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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정자기행] 송순의 면앙정을 찾아서 2

林 山 2017. 2. 21. 15:31

송순은 1519년(중종 14) 27세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했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조광조와 자암(自庵) 김구(金絿, 1488~1534)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이후 이런 대문장가는 없었다고 칭찬했다. 바로 그해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들이 조광조,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사림파(士林派)들을 숙청한 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사림파들이 중종반정(中宗反正) 공신 중 공이 없음에도 공신이 된 자들을 솎아 내야 한다고 주장하자 훈구파들은 이들이 붕당을 지어 왕권을 위협하고 국정을 농단한다고 주장했다. 중종은 훈구파들의 주장을 수용해 사림파들을 숙청했다. 


담양 면앙정


사림파의 숙청을 목격한 송순은 이를 비관하고 낙담한 나머지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는 시를 지었다. 그는 사림파의 개혁 정책이 실패하자 이를 매우 안타까와했다.   


날은 저물고 달은 아직 돋지 않아

뭇 볕이 다투어 반짝이는 저 하늘

산천의 기운은 가라앉아 가네.

그 누가 알랴, 이 속에서 홀로 아파하는 이 마음을


첫 구는 사림파의 숙청과 개혁 정책의 실패로 인한 암담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투어 반짝이는 뭇 별은 기세등등하게 날뛰는 훈구파, 가라앉는 산천의 기운은 국운, 또는 사람파의 몰락을 말하는 것일 게다. 시적 화자는 훈구파들 속에서 사림파의 몰락을 가슴 아파하고 있다. 송순은 훈구파들이 이 시에 자신들을 헐뜯는 뜻이 있다고 트집을 잡아 하마터면 큰 화를 당할 뻔했다고 한다.   


사림파가 몰락하자 김안로(金安老)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발탁되었다. 김안로는 자신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결혼하자 이를 배경으로 권력을 남용하였다. 좌의정에 오른 그는 동궁(東宮, 인종)의 보호를 구실로 권력을 장악해 허항(許沆), 채무택(蔡無擇) 등과 함께 여러 차례 옥사(獄事)를 일으켜 반대파들을 제거하였다. 김안로 일파에 의해 정광필(鄭光弼), 이언적(李彦迪), 나세찬(羅世纘), 이행(李荇), 최명창(崔命昌), 박소(朴紹) 등 많은 인물들이 사사(賜死)되거나 유배되었다. 경빈 박씨(景嬪朴氏)와 복성군 이미(福城君 李嵋) 등 종친도 죽음을 당했으며, 왕실 외척인 윤원로(尹元老)와 윤원형(尹元衡)도 실각했다.  


1520년(중종 15)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들어간 송순은 그해 가을 무등산을 유람하였다. 겨울에는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제수받았다. 1522년 1월에는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으나 봄에 파직되어 고향에 내려왔다. 고향에서 송순은 '자경(自警)'이란 시를 지었다.  


자경(自警)-스스로 경계함


悔生事去後(회생사거후) 일이 지나간 뒤에 후회하게 되니

 百廬無能爲(백려무능위) 백 번 생각하여도 능한 것이 없네 

心豈悔之府(심기회지부) 마음이 어찌 후회의 창고이리오?

事前當三思(사전당삼사) 일을 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해야지


송순 자신이 스스로를 경계하는 뜻이 담겨 있는 시다. 송순은 벼슬길에 오른 지 3년만에 파직을 당했다. 파직은 젊은 송순에게 벼슬길이 변화무쌍하고 위험천만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때의 경험과 깨달음이 송순으로 하여금 사화에도희생되지 않고 천수를 누릴 수 있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    


1523년 송순은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가 되었으나 그해 부친상을 당했다. 1524년(중종 19)에는 곽씨로부터 면앙정 터를 매입하였다. 1525년에는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이듬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올랐다. 1527년 여름 다시 파직되어 고향에 내려왔다가 그해 가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 올라갔다. 1528년에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올랐으나 이듬해 10월 다시 낙향했다. 1530년 경빈 박씨와 복성군 이미의 옥사(獄事)에서 송순은 박씨 모자를 변호하는 계(啓)를 올렸으며, 이듬해에도 사간으로서 박씨의 옥사를 저지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1533년(중종 28) 41세의 송순은 김안로가 권력을 휘두르자 낙향하여 면앙정을 세운 뒤 '면앙정삼언가(俛仰亭三言歌)'를 지어 부르고, '면앙정'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는 면앙정에서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읊으면서 4년 동안을 지냈다. 


송순은 학식이 뛰어나고 덕이 많아서 면앙정에는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1557),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1504~1547),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1525∼1597),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1601),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 등 당대 최고의 문인, 석학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시와 노래를 지으면서 호남 제일의 면앙정가단을 형성하고, 누정문학(樓亭文學)의 꽃을 피웠다. 


무등산(無等山) 주변의 광주와 담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가사문학권(歌辭文學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심에 바로 면앙정가단이 있었다. 면앙정가단은 이후 임억령의 식영정(息影亭)과 양산보의 소쇄원(瀟灑園), 김성원의 서하당(棲霞堂),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의 환벽당(環碧堂) 등의 성산가단(星山歌壇)과 함께 호남가단(湖南歌壇)을 형성하였다. 호남가단은 국문학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호남가단을 빼고서는 국문학사 자체를 논할 수 없을 정도이다.  


송순은 또 박우, 신광한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3∼1564),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 1498∼1551), 조계(棗溪) 정만종(鄭萬鍾, ?~?), 반곡(盤谷) 송세형(宋世珩, ?∼1553), 인재(忍齋) 홍섬(洪暹, 1504∼1585) 등과도 도의로써 교유하였다. 성수침, 성수종(成守琮, 1495∼1533) 형제는 양산보와 함께 조광조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다.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 중 한 사람인 성혼(成渾, 1535~1598)은 성수침의 아들이다.


송순이 교류한 인물들을 보면 당시 조선 최고의 학자, 문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송순은 인품이 너그럽고 의리가 있었으며,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귀었다. 이런 송순에 대해 성수침은 '온 세상의 선비가 모두 송순의 문하로 모여들었다'고 했으며, 이황은 '하늘이 낸 완인(完人)'이라고 칭송했다. 또, 청송(靑松) 심중량(沈仲良, 1658 ~ ?)도 송순에 대해 평하기를 '세상에 연연하지 않고, 시류에 따르지도 않으며, 천지를 면앙하여 터득함이 있는 분'이라고 하였다.    


‘면앙(俛仰)’이라는 이름에는 '면앙우주지의(俛仰宇宙之義)'의 뜻이 담겨 있다. 이는 곧 '맹자(孟子)' 진심장(盡心章)에 나오는 군자(君子)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남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는 구절과 상통한다. 면앙정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송순이 하늘과 땅 사이의 대자연에서 호연지기를 기르고, 자연을 관조하는 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불교의 극락세계나 도교의 신선세계와는 달리 조선의 유학자 사대부들에게는 내세관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에서 귀의처를 찾았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최고 이상으로 여겼다. 사계절의 반복순환을 통해서 사대부들은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영원성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면앙정삼언가(仰亭三言歌)'는 사대부 송순의 그러한 이상이 담겨 있는 시다.   


송순의 '면앙정삼언가' 편액


 면앙정삼언가(仰亭三言歌)-송순

 

俛有地仰有天(면유지앙유천) 굽어보니 땅이요 우러러보니 하늘이라

 亭其中興浩然(정기중흥호연) 그 가운데 정자를 지으니 흥취 호연하다

招風月揖山川(초풍월읍산천) 바람과 달 불러들이고 산천을 끌어들여

扶藜杖送百年(부려장송백년) 청려장 지팡이 짚고 한백년을 보내리라


이 시에는 벼슬에서 물러난 송순이 대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하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면앙정에서 천지인 삼재의 조화를 이루면서 대자연에 가득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호흡함으로써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선비로서의 떳떳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대학(大學)'의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좌우명으로 삼은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연에 묻혀 학문과 수양에 힘쓰는 한편 가정을 잘 건사하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으면 언제든지 관직에 나아가 덕치(德治)를 펼침으로써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루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송순이 면앙정을 짓고 거기서 살아가는 뜻은 그의 '면앙정잡가(仰亭三雜歌)'에 잘 나타나 있다. '면앙정잡가'는 1829년(순조 29)에 간행된 목활자본 '면앙집(俛仰集)' 권4 잡저편에 한역가(漢譯歌)만 실려 전한다. 이들 시에는 송순의 인생 철학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담겨 있다.   


면앙정잡가(俛仰亭雜歌) 2수-송순


추월산(秋月山) 가는 바람 금성산(錦城山) 넘어갈 제

들 넘어 정자 위에 잠 못 이뤄 깨었으니

일어나 앉아 맞은 기쁜 정이야 옛 임 본 듯하여라


탁 트인 정자에서 풍류를 즐기다가 미풍을 맞는 정회를 읊고 있다. 추월산 바람이 금성산을 지나 자신이 앉아 있는 면앙정에 불어오는 것을 맞이하면서 느끼는 기쁜 마음이 마치 옛 임을 보는 것처럼 반갑다는 것이다.  


송순의 '면앙정단가' 둘째 수는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을 비롯하여 많은 가집에 전하는데, 거의 무명씨의 작품이라고 하였다. '병와가곡집'에는 김장생(金長生)의 작품으로 밝혀 놓았다.


십년(十年)을 경영(經營)하야 초려삼간(草廬三間)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淸風) 한 간 맛져두고 

강산(江山)은 들일 듸 업스니 둘러 두고 보리라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강호자연에 묻혀 사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읊은 시다. 초가삼간(草廬三間)을 짓고 나에게 한 칸, 달에게 한 칸, 바람에게 한 칸씩 주고, 강산은 너무 커서 들일 수 없으니 집 주위에 둘러놓고 보겠다는 것이다. 자연에 묻혀 사는 은인(隱人)의 호방한 풍류와 한가로움을 노래한 안빈낙도가(安貧樂道歌)이다.


'면앙정단가(仰亭三短歌)' 7수는 자연에 동화되어 안분자족(安分自足)하는 시인의 초연한 심경을 노래한 시다. 이 시의 주제는 그의 장가(長歌)나 다른 시조들의 주제와 거의 일맥상통한다. 


면앙정단가(仰亭短歌) 7수-송순


머리를 숙여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하늘과 땅 사이에 내가 태어나 살면

계산(溪山)과 풍월을 거느리며 장차 함께 늙어가리라


아래로 땅, 위로 하늘 사이에 살면서 산과 물, 바람과 달을 벗삼아 늙어가리라고 읊고 있다. ‘면앙(仰)’의 뜻을 풀이한 시다. '면앙정삼언가'와 대동소이하다. 


넓고 넓은 들이여 냇물 또한 길고 길도다

눈빛 같은 하얀 모래 구름과 같이 펴 있구나 

할 일 없는 낚시군이여 해 지는 줄을 알지 못하누나


넓은 들, 긴 시냇물, 하얀 모래를 배경으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낚시하는 풍경을 묘사했다. 해 지는 줄도 모른다는 것은 세월도 잊고, 세상사도 잊었다는 것이다. 자연에 동화되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소나무 울타리에 솟은 달 대나무 가지에 이르러 굴러가는 듯 

거문고 안고서 바위가에 앉았는데 

어쩌다가 짝을 잃은 기러기 홀로 울며 가누나


소나무 울타리와 대나무 숲 위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면서 거문고를 타고 있을 때 짝 잃은 기러기가 외로이 울면서 날아가는 정취를 읊었다. '짝을 잃은 기러기 홀로 울며 가누나'에서 진한 외로움이 느껴진다. 


산은 병풍이 되어 들 밖에 들렀으니 

지나가는 구름들이 모두 자고 싶어 들어온다 

어찌하여 마음없이 지는 해 외로히 넘어가누나


들판 건너편 산등성이 위로 해가 넘어가는 광경을 그렸다.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서 지는 해는 장렬한 느낌을준다. 소멸, 죽음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소멸, 죽음의 심상 뒤에 찾아오는 고독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새는 잠자리를 찾아 날아들고 

새로운 달은 점차 솟아 오를 때였네 

외로운 나무 서있는 다리위에는 

저 스님이 홀로 가누나 

너이 절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종소리가 귀속에 들어온다


새는 잠자리를 찾아 제 집으로 날아들고, 새 달이 솟아오를 때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스님을 보고 읊은 시다. 여기서 스님은 강나루 건너서 밤길을 가는 나그네의 이미지다. 달 환하게 밝은 밤 범종소리 은은하게 들려오는 풍경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산 나루에 저녁노을 바라보소 

물고기 떼를 지어 뛰어논다 

오직 무심코 낚시를 지어 디루웠건만 

고기들은 조금도 의심이 없구나 

맑은 강물에 달이 장차 솟아나니 

이 사이에 흥미란 가히 헤아리지 못하겠어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강에서 낚시를 하면서 동녘에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그 감상을 읊었다. 시인은 맑은 강물에 비친 달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있다.  


하늘과 땅은 장막이고 

해와 달은 등불일세 

저 북해(北海)를 기울어서 

바다물에 그릇을 씻으리라 

남쪽 하늘 끝 노인성(老人星) 비치니 

장차 알 수 없지만 어두움 있을손가


하늘과 땅을 장막, 해와 달을 등불로 삼아 북해의 물로 그릇을 씻고 싶다는 심경을 읊었다. 시인의 호연지기가 물씬 느껴지는 시다. 노인성은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별로 수성(壽星)이라고도 한다. 노인성이 나타나면 세상이 태평하고, 나타나지 않으면 전란이 일어난다고 한다. 노인성이 나타났으니 자연 속에서 호기롭게 오래도록 살고 싶다는 소망을 담고 있다.  


'면앙정단가'는 면앙정 앞으로 펼쳐진 넓은 들판, 긴 시내와 흰 모래사장, 소나무 울타리와 대나무 숲, 하늘에 한가로이 떠가는 구름, 저녁놀, 저물녘의 종소리와 귀소하는 새들, 맑은 강에서의 낚시 등의 자연경관과 그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안빈낙도하는 시인의 풍류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들은 훗날 강호가도(江湖歌道)의 형성에 밑바탕이 되었다.


'면앙정단가'는 1829년(순조 29) 간행된 목활자판 '면앙집(俛仰集)' 권4 잡저편에 한역가(漢譯歌)만 실려 전한다. 이 중 제5수는 '송강가사(松江歌辭)', '청구영언(靑丘永言)' 등 여러 가집에 실려 전한다. 작자는 대부분 무명씨로 되어 있고, '병와가곡집'과 '대동풍아(大東風雅)'에는 정철로 되어 있다. 고려대학교 소장본 '악부(樂府)'에 이와는 또 다른 한역가가 전한다. 제7수는 '병와가곡집'을 비롯한 많은 가집에 전하는데, 대부분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작품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