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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송순의 면앙정을 찾아서 10

林 山 2017. 2. 22. 16:47

 

담양 면앙정 설경

소쇄처사 양산보는 '면앙정원운' 1수의 운자 '만(巒), 만(漫), 건(乾), 간(干)', 2수의 운자 '전(前), 연(連), 연(烟), 전(傳)'을 차운하여 '차면앙정운'을 지었다. 양산보는 송순의 고종사촌동생이자 김윤제의 매형이었다. 그러니까 송순과 김윤제는 한 다리 건너 사돈 간이었다. 그런 양산보였으니 송순의 면앙정에 시 한 수 걸어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소쇄처사 양산보의 '차면앙정운' 편액

차면앙정운(次俛仰亭韻)-면앙정제영에서 차운하다(양산보)

 

崱崱群山混混川(측측군산혼혼천) 큼직큼직한 산들에 출렁대는 시내까지

 悠然瞻後忽瞻前(유연첨후홀첨전) 느긋하게 뒤를 보다가 문득 앞도 보나니

田墟曠蕩亭欄斷(전허광탕정난단) 정자 난간은 크고 넓은 들판을 향하고

松逕逶迤屋砌連(송경위이옥체련) 구불구불한 솔숲길로 섬돌 이어졌구나

大野燈張皆我月(대야등장개아월) 큰 들판에 걸린 등불은 다 나의 달 같고

 長天雲起摠人煙(장천운기총인연) 하늘에 이는 구름은 다 인가의 연기라네

 淸平勝界堪收享(청평승계감수향) 저 청평의 뛰어난 경치는 누려볼 만한데

綠野東山笑漫傳(녹야동산소만전) 우습구나 녹야의 동산이 더 알려졌다니

 

丹丘何恨訪尋難(단구하한방심난) 신선의 경지 찾기 어렵다 뭐 한탄하랴

眞界分明此一巒(진계분명차일만) 그곳도 분명 이와 같은 산하일 것일세

曠占乾坤寬納納(광점건곤관납납) 천지간 넓게 차지한 듯 넉넉히 들이고

恢收山水引漫漫(회수산수인만만) 산수도 널리 거두어 넘치게 이끌었네

風霜幾歲松筠老(풍상기세송균노) 여러 해 풍상에 소나무 대나무 져가고

詩酒當年筆硯乾(시주당년필연건) 그 해 풍류는 붓과 벼루처럼 말라버려

徒倚曲欄流顧眄(도의곡난류고면) 그저 난간 기대 하염없이 돌아보자니

 世緣消息絶來干(세연소식절래간) 세상사 소식도 끊어져 오질 않네 그려 

 

시적 화자는 면앙정과 주변의 승경을 바라보면서 이곳이 선선이 사는 별유천지 못지 않으며, 그 속에서 안빈낙도하는 면앙정 주인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세상사 소식조차 끊어진 이곳이 바로 이상향 은둔처라는 것이다. 2수는 소쇄원 제월당(霽月堂)에도 걸려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소쇄원에 가보지 못했다.

 

 

담양 소쇄원

송순도 고종사촌동생 양산보의 소쇄원을 방문해서 칠언율시로 된 만시(輓詩) 한 수를 남겼다. 만시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하는 시다. 양산보는 송순보다 25년이나 먼저 세상을 떠났다.  

 

외제소쇄처사만(外弟瀟灑處士輓)-고종사촌 소쇄처사 애도시(송순)

 

珍重林泉鎖舊雲(진중임천쇄구운) 아름다운 정원은 옛 구름에 잠겨 있고

路迷何處覓微君(로미하처멱미군) 길 잃으니 어느 곳에서 자네를 찾으랴

 謝家庭畔蘭方郁(사가정반난방욱) 사가의 뜨락엔 바야흐로 난초 가득하고

曾氏堂前日欲曛(증씨당전일욕훈) 증씨의 집앞에는 저녁 햇살 어스레하네

穿石巖溪空自咽(천석암계공자인) 바위 구멍 물 소리는 공연히 목이 메고

引墻花木爲誰芬(인장화목위수분) 담장의 꽃나무는 누굴 위해 향기 내나

故園永與新阡隔(고원영여신천격) 옛 동산은 새 길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老樹啼禽不忍聞(노수제금불인문) 고목에서 우는 두견성 차마 못 듣겠네 

 

저 세상을 떠난 소쇄처사 양산보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다. 아름다운 정원 소쇄원은 의구하되 아끼고 사랑했던 고종사촌동생 양산보는 간 곳 없었던 것이다. 살아 생전의 양산보는 재주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효성도 지극했던 모양이다. 그런 양산보가 죽고 없으니 얼마나 슬펐을까! 마음이 아파서 두견새 우는 소리조차 차마 듣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외제(外弟'는 고종사촌동생이다. '사가(謝家)'는 중국의 뛰어난 문장가 사영운, '증씨(曾氏)'는 중국의 대표적인 효자로 '대학(大學)'을 쓴 증자(曾子, BC 505~436)를 가리킨다. 그만큼 양산보가 훌륭한 인물이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면앙정에는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의 차운시가 함께 판각되어 걸려 있다. 이황은 송순이 선산도호부사로 있을 때 자주 만나 친교를 맺은 사이였고, 김인후는 송순의 문인이었다. 이황은 송순 부친의 비문을 쓰기도 했다. 1531년 김인후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9살 연상의 이황과 함께 성균관에서 학문을 닦으면서 교우 관계를 맺었다. 김인후는 또 양산보와 사돈 간이었다. 

 

두 사람의 시는 모두 '면앙집' 7권에 실려 있다. 이황은 '면앙정원운' 2수의 '천(川), 전(前), 연(連), 연(烟), 전(傳)'과 3수의 '유(幽), 두(頭), 조(稠), 추(秋), 수(愁)'를 차운했고, 김인후는 2수의 2수의 '천(川), 전(前), 연(連), 연(烟), 전(傳)'과 1수의 '난(難), 만(巒), 만(漫), 건(乾), 간(干)'을 차운했다.     

 

이황과 김인후의 '차면앙정운' 편액

차면앙정운(次俛仰亭韻)-면앙정제영에서 차운하다(이황)

 

七曲高低控二川(칠곡고저공이천) 두 강 흐르는 곳에 높고 낮은 일곱 구비

翠鬟無數迥排前(취환무수형배전) 정자 앞 멀리 푸른 산 무수히 벌려 있네 

縈簷日月徘徊過(영첨일월배회과) 처마를 도는 해달은 갈 듯 말 듯 지나고

匝域瀛壺縹緲連(잡역영호표묘련) 여길 감싼 영주산은 멀리로 이어졌거니

村老夢徵虛宿昔(촌노몽징허숙석) 늙은이의 꿈 희미하니 옛일이 허무하고

使君資築償風煙(사군자축상풍연) 사군이 건축 도와 경치 감상하는 것이니

傍人欲識亭中樂(방인욕식정중락) 이 곳 즐거움을 속인이 알기를 바란다면

光霽應須別有傳(광제응수별유전) 맑고 밝은 기상은 특별히 전해야 하리라

 

松竹蕭槮出逕幽(송죽소삼출경유) 소나무 대나무 소소하고 산길 깊은데

一亭臨望岫千頭(일정임망수천두) 정자 하나 많은 산봉우리 굽어본다네

畫圖隱映川原矌(화도은영천원광) 넓은 산천은 그림처럼 은은히 비치고

萍薺依俙樹木稠(평제의희수목조) 풀들은 울창한 나무 아래 아른댄다요

夢裏關心遷謫日(몽리관심천적일) 꿈속에서도 벼슬 떠날 날 생각했나니

吟邊思樂撫摩秋(음변사락무마추) 가을날 음풍농월 생각만도 즐거워라

何時俛仰眞隨意(하시면앙진수의) 언제나 선생 같이 진정 뜻 가는 대로

洗却從來局促愁(세각종래국촉수) 지난날 자질구레한 시름 씻어 보려나

 

1수 전반부는 면앙정 주변의 승경, 후반부는 송순이 정자를 짓게 된 경위와 맑고 밝은 기상을 간직한 정자에서 노니는 즐거움을 읊었다. 2수에서는 면앙정과 주변의 풍경을 묘사한 다음 강호자연에서 안빈낙도하는 송순처럼 살고 싶다는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칠곡(七曲)'은 제월봉으로부터 면앙정 기슭에 이르기까지 산줄기가 일곱 구비임을 말한다. '이천(二川)은 백탄(白灘)과 여계(餘溪)이다. '영호(瀛壺)'는 영주산(瀛洲山)을 가리킨다. 산 모양이 술병처럼 생겨서 영호라 한다. 여기서는 면앙정 주변 산의 대유적 표현이다. '촌노몽징(村老夢徵)'은 면앙정 터의 옛 주인 곽성의 꿈을 말한다. 옛날 제월봉 기슭에 곽성이 살고 있었는데, 꿈에 금의 옥대를 한 선비들이 그 위에서 놀기에 그 집이 흥할 징조라 생각하였으나 아무런 영험이 없자 송순에게 팔았다고 한다. '사군자축(使君資築)'은 면앙정을 지을 때 담양부사 오겸(吳謙)이 재물을 보조한 것을 말한다. '광제(光霽)'는 황정견(黃庭堅)이 쓴 '염계시서(濂溪詩序)'의 '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용릉의 주무숙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여 가슴속이 깨끗해서 마치 온화한 바람과 맑은 달빛 같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차면앙정운(次俛仰亭韻)-면앙정제영에서 차운하다(김인후)

 

蠶頭斗起壓平川(잠두두기압평천) 누에머리처럼 우뚝 솟아 큰 냇물 압도하니

一望風雲几席前(일망풍운궤석전) 앉은 자리 앞 경치가 한 눈에 바라다 뵈네

春半雜花紅亂映(춘반잡화홍난영) 한창 피어나는 봄꽃들엔 붉은색 번져가고

秋深列岫翠相連(추심열수취상련) 뭇산엔 가을 깊어가도 푸른 빛 이어졌으니

寒松不廢千年色(한송불폐천년색) 한겨울 소나무는 천년의 빛깔 버리지 않고

芳草渾凝三月煙(방초혼응삼월연) 향그런 풀엔 삼월 안개 자욱하게 끼었는데

問却桑麻邀野老(문각상마요야노) 시골 노인 마주쳐서 농삿일 여쭈어 보자니

怡然時復數觴傳(이연시복수상전) 환한 안색으로 가끔씩 술잔도 건네네 그려

 

內杖追隨會二難(내장추수회이난) 지팡이 들고 뒤따라서 이난을 만나고 보니

小亭高爽帶林巒(소정고상대림만) 산 가까이 높고도 탁 트인 정자였네 그려

風傳曉寺鍾聲遠(풍전효사종성원) 새벽 산사 먼 종소리 바람에 실려 오는데

雲接長空雁路漫(운접장공안로만) 구름 깔린 넓은 하늘엔 기러기 먼 길 가네

好月臨昏山更靜(호월임혼산갱정) 저물녘 이쁜 달 뜨니 산은 더욱 고요하고

疏篁搖曙露先乾(소황요서로선건) 새벽녘 대숲 흔들릴 제 이슬 먼저 마르네

蕭然自占閑中趣(소연자점한중취) 한가한 정취 나홀로 홀가분하게 차지하니

萬事悠悠莫我干(만사유유막아간) 만사가 느긋하여 나랑 상관없는 듯하구나

 

면앙정과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그 주변의 경치를 묘사한 뒤 자연에 동화되어 사는 삶의 즐거움을 읊은 시이다. '이난(二難)'은 현주(賢主)와 가빈(嘉賓) 즉 어진 주인과 좋은 손님 둘 다 얻기 어렵다는 말이다. 왕발(王勃)의 '등왕각서(藤王閣序)'에 '四美具二難幷(네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지고, 두 가지 어려움이 함께 하였다)'이라 하였다. '사미(四美)'는 양신(良辰), 미경(美景), 상심(賞心), 낙사(樂事) 또는 인(仁), 의(義), 충(忠), 신(信)  또는 음악(音樂), 진미(珍味), 문장(文章), 언담(言談)을 말한다.

 

이황과 김인후는 성균관 동창생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시를 한 편액에 나란히 새긴 것 같다. 김인후는 이황을 

‘영남에서 가장 빼어난 분으로서 문장은 이백(李白) 두보(杜甫)

 같고, 글씨는 

황희지(王羲之), 조맹부(趙孟頫)

의 필력이다'라고 칭송하였고, 이황도 김인후를 '함께 더불어 사귄 이로서 오직 하서뿐이다’라고 칭송했다.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선비였던 두 사람의 사귐은 매우 돈독했다. 

 

김인후 하면 뭐니뭐니해도 '자연가

(自然歌)'를 빼놓을 수 없다. 강호자연에 묻혀서 속세를 초탈한 선비의 삶이 절로 절로 느껴지는 시조다.  

 

 

자연가

(自然歌)-김인후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 절로 물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생긴 인생이라 절로 절로 늙어가리 

 

읊다 보면 절로 절로 노래가 되는 아주 쉬운 시조다. '자연가'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

, 또는 이황이 지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김인후의 문집인 '하서집'에 이 작품의 한역가(漢譯歌)가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작품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