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적 명산 명승지

담양 가사문학관을 찾아서

林 山 2017. 2. 15. 19:11

담양읍내 영산강변의 관방제림(官防堤林, 천연기념물 제366호)을 돌아본 뒤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한국가사문학관(韓國歌辭文學館)을 찾았다. 가사문학관은 원봉(342m)에서 최고봉(493m)을 지나 까치봉(424m)으로 이어지는 성산(星山, 별뫼)의 서남쪽 산발치, 광주호 상류 바로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입장료는 성인 2,000원이다.  


가사문학관


담양은 조선의 가사문학이 꽃을 피웠던 고장이다. 담양에는 월봉(月峰) 이서(李緖, 1482~?)의 '낙지가(樂志歌)', 기촌(企村) 송순(宋純, 1493~1582)의 '면앙정가(俛仰亭歌)',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성산별곡(星山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정식(鄭湜, 1661~1731)의 '축산별곡(竺山別曲)', 남극엽(南極曄, 1736〜1804)의 '향음주례가(鄕飮酒禮歌)', '충효가(忠孝歌)', 유도관(柳道貫, 1741~1813)의 '경술가(庚戌歌)', '사미인곡(思美人曲)', 남석하(南碩夏,1773~1853)의 '백발가(白髮歌)', '초당춘수곡(草堂春睡曲)', '사친곡(思親曲)', '원유가(願遊歌)', 정해정(鄭海鼎, 1850〜1923)의 '석촌별곡(石村別曲)', '민농가(憫農歌)', 작자 미상의 '효자가(孝子歌)' 등 18편의 가사가 전승되고 있다. 그래서, 담양을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 부른다. 


2000년 10월에 완공된 가사문학관에는 송순의 '면앙집'과 정철의 '송강집', 담양권 가사 18편, 가사 관련 도서 4,500여권과 유물 200여점, 목판 535점 등 귀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사문학관 바로 북서쪽에는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식영정(息影亭,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37호), 남서쪽에는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의 환벽당(環碧堂, 대한민국 명승 제107호), 남동쪽에는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1557)의 소쇄원(瀟灑園, 대한민국 사적 제304호)이 있다.


명창 박동실 기념비


가사문학관 마당 한켠에는 명창 박동실(朴東實, 1897~1968)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박동실은 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관리(호적은 담양읍 객사리 241)에서 부 박장원(朴壯元)과 모 배금순(裵今巡)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조부는 판소리 명창 배희근(裵喜根)이다. 


서편제 명창 김채만에게서 소리를 배운 그는 1909년 12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광주 양명사(陽明社) 창극에 참여해서 춘향 역을 맡았다. 1910∼1935년까지 박동실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화순협률사, 리리협률사, 부안협률사 등의 창극 공연에 활발하게 참여했고, 1936∼1945년까지는 청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공기남, 임소향, 조상선 등에게 판소리를 가르쳤다. 또 박석기의 후원으로 김소희, 한애순에게 심청가를 전수했다. 1939년 오케 레코드에서 '흥보치부가'와 단가 '초한가'를 취입하였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이 되자 창작 판소리 '열사가'를 지었다.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던 박동실은 한국전쟁 중인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 안기옥, 정남희, 조상선, 임소향, 공기남 등과 함께 월북하였다. 월북 이후 창극 '춘향전', '리순신장군'을 만들었으며, 단가 형식의 '김장군을 따르자'를 창작하기도 했다. 이후 활발한 창작 활동으로 판소리 '녀성영웅 주옥희', '보천보출진', '해군영웅 김군옥' 등 9편, 장가 '조국해방실천사', '새로운 조국', '사회주의 좋을시구', '승리의 10월' 등 10편, 단가 '해방의 노래', '단결의 노래', '금강산 휴양의 노래' 등 수십 편을 작곡했다. 


1954~1956년 박동실은 예술단을 이끌고 중국을 순회하면서 창극 '춘향전', '심청전'을 공연하였다. 1956년 평양음악대학 교원으로 임명되었으며,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판소리의 쐑소리(수리성)를 버리고 맑은 목을 쓰는 주체창법으로 전환하였다. 같은 해 전쟁고아 박영선과 박영순을 자녀로 입양하였다. 1958년에 공훈배우, 1961년에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1967년에는 개성 관음사에서 공기남, 임소향, 조해숙, 신우선 등에게 판소리 5바탕을 재전수하여 녹음하였다. 1968년 12월 4일 향년 71세로 작고했다. 


박동실은 구성진 수리성을 내는 목소리를 지녔고, 정교하고 치밀한 소리를 구사하였다. 특히 그는 한국의 초창기 창극과 창작 판소리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날치-김채만에 이어 박동실-김소희, 한애순으로 전승된 심청가는 대표적인 서편제 판소리 바디로 꼽힌다. 박동실은 창극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에서 현실의 모순을 민감하게 반영한 리얼리스트였다.


박동실은 '하얀 나비', '이름 모를 소녀' 등으로 유명한 천재가수 김정호(본명 조용호)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박동실의 차녀 박숙자가 바로 김정호의 어머니이다. 박숙자도 국악인이었는데, 부친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걸어온 험난한 예술인으로서의 길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김정호는 결국 한국 포크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에게도 외조부로터 내려온 예술가의 피가 흘렀던 것이다.


박동실은 비록 월북한 예술가이지만 담양인들은 그의 공적을 기려 기념비를 세워 주었다. 아게 바로 호남인, 호남정신, 호남문화의 저력이 아닌가 한다.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


가사문학관 일층 로비에는 송순의 '면앙정가'와 정철의 '성산별곡'을 붓글씨로 쓴 대형 액자가 갈려 있다. 송순은 가사문학의 씨를 뿌인 사람이고, 정철은 가사문학의 꽃을 피운 사람이다. 송순과 정철 사이에 식영정4선(息影亭四仙)으로 일컬어지는 임억령과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1525∼1597),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있다. 식영정 사선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 네 사람이다.   


눌재 박상 전시관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 전시관에는 그의 초상과 문집인 '눌재집(訥齋集)', 목판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고, 1688년(숙종 1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송순은 1513년 21세 되던 해부터 1514년까지 담양부사 박상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박상의 아우 육봉(六峰) 박우(朴祐, 1476∼1547)에게서도 배웠다. 박상은 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여 호남 사림의 종주가 된 학자이다. 문집에 '눌재집'이 있다.  


기촌 송순 전시관


기촌 송순 전시관


담양에서 쓰인 가사 18편


기촌 송순 전시관


기촌 송순 전시관


면앙정 회방연도


송순 전시관에는 '면앙정(俛仰亭)' 현판, 교지, 시호장, '분재기(分財記)', 표문, '면앙집', '면앙정가', 잡가, '면앙집 속편', '회방연도(回榜宴圖)', '면앙정삼언가'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 가사문학의 원조답게 정철과 더불어 전시 공간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


송순은 41세 되던 해인 1533년(중종 28)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면앙정을 세웠다. 면앙정에는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 1486∼1562), 임억령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양산보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1504~1547),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 김성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 고경명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1601), 정철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 등 당대 조선의 최고 문인 학자들이 출입하면서 호남 제일의 면앙정가단(俛仰亭歌壇)을 형성하였다. 면앙정가단은 이후 호남의 성산가단(星山歌壇), 영남의 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과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 승평계(昇平契) 등의 효시가 되어 조선 누정문학(樓亭文學)의 꽃을 피웠다.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에 묻혀 자연을 예찬하는 작품들을 많이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면앙정삼언가', '면앙정제영(俛仰亭題詠)' 등 한시 505수와 부 1편를 남겼다. 또,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면앙정단가',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 '오륜가(五倫歌)' 5수 등 단가와 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의 시가문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의 시조 '오륜가'는 주세붕(周世鵬)의 '오륜가'와 함께 후에 정철의 시조 '훈민가(訓民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문집으로는 '면앙집(俛仰集)'이 있다. 


석천 임억령 전시관


임억령 전시관에는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 판액, 문집 '석천집(石川集)', 서석한운(瑞石閑雲) 시, 목판, 술잔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임억령도 박상 형제에게 글을 배웠다. 서하당 김성원은 임억령의 사위다. 


1557년에 담양부사를 지낸 임억령은 담양 식영정 계곡에 살면서 송순,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1493∼1564), 김인후, 고경명, 임제, 양산보, 기대승, 옥봉(玉奉) 백광훈(白光勳)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호남문단의 중진으로 정철, 김성원, 고경명과 더불어 식영정4선으로 불렸다. 또, 안방준, 김인후와 더불어 호남3고(湖南三高), 최부, 류희춘, 윤구, 윤선도, 백백웅과 더불어 해남6현(海南六賢)으로도 불렸다. 


임억령은 민중에 대한 사랑을 예술로 승화한 시인이다. 그가 지은 '송대 장군가'는 고려 말 송 장군을 추모한 서사시이다. 그는 3천여 수의 한시를 남겼다. 문집에는 '석천집(石川集)'이 있다. 


임억령의 묘소는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에 있다.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과 해남의 석천사(石川祠), 해촌사(海村祠), 창평 성산사(星山祠)에 배향되었다.


소쇄옹 양산보 전시관


양산보 전시관에는 '소쇄원도(瀟灑園圖)' 판액, 제월당(霽月堂)과 오곡문(五曲門) 현판, 양씨 집안의 문집인 소쇄원사실(瀟灑園事實) 등이 전시되어 있다. '霽月堂'과 '五曲門' 현판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담양 창평에서 태어난 양산보는 15세 때 한양으로 가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성균관 유생들의 우상이었던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19년 17살 때 현량과에 합격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등용되지는 않았다. 그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스승 조광조가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가게되자 유배지까지 따라갔다. 그해 겨울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자 충격을 받은 나머지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소쇄원을 짓고 스스로를 소쇄옹이라 하였다. 소쇄원은 1528년까지 정자 한 채만 있었고, 그의 말년에 이르러 '원(園)'을 갖추었으나 별서원림(別墅園林)을 직접 완성하지는 못하고 죽었다. 


지금의 소쇄원은 조일전쟁 때 불탄 것을 그의 손자인 양천운(梁千運, 1568∼1637)이 1614년에 재건한 것이다. 소쇄원 경영에는 송순과 김인후 등도 참여했다. 송순은 10살 어린 양산보와 고종사촌, 김인후는 양산보와 사돈 간이었다. 임억령과 김윤제 등도 소쇄원을 드나들며 풍류를 즐겼다. 양산보는 '효부(孝賦)'와 '애일가(愛日歌)'를 남겼다. 


하서 김인후 전시관


김인후 전시관에는 '소쇄원사십팔영(瀟灑園四十八詠)' 판액, '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 '하서선생속집(河西先生續集)', '하서필적(河西筆跡)', '침계문방(枕溪文房)', '상암대기(床巖對琪)', '옥추횡금(玉湫橫琴)' 등이 전시되어 있다. 


김인후는 전라남도 장성 출신이다. 1519년(중종 14)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小學)'을 배웠다.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이때 이황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공부했다. 1545년(인종 1)인종이 죽은 직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장성으로 귀향하여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그는 조정의 부름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김인후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의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 논쟁에 대하여 김인후는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의 견해에 동조하였다. 그는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수양론에 있어서 김인후는 성경(誠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노수신(盧守愼)과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에 대한 논쟁에서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고,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김인후는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律曆) 등 다방면에 정통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정철, 변성온(卞成溫), 기효간(奇孝諫), 조희문(趙希文), 오건(吳健) 등이 있다. 그는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다.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김인후는 1796년(정조 20)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해동의 염계(廉溪)', '호남의 공자'로 불렸던 그는 호남인 중 유일하게 해동18현(海東十八賢)에 들어간 사람이다.  


서하당 김성원 전시관


김성원 전시관에는 '성산계류탁열도(星山溪柳濯熱圖)' 판액과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 '헌작북당시월미명우역작작가(獻酌北堂時月微明雨亦作作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서하당유고'에는 서문 '성산계류탁열도'와 한시, 부록으로 한시 '식영정십이영(息影亭十二詠)', 정철의 '성산별곡'과 그 한역가(漢譯歌), 단가(短歌) '헌작북당시월미명우역작작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성산별곡'은 정철이 25세 때 김성원을 위하여 지어 준 것이라고 한다.  


김성원은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7세 때 아버지는 잃고 숙부에게 수학하여 1551년(명종 6) 향시(鄕試)에 일등으로 합격했다. 그는 정철(鄭澈)과 특계(特契)를 맺고 '근사록(近思錄)'과 '주역' 등을 공부하였다. 


1592년 제1차 조일전쟁(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가관(同福假官),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있으면서 의병과 군량을 모으는데 큰 공을 세웠다. 1596년 조카 김덕령(金德齡)이 무고(誣告)로 옥사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숨어 살았다. 1597년 제2차 조일전쟁(정유재란) 때 어머니를 업고 피난하던 중 성모산(聖母山)에서 왜군을 만나자 부인과 함께 몸으로 어머니를 보호하다 살해되었다.


김성원은 '성리서(性理書)', '주역'에 대하여 깊이 연구한 학자였다. 그는 시로도 이름이 높아 '식영정잡영(息影亭雜詠)', '척서도(滌署圖)' 등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저서로는 '서하당유고'가 있다.


제봉 고경명 전시관


고경명 전시관에는 '면앙정삼십영' 판액과 '제봉집(霽峰集)', '서석록(瑞石錄)', 목판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봉집'은 문집이고, '서석록'은 무등산 기행문이다.  


고경명은 1552년(명종 7) 진사가 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장원했다. 공조좌랑과 전적, 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를 했다. 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부교리를 거쳤다. 1563년 교리로 있을 때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하는 데 참여하고, 그 경위를 이량에게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직되었다. 1581년(선조 14) 조정의 부름을 받아 영암군수가 되고 승문원판교를 거쳐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세자 책봉문제로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1592년 조일전쟁이 김천일(金千鎰), 박광옥 등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리자 6천여 명의 의병군이 담양으로 모여들었다. 6월 1일 북상을 개시하여 6월 13일 전주, 22일 여산, 27일에는 은진에 도달했다. 그러나 왜적이 호남으로 쳐들어올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방향을 돌려 7월 1일 연산으로 갔다. 7월 10일 곽영의 관군과 금산에서 합세하여 왜적과 싸우기로 하고 8백여 명의 정예부대로 선제공격을 했다. 그러나, 겁에 질린 관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뿔뿔이 도망갔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仁厚)와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 등과 전사했다.


고경명은 시는 물론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제봉집', '서석록',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正氣錄)' 등이 있다. 그는 광주 포충사(褒忠祠), 금산 성곡서원(星谷書院), 종용사(從容祠), 순창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송강 정철 전시관


송강 정철 전시관


송강 정철 전시관


송강 정철 전시관


송강 정철 전시관


송강 정철 전시관


송강 정철 유필


정철 전시관에는 '송강집(宋江集)', '문청공연행일기(文淸公燕行日記)', '문청공유사(文淸公遺詞)', '백세보중(百世葆重)', '송강유고(宋江遺稿)', 송강선조유필(松江先祖遺筆), 백세진보(百世珍葆), 백세유장, 송강서원 현판, 사액축문, 임금이 하사한 옥배와 은잔, 송강집 목판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가사문학관에서 정철의 유물이 가장 많이 전시되어 있다.  


정철은 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서 돈녕부판관 정유침(鄭惟沈)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다. 그의 누이가 인종의 숙의(淑儀, 왕의 후궁에게 내린 종2품의 작호)였고, 막내누이가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궁중에 출입했다. 이때 동갑인 경원대군(慶源大君, 훗날의 명종)과 친하게 지냈다.


정철의 나이 10살 때인 1545년(인종 1, 명종 즉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돼 부친 정유침은 함경도 정평(定平), 맏형 정자(鄭滋)는 광양(光壤)으로 유배당했다. 1547년(명종 2) 을사사화의 여파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터지면서 정철의 부친은 경상도 영일(迎日)로 유배됐고, 그의 맏형은 장형(杖刑)을 받고 귀양을 가던 중 3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정철은 부친을 따라 유배지에서 생활을 했다.


1551년(명종 6) 정유침은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유배에서 풀려나자 조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였다. 정철은 창평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 년을 보냈다. 이때 정철은 송순, 김인후, 기대승, 양응정(梁應鼎)에게 학문을 배웠고, 임억령에게 시를 배웠다. 또,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 같은 당대의 선비들과도 교유했다. 


1552년(명종 7) 17세에 정철은 문화유씨(文化柳氏) 유강항(柳强項)의 딸과 결혼하여 4남2녀를 두었다. 1560(명종 15) 25세 때 가사 '성산별곡'을 지었다. '성산별곡'은 성산(星山, 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지은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풍경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1561년(명종 16) 정철은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성균관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지평에 임명됐다. 이어 좌랑, 현감, 도사를 지내다가 1566년(명종 21) 31세에 정랑, 직강, 헌납을 거쳐 지평이 됐다.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와 함께 젊은 문관 가운데 휴가를 주어 학업만을 닦게 하던 서재인 호당(湖堂)에 뽑혔다. 이어 수찬, 좌랑, 종사관, 교리, 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1570년(선조 3) 35세 때 부친상,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40세인 1575년(선조 8) 정철은 시묘살이를 끝내고 벼슬길에 나가 직제학, 성균관사성, 사간 등을 역임했다.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에 있을 때 선조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인 1578년(선조 11)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 해 11월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선조 13)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정철은 전라도관찰사, 도승지, 예조참판, 함경도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하고, 1583년(선조 16) 48세 때에는 예조판서로 승진했다. 1584년에는 대사헌이 됐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했다. 이때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 한시 등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많은 작품을 지었다.


1589년(선조 22) 정철이 54세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죽이고, 동인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정철의 주동으로 호남에서 1천여 명, 영남에서 수백여 명의 선비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때 호남의 선비들은 씨가 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철은 1590년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591년 56세 때 세자 책봉과 관련된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정철은 동인의 거두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됐다. 함경도 명천(明川)에 유배됐다가 다시 진주(晋州)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진 지 사흘 만에 또 다시 강계(江界)로 귀양지를 옮겼다. 


1592년(선조 25) 57세 때 조일전쟁이 일어나자 정철은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해서 의주까지 호종했다. 왜군이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그는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서 살다가 58세로 죽었다.  


정철의 작품으로는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주문답(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短歌雜篇)' 32수, '성은가(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정철의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松江歌辭)'가 있다. '송강집'은 1894년(고종 31)에 간행한 것이다. '송강가사'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 의성본(義城本), 관북본(關北本), 성주본(星州本), 관서본(關西本) 등이 알려져 있다.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다. 성주본과 이선본(李選本) '송강가사'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가 있다.


정철은 임금에 대한 사모와 충성을 다짐하는 내용의 작품을 많이 썼다. 또, 백성을 사랑하는 내용이나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작품, 강호 산수의 자연미를 노래한 작품들도 있다. 그외 선취(仙趣)적 기풍과 멋스런 호방함을 담아낸 작품도 썼다. 정철의 작품에는 당시 사대부의 정신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정철은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됐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정철에게 숙청을 당한 호남 선비들의 후손들은 아직도 그를 피에 굶주린 잔악무도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2층 전시실에는 허난설헌(許蘭雪軒)의 '규원가(閨怨歌)'를 비롯해서 '연화산(蓮花山) 화전가(花煎歌)', '한별곡(恨別曲)', 계녀가(戒女歌)' 등 규방가사(閨房歌辭)가 전시되어 있다. 그외 '화전가', '서낭자석별가', '상명가라', '사향곡', '도산별곡', '우미인가라', '도덕가라' 등의 가사도 전시되어 있다. 


내방가사(內房歌辭), 규중가도(閨中歌道), 규방문학(閨房文學), 규중가사(閨中歌辭)라고도 한다. 규방가사는 조선 영조대부터 영남지방의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유행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거의 사라진 문학 장르다. 부녀자들이 국문을 익히고 교양을 쌓는 데 쓰였던 규방가사는 한편으로 욕구와 불만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2017. 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