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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송순의 면앙정을 찾아서 11

林 山 2017. 2. 23. 09:27

담양 면앙정 설경


윤두수는 '면앙정원운' 2수의 '전(前), 연(連), 연(烟), 전(傳)'에서 차운하여 지은 시 한 수와 '면앙정가' 한역시(漢譯詩)에서 차운한 오언율시 한 수를 지었다. 윤두수는 1587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면앙정을 다녀간 뒤 10년만에 다시 찾아와서 이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윤두수의 '차면앙정운' 편액


차면앙정운(次俛仰亭韻)-면앙정제영에서 차운하다(윤두수)


歲月茫茫不舍川(세월망망불사천) 세월은 아득히 강물처럼 흘렀는데

我來重想十年前(아래중상십년전) 내 다시 와서 십 년 전을 회상하네

一園花竹思君實(일원화죽사군실) 동산의 화죽은 군실을 생각케 하고

半畝池塘憶惠連(반묘지당억혜련) 뜰 앞 연못 보니 혜련도 생각나네

壁掛雲鵬猶有句(벽괘운붕유유구) 벽의 운붕에는 싯구라도 남았는데

灰寒丹竈更無煙(회한단조갱무연) 재가 식은 부엌엔 연기 다시 없네

人生到此渾如夢(인생도차혼여몽) 인생도 늙으면 모든 것 꿈 같으니

秘訣休言世上傳(비결휴언세상전) 전하는 비결 있다고 말하지 마소


시적 화자는 면앙정에 다녀간 10년 전을 회상하면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노래하고 있다. '군실(君實)'은 송나라 때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쓴 사마광(司馬光)의 자(字)이다. 그는 도덕성이 고결했고, 학문이 깊었으며, 뛰어난 정치가였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 개혁을 반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혜련(惠連)'은 중국 남북조시대 동진(東晋)의 대문장가 사영운(謝靈運)의 종제(從弟) 사혜련(謝惠連)으로 문장에 뛰어났다. 그가 남긴 대표작이 바로 눈을 노래한 '설부(雪賦)'다. '설부'는 중국문학사상 눈을 노래한 작품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차면앙정가운(次俛仰亭歌韻)-면앙정가에서 차운하다(윤두수)


舊宅空文藻(구댁공문조) 옛 집에는 유적도 텅 비었는데

斜陽匹馬來(사양필마래) 석양 무렵에 필마를 타고 왔네

 曾多長者轍(증다장자철) 옛날엔 장자의 수레 이어졌건만

 今作釣人隈(금작조인외) 지금은 사람들 낚시터가 되었네

 意氣風雲散(의기풍운산) 의기는 구름 바람처럼 흩어지고

湖山表裏開(호산표리개) 호수 산은 안팎으로 열려 있

謝公行樂處(사공행락처) 공이 즐기시던 곳 떠나려 하니

   華屋恨難裁(화옥한난재) 화려했던 집 영락함이 한스럽네 


10년 전에는 면앙정에 내노라하는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바람만 찾는 텅 빈집이 되어 있음을 탄식하고 있다. 세월의 무상함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시다.  

'사공(謝公)'은 중국 동진의 대문장가 사영운이다. 여기서는 송순을 비유한 말이다. '화옥(華屋)'은 '화옥산구(華屋山丘)'의 준말이다. '화려한 집이 산언덕으로 변하다.'의 뜻으로 인생의 무상함을 나타낼 때 쓰는 표현이다.

윤두수는 이황, 성수침, 이중호(李仲虎) 등에게 배웠다. 1587년에는 전라도관찰사가 되었고, 1591년에는 서인의 영수 정철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하다가 유배를 당할 때 함께 파직되어 함경북도 회령, 함경남도 홍원 등지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나 명대의 문징명체(文徵明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로는 '오음유고(梧陰遺稿)'와 '성인록(成仁錄)'이 있다.


이안눌은 1610년 담양부사로 있을 때 면앙정에 올라 '차벽상운(次壁上韻)'과 윤두수의 '차면앙정가운(次俛仰亭歌韻)'에서 차운한 오언율시를 읊었다. '차벽상운'은 '차면앙정운'과 같은 뜻이다. 이안눌은 담양부사로 1년 정도 재직하다가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담양부사 시절 그가 남긴 시가 전라도에 많이 남아 있다.  


이안눌의 '차벽상운' 편액


차벽상운(次壁上韻)-벽에 걸린 시를 보고 차운하다(이안눌)


名利關人勇退難(명리관인용퇴난) 인간사 명리에 과감히 물러나기 어려운데

廣平黃髮臥巖巒(광평황발와암만) 백발재상에서 여기 바위산에 누워 있구려

凭欄尙想懷全曠(빙란상상회전광) 난간에 기대 마음 비운 그 모습 떠올리니

題壁偏驚字已漫(제벽편경자이만) 저 벽 위 여유로운 글 너무나도 놀랍도다

山日欲沈嵐彩合(산일욕침람채합) 서산의 해가 안개 속에 잠기려 하는 차에

野花初綻雨痕乾(야화초탄우흔건) 빗자국 마른 곳에 들꽃 이제 갓 피어났네

九原可作鞭堪執(구언가작편감집) 공이 살아난다면 말고삐라도 잡고 싶거니

高義千秋直上干(고의천추직상간) 천추에 그 의리 하늘에 닿을 듯 높으니까


湖南形勝此山川(호남형승차산천) 여기 산천은 호남에서 경치 좋은 곳이니

 九邑峯巒一檻前(구읍봉만일함전) 정자 앞엔 아홉 고을 산봉우리 벌려 있어

謝屐平生頻夢想(사극평생빈몽상) 사극처럼 평생을 살겠노라 꿈꿨던 터라

習池暇日好留連(습지가일호류연) 습지 마냥 한가히 머물기를 좋아했던 곳

沙禽暝帶溪橋雨(사금명대계교우) 물새는 어두운 시내 다리에서 비를 맞고

 岸樹秋凝野店煙(안수추응야점연) 들 술집 연기 저 언덕 나무에 머무를 때라

不用老夫初着句(불용노부초착구) 애초에 이 노부가 쓴 글은 필요없을 게야

相公歌曲至今傳(상공가곡지금전) 면앙공의 노래가 지금껏 전해 오는데 뭐


畵甍高出竹陰幽(화맹고출죽음유) 용마루는 높고 대숲 그늘은 그윽한데

七曲靑山第一頭(칠곡청산제일두) 일곱 구비 청산 우뚝 솟아 제일봉일세

瑞石北來靑嶂合(서석북래청장합) 북쪽의 서석대는 푸른 산과 어울리고

佛臺西望夕嵐稠(불대서망석람조) 불대 서쪽 바라보니 저녁노을 짙구나

 隔溪紅雨桃花晩(격계홍우도화만) 개울 건너 붉은 복사꽃비 내리는 저녁

覆野黃雲麥穗秋(복야황운맥수추) 들을 뒤덮은 황운에 보리도 익어가네

想得扶藜俛仰日(상득부려면앙일) 지팡이 짚고 해를 바라보며 생각하니

羲皇世界信無愁(희황세계신무수) 복희의 세계에 근심이 없음을 알겠네


末二句用俛仰亭歌中之語 끝 두 구절은 면앙정가의 말을 쓰다.

萬曆三十八年庚戌孟秋上澣東嶽李安訥 만력 38년 경술(1610년) 초가을 상한에 동악 이안눌


벼슬길 50여 년만에 사직하고 재상직에서 물러나 자연에 귀의한 송순의 무욕의 삶과 높은 덕행, 그리고 여유롭고 뛰어난 글을 찬양한 시다. 송순이 다시 태어난다면 그의 말고삐라도 잡겠다는 표현과 면앙공의 글이 뛰어나기에 자신의 글은 쓸 필요도 없다는 표현에서 지은이의 겸손함을 읽을 수 있다. 


'광평(廣平)'은 당나라 때 심성이 고결하고 심지가 곧았던 것으로 이름난 재상 송경(宋璟)의 봉호인 광평군공(廣平郡公)의 약칭이다. 여기서는 재상의 뜻으로 쓰였다. '황발(黃髮)'은 '노인(老人), 기름기 없는 머리카락, 누른빛의 머리카락'의 뜻이다.


'사극(謝屐)'은 사공극(謝公屐)의 준말로 등산용 신발을 말한다. 남송(南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은 명산을 유람하면서 산을 오를 때는 나막신(屐)의 앞굽을 떼고, 산을 내려올 때는 뒷굽을 떼어 걷기에 편하도록 했다는 고사가 있다. 여기서는 송순이 강호에 뜻을 둔 사영운처럼 살기를 바랬다는 뜻이다. '습지(習池)'는 습가지(習家池)의 준말로 여기서는 면앙정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산간(山簡)은 양양(襄陽)에 있을 때 늘 습가지에 찾아가 술에 취했다는 고사가 있다. 흥겨운 주연(酒宴)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복황(羲皇)'은 복희(伏羲)를 말한다. 복희는 중국 전설상의 제왕으로 BC 29세기 경 뱀의 몸에 인간의 머리를 한 신비스런 모습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8괘(八卦)를 만들어 문자의 발전에 이바지했다고 전한다. 또, 그는 짐승을 길들였고, 백성들에게 요리법과 낚시법, 사냥법 등을 가르쳤으며, 결혼을 제도화했고, 야외에서 첫 천제를 올렸다고 한다. 여기서 '복황'은 송순을 비유한 것이다.


차면앙정가운(次俛仰亭歌韻)-면앙정가에서 차운하다(이안눌)


昔聽無等曲(석청무등곡) 그 옛날 면앙정 무등곡 들으려고

誰謂此亭來(수위차정래) 누가 이 정자에 왔다고 하였는가

鶴翼翻雲外(학익번운외) 학의 날개는 구름 밖에 펄럭이고

龍腰縮水隈(용요축수외) 용의 허리는 깊은 소에 웅크렸네

晩霞紅綺散(만하홍기산) 저녁노을은 붉은 비단을 펼친 듯

晴峀翠屛開(청수취병개) 산봉우리는 푸른 병풍을 펼친 듯

認是眞仙宅(인시진선택) 참으로 신선이 머물던 집이러니

吟懷不自裁(음회불자재) 시 읊으며 그 감회 누를 길 없네


면앙정 주변의 정경을 '학익(鶴翼)과 '용요(龍腰)', '홍기(紅綺)'와 '취병(翠屛)' 등의 댓구법과 대조법을 사용해서 멋지게 읊은 시이다. '무등곡'은 '면앙정가'이다. '진선(眞仙)'은 송순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이안눌은 당나라 현실주의 시인 두보(杜甫)의 시를 만 번이나 읽었다고 전한다. 그는 특히 당시(唐詩)에 뛰어나 조선의 이태백(李太白)이라고 불렸다. 그는 권필(權韠), 윤근수(尹根壽), 이호민(李好閔) 등과 교우를 맺고 시문을 주고받았는데, 이들의 모임을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고 한다. 그는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을 듣고 '문가(聞歌)'를 지었고,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동래부사로 부임해서는 조일전쟁의 상처를 담은 '동래사월십오일(東萊四月十五日)'을 지었다. 이안눌은 4,379수라는 엄청난 양의 시를 남겼다. 문집에 '동악집(東岳集)' 26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