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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송순의 면앙정을 찾아서 7

林 山 2017. 2. 22. 12:39

1576년 5월 18일 84세의 송순은 당대의 대문장가 임제에게 면앙정을 빛낼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6월 16일에는 임제에게 글을 써 주어서 고맙다는 편지를 보냈다. 송순의 부탁을 받고 임제는 1576년 5월 18일~6월 16일에 '면앙정부(俛仰亭賦)'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 임제의 나이는 27세였다. 


담양 면앙정


산수(傘壽)가 지난 전직 재상(宰相)이 이립(而立)도 채 안된 청년과도 나이를 초월한 교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송순은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면앙정부(俛仰亭賦)-임제


큰 고을은 남쪽에 놓여 있고, 넓은 들판은 동쪽으로 펼쳐져 있네. 용이 서려 있는 일곱 구비요, 원래 아늑한 한 마을이었네. 경치가 빼어난 별유천지요, 바람과 달은 천만 년 한가로웠네. 


속인들의 발자취 몇 번이나 올라왔으련만 늙은 임의 눈에 보였네. 어린 시절부터  고기 잡고 놀았던 곳, 안개 속에 고결하게 보였네. 숲 우거진 언덕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이 내 몸 늙어서 다시 돌아와 이곳에 머물리라.'


처음 곽씨의 꿈은 헛되었고, 잡목만 우거진 터는 폐허가 되었네. 훌륭한 경치는 감춘 채 드러나지 않고, 나무꾼이 노래하고 목동이 피리 부는 곳이었네. 이상한 꿈은 은자(隱者) 때문에 끝이 나고, 한가한 구름은 벌써 신선을 기다리네.


인품은 맑고 경관도 고요하니, 두 가지 아름다움 모두 다 합해졌네. 뜻은 비록 유안(幼安, 후한의 처사 管寧)을 사모했으나, 명망은 안석(安石, 진나라 때 천하를 태평케한 대풍류객 謝安石)보다 정중했네. 조정에 나아가서 일 하시니 학들이 임의 가심을 아쉬워하였네.


학이 찾아와 노래하니 꽃도 좋고 대나무도 좋아. 거북이 꾀를 어찌 빌릴손가! 날아가는 새 모습을 빨리 구상하였네. 


지어진 정자의 모습은 사치와 검소의 중간이고, 유람객들은 산수의 아름다움을 다 보았다네. 난간에서는 갖가지 형상 다 펼쳐져 있고, 자리에서는 천리풍경이 다 바라보이네. 한번 굽어보고 한번 우러르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도다.


북쪽으로 멀리 허공을 바라보니, 추월산 봉우리에 가을달이 비치네. 안개가 걷혔다가 다시 끼니 아침저녁 수시로 변하는 모습이로세.


서울 소식이 막힌 지 얼마나 되었을까? 임금을 생각하니 옥 같은 모습일 거야. 벼슬길에 오르니 그윽한 회포를 일으키고, 은자(隱者)를 부르는 노래 한 곡조를 읊조리네. 남쪽을 바라보니 아스라하고, 들판은 넓고 하늘은 나지막하구나. 여울물은 아득하고 아득한데, 풀빛은 푸르름이 희미해지는구나.


스님이 돌아갈 제 석양이 저물어가니 먼 산에 저녁노을 분명히 그어 있네. 따뜻한 태양은 처음으로 돌아왔건만 겨울눈은 아직도 두텁게 쌓여 있네. 향기는 산비탈에 차가운데 매화에서 봄소식이 새나오는가.


작설차를 마시면서 거문고를 퉁기고, 유란곡(幽蘭曲, 전국시대 초나라 屈原의 제자 宋玉이 지은 幽蘭白雪曲)을 연주하지만 그 소리 아는 이 없구나. 청려장(靑藜杖) 짚고서 오갈 제 날마다 동풍이 불어오네. 버들은 찡그린 듯 푸르름이 짙어가고, 꽃은 웃는 듯 붉은 빛을 재촉하네. 꽃송이 꺾어 허리에 차고 산언덕에 외로이 서 있네. 새는 속절없이 울고 꽃향기는 희미해져 가는구나. 애달프다, 화사한 꽃 얼마나 갈 것인가! 쇠잔한 봄은 한 바탕 꿈 같은데, 비바람이 배꽃을 때리는구나.


그늘이 무성하니 물가가 숨어버렸고, 서리 조금 내렸는데 나뭇잎은 붉게 물들었네. 넘치던 물 떨어져 가을 물 차갑고, 구름이 걷히니 하늘이 맑도다.


반악(潘岳, 晉나라 때의 미남 시인)의 희끗한 귀밑머리 어찌 슬퍼하리오. 송옥(宋玉, 초나라 굴원의 제자)의 수심을 나는 하지 않으리. 술동이를 열어놓고 누구를 기다릴 것인가? 달과 더불어 기약이 있겠지. 은하수는 맑고 별빛은 저문데, 기러기 울음소리 서글프게 들려온다. 밤은 차츰 깊어가고 이슬은 떨어지니 신선이 사는 열두 요대(瑤臺)처럼 황홀하여라.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 향기를 맡으며, 도연명(陶淵明, 육조시대 송나라의 대시인)의 맑은 기풍을 생각하노라.


가을 소리 적막하니, 뜰에는 오동잎이 가득하다. 간혹 날씨가 흐렸다 맑았다 하여 이상한 것 같고,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하니 주렴을 길게 거두었네, 구경할 만한 경치가 많기도 많다. 잠깐 사이에 내린 소나기는 분명 우림(羽林, 은하수의 별들 중 대장군의 별, 궁궐 호위 무사)의 창과 같고, 만길 되는 무지개는 여와씨(女媧氏,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에 나오는 여신으로 伏羲氏의 아내 혹은 누이)의 돌을 방불케 하는구나. 절간의 종소리 멀리 들려올 제 앞산 노을은 어둑어둑하네. 아침 창문에 새 우는데 차가운 숲에는 햇살이 밝구나. 그윽한 일 또한 즐길 만하니 한 그루 구부정한 소나무 아래 앉아서 노노라. 나라를 근심하며 풍년 들기를 기대하노니 온 들녘에 누런 곡식을 즐거이 바라보누나.


악양루(岳陽樓, 중국 후난성 웨양시 서문에 있는 누각)는 보이지 않고, 등왕각(滕王閣, 장시성 난창에 있는 누각)은 이름만 들었는데, 오직 이 정자 홀로 호남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었네. 악양루기(岳陽樓記)를 지은 범희문(范希文, 송나라의 명신 范仲淹)은 떠나간지 오래고, 등왕각서(滕王閣序)를 지은 왕발(王勃, 당나라의 시인)은 다시 불러올 수 없도다.


주인 어른은 강호에서 지내며 펼친 풍류와 경륜, 한 조각 충성된 마음으로 세 분 임금을 모신 백발노인이네. 옛날 강태공(姜太公, 무왕을 도와 은나라 紂王을 멸하고 周나라를 세운 太公望)이 늙어서 출세했음을 생각하면 국가를 도모하는 일에 어찌 조금이라도 흔들리겠는가? 무릇 많은 인재가 조정에 가득하더라도, 속세와의 초연한 맹세 저버리기 어려우리. 


푸른 산이 우리 님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사직하는 글 조정에 던지셨지. 욕심이 없기는 한운(漢雲)과 같았기에 물고기와 새도 벼슬하신 분을 의심하지 않는구나. 정자의 모습은 변하지 않고, 풍경도 그대로일세.


수건을 질끈 매고 농군의 옷을 입고서 휘파람 불며 한가로이 서성이니 사안석(謝安石)처럼 풍악을 울리면서 공북해(孔北海, 후한 말기 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孔融으로 北海相을 역임함)와 같이 손님을 맞이하네. 이 정자에서 우러러 하늘을 보고, 머리 숙여 땅을 보니 이 산정에서의 삶이 더없이 좋구나. 이 정자에서 바람을 쐬고, 달을 구경하니 한 푼의 돈도 들일 것이 없구나. 학의 모습처럼 깔끔하고, 소나무 그림자처럼 건장하도다. 자하주(紫霞酒, 신선들이 마신다는 술) 마시면서 세월을 머물게 하고, 신선을 초청하여 함께 어울리네.


임제(林悌)는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주점에서 이름을 감추었네. 우습도다, 세상 사람들은 기상이 높은 나를 미치광이라고 하네. 매양 달 밝은 밤이면 그 노래를 읊조리며, 이 몸도 임의 곁으로 가고 싶은 게 소원이었소. 다행히 면앙 선생을 한번 찾아뵙게 되어 나의 많은 빚을 갚게 되었도다. 가냘픈 노래를 부르고 술잔을 기울이며, 휘파람 불며 외로운 등잔 아래 이별하였네. 산중에서 거처로 돌아오니 생각이 떠올라 하룻밤에도 아홉 차례나 혼이 따라갔다오.


부(賦)를 지으라는 면앙공의 부탁을 받았지만 나 이제 미사여구로 문장이나 꾸미는 보잘것없는 재주일세. 허나 공의 뜻을 저버리기 어려운 터라 지금 부득이 이 글을 짓노라. 아, 사람들은 인정에 이끌려 바깥으로 치닫고, 세상의 눈은 명리로만 빠지는데, 쳐다보고 굽어보는 사이에서 공은 홀로 즐거움이 있도다.


인간의 삶은 하늘과 땅과 함께 삼재(三才)라고 한다네. 마음은 허령(虛靈)하여 온갖 이치가 모두 갖추져 있거늘, 이제 돌아감에 하늘은 높고 땅은 넓은데, 눈을 들어 바라보니 상쾌하도다. 이 좋은 경치가 면앙공의 뜻에 어김이 있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하리. 나 누구와 함께 돌아갈 것인가? 진실로 이런 분과 같이 노닐고 싶어라.


송순은 사변적이어서 산문에 능한 기대승에게는 '면앙정기'를 부탁하고, 낭만적이면서도 호탕하여 운문에 능한 임제에게는 '면앙정부'를 부탁했다. 이처럼 송순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조선 최고의 풍류객 임제를 미치광이 취급했지만, 송순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면앙정부'는 면앙정 주변 산수의 아름다움과 그에 걸맞는 송순의 높은 인품을 중국 고사를 넘나들면서 호방하고 화려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시인은  기상이 높은 자신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미치광이 취급한다는 신세한탄도 하면서 자신을 알아준 그런 송순과의 교류를 진실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49년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會津縣, 지금의 다시면)에서 태어난 임제는 남인(南人)의 당수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외조부로 문장과 시에 뛰어난 천재였다. 그는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禮曺正郞)을 지냈으나, 선비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피를 튀기며 다투는 것을 보고 이를 개탄하였다. 스승 대곡(大谷) 성운(成運, 1497~1579)이 죽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채 조선 천지를 방랑하면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임제는 35세 때 평안도도사(平安道道使)로 부임하면서 개경의 명기 황진이(黃眞伊)의 묘 앞에서 관복을 입은 채 술잔을 올리고 조시(弔詩)를 지어 바칠 정도로 대단한 낭만주의자였다. 이 일로 그는 조정의 탄핵을 받고 파직을 당했다.  


청초 우거진 골에(임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임제는 감수성이 뛰어난 섬세한 사람이면서도 기개가 호방하고 담대한 사람이었다.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고나 할까? 이 시조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나온다. 


임제가 문과에 급제하고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한 부친 임진(林晉)을 뵈러 떠나던 날은 배를 띄울 수 없을 만큼 풍랑이 심했다. 그럼에도 그는 문과급제자에게 내린 어사화 두 송이와 거문고, 칼 한 자루만 들고 배에 오른 뒤 뱃전에 서서 유유하게 파도를 바라보며 이 시를 읊었다.  


기행(記行)-임제


거문고에 보검이면 길차림이 넉넉하건만

바둑판과 찻잔으로 세상일이 사그라졌네.

한강 어구에 지는 해는 기러기 따라 돌아가고

광릉의 연기와 달도 스님 따라 한가로워라.

파강의 비바람이 외로운 배에 몰아치니

용포의 솔숲 대숲이 하룻밤 내내 차가워라.

어촌에서 술 사 마시니 계절 더욱 아름다운데

옥경으로 돌아가는 길이 구름 사이로 보이네


큰 파도에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듯한 배 위에서 태연자약하게 시를 읊은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담대하고 낭만적인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임진은 부하 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태풍이 몰아치는 제주항에서 아들을 기다렸다고 한다. 무슨 일을 결심하면 꼭 하고야 마는 아들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사회는 임제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위대한 천재가 살기에는 너무 좁고, 답답해서 숨이 막히는 사회였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당쟁에 물들기 싫어서 한평생 풍류를 즐기며 살았지만 조일전쟁 당시에는 백의종군하면서 왜적을 물리친 호방한 무인이기도 했다. 죽음을 앞두고 자손들 앞에서 마지막 남긴 유언을 보면 그의 사나이 대장부다운 기개를 알 수 있다.


물곡사(勿哭辭)-곡하지 말라(임제)


四夷八蠻皆呼稱帝(사이팔만개호칭제) 사방의 모든 나라마다 황제라 부르는데

唯獨朝鮮入主中國(유독조선입주중국) 오로지 조선만 중국을 주인으로 섬기네

我生何爲我死何爲(아생하위아사하위) 이런 나라에 산들 어떻고 죽은들 어떠리

勿哭(물곡) (이런 지지리 못난 조선에 태어났으니 내가 죽더라도) 곡하지 말라

            

그의 유언은 무능한 조선의 지배계급인 왕과 벼슬아치들에 대한 통렬한 일침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천재 시인 임제를 미치광이라고 비웃었지만, 그는 오히려 그런 세상 사람들을 오히려 조롱하고 비웃었다. 우리나라 국어교과서에는 '물곡사(勿哭辭)' 같은 글이 실려야 한다.


임제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시도 썼다. 그의 시를 보면 당시의 세태가 지금의 세태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천재들이 요절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세상의 갑남을녀들이 옹졸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정신병자로 취급하는 것에도 있다. 천재들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면 얼마나 미치고 환장하겠는가! 그래서 천재들은 화병(火病)에 걸리기 쉽다. 임제도 그래서 요절했을 것이다.    


류별성이현(留別成而顯)-성이현과 헤어지며(임제)


 出言世爲狂(출언세위광) 말을 하면 미쳤다고들 하고 

緘口世云癡(함구세운치) 입을 다물면 바보라고 하네

所以掉頭去(소이도두거) 그래서 고개 젓고 떠나지만

豈無知者知(기무지자지) 어찌 알아줄 사람 없으리오


말을 하면 미쳤다고 하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바보라고 비웃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 울분을 토로하면서 미친 세상이 싫어서 떠나지만 언젠가는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나타나리라는 희망을 읊고 있다.   


임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애도시(哀悼詩)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죽음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소인배들이 우글거리는 속세에 더 이상 미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내 죽음을 스스로 슬퍼하다-임제


강한(江漢)의 풍류(風流) 생활 사십 년 동안

맑은 이름이 세상 사람들을 울리고도 남았네

이제 학(鶴)을 타고 티끌 그물을 벗어났으니

바다의 반도(蟠桃) 복숭아가 새로 익겠지


시적 화자는 강호를 유람하며 풍류 생활을 즐기면서 신선처럼 살아간 자신의 고결한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것이다. 이제 죽어서 신선이 되어 서왕모(西王母)의 정원에서 3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반도(蟠桃) 복숭아가 익으면 팔선(八仙)들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임제는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을 남겼다. 또, 문집으로는 '임백호집(林白湖集)'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