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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송순의 면앙정을 찾아서 4

林 山 2017. 2. 21. 16:42

1537년 김안로는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왕의 밀명을 받은 이조참판(吏曹參判) 윤안인(尹安仁)과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양연(梁淵)에 의해 체포되어 사사되었다. 당시 김안로는 허항, 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일컬어졌다. 김안로가 사사되자 송순은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에 제수되고, 1538년에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올랐으며, 이어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충청도어사(忠淸道御史)를 차례로 지냈다. 


담양 면앙정


1539년(중종 34) 봄 송순은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이어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4월에는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를 맞이했다. 1540년에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듬해에는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이어 대사헌 등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대사헌으로서 그는 척신(戚臣)과 결탁한 황헌(黃憲)을 탄핵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42년(중종 37) 50세가 된 송순은 윤원형, 황헌 등에 의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좌천되어 내려왔다.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그는 양산보가 소쇄원을 짓는 일을 도와주었다. 이때 '차능성동헌운(次綾城東軒韻)'을 지었다. 


차능성동헌운(次綾城東軒韻)-능성 동헌의 시를 차운하다 


重來何物不爲新(중래하물불위신) 다시 오니 어느 물건인들 새롭지 않으리오

舊事今經二十春(구사금경이십춘) 옛일이 어제인 듯 벌써 20여년이 지났으니

玉節休看垂老使(옥절휴간수노사) 옥부절 지닌 늙은 사신으로만 보지 마시라

 布衣曾是少年人(포의증시소년인) 베옷 입고 이곳에서 공부하던 소년이었다네


능성현(綾城縣)은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이다. 송순이 능성현을 방문했을 때 동헌에 걸린 시를 보고 운자(韻字)를 따서 지은 회고조의 시다. 27세에 벼슬길에 나아간 송순은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돌아왔다. 베옷을 입고 공부하던 송순의 어린 시절을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나 고향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전라도 최고권력자인 관찰사가 되어 내려온 그를 스스럼없이 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송순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자신을 예를 표해야 하는 관찰사로만 보지 말고 그 옛날 천자문을 옆에 끼고 코를 질질 흘리면서 서당에 다니던 동네 꼬마로 친근하게 봐달라는 것이다.       


1543년 50세의 송순은 병환으로 잠시 고향에 내려왔다가 곧 다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어 올라갔다. 1544년 가을에는 신회(申會), 김약회(金若晦)와 함께 능성현 운주사(運舟寺)를 유람했다. 그해 12월 모친상을 당했다. 이때 18세의 기대승은 송순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1545년(인종 원년, 명종 즉위년) 저 유명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 7월 인종(仁宗)이 죽자 그의 이복동생인 명종(明宗)이 왕위에 올랐다. 중종(中宗)의 3비 문정왕후(文定王后)는 오빠 윤원로(尹元老), 남동생 윤원형(尹元衡)에게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尹任)을 제거하라고 밀지를 내렸다. 윤임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였다. 인종의 상중에 을사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윤임의 대윤(大尹)과 윤원로, 윤원형의 소윤(小尹) 사이에 세자 교체를 두고 벌어진 권력투쟁으로 대윤파가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을사사화로 인해 많은 사림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를 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소윤을 등에 업은 우의정 겸 병조판서 이기(李芑)는 대윤파 정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다.  


을사사화로 또 다시 사림파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되는 것을 목격한 송순은 저 유명한 '상춘가(傷春歌)'를 지어 읊는다. '상춘가'를 '석춘가(惜春歌)', '을사사화가(乙巳士禍歌)'라고도 부른다.


상춘가(傷春歌)-봄을 슬퍼하는 노래(송순)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허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삼 하리오


'상춘가'는 을사사화를 비판하고 풍자한 시조다. 을사사화로 인해 화를 당한 선비들을 낙화, 간신배들을 바람에 비유해서 당시의 세상을 개탄하고 있다. 종장에서 다소 체념적인 시상이 엿보인다. 


'꽃이 진다'는 '선비들이 희생된다', '새들'은 '백성과 근심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바람'은 '사화을 일으킨 무리, 간신배'를 가리키고, '희짓는'은 '방해하는, 희롱하는, 심술부리는'의 뜻이다. '봄'은 '시대의 세태', 을사사화 같은 사건을 일으키고도 잘 살아가는 간신배들을 상징한다. '새와'는 '시샘하여, 시기하여'의 뜻이다. 


송순은 '상춘가'로 인해 또 한번 화를 당할 뻔했다. 당시 이 시조는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정권 치하의 우리나라 1970~80년대 운동권 노래나 금지곡처럼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던 모양이다. 어느 날 윤원형의 심복인 진복창(陳復昌)도 참석한 잔치집에서 한 기생이 '상춘가'를 읊었다. 이 시조를 들은 진복창은 불온한 노래라고 대노하면서 기생에게 어디서 배웠는지 추궁하였다. 그러나, 그 기생이 끝내 입을 열지 않아 송순은 겨우 화를 면했다고 한다.  


두 차례의 참혹한 사림의 화를 목격한 호남의 선비들은 사화를 피해 광주나 담양의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정자를 짓고, 문인 학자들과 어울려 선비정신을 다지면서 이른바 누정문학(樓亭文學)을 꽃피웠다. 광주와 담양에서 특히 정자문화가 발달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송순의 면앙정은 소쇄원, 서하당, 식영정, 환벽당,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 1583∼1623)의 명옥헌(鳴玉軒), 정철의 송강정(松江亭)과 함께 호남의 정자문화를 이끌었다. 식영정은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것이다. 이들 정자들은 강학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시적 교유의 무대이자 풍류가 넘치는 문화 교류 공간이었다. 


1547년(명종 2) 송순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라 '중종실록(中宗實錄)'을 찬수하였고, 이어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가 되었으며, 5월에는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北京)에 다녀왔다. 1548년에는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있으면서 개성 동문 밖 화담(花潭)을 유람하였다. 1549년에는 박연폭포(朴淵瀑布)를 유람하고, 개성부 서쪽에 역암정(㻛巖亭)을 지었다. 


1550년(명종 5) 대사헌에 이어 이조참판에 오른 송순은 탕춘대(蕩春臺)를 유람했다. 탕춘대는 연산군이 한양 장의문(藏義門) 밖에 지은 수각(水閣)으로 미회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가을 어느 날 명종은 대궐 정원의 황국화(黃菊花)를 꺾어 옥당관(玉堂官)에게 주며 가사(歌詞)를 지어 올리라고 명했다. 갑자기 명을 받은 옥당관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모습을 보자 마침 수직(守直)을 하고 있던 송순이 시를 지어 올렸다. 이에 명종은 송순에게 큰 상을 내렸다.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송순


풍상(風霜)이 섯거친 날에 갓 픠온 황국화(黃菊花)

금분(金盆)에 가득 다마 옥당(玉堂)에 보내오니

도리(桃李)야 곳이오냥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국화를 하사한 임금의 뜻에 따라 지조와 절개를 지키겠다고 다짐한 노래이다. 이 시조는 명종의 명을 받아 읊은 응제시(應制詩)로 '옥당가(玉堂歌)'라고도 한다. 응제시는 대개 한시로 짓는데, 그런 점에서 이 시조는 매우 특이하다. 


이 시조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 권14 가사조(歌詞條)에 나온다. 정철의 가사와 단가를 모은 '송강가사(松江歌辭)' 성주본(星州本)에는 정철의 작품으로 실려 있으나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 시조는 송순의 작품이 확실하다. 송순의 문집 '면앙집(俛仰集)' 권4 잡저편(雜著篇)에 한역가가 실려 있고, '진본 청구영언' 등에는 국문 시조가 전한다.   


'풍상(風霜)'은 바람과 서리로 온갖 역경, '국화'는 오상고절(傲霜孤節), 지조를 상징한다. '도리(桃李)'는 복사꽃과 오야꽃이다. 잠깐 피었다가 져버리는 꽃으로 예로부터 변절자를 상징한다.  


같은 해 송순은 영의정(領議政) 이기와 대사헌 진복창(陳福昌) 등에 의해 사론(邪論)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舒川)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평안도 순천(順川)으로 유배지를 옮겼으나 이듬해 사면을 받아서 풀려났다. 1552년(명종 7) 60세 때 송순은 담양부사 오겸(吳謙)의 도움을 받아 면앙정을 중건했다. 면앙정 증건이 끝나자 송순은 '하늘을 우러러보기도 하고 땅을 굽어보기도 하며 바람을 쐬면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으니 나의 소망이 이제야 이루어 졌다'고 매우 기뻐하였다. 


담양 면앙정 설경


면앙정 편액


사찰이나 서원, 누정에 가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이 당호(堂號) 현판(懸板)이다. 당호에 주인의 지향점이나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俛仰亭(면앙정)' 현판은 당대의 명필 성수침이 글씨를 썼다. 송순은 성수침이 사는 경기도 파주까지 찾아가서 현판 글씨를 받았다. 성수침은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당하자 벼슬의 뜻을 버리고 파주로 낙향하여 '청송(聽松)'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했다. 그는 자연에 묻혀 경서 특히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 등을 읽으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성수침의 아들 성혼은 정철의 오랜 친구였다. 성수침은 사후에 좌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과 물계(勿溪)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