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앙정에는 송순의 '면앙정삼언가'와 '면앙정제영(俛仰亭題詠, 면앙정원운)'을 비롯해서 이황과 김인후의 '차면앙정운(次俛仰亭韻)', 기대승의 '면앙정기', 임억령과 고경명이 지은 '면앙정삼십영' 등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송순의 '면앙정제영'을 차운한 소세양의 '차면앙정운'과 소쇄처사 양산보의 '차면앙정운' 판액(板額)도 있다.
담양 면앙정
또, 이안눌의 '차벽상운(次壁上韻)', 담양부사를 지낸 황수의 '차판상운(次板上韻)'과 청오헌(聽悟軒) 임광필(林光弼)의 '증주인(贈主人)', 윤두수의 고손(高孫)으로 담양부사를 지낸 윤세관(尹世觀)의 '면앙정병서(俛仰亭幷序)',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7~1800) '어제(御製)'와 '효사당기(孝思堂記)', '제승정기(濟勝亭記)', '차제승정운(次濟勝亭韻)' 등의 편액도 걸려 있다. 송순의 '면앙정가'와 임제의 '면앙정부' 편액은 걸려 있지 않다.
면앙정에 걸려 있는 편액
면앙정에 걸려 있는 편액
송순의 '면앙정제영'과 소세양의 '차운' 편액
면앙정제영(俛仰亭題詠, 면앙정원운)-면앙정에서 지어 읊다(송순)
超然羽化孰云難(초연우화숙운난) 누가 초연히 신선되는 걸 어렵다 했나
得臥蓬萊第一巒(득와봉래제일만) 봉래산 제일봉에 자리 잡고 누워 보니
脚下山川紛渺渺(각하산천분묘묘) 다리 아래 산천은 저 멀리 아물거리고
眼前天地闊漫漫(안전천지활만만) 넓고 넓은 천지는 눈앞에 탁 트였건만
鵬搏九萬猶嫌窄(붕박구만유혐착) 구만 리 나는 붕새는 오히려 좁다하고
水擊三千直待乾(수격삼천직대건) 삼천리 박찬 물이 곧장 마르길 바라네
欲御泠風雲外去(욕어령풍운외거) 찬바람 쐬려고 구름 밖에 나가 봤더니
腰間星斗帶欄干(요간성두대난간) 난간 근처 별들이 허리춤에 있네 그려
丹葉辭林下碧川(단엽사림하벽천) 떨어진 나뭇잎은 푸른 내로 떠나가는데
晩風吹雨過階前(만풍취우과계전) 저녁 바람은 비를 몰아 뜰앞을 지나가네
遠山細入眉間沒(원산세입미간몰) 먼 산은 눈썹 사이로 들어오다 사라지고
大野平後掌上連(대야평후장상련) 큰 들은 평평하여 손바닥 위로 이어지네
眼豁何方無好月(안활하방무호월) 눈앞에는 어느 곳이든 좋은 달이 있는데
河明慈夕絶穢煙(하명자석절예연) 맑은 물은 이 밤도 더러운 티끌 씻어가네
蒼茫光景誰堪畵(창망광경수감화) 아스라한 이 경치를 그 누가 그려 보련가
陶謝詩中始得傳(도사시중시득전) 저 도연명과 사영운이 시로써 전하였네
黎杖松陰步步幽(려장송음보보유) 지팡이 짚고 솔 그늘 한가히 거니는데
岸中從倚玉溪頭(안중종의옥계두) 언덕은 시내머리에 기대어 의지하였네
巡簷白日行天遠(순첨백일행천원) 처마에 물러난 해 하늘까지 가기 멀고
對揚靑山護野稠(대양청산호야조) 푸르른 산들은 들을 빽빽하게 둘러쌌네
風引店烟遙度樹(풍인점연요도수) 바람은 연기 몰아 나무 사이로 지나고
雲將浦雨細隨秋(운장포우세수추) 구름은 비를 내리며 가을을 재촉하네
登臨自取武邊與(등림자취무변여) 오르락 내리락 나 혼자서 흥이 나다가
肯着人間段段愁(긍착인간단단수) 이 세상에 이런 저런 수심도 다 있다네
제영(題詠)은 제목을 붙여 시를 읊는 것이다. '면앙정제영'은 붕정만리(鵬程萬里)의 원대한 뜻을 품었음을 노래한 시다. 붕정만리는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말이다. '소요유'에 '붕새가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물을 3천 리나 박차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나 날아오른 뒤에야 6월의 대풍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간다.(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고 하였다. 미래지향적인 큰 뜻을 품었을 때 쓰는 말이다.
'도(陶)'는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 초기에 걸쳐 활약한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을 말한다. '사(謝)'는 중국 동진(東晉), 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 385~433)을 가리킨다
송순의 면앙정원운(俛仰亭原韻) 3수 중 1수의 운자는 '만(巒), 만(漫), 건(乾), 간(干)', 2수의 운자는 '전(前), 연(連), 연(烟), 전(傳)'이다. 3수의 운자는 '두(頭), 조(稠), 추(秋), 수(愁)'이다.
소세양의 '차면앙정운'은 송순의 '면앙정제영'과 같은 편액에 새겨져 있다. 소세양은 송순의 면앙정원운 3수의 운자 '두(頭), 조(稠), 추(秋), 수(愁)'를 차운해서 시를 지었다.
차면앙정운(次俛仰亭韻)-면앙정제영에서 차운하다(소세양)
竹林深處草亭幽(죽림심처초정유) 대나무 숲 깊은 곳 그윽한 정자
百尺危臨斷壟頭(백척위림단롱두) 까마득히 높은 언덕에 서 있네
積水滿時平野合(적수만시평야합) 물 가득 찰 땐 들도 묻혀버리고
暮雲歸後亂峯稠(모운귀후난봉조) 구름 개면 뭇 봉우리 빽빽하네
錦城近送千林雨(금성근송천림우) 금성은 가까이서 비를 보내주고
無等遙分一片秋(무등요분일편추) 무등은 멀리서 가을을 나눠주네
魂夢每驚淸禁漏(혼몽매경청금루) 대궐 물시계 꿈에 매번 놀래지만
故山猿鶴未應愁(고산원학미응수) 고산 원학은 시름할 필요 없겠지
면앙정과 그 주변의 풍경을 묘사한 뒤 자신은 조정에서 정사를 돌보느라 경황이 없지만 고향 산천의 원숭이나 학은 자신처럼 마음 졸일 필요없이 한가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벼슬살이의 고달품을 한탄하면서 자연에 귀의한 삶을 동경하는 시다.
'금성(錦城)'은 금성산, '무등(無等)'은 무등산을 가리킨다. '청금(淸禁)'은 대궐, '루(漏)는 물시계이다. 출퇴근 등 조정 벼슬아치들의 일과는 대궐의 물시계에 엄격하게 맞춰야만 했다.
소세양은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남달랐다. 그가 일곱 살 때 지은 '신월(新月)'이란 시를 보면 그의 천재적인 문재를 알 수 있다.
신월(新月)-초승달(소세양)
誰斷蟾宮桂(수단섬궁계) 누가 달 속의 계수나무를 깎아서
裁成玉女梳(재성옥녀소) 여인의 빗같은 저 달을 만들었나
銀河一別後(은하일별후) 칠석날 은하수에서 헤어진 뒤에
愁亂擲空虛(수란척공허) 시름겨워 저 하늘에 던져 버렸네
일곱 살의 어린이 조세양이 초승달을 여인의 빗에 비유한 표현이 놀랍다. 어린 나이에 조세양은 벌써 자신의 시에 여인을 등장시키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여자를 좋아했던가 보다. 정자·주서·부수찬(副修撰)·정언
소세양은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정자(正字)와 주서(注書), 정언(正言), 수찬(修撰), 이조정랑(吏曹正郞), 교리(校理), 직제학(直提學), 사성(司成)을 거쳐 승지(承旨)에 올랐다. 1523년 소세양은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529년(중종 24) 10월에는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9월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는 사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1년 복직되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오른 뒤, 1533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1535년 형조판서와 호조판서(戶曹判書), 1537년 병조판서(兵曹判書)와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1545년(인종 1) 대윤파의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명종 즉위 후 을사사화로 윤임(尹任) 등이 몰락하자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소세양은 율시에 뛰어났고, 송설체(松雪體)의 명필이었다. 그의 저서에는 '양곡집(陽谷集)'이 있다. 글씨로는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와 소세양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 등이 있다. 죽은 뒤 익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소세양은 익산에서 말년을 보낼 때 면앙정에 가끔 들러 송순과 시문답을 하곤 했다. 송순과 소세양의 인연을 이야기하자면 송흠을 빼놓을 수 없다. 송순은 송흠의 조카뻘이자 제자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송흠은 관직에서 물러나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에 관수정(觀水亭)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소세양은 송흠의 아들인 낙안부사 송익경(宋益憬)의 부탁으로 '경차병서(敬次竝序)'를 지었다. 소세양은 송흠의 '관수정원운(觀水亭原韻)'에서 차운하여 시를 짓고 서문을 덧붙였다.
소세양 하면 이런 공식적인 프로필 말고 황진이(黃眞伊, 1514~?)와의 로맨스가 더 유명하다. 풍채도 좋고 벼슬도 승승장구, 명필에 율시에도 능해 명나라와 일본에까지 문명을 떨쳤으며, 재치와 유머까지 갖춘 천하의 풍류객 소세양은 젊어서부터 여색을 밝혔다. 그는 어떤 여자를 만나도 한달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소세양이 황해도관찰사로 나갔을 때 송도 명기 황진이가 절세가인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황진이가 절세가인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30일만 머물고 헤어지겠다. 만일 하루라도 더 머물면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吾其非人哉)'고 호언장담했다.
황진이가 누구던가! 신분상의 제약을 벗어버리고 자유를 택한 여성이 아니던가! 그녀는 사대부들의 위선과 허위를 조롱하면서 양반도 상놈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세상에 폭로한 진보적 자유인이었다. 학문과 권력을 겸비한 사대부들을 희롱하고자 그녀는 조선 최고의 군자로 일컬어지던 종실(宗室) 벽계수(碧溪水) 이종숙(李終叔)을 '청산리 벽계수야' 시 한 수로 무너뜨렸고, 30여년을 면벽참선하여 생불로 불리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파계시켰다. 이후 조선의 내노라하는 사대부들이 모두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진이는 도학군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도 유혹하였다. 하지만 끝내 자신의 유혹을 뿌리치자 제자를 자청한 그녀는 서경덕을 송도삼절이라 칭송하면서 시조 '청산은 내 뜻이요'를 읊었다.
청산은 내 뜻이요-황진이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 밤길 예놋다
임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노래한 시조이다. 녹수가 흘러가더라도 청산은 변하지 않겠다. 그러니 청산을 잊지는 말아 달라는 것이다. '청산'은 황진이, '녹수'는 서경덕을 가리킨다.
소세양은 황진이에게 가기 전 남들이 알까봐 편지에 '榴(석류나무 류)' 한 글자만을 적어서 보냈다. 황진이는 편지를 읽고 난 뒤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榴'가 '碩儒那無遊(석유나무유)-높은 선비가 여기 왔는데 어찌 놀지 않겠는가?'를 줄인 말임을 한눈에 간파한 것이다. 황진이도 한치의 망설임 없이 답장을 썼다. 답장에는 '漁(고기잡을 어)' 한 글자만 달랑 적혀 있었다. '漁'는 '高妓自不語(고기자불어)-고상한 기녀는 스스로 말하지 않아요.'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나와 놀고 싶으면 당신이 오세요.'라고 대답한 것이다.
마침내 당대 최고의 풍류남과 풍류녀가 날을 정해 만났다. 급진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황진이도 소세양을 만나자 한눈에 반했다. 28년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소세양과 황진이의 마음은 번갯불이 치듯 통했고, 몸은 서로를 원했다. 두 사람은 30일의 밀월에 들어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누가 이기나 해보자'라는 경쟁심도 있었을 것이다.
드디어 약속한 30일 기한이 다 찼다. 늦가을 밤 높은 누각에서 황진이는 조세양에게 이별의 주회를 베풀었다. 두 사람은 헤어지기 싫었지만 서로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때 황진이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시 한 수를 읊었다.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소판서세양과 이별하며(황진이)
月下庭梧盡(월하정오진) 뜰에는 달빛 아래 오동잎 지고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 시들고 있네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대 높아 까마득 하늘에 닿고
相盞醉無限(상잔취무한) 취한 임은 무한정 술만 마시네
流水和琴冷(유슈화금냉) 거문고 뜯는 소린 물처럼 맑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피리 소리에 매화 향 그윽한데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오늘 아침 서로 헤어지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그리움은 강물처럼 끝이 없겠지
황진이는 거문고 가락에 실어 송별시를 읊는다. 그녀는 조세양에게 '날이 밝아 서로 헤어지고 나면 앞으로 다시는 못 볼 것입니다. 그리움만 저 강물처럼 끝없이 흐르겠지요. 어떻게 하실래요?' 하고 은근히 묻는다. 천하의 조세양인들 어쩌랴! 소세양은 마음을 바꿔 '이제 나는 사람이 아니다. 다시 더 머무르겠다(吾其非人哉 爲之更留)'고 선언하고는 황진이와 하룻밤을 더 묵었다.
황진이와 꿈 같은 하룻밤을 보낸 소세양은 조정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황진이는 불 같은 사랑을 나누던 그 임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녀는 매일 소세양을 그리워하면서 상사몽(想思夢)으로 밤을 지샜다.
몽(夢)-꿈(황진이)
想思相見只憑夢(상사상견지빙몽) 그리워도 만날 길은 꿈속 밖에 없으니
儂訪歡時歡訪儂(농방환시환방농) 내가 임 찾을 때 임도 날 찾아오셨네
願似遙遙他夜夢(원사요요타야몽) 바라건대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一時同作路中逢(일시동작노중봉) 같은 날 오가는 꿈길에서 서로 만나소
황진이는 정인 소세양이 너무 그리워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황진이도 진정 소세양을 사랑했던 것일까? 황진이의 상사몽 그건 사랑의 열병이었다. 소, 황 두 사람의 사랑은 영화배우 최무룡과 김지미의 사랑만큼이나 센세이셔널한 것이었다. 둘쨋 구는 앞, 뒤에서 읽어도 '농방환시환방농'으로 똑같다. 시제 '몽(夢)'을 1, 3구의 운자로도 썼다. 황진이의 시적 기교가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황진이는 '월야사(月夜思)'라는 칠언율시를 지어 시비 동선을 시켜 한양에 있는 소세양에게 전하게 했다. 그리운 임 소세양이 율시의 대가였기 때문에 황진이도 칠언율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월야사(月夜思)-달밤의 생각(황진이)
簫蓼月夜思何事(소료월야사하사) 소슬한 달밤이면 무슨 생각하시는지요
寢宵轉轉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뒤척이는 잠자리는 꿈인 듯 생시인 듯
問君有時錄妾言(문군유시록첩언) 임아 때론 제가 드린 말도 적어보나요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이승에서 맺은 인연 믿어도 좋을까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아득히 임 생각하다 보면 끝이 없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하루 얼마나 제 생각을 하시는지요
忙中要顧煩惑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쁘실 때도 저를 생각하면 기쁘신지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재잘대도 아직 제가 좋은가요
나는 매일 밤 임 생각으로 잠 못 이루는데, 임도 멀리 떨어진 한양에서 내 생각을 하는지,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지 조바심을 내며 물어보는 시다. 사랑은 이렇듯 사람을 달뜨고 애태우게 하는가 보다. '월야사'는 양인자의 의역에 김희갑이 곡을 붙이고, 이선희가 부른 노래 '알고 싶어요(I Want To Know, 1986)'로도 나왔다.
알고 싶어요-작사 양인자, 작곡 김희갑, 노래 이선희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세월과 함께 두 사람의 사랑도 꿈처럼 강물처럼 흘러가버리고, 황진이의 이마에도 어느덧 주름살이 늘어갔다. 나이가 들자 황진이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그녀의 외로움은 더해갔을 것이다. 그녀는 당대의 명창 이사종(李嗣宗, 1543~1634)을 만나 6년 동안 사랑에 빠진다. 이사종은 황진이의 마지막 연인이었다. 그만큼 이사종에 대한 황진이의 사랑은 절실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사종을 생각하며 '동짓달 기나긴 밤을'이란 시조를 한숨과 함께 신음처럼 읊었다. 원래 이 시조는 그녀의 첫 사랑 부운거사(浮雲居士) 김경원(金慶元, 1528~?)을 사모해서 읊었던 노래였다. 황진이는 소세양과 사랑에 빠졌던 시절 '청산은 내 뜻이요'와 이 시조를 편지에 적어서 정인이 있는 한양으로 보내 장안의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일부종사를 할 수 없었던 자유인 황진이는 얼마나 외로왔을까! 얼마나 사무치게 외로왔으면 동짓달 기나긴 밤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임이 오시는 날 밤 구비구비 펴서 오래오래 함께 보내겠다는 것이다. 외로움은 어쩌면 그녀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독수공방의 외로움이 구구절절 묻어나는 노래다.
소세양은 정철의 스승 김윤제와도 친분이 있었다. 김윤제가 부안군수로 있을 때 소세양에게 새우젓과 생선을 보내준 적이 있었다. 이에 소세양은 시를 지어 김윤제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사부안수김윤제혜하해급어(謝扶安守金允悌惠蝦醢及魚)
부안군수 김윤제의 새우젓과 생선 선물에 감사하며
秋雨經旬土蝕花(추우경순토식화) 가을비가 열흘 넘겨 땅에 꽃들 썩어가네
盤饌久厭飣瓜茄(반찬구염정과가) 반찬 올린 오이 가지 오래도록 물렸는데
筠籠遠惠莘莘尾(균롱원혜신신미) 멀리서 대소쿠리 한가득 생선 보내주니
却對妻孥獨自誇(각대처노독자과) 처자식 바라보며 나 홀로 자랑하고 싶네
새우젓과 생선 선물을 받고 매우 기뻐하는 심경을 읊은 시다. 조선시대 전기에도 오이와 가지를 반찬으로 먹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부안은 예로부터 새우젓의 명산지였다. 이 시는 소세양의 '양곡집' 권4에 실려 전한다.
담양 환벽당
김윤제가 부안 군수로 재직 중에 환벽당에 와서 머문다는 소식을 들은 송순은 '문부안쉬김공공노래우환벽정 희증4수(聞扶安倅金公恭老來寓環碧亭 戲贈四首)'이란 제목의 칠언절구 4수를 희증했다. 김윤제의 아니는 송순보다 8년 아래였다.
문부안쉬김공공노래우환벽정 희증4수(聞扶安倅金公恭老來寓環碧亭 戲贈四首)
부안 군수 김공 공노가 환벽정에 머문다는 소식 듣고 시 4수를 희증하다- 송순
松下澄潭巖上亭(송하징담암상정) 소나무 아래 맑은 못 바위 위의 정자는
十分淸境是家庭(십분청경시가정) 참으로 청정한 곳 신선이 노는 뜰이로다
一來猿鶴爭嘲笑(일래원학쟁조소) 원숭이 두루미들 날아와 나를 비웃는 듯
其奈人間夢未醒(기내인간몽미성) 어찌 인간 속세의 꿈을 깨지 못하느냐고
山容水態一時新(산용수태일시신) 산의 모습 물의 자태 일시에 새로운데
賴是今朝得主人(뢰시금조득주인) 참으로 오늘 아침 제 주인을 얻었으니
惆悵未成携酒過(추장미성휴주과) 아쉽지만 덜 익은 술통 끼고 찾아가서
臨風終夕岸烏巾(임풍종석안오건) 밤새 바람 맞으며 갓 비뚤도록 취하네
删樹新安屋數間(산수신안옥수간) 나무를 깎아서 새 집 여러 칸 지어내니
江山到此轉生顏(강산도차전생안) 강도 산도 비로소 새로운 모습이로세
挽回天地繩床外(만회천지승상외) 천지자연을 내 앉은 자리로 가져왔으니
無盡藏誰爲我慳(무진장수위아간) 무진장함이여 그 누가 나를 나무랄까나
手移松竹卅經秋(수이송죽삽경추) 소나무와 대나무 옮겨 30년 세월이 지나
顚倒生涯笑白頭(전도생애소백두) 생애가 고단하니 흰 머리털만 생겼구나
縱向林泉尋舊約(종향림천심구약) 자연에서 그 옛날의 언약을 찾으려 하니
見欺魚鳥肯相收(견기어조긍상수) 물고기와 새에게 속임을 당한들 어떠리
환벽당의 승경을 묘사한 뒤 김윤제를 신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으로 칭송하는 한편 송순은 아직도 속세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으로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고 있다. 김윤제의 시가 면앙정에 한 수쯤 걸려 있을 법도 한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송순은 자신의 스승이자 9촌 아저씨 송흠의 관수정에도 들렀다. 관수정에서 그는 송흠의 관수정원운(觀水亭原韻)에서 차운하여 칠언율시 한 수를 남겼다.
차관수정운(次觀水亭原韻)-관수정원운에서 차운하다(송순)
畵閣玲瓏俯碧寒(화각영롱부벽한) 단청누각 영롱하여 푸른 물 굽어보는데
每憐澄淨獨憑欄(매련징정독빙란) 언제나 맑음이 좋아 홀로 난간에 기대네
涵秋洗鏡開平鋪(함추세경개평포) 가을 머금은 거울은 드넓게 펼쳐져 있고
噴雪晴雷下急灘(분설청뢰하급탄) 눈을 뿜듯 천둥치듯 세찬 여울 내려가네
皎潔此心曾合契(교결차심증합계) 일찌기 맑고 깨끗한 그 마음 서로 맞아서
淵源一派也冥觀(연원일파야명관) 이에 한 줄기 깊은 물 고요하게 바라보네
百年交養知如許(백년교양지여허) 백 년 동안 사귐과 양성 이처럼 하였으니
氷玉崢嶸照肺肝(빙옥쟁영조폐간) 빙옥처럼 고결함이 진정으로 비치는도다
門人(문인) 弘文應敎(홍문응교)
俛仰(면앙) 宋純(송순)
관수정의 승경을 묘사한 뒤 송흠의 학문과 인격이 매우 높고 고결함을 칭송한 시다. 송순은 이 시에서 자신을 송흠의 문인(門人)이라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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