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9년 10월 87세를 맞은 송순의 회방연(回榜宴)이 면앙정에서 열렸다. 과거 급제 60돌을 축하하는 그의 회방연에는 임제, 고경명, 정철을 비롯해서 전라감사 송인수, 지역 수령 등 백여 명이 참석했다. 정철이 두 번째로 창평에 낙향하였을 때다. '담양부지(潭陽府誌)'는 이날의 모습을 '경하의 연회를 베풀기를 신은(新恩)의 날과 같이 하니 온 도에서 높이 받들었고, 밤이 깊은 뒤에 취하여 따뜻한 방으로 내려오니 수찬 정철이 말하기를 "공을 남여(藍輿)로 모시어 나쁠 것이 없다. 우리들이 대나무 남여를 메겠다."고 하고, 헌납 고경명, 저언 임제, 도백(道伯)과 읍재(邑宰) 등이 일시에 공을 부축하여 내려가니 모여 있던 사람들이 전부 차탄(嗟歎)하여 "전고에 없는 감사(監司)라"고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담양 가사문학관
담양 가사문학관 소장 송순의 회방연도
송순은 강호에 은둔하면서 음풍농월만 즐긴 것이 아니라 당시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가슴 아파했다. 그는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곡소리를 듣고 '문인가곡(聞隣家哭)'이라는 장시를 써서 위정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문인가곡(聞隣家哭)-이웃집의 곡소리를 듣고(송순)
日暮殘村行路稀(일모잔촌행로희) 해 저문 쓸쓸한 시골길엔 사람마저 드문데
墻外哭聲來無數(장외곡성래무수) 담 너머 통곡하는 소리 밤새도록 들려오네
聞是西隣第幾家(문시서린제기가) 가만히 들어보니 서쪽에 사는 이웃 집인데
無食無衣一窮姥(무식무의일궁모) 먹을 것 입을 것 없는 가난뱅이 할멈이구나
掩券垂淚久咨嗟(엄권수루구자차) 읽던 책 덮고서 눈물 흘리며 장탄식하는데
此姥盛時吾親覩(차모성시오친도) 그 할멈 잘살던 시절은 내가 직접 보았노라
憶昔朝廷善政初(억석조정선정초) 머언 옛날 나라에서 선정을 베푸실 때에는
必使長者知吾府(필사장자지오부) 훌륭한 인물 보내서 우리 고을 맡기셨으니
差科正來民力均(차과정래민력균) 부세 노역은 공평해서 백성 살림 나아지고
一年餘食盈倉庾(일년여식영창유) 한해 먹고 남은 곡식 곳간에 가득 넘쳤는데
西家饒財一里最(서가요재일리최) 저 서쪽 집의 요족함은 온 마을 중 으뜸이라
糴夫糶女塡門戶(적부조녀전문호) 쌀 얻으러 온 사람들은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鷄豚伏臘燕鄕閭(계돈복랍연향려) 복날엔 닭 섣달엔 돼지 잡아 잔치를 벌였으며
前庭後街羅歌舞(전정후가라가무) 앞뒤 뜰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흥겹게 놀았네
從前時運有陞降(종전시운유승강) 예로부터 시운은 오르고 내림이 무상했으니
斯民計活有散聚(사민계활유산취) 백성 살림살이도 모이고 흩어짐이 있기 마련
召父不來杜母去(소부불래두모거) 어질고 착한 원님은 떠나고 다시 오지 않으니
始信苛政浮猛虎(시신가정부맹호) 혹독한 정사 범보다 무섭다는 말 이제 알겠네
朝破一田備東責(조파일전비동책) 아침에 밭 한뙈기는 동헌의 들볶임에 깨지고
暮撤一家充西取(모철일가충서취) 저녁에 집 한채는 서쪽에서 빼앗음에 헐리니
日復有日夜復夜(일부유일야부야) 일 년 내내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또 밤마다
暴政毒令加蜂午(폭정독령가봉오) 악하고 혹독한 정령이 말벌떼처럼 달라붙어
甕盎皆鳴機杼空(옹앙개명기저공) 뒤주와 항아리는 텅 비고 빈 베틀만 덩그러니
竈上久已無錡釜(조상구이무기부) 부뚜막에 노구솥 가마솥은 사라진 지 오래고
枷父械子置牢獄(가부계자치뢰옥) 남편과 자식은 칼 차꼬 차고 감옥에 갇혔는데
鞭餘肌肉皆臭腐(편여기육개취부) 모진 채찍질에 남은 살갗 썩는 냄새 진동하니
人生到此理極難(인생도차리극난) 사람 사는 꼴이 이 지경이니 어떻게 견디리오
不如死去埋厚土(불여사거매후토) 차라리 죽어서 흙 속에 묻히느니만 못하리다
呼天終日哭籬下(호천종일곡리하) 하늘에 대고 부르짖고 울밑에서 종일 울어도
天猶不應更誰怙(천유불응갱수호) 하늘조차 대답 없으니 어느 누구를 믿으리요
嗚呼汝命誠可哀(오호여명성가애) 아, 할멈의 운명이여 진정 애달픈 사연이로세
聞者孰不增恚怒(문자숙불증에노) 사정을 들은 사람 그 누군들 분노하지 않으랴
方今國家愼賞罰(방금국가신상벌) 지금 바야흐로 나라에서 상벌을 신중히 하사
君王仁澤臻舜禹(군왕인택진순우) 임금의 은혜로운 덕택이 옛 성군에 비길 건가
我當爲爾陳闕下(아당위이진궐하) 내 응당 할멈을 위해 대궐에 나아가 아뢸지니
酷吏不啻膏諸斧(혹리부시고제부) 독하고 악한 관리놈들 처벌받게 할 뿐 아니라
夫還子放復舊居(부환자방부구거) 남편과 자식은 옥에서 풀려나 옛집으로 돌아와
殘年敗業猶足樹(잔년패업유족수) 망해 버린 살림살이 다시 일으킬 수 있으리다
老婦掉頭哭且言(노부도두곡차언) 내 말에 머리 내젓고 할멈 통곡하며 말하더라
隣家丈人還余侮(린가장인환여모) 이웃 어르신네 무슨 말씀 시방 저를 놀리나요
오언율시로 읊은 '전가원(田家怨)'도 '문인가곡'처럼 위정자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고발한 현실비판적인 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애절양(哀絶陽)'이나 '기민시(饑民詩)'처럼 이 시에도 개혁 의지가 드러나 있다.
전가원(田家怨)-농가의 원성(송순)
舊穀已云盡(구곡이운진) 묵은 양식은 이미 다 떨어지고
新苗未可期(신묘미가기) 새로 핀 이삭 여물 날 언제런지
摘日西原草(적일서원초) 매일 서쪽 언덕에 나물 뜯어도
不足充其飢(부족충기기) 굶주림을 채우기에도 부족하네
兒啼猶可忍(아제유가인) 아이들 울부짖는 건 참는다지만
親老復何爲(친노부하위) 늙으신 부모님은 또 어찌하리오
出入柴門下(출입시문하) 사립문 밖에 드나들어 보아도
茫茫無所之(망망무소지) 아득하기만 하여 갈 곳이 없네
官吏獨何人(관리독하인) 관리놈들은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責公兼徵私(책공겸징사) 세금 닦달하고 사사로이 뜯어가네
窺缸缸已空(규항항이공) 쌀독을 들여다보니 모두 비어 있고
視機機亦隳(시기기역휴) 베틀을 바라보니 베도 다 끊어냈네
吏亦無奈何(리역무내하) 아전들은 또한 어찌할 수 없었던지
呼怒繫諸兒(호노계제아) 소리치고 성내며 아이들 묶어가네
持以告官長(지이고관장) 붙잡아다 고을 수령 앞에다 바치니
官長亦不悲(관장역불비) 수령놈 또한 불쌍히 여기지도 않네
桎梏加其頸(질곡가기경) 손 발에 차꼬 채우고 목에 칼을 씌워
鞭扑苦其肢(편복고기지) 볼기에 곤장치고 다리에 주리를 트네
日暮相扶持(일모상부지) 해 저문 저녁에 서로서로 끌어안고서
齊哭繞故籬(제곡요고리) 일제히 통곡하는 소리 감옥을 울리네
呼天皆乞死(호천개걸사) 모두 죽여 달라고 하늘에 빌고 빌어도
聽者其又誰(청자기우수) 들어줄 자 과연 그 누구란 말이던가?
哀哀不見救(애애불견구) 구원받지 못해서 슬프고 또 슬프도다
丘壑空積屍(구학공적시) 백성들의 시체가 구렁마다 쌓여 있네
시적 화자는 위정자들의 억압과 착취에 대해 분노하는 한편 수령과 아전들의 가렴주구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애민시다. 하지만, 송순은 백성들의 시체가 빈 구렁에 쌓여간다고 외치는 것으로 그칠 뿐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조선시대 사대부 벼슬아치들의 한계일 수 밖에 없었다. 민초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근본모순은 전제왕조정권 체제에 기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전제왕조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적 정부를 세우는 것만이 억압과 착취를 끝장내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전제왕조정권 하에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혁명을 바란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사림파 선비들의 애민시들이 부정부패로 썩어가는 사회를 고발하고 분노할 뿐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림파 존재의 근원이 전제왕조정권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요즘의 지식인 군상도 별반 차이가 없다.
사림파들과는 달리 연산군대의 홍길동(洪吉同), 명종대의 임거정(林巨正, 임꺽정), 숙종대의 장길산(張吉山) 등이 이끄는 농민혁명군은 왕과 탐관오리들의 목을 치고, 썩은 체제를 뒤집어엎은 뒤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했다. 이들은 사회적 모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봉기했던 것이다. 농민봉기가 성공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열렸을지도 모른다.
1582년(선조 15) 2월 1일 송순은 천수를 다 누리고 90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담양군 봉산면 기곡리 산 200-16번지에 묻혔다. 담양군 수북면 남산리 구산사(龜山祠)에는 그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송순의 부음을 듣자마자 정철은 담양의 빈소로 달려와 제문을 지어 조문했다.
면앙송순제문(俛仰宋純祭文)-정철
슬프도다. 세상살이 험난한 길을 겪고 겪은 자 많으나, 그 넘어지지 않은 이 역시 드문데, 조정에서 계신 60여년을 대로로만 따르며, 마침내 크게 넘어지지 않은 이로 상공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저의 비통함이 사사로운 인정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아! 슬프고 서럽도다.
송순이 살았던 시대는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등 4대사화가 일어난 혼란한 때였으나, 그는 50여 년의 벼슬살이 동안 단 한번 1년 정도의 귀양살이만 했을 뿐 별다른 화를 당하지 않았을 정도로 관운이 좋았다. 송순은 인품이 너그럽고 아량이 넓은 학자이자 정치가, 시인이었다. 관대하고 포용력이 큰 선비였기에 그는 각종 사화가 난무한 50년 벼슬길에서도 큰 화를 당하지 않고 순탄하게 정년퇴직까지 할 수 있었다. 또 그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가야금을 잘 탔으며,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선비였다.
송순은 두 아들의 이름을 각각 해관(海寬)과 해용(海容)으로 지었다. 두 이름의 끝자를 합하면 관용(寬容)이 된다. 송순이 관용과 포용(包容)을 평생의 신조로 삼고 살아갔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면앙정 설경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의 면앙정에 머물면서 자연을 벗삼아 안빈낙도와 자연을 예찬하는 작품들을 씀으로써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가 되었다. 송순의 면앙정가단은 임억령의 식영정, 김성원의 서하당, 김윤제의 환벽당, 양산보의 소쇄원으로 구성된 성산가단(星山歌壇), 김수장(金壽長)을 중심으로 한 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 김천택(金天澤)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 안민영(安玟英)의 승평계(昇平契) 등의 효시가 되어 조선 누정문학의 꽃을 피웠다.
송순은 '면앙정삼언가', '면앙정제영(俛仰亭題詠)' 등 한시 505수와 부 1편를 남겼다. 또,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면앙정단가',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 '오륜가(五倫歌)' 5수 등 단가와 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의 시가문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의 시조 '오륜가'는 주세붕(周世鵬)의 '오륜가'와 함께 후에 정철의 시조 '훈민가(訓民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문집으로는 '면앙집(俛仰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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