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3년 송순은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는 공로로 표리일습(表裏一襲, 안팎의 옷감 한 벌)을 하사받았다. 선산도호부사로 재직 중 송순은 이황을 비롯해서 영남의 많은 문인, 학자들과도 교류하였다. 그해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면 예강리에 있는 황기로(黃耆老)가 지은 매학정(梅鶴亭)을 유람했고, 9월에는 송희규(宋希奎)와 함께 낙강(洛江)을 유람했다. 12월에는 부인상을 당했다.
담양 면앙정
1554년에는 지례현감(知禮縣監) 노신(盧愼)을 방문했다. 그해 황윤헌(黃允獻)의 무진정(無盡亭)을 유람하고, 선산부(善山府) 영봉리(迎鳳里)에 우거하면서 7월에 시고(詩稿)를 기록하였다. 1555년에는 선산부 백성들이 송순의 선정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주었다. 1556년 송순은 고조부(高祖父) 노송당(老松堂) 송희경(宋喜慶)이 쓴 '노송당일본행록(老松堂日本行錄)'을 구해서 서(序)를 지었다. 송희경은 대마도를 정벌한 다음해인 1420년 일본에 회례사로 파견되었다. 이 책은 한때 분실되었으나 양산보가 남원의 선비 오상의 집에서 되찾아 왔다.
1558년 송순은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이때 기대승이 휴가를 얻어 고향인 광산군(光山郡)에 내려와 있었다. 기대승은 송순의 부탁으로 '면앙정기(俛仰亭記)'를 지었다. 송순의 나이 66세, 기대승의 나이 32세 때였다.
기대승은 고경명, 임제와 함께 송순의 제자였다. 또, 기대승은 송순, 김인후와 함께 정철의 스승이었다. 정철은 9살 연상의 기대승으로부터 주희(朱熹)의 '근사록(近思錄)'을 배웠으며, 특히 선비로서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행동거지들을 익혔다.
기대승의 '면앙정기' 비
기대승의 '면앙정기' 편액
면앙정기(俛仰亭記)-기대승
俛仰亭。在潭陽府之西錡谷之里。今四宰宋公之所營也。余嘗從公遊於亭之上。公爲余道亭之故。 徵余文爲記。余觀亭之勝。最宜於曠。而又宜於奧。柳子所謂遊之適。大率有二者。亭可兼而有也。亭東山曰霽月峯。峯支向乾方。稍迤而遽隆。勢如龍首之矯亭正直其上。爲屋三間。四虛。其西北隅。極陟絶。屛以密竹。蕭槮悄蒨。東階下廓之。構溫室數楹植花卉。繚以短垣。循峯眷延于左右谷。長松茂樹。惹瓏以交加。與人煙不相接。逈然若異境焉。憑虛以望。則曠然數百里間。有山焉。可以對而。挹也。有水焉。可以臨而玩也。山自東北而馳。迤遷於西南者。曰瓮巖。曰金城。曰龍泉。曰秋月。曰龍龜。曰夢仙。曰白巖。曰佛臺。曰修緣。曰湧珍。曰魚登。曰錦城。其巖崖之詭麗。煙雲之縹緲。可愕而可嘉。水之出於龍泉者。過府治爲白灘。屈折橫流。汨濦渟洄。發於王川者名曰餘溪。漣漪澄瀅。廻帶亭簏下。合於白灘。蒼茫大野。首起於秋月山下。尾撇於魚登之外。間以丘陵林藪。錯如圖畫。聚落之雜襲。丘求之刻鏤。而四時之景。與之無窮焉。亭之□合幽窅。足以專靜謐之觀。其寥廓悠長。可以開浩蕩之襟。向所謂宜於曠宜於奧者。其不信矣乎。始公之先祖。解官而居于錡。子孫因家焉。亭之舊址。則郭姓者居之。得異夢見衣纓之七。頻來盍簪。謂其家之將有慶。托子於山僧以學書。及其無成而且窮。乃伐其樹而遷其居。公以財貿而獲之。里之人。皆來賀。以郭之夢爲有驗云。斯無乃造物者。蓄靈閟祉。以遺於公耶。公又葉新居于霽月之陽。取其與亭近也。亭之地。得於甲申。亭之起。始於奏巳。後仍類廢。至壬子重營而後。曠如奧如之適。無不盡也。公嘗揭其名亭之意以示客。其意若曰。俛焉而有地也。仰焉而有天也。亭于玆之丘。其興之浩然也。招風月而挹山川。亦足以終吾之餘年也。味斯語也。公之所以自得於俛仰者。蓋可想也。噫。自甲申迄于今四十有餘年。其間悲歡得喪。固有不勝言者。而公之俛仰逍遙者。終不失正。豈不尙哉。余之以托名爲幸。而不敢辭者。意亦有以也。於是乎書. [담양부(潭陽府) 서쪽 기곡(錡谷) 마을에 있는 면앙정은 지금 사재(四宰)로 있는 송공(宋公)이 지은 것이다. 내 일찌기 송공을 따라 면앙정에서 놀았는데, 공은 정자의 유래를 말하면서 나에게 기문을 지어 줄 것을 부탁했다.
전망이 확 트여서 경치가 좋은 면앙정은 유자(柳子, 당나라의 柳宗元)가 말한 '놀기에 적당한 것이 대개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겸하여 갖추었다고 할 만하다. 정자 동쪽의 제월봉(霽月峯)은 가지가 건방(乾方)을 향하여 조금 아래로 내려가다가 갑자기 높이 솟아서 산세가 마치 용이 머리를 들고 있는 듯한데, 정자는 바로 그 위에 세워져 있다. 집을 세 칸으로 만들고는 사방을 텅 비게 하였다. 정자의 서북 귀퉁이는 상당히 가파르고, 좌우에는 대나무가 빽빽하게 병풍처럼 둘러 있으며, 삼나무가 울창하다. 동쪽 뜰 아래를 확 트고는 온실 몇 칸을 짓고, 여러 가지 화초를 심어 놓았으며, 낮은 담장을 빙 둘러쳤다.
봉우리의 등마루를 따라 내려가면 낙락장송과 무성한 숲이 영롱하게 서로 어우러져 있어서 인간 세상과는 다른 별천지(別天地) 같다. 정자에서 멀리 바라보면 수백 리 사이에 산들이 솟아 있어서 마주 대할 수 있고, 물이 있어서 바라볼 수가 있다. 옹암산(瓮巖山), 금성산(金城山), 용천산(龍泉山), 추월산(秋月山), 용구산(龍龜山), 몽선산(夢仙山), 백암산(白巖山), 불대산(佛臺山), 수연산(修緣山), 용진산(湧珍山), 어등산(魚登山), 금성산(錦城山) 등이 동북방에서 달려와서 서남쪽으로 치달려 내려간다. 기암괴석들은 화려하며, 내와 구름이 아득히 끼어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용천(龍泉)에서 나온 물은 읍내를 지나 백탄(白灘)이 되어 꺾여 흐르고 혹은 가로질러 흐르며, 옥천(玉川)에서 나온 넓고 깨끗한 여계(餘溪)는 정자 앞을 지나 백탄으로 흘러든다. 드넓은 들은 추월산 아래에서 시작되어 어등산 밖에 펼쳐져 있는데, 그 사이에는 구릉과 나무숲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져 있다. 마을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밭두둑은 마치 아로새긴 듯하여서 사계절의 경치가 이와 더불어 무궁하게 펼쳐진다.
정자에는 산이 빙 둘러 있고 경치가 그윽하여 고요히 보면서 즐길 수 있다. 정자의 전망은 확 트이고, 멀리 아득히 보여서 호탕한 흉금(胸襟)을 열 수 있다. 앞에서 말한 확 트여서 좋고 아늑하여 좋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처음에 공의 선조(先祖)가 관직을 그만두고 기곡에 자리잡으면서 그 자손들도 이곳에 살게 되었다. 정자의 옛터는 원래 곽씨(郭氏)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곽씨는 일찌기 의관(衣冠)을 갖춘 선비들이 자주 와서 모이는 꿈을 꾸었다. 자기집에 장차 경사가 있을 징조라고 생각한 곽씨는 아들을 산사(山寺)의 승려(僧侶)에게 부탁해서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아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빈궁하게 되자, 곽씨는 그곳에 있는 나무를 베어 버리고 사는 곳을 옮겼다.
송공이 이곳을 사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와서 '곽씨의 꿈이 징험이 있다.'면서 축하하였다. 이것은 조물주가 신령한 곳을 감추어 두고 숨겨 두었다가 공에게 준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면앙정과 가까운 제월봉 남쪽에 새 집을 지었다. 정자의 터는 갑신년(1524년)에 얻었고, 정자를 짓기 시작한 것은 계사년(1533년)이었으며, 그 후 방치되었다가 임자년(1552년)에 이르러 중건하니, 그제서야 확 트인 전망과 멋진 경치가 모두 다 드러나게 되었다.
공은 일찌기 정자의 이름을 지은 뜻을 계시하여 손에게 보여 주었다. '면앙정'의 뜻은 '굽어보면 땅이 있고 우러러보면 하늘이 있는데, 이 언덕에 정자를 지으니, 그 흥취가 호연(浩然)하다. 풍월을 읊고 산천을 굽어보니, 또한 나의 여생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의 말을 음미해 보면 공이 면앙에 자득(自得)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갑신년으로부터 지금까지는 40여 년이 지나면서 슬픈 일과 기쁜 일, 좋은 일과 궂은 일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공이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이 정자에서 소요(消遙)하면서도 끝내 올바름을 잃지 않았으니 어찌 가상하지 않겠는가! 내가 여기에 이름을 넣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 감히 사양하지 못한 것은 또한 이러한 뜻이 있어서였다. 이에 이 글을 쓰노라.]
필자는 '면앙정기'를 쓰게 된 동기로 서두를 시작해서 면앙정의 위치와 모습, 주변의 풍경, 터를 매입해서 정자를 세우기까지의 경위를 쓰고, 마지막으로 송순의 인간됨을 찬양하면서 글을 끝맺고 있다. 기대승은 면앙정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매우 영광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기대승은 1527년 전라도 광산에서 태어났다. 기대승의 집안은 원래 경기도 행주(幸州,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의 명문가였는데,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그의 삼촌 복재(服齋) 기준(奇遵, 1492∼1521)과 조광조가 함께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전라도 광산으로 내려와 터를 잡게 되었다. 기대승은 조상들의 옛 터전인 행주의 고봉현(高峯縣)을 기리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고봉(高峯)으로 지었다.
기대승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길재-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1389∼1456)-김종직-김굉필-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조광조-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기준의 학통을 이어받아 조선조 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주자학자(朱子學者)이다. 그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사상을 계승하여 유교주의적 민본정치인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조광조와 함께 개혁 정책을 추진했던 삼촌 기준을 닮아 기대승도 매우 개혁적이었다.
1558년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한 이황과의 만남 이후 기대승은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입장에서 13년 동안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특히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 보수파의 원로 이황과 진보파의 기수 기대승 사이에 이루어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또는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조선 유학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사칠논변은 명종조 훈구파 척신들의 발호와 전횡으로 언로가 막혀 있던 사림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사림파 선비들은 이(理), 기(氣)에 대한 논쟁으로 이(李), 기(奇)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를 베껴서 서로 돌려 보았다. 그 정도로 사칠논변은 당시 조선의 학계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1560년 송순은 병환으로 벼슬을 잠시 쉬고 고향에 내려왔다가 그해 12월 이황, 임억령과 함께 명나라 사신의 접빈문사(接賓文士)로 추천되었다. 1561년 1월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갔으나 사신이 오지 않자 송순은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었다.
1562년(명종 17) 70세가 된 송순은 정이품 이상의 원로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568년(선조 1)에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찬수한 뒤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듬해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특별 승진한 송순은 이어 정이품 관직인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이 되었다.
송순은 의정부우참찬을 마지막으로 노환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그는 벼슬길에 오른 지 50여 년만에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조(宣祖)는 승지(承旨)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송순에게 의식(衣食)을 공급하게 하였다. 송순은 면앙정에서 강호제현(江湖諸賢)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양성하여 문인들이 그를 신평선생(新平先生)이라 불렀다.
1569년 기대승은 전에 썼던 '면앙정기'를 절반 정도로 축약하여 다시 썼다. 전에 썼던 '면앙정기'는 너무 길어서 현판으로 내걸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1570년(선조 3) 44살의 기대승은 이황의 추천으로 지금의 국립서울대학교 총장격인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제수받았다. 대사성은 학문이 높지 않으면 오를 수 없는 직책이었다. 그런 이황이 그해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기대승은 이황의 부음을 듣자마자 신위를 설치하고 예를 갖춰 곡을 하였다.
1571년 1월 기대승은 도산(陶山)으로 사람을 보내 이황을 조제(弔祭)하였으며, 2월에는 이황의 묘갈명서(墓碣銘序)를 짓고 또 묘지(墓識)를 지었다. 3월 이황의 장례식날 기대승은 제자들과 함께 무등산(無等山) 규봉((圭峯)에 올라 망자의 명복을 빌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죽으면 100일장을 치르는 것이 상례였다. 이날 기대승은 ‘퇴계 선생의 장례날에 문수암(文殊庵)에서’란 제목의 칠언절구 세 수를 지었다.
先生厭世白雲鄕(선생염세백운향) 선생은 세상 싫어 백운향 가셨는데
賤子含哀在一方(천자함애재일방) 천한 제자 슬픔 머금고 이곳에 있네
遙想佳城今日掩(요상가성금일엄) 생각하니 오늘 무덤에 묻히실 텐데
四山氛霧轉茫茫(사산분무전망망) 사산의 궂은 안개 점점 아득해지네
一氣悠悠往又回(일기유유왕우회) 한 기운 유유히 왔다가 또 돌아가니
可堪華屋落泉臺(가감화옥락천대) 화옥에서 황천 떨어짐 어찌 견디랴
山頭不覺中心痛(산두불각중심통) 산머리에서 나도 몰래 마음 아프니
衰白餘生踽踽來(쇠백여생우우래) 쇠약한 몸 백발 여생이 외로와졌네
多病年來效括囊(다병년래효괄낭) 병 많아 근래에는 괄랑을 본받으니
偶隨春色到禪房(우수춘색도선방) 우연히 봄빛 따라 선방에 이르렀네
傷心吾道今墜地(상심오도금추지) 우리 도학 땅에 떨어짐 상심하노니
敬爲何人更畜香(경위하인갱휵향) 누구를 공경하여 향기 다시 기를꼬
기대승은 조선 성리학의 큰 별이 땅에 떨어졌음을 슬퍼하고, 극진한 예로써 조문하고 있다. 그가 평소 이황을 매우 존경했음을 알 수 있다.
'백운향(白雲鄕)'은 흰구름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천제(天帝)나 신선(神仙)이 사는 곳을 말한다. 중의적인 표현으로 쓰였다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가리킬 수도 있겠다. 백운동서원은 1543(중종 38)년에 주세붕(周世鵬)이 경상북도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에 세웠는데,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의 주청으로 명종은 친히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써서 사액(賜額)했다. '괄낭(括囊)'은 주역(周易) 곤괘(坤卦) 육효(六爻)에 나오는 말로 '주머니를 싸맨다.'는 뜻이다. 괄낭의 시대는 자신의 실력을 감추고 침묵을 지켜야 하는 암울한 시대를 말한다.
취가정에서 바라본 무등산
기대승은 무등산 규봉에서 내려와 하루 머물기 위해 들른 식영정에서 제자 고경명을 만났다. 당시 고경명의 부친 고맹영(高孟英)과 장인 김백균(金百鈞)은 척신 이량(李樑)의 당이었다는 이유로 심의겸(沈義謙)과 기대승의 종형 기대항(奇大恒)의 탄핵을 받고 파직된 상태였다. 이량은 이조전랑으로 추천된 아들 이정빈(李定賓)이 상피제(相避制)로 갈리면서 후임으로 부임한 이정빈의 친구 유영길(柳永吉)의 임명을 반대하던 기대승, 윤두수, 박소립(朴素立), 허엽(許曄), 윤근수(尹根壽) 등을 탄핵하려다가 도리어 역공을 당했던 것이다. 이량은 결국 평안도 강계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고, 고맹영도 유배를 당했다. 이 사건으로 고경명도 울산군수로 좌천되었다가 바로 파직되었다.
두 사람의 불편한 만남을 의식했음일까 김성원(金成遠)은 '식영취후여고제봉김상사경생호운(息影醉後與高霽峰金上舍景生呼韻)'이란 제목의 오언사운(五言四韻) 세 수를 지어 읊었다.
식영취후여고제봉김상사경생호운(息影醉後與高霽峰金上舍景生呼韻) - 김성원
식영정에서 술에 취한 뒤 고제봉, 김상사 경생과 더불어 운자를 부르다
物外情難盡(물외정난진) 물외는 정 다하기 어려운데
人間事或乖(인간사혹괴) 인간사는 혹 일도 어긋나네
杯盤賓主共(배반빈주공) 주안상을 주객이 함께 받고
談笑古今偕(담소고금해) 고금의 이야기 함께 나눴네
酒味傾還喜(주미경환히) 술잔을 기울이면 더 기쁘고
歌聲聽卽佳(가성청즉가) 노래 소리 아름답게 들리네
星山此夜會(성산차야회) 별뫼의 오늘 밤 모임에서는
消遣百年懷(소견백년회) 백년의 회포를 풀어 보리라
瑞石纔探歷(서석재탐력) 서석을 겨우 탐승하고 나니
松間意不乖(송간의불괴) 소나무 간에 뜻이 어울리네
酒多情自放(주다정자방) 술 많으니 정도 호탕해지고
吟苦笑兼偕(음고소겸해) 괴롭게 읊으니 웃음 겸했네
長笛風前好(장저풍전호) 대피리소리 바람 앞에 좋고
華燈夜亦佳(화등야역가) 등잔불 밤 되니 아름다워라
棲霞成一宿(서하성일숙) 연하 속에 하룻밤을 묵으니
明發有餘懷(명발유여회) 날이 밝아도 회포는 남았네
夜色深深好(야색심심호) 밤 빛일랑 깊을수록 좋은데
往言事事乖(왕언사사괴) 지나간 말 일마다 어긋났네
酒來曾不讓(주래증불양) 술이 오면 사양치 아니하고
醉去宿能偕(취거숙능해) 취해 가면서도 함께 하노라
爛爛情何極(란란정하극) 무르익은 정 다함이 있을까
追隨意更佳(추수의갱가) 서로 따르는 뜻 아름다워라
風煙迷洞壑(풍년미동학) 안개 바람 골짝에 가득하니
春酌遣幽懷(춘작견유회) 봄술로 그윽한 회포 보내리
이량의 당 사건으로 기대승과 고경명은 악연이 되었지만 오늘만큼은 이황의 장례일을 맞아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털어버리고 술이나 한잔 나누면서 회포를 풀자는 것이다. 김성원은 기대승과 고경명을 진심으로 화해시키고자 했다.
1572년 80세 때 송순은 분재기(分財記)를 남겼다. 분재기를 보면 그가 재산과 140여 명의 노비를 남녀 차별없이 공평하게 나눠줬음을 알 수 있다. 장녀에게는 밭 120마지기와 서당, 노비를 주었다. 차녀와 첩에게서 난 아들 3명에게도 재산을 남겼다.
같은 해 '면앙정기'를 쓴 기대승이 세상을 떠났다. 기대승의 제자에는 고경명을 비롯해서 정철, 정운룡(鄭雲龍), 최경회(崔景會), 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기대승은 특히 정철을 아끼고 사랑했다. 이에 관한 일화가 전해 온다. 어느 날 제자들과 산에 올라가 기이하게 생긴 수석 하나를 발견했다. 제자들이 '세간 사람으로서 인품이 이에 비길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기대승은 '오직 정철이 그러하다.’라고 대답했다.
1573년 2월 8일 기대승의 장례식이 있었다. 장례식날 무려 55개에 이르는 만장(輓章)이 상여를 끌고 가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만시(輓詩)는 김계휘, 이이, 노수신, 허엽, 심의겸, 양사기, 우성전, 윤근수, 김성일, 정유길, 정유일, 박순, 정철, 유근, 최경회 등 기대승의 친구, 당대의 고관대작, 제자들이 썼다. 정철은 제문(祭文)을 지어 스승을 애도했다.
제문(祭文)-정철
소자(小子)가 선생을 사모한 지 오래되었으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그 까닭은 흐려져 가는 사류의 추향을 누가 밝히고, 저하되어 가는 세상의 도의를 누가 높이겠는가를 생각할 때 높이고 밝히실 분은 오직 우리 선생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가신 후로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으니 망천(望川) 사우(社宇)에 유풍만 방불합니다.
기대승의 저서에는 '논사록(論思錄)', '주자문록(朱子文錄)', '고봉집(高峰集)' 등이 있다. 그의 사후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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