡이와 짚신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오모(烏帽)'는 은자(隱者)나 거사(居士)가 쓰던 검은 모자이다. '한행(閑行)'은 한가로이 걷는 것이다.
전계소교(前溪小橋)-앞 시내의 작은 다리(임억령)
渺渺前溪上(묘묘전계상) 저기 저 앞 멀리 시냇물 위에
看如一字橫(간여일자횡) 한 일자 외나무다리 보이는데
村翁莫輕走(촌옹막경주) 노인네여 섣불리 달리지 마소
失足恐欹傾(실족공의경) 발 헛디뎌 기우뚱할까 두렵소
앞 시내에 작은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자칫하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기 쉽다. 시인은 그러니 섣불리 건너지 말라고 노인에게 당부하고 있다. 시인의 애민정신이 담겨 있는 시이다.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외나무다리는 강호자연의 세계와 험난한 벼슬길을 가르는 경계이다. 시인은 강호자연의 세계에서 외나무다리 건너 풍파가 난무하는 험난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허명을 얻기 위해 강호에 은거하는 척하던 촌옹(村翁)이 조정의 부름을 받자 험난한 벼슬길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섣불리 벼슬길에 들어섰다가 화를 당할 수도 있으니 촌옹에게 조심하라는 것이다.
'전계(前溪)', '소교(小橋)'는 어디에 있는 곳인지는 알 수 없다. '묘묘(渺渺)'는 '수면이 한없이 넓은 모양, 작은 모양, 먼 모양'을 뜻한다. '의경(欹傾)'은 '기울어짐'의 뜻이다.
전계소교(前溪小橋)-앞 시내의 작은 다리(고경명)
沙路明橫野(사로명횡야) 모랫길은 들판 질러 환하게 트이고
枯槎跨淺灣(고차과천만) 앞 시내엔 마른 등걸까지 놓였으니
趁虛人去盡(진허인거진) 왔던 사람들 모두 다 가버린 뒤에도
扶杖聽潺湲(부장청잔원) 물소리 들으려 지팡이 짚고 섰다네
손님들을 개울 건너 다 보내고 물소리를 들으려고 외나무다리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심경을 읊은 시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나 할까!
'고차(枯槎)'는 베어져서 말라 있는 나무를 말한다. 여기서는 시내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가리킨다. '진허(趁虛)'는 '중국 송대 농촌시장'으로 '시장의 모임에 나아감'이란 뜻도 있다. '잔원(潺湲)'은 '물이 천천히 흐르는 모양, 눈물이 흘러내리는 모양'이다. '조용하고 잔잔하다'의 뜻이다.
임억령, 고경명, 김인후, 박순은 '면앙정삼십영'을 통해서 공통적으로 탐승경(探勝景), 자연관조(自然觀照), 탈속(脫俗), 무욕(無欲), 지조(志操), 태평성대(太平盛代) 등의 미의식을 구가하였다. 이들은 뜻을 잃었을 때는 호남의 강호자연에 묻혀 학문을 닦고 성찰의 시간을 보내다가 뜻을 얻으면 조정의 관직에 나아가 덕치(德治)로써 태평성대를 이루리라는 포부를 품고 있었다.
'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도정자기행] 송순의 면앙정을 찾아서 7 (0) | 2017.02.22 |
---|---|
호남 제일 가단 담양 면앙정을 찾아서 6 (0) | 2017.02.22 |
[남도정자기행] 송순의 면앙정을 찾아서 4 (0) | 2017.02.21 |
[남도정자기행] 송순의 면앙정을 찾아서 3 (0) | 2017.02.21 |
[남도정자기행] 송순의 면앙정을 찾아서 2 (0) | 2017.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