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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송순의 면앙정을 찾아서 13

林 山 2017. 2. 23. 09:41

담양 면앙정에서 바라본 병풍산과 삼인산


정조의 '어제(御製)'는 1798년(정조 22) 호남 교준유생(校準儒生)들에게 내린 응제시제인 '하여면앙정(荷與俛仰亭)'과 부(賦) '장군수(將軍樹)', 그리고 책(策) 등이 판각되어 있다. 원본은 면앙집(俛仰集) 5권에 실려 있다.

 

정조의 '어제 하여면앙정' 편액


御製(어제)


湖南校準儒生應製試題. 正宗大王 二十二年 戊午 命設道科于光州, 時牧使 徐瑩修.(정조 22년 무오 광주목사 서형수에게 명하여 도과를 실시하라고 명했다.) 


詩 荷輿俛仰亭(시 하여면앙정)


解潭陽府誌曰: 宋純號企村, 二十登第, 文章標望, 爲世所宗. 歷事四朝 退老林下, 作亭家園岸上, 名曰‘俛仰亭’, 蓋俛仰宇宙之意也. 其愛君之誠, 多形於篇詠. 登第周甲日, 設宴于俛仰亭上, 如新恩時, 一道聳觀. 酒半修撰鄭澈曰, ‘吾儕爲此老荷竹輿可乎?’ 遂與獻納高敬命, 校理奇大升, 正言林悌, 掖上扶輿而下. 邑宰及四隣來會者隨之, 人皆嗟歎而榮之. 此實前古所未有之盛事也.(담양부지에 이르기를 송순의 호는 기촌인데, 20세에 급제할 정도로 문장은 당세에 표준이요 으뜸이었다. 4조에 걸쳐 벼슬한 뒤 관직에서 은퇴하여 고향의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면앙정이라 하였다. 면앙의 뜻은 우주를 두루 살펴본다는 뜻이다. 그의 임금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은 많은 시문에서 나타나고 있다. 등과한 지 60주년을 맞아 면앙정에서 베푼 잔치는 마치 급제에 올랐을 때처럼 온 전라도가 떠들썩하였다. 술이 어느 정도 취하자 당시 수찬 정철이 '우리가 어르신을 위해 죽여를 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헌납 고경명, 교리 기대승, 정언 임제 등이 남여를 메고 내려오자 각 고을 수령들과 사방에서 온 손님들이 뒤를 따르니 사람들 모두가 감탄하고 영광스럽게 여겼다. 이는 실로 옛날에도 없었던 성대한 행사였다.)


賦 將軍樹(부 장군수)


解全州府誌曰: 將軍樹在鉢山南, 穆祖爲兒嬉戲, 聚群童習陣法於大樹下, 時人名其樹曰將軍樹.(전주부지에 이르기를 장군수는 발산의 남쪽에 있다. 목조가 어린 시절 아이들을 모아 큰 나무 아래서 진법 놀이를 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 나무를 일컬어 장군수라고 했다.)  

箋 擬本朝群臣賀用周家祀后稷之禮, 建肇慶廟.(본조 여러 신하들이 주나라에서 후직을 모시는 예를 따를 것을 권하여 조경묘를 세웠다.)  

詩義 ‘我圖爾居, 莫如南土.’ 解見詩大雅崧高.('내가 네 거처할 곳을 도모하니 남쪽 땅만한 곳이 없도다.' 시경 대아 숭고에 보인다.)  


策(책)

 

王若曰: 湖南一路, 卽我朝興王之地也, 建宅肇慶, 有邰之家室也.…… 云云. 是年七月初七日, 俛仰八代孫允喆入湖南, 故家世族. 道薦抄啓中, 上特除武臣兼宣傳官, 引見入侍時, 上親問俛仰亭, 聖敎亹亹諄複, 恩眷隆重.(왕이 말하기를 호남 일대는 바로 우리나라의 왕업이 일어난 곳이다. 집을 짓고 정착을 하여 경사를 일으킨 일은 유태의 가실과 같고..... 운운. 올 칠월 칠일 호남에 들어와 여러 대에 걸쳐 세도를 누리고 있는, 면앙의 팔대손 윤철을 감사가 추천하자 임금이 특별히 무신 겸 선전관으로 임명하고 나서 친히 불러들여 면앙정에 대해 물으니 성은이 오래도록 두텁고 은총이 성대하다.)

崇禎一百九十七年 甲申八月 日揭(숭정 197년 갑신 8월 걸다)


1798년(정조 22) 정조는 도과(道科)를 광주에서 실시하라고 명했다. 도과란 조선시대 각 도의 감사(監司)에게 명하여 그 도에서 실시하던 특별한 과거였다. 당시 전라감사는 서정수(徐鼎修), 광주목사는 서형수(徐瑩修)였다. 시제는 ‘하여면앙정(荷與俛仰亭)’이었다. 


담양부지를 인용하여 송순의 호와 급제한 나이에 이어 문장이 뛰어났으며, 4조에 걸쳐 벼슬한 뒤 강호자연으로 은퇴하여 면앙정을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면앙정의 뜻과 송순의 회방연이 훌륭했음을 적고 있다. 송순의 회방연은 임금도 술과 꽃을 하사할 정도로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정조가 전라도 유생들에게 죽은 지 2백여 년이나 지난 송순의 일화를 과거 시험 문제로 출제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반증이 된다.  


고경명과 임제, 정철은 친구 사이다. 그런데, 편액에는 정철의 스승인 기대승도 송순의 남여를 직접 멨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기대승은 회방연이 열리기 7년 전인 1572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면앙집에서는 회방연을 빛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당대 조선 최고의 철학자 기대승의 이름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발산(鉢山)'은 전주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이씨왕조가 일어난 산이라 하여 발리산(發李山)이라고도 한다. '장군수(將軍樹)'는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穆祖, ?~1274) 이안사(李安社)가 어린 시절 발산의 남쪽에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진법(陣法) 놀이를 했다는 나무다. 지금의 전주시 완산구 교동에 있는 이목대(梨木臺, 전라북도기념물 제16호)이다. 


'후직(后稷)'은 전설상의 주나라 희씨(姬氏)의 조상으로 이름은 기(棄)다. 신농과 함께 중국 농업의 신으로서 숭배되고 있다. '조경묘(肇慶廟)'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 사공(司空) 이한(李翰)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숭고(崧高)'는 시경 대아편(大雅篇)에 나온다. 대아편은 주나라 왕실 조상들에 대한 찬양이나 주나라 왕실의 통치에 대한 미화가 주를 이룬다. '유태(有邰)'는 강원(姜源)의 어머니 유태씨(有邰氏)를 말한다. 강원은 고신왕(高辛王)의 첫째 부인으로 주나라의 시조 후직을 낳았다. 숭정 197년은 1824년에 해당한다.


'효사당기(孝思堂)'와 '제승정기(濟勝亭)', '차제승정운(次濟勝亭韻)' 후손 송경효(宋景孝)가 판액하여 면앙정에 걸어 놓은 것이다. 효사당(孝思堂)과 제승정(濟勝亭)은 송씨 집안에서 세운 정자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효사당기'와 '제승정기', '차제승정운' 편액


孝思堂記-新平宋氏世狀(효사당기-신평송씨세장)


欽之曾祖龜 乃公之高祖希璟之弟也. 欽謬陞一品, 追贈. 三世, 希璟之後, 三世不達, 而公亦以顯職, 追贈二品, 可謂孝思也已. 且公考, 常痛少孤失業, 而公承其志, 得君顯揚, 與我同被國恩, 公年齒猶芳, 他日所就, 詎可涯涘? 欽時年八十九 更復何望? (江寧君洪相公暹撰碣銘, 文純公退溪李先生滉書)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知義禁府事, 諱泰, 號孝思堂, 河西金先生作記, 聽松成先生書額, 而兵燼中逸而無傳此記. 俛仰公重創先堂時, 議政府左贊成, 判中樞府事, 孝憲公知止堂所製, 而亦逸全篇. 抵(低)有四五行載於崔公棄所撰俛仰先生行蹟中, 懼夫愈失而愈久, 盥抄登梓, 庸圖壽傳, 嗚呼![나 흠의 증조 구는 공의 고조 희경의 아우이다. 내가 외람되게도 일품 벼슬에 승진되어 삼대가 증직되었지만 희경의 후예는 삼대가 현달하지 못하다가 면앙공이 또한 현직으로 이품에 증직되었으니 효사라고 할 만하다. 또 공의 부친이 항상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가업을 제대로 일으키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했다. 이에 공이 부친의 뜻을 받들어 임금에게 신임을 얻어 이름을 드날려 나와 함께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 이때 공의 나이가 20세에 불과했으니 다른 날에 성취한 것이 어찌 작았겠는가? 나는 그때 나이가 89세였으니 다시 무엇을 바랐겠는가? (강령군 상공 홍섬이 묘갈명을 짓고, 문순공 퇴계 이황 선생이 글을 쓰다.)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휘 태, 호 효사당은 하서 김 선생이 기문을 지었고, 청송 성 선생이 편액을 썼는데, 병란 중에 잃어버려 기문이 전하지 않게 되었다. 면앙공이 선당을 중창할 때 의정부좌찬성, 판중추부사 효헌공 지지당이 기문을 지었는데 또한 전편이 일실되었다. 다만 최기 공이 지은 면앙 선생 행적 중에 4~5행이 실려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 잃어버릴까 두려워 손을 씻고 뽑아서 등재하여 오래도록 전하기를 도모한다. 아 아, 슬프도다.]


효사당은 송흠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면앙정 근처에 지은 정자다. 효사당이라는 정자 이름은 송순의 부친 송태가 지은 것이다. 기문은 김인후가 지었고, 글은 성수침이 써서 판액하였다. 효사당이 전쟁이나 난리로 소실될까 염려하여 송순의 행적에서 관련 일을 뽑아 기록했다는 내용이다. 신평송씨세장(新平宋氏世狀)에 기록된 내용을 판액한 것이다. 


제승정은 1551년 송순의 중제(仲弟) 송인(宋絪)이 지은 정자다. '제승정기'는 정자를 지은 해에 송순이 썼다. 송순은 정자의 주인 송인의 처지가 마치 불이 물 위에 있어 건널 수 없는 주역의 미제괘(未濟卦)와 같아 승구(勝區)사이에서 시를 읊으며 자취를 숨기고 있는 형국이라 '제승(濟勝)'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아울러 송순 자신도 강호자연에 은거하는 뜻을 밝히고 있다. '제승정기'는 면앙집에 실려 있다.  

 

'차제승정운'은 송인이 쓴 '제승정시'에 송순이 화답한 2수의 칠언율시다. 이 시는 면앙집에 '제제승정(題濟勝亭)'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면앙정에서 필자


면앙정에 정철의 시도 하나쯤 걸려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들러보았으나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정철은 면앙정의 말석에라도 낄 수 없었던 것일까? 정철의 '봉증면앙상공화교지운(奉贈俛仰相公和敎之韻)'이란 시가 여기 걸려 있음직도 하다.  


봉증면앙상공화교지운(奉贈俛仰相公和敎之韻)-면앙 상공의 화교한 운에 봉증하다(정철)


剔盡巖苔萬丈蒼(척진암태만장창) 만 길 바위벽에 푸른 이끼 깎아 내고

 暮年棲息有茅屋(모년서식유모옥) 늙어 만년 안식처라 띠집을 지었구려

 仙亭見說牛鳴外(선정견설우명외) 신선이 산다는 정자 가깝다 들었는데

 秋月春風興更長(추월춘풍흥갱장) 가을달 봄바람에 흥취 더욱 길어지네


송순의 따뜻한 가르침에 대하여 정철이 그 뜻을 받들어 지어 올린 시다. 시적 화자는 면앙정을 소박하게 묘사한 뒤 송순을 신선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봉증(奉贈)', '상공(相公)' 등에서 정철이 송순에 대해 극진한 예를 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면앙정을 떠나기 전 무언가 아쉬움에 다시 한번 되돌아보다. 문득 달 밝은 밤 송순을 비롯해서 소세양, 임억령, 양산보, 이황, 기대승, 김인후, 고경명, 박순, 임제, 정철 등 당대의 쟁쟁한 가객들이 모여 시를 읊고 시국을 논하는 정경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면앙정을 떠나며 시조 한 수 남기다.   


담양 땅 면앙정 호남제일 가단이라지

말석에라도 끼려 제월봉에 올랐더니

가객은 간 곳 없고 흰 눈발만 흩날리네


면앙정에 걸려 있는 한시 편액 중 마멸되어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은 담양군 윤재득 학예연구사의 도움으로 사단법인 담양향토문화연구회에서 펴낸 '향사의 맥 2'와 광주북구문화원역사문화해설사회에서 펴낸 '가사문화권 문화재 소개-제영(題詠)을 중심으로'라는 책을 참조했다. 이 글이 나오기까지 많은 도움을 준 담양군 윤재득 학예연구사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17.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