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24주기를 맞아

林 山 2018. 11. 5. 17:32

2018년 11월 3일 통영에 내려간 날은 공교롭게도 독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한국) 출신의 현대 음악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 윤이상(尹伊桑)이 세상을 떠난 지 2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24주기를 맞아 그의 통영 생가와 기념관, 묘소 등지를 돌아보았다. 


윤이상기념관의 윤이상 사진


1917년 9월 17일 산청군 시천면에서 아버지 윤기현과 어머니 김순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족과 함께 통영으로 이주한 윤이상은 통영군 충무면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내다가 통영면에서 성장했다. 통영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인 그는 열세 살 때에 바이올린과 기타를 배우고 작곡도 하기 시작했다. 윤이상은 동네 영화관에서 자신이 만든 곡이 연주되는 것을 듣고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통영협성상업학교에 진학했지만 음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윤이상은 2년 뒤 서울로 올라가 군악대 출신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화성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에서 악보를 보며 서양 고전음악을 독학했다.


1935년 상업학교에 진학하면 음악을 공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식민지 종주국 일본 오사카의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이어 오사카 음악학교(大阪音樂學校)에서 첼로와 작곡, 음악 이론 등을 배웠다. 그는 이때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거주지에 살면서 억압과 차별에 시달리는 동포들을 바라보며 정치와 사회, 역사 의식을 갖게 됐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와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윤이상은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냈다. 1939년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노우치 도모지로(池内友次郎)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1941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귀국한 윤이상은 1943년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 비밀결사에 가담했다가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으며, 1944년에는 조선가곡 악보가 발각되어 두 달 간 감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에는 서울에서 결핵으로 쓰러져 경성제대병원에 입원 중 미국의 원폭 투하와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통영으로 돌아온 윤이상은 유치환, 김춘수, 정윤주 등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자신은 음악부문을 맡았다. 이때 그는 통영고등학교를 비롯해서 통영에 있는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다. 고려대학교 교가도 윤이상이 작곡했는데, 가사는 조지훈이 썼다. 전쟁고아들이 일본에서 부산으로 몰려들자 윤이상은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었다.


통영 국제음악당


1948년 윤이상은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다가 부산사범학교로 옮겨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을 했다. 1949년 8월 해방 조국 부산에서 '고풍의상', '달무리', '추천' 등이 수록된 가곡집 '달무리'를 출판하였다. '고풍의상'이나 '추천'등은 1960년대에 많이 불렸던 노래들이다. 1950년 1월 30일 같은 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이수자와 결혼했다. 그해 8월 첫 딸 윤정이 태어났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의 전시작곡가협회에서 활동하고 부산고등학교에서 재직하다가 1953년 휴전이 되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윤이상은 서울대학교 예술학부와 경희대, 숙명여대,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면서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4년 전시작곡가협회의 후신 한국작곡가협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글 '악계구상의 제 문제'를 썼다. 1956년 4월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 트리오'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당시 한국에서 습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나기로 했다.


통영 국제음악당 뒤뜰의 윤이상 묘소


1956년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윤이상은 프랑스로 건너가 1957년까지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Paris Conservatoire)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하였고, 다시 독일로 가 베를린음악대학(Berlin Hochschule)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그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쉴링(Reinhardt Schwarzschilling), 보리스 블라허(Boris Blacher), 요세프 루퍼(Josef Rufer)를 사사했다. 1958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현대음악 강습에 참가해 다른 작곡가들과 교류를 가졌다. 1959년 빌토번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했다. 동아시아의 음악을 서양 음악에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963년 4월 윤이상은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 동물의 형상을 표현한 사신도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방문하였다. 거기서 그는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당시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반공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의 중앙정보부는 윤이상의 방북행적을 포착하고 내사에 들어갔다.


1964년 부인, 두 자녀와 함께 서베를린에 정착했다. 1965년 초연한 불교 주제에 의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 1964)와 1966년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초연한 관현악곡 '예악'은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중앙정보부가 1967년 7월 8일 발표한 이른바 '동백림 사건(東伯林事件, 동베를린 사건)'이다. 중앙정보부는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의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면서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정보부는 작곡가 윤이상과 민중적 저항을 상징한 작품 '군상(群像)'으로 유명한 화가 이응로(李應魯) 등을 간첩으로 지목했으며, 한국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천상병(千祥炳)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간첩으로 지목한 교민과 유학생을 서독에서 납치해 강제로 한국으로 압송하자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는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에 항의 서한을 보내는 등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1967년 12월 3일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가운데 34명이 유죄판결 받았지만, 대법원 최종심에서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윤이상이 수감되자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발레음악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와 세계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박정희군부독재정권에 공동탄원서를 내는 한편 그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서명한 사람 중에는 덴마크 작곡가 페르 뇌고르(Per Nørgård), 이탈리아 작곡가 루이지 달라피콜라(Luigi Dallapiccola), 오스트리아 작곡가 죄르지 리게티(Gyorgy Ligeti), 스웨덴 출신 작곡가 아르네 멜내스(Arne Mellnäs), 독일의 세계적인 음렬주의 작곡가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독일의 지휘자 요제프 카일베르트(Joseph Keilberth), 아르헨티나 출신 작곡가 마우리치오 카겔(Mauricio Kagel), 독일 출신 지휘자 오토 클렘퍼러(Otto Klemperer), 독일 작곡가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 스위스의 오보에 연주자이자 작곡가 및 지휘자 하인츠 홀리거(Heinz Holliger) 등이 있었다. 


감옥에서 복역 중 자살을 시도한 윤이상은 결국 작곡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다. '나비의 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는데, 31회의 커튼콜을 받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자 윤이상은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윤이상이 거주하던 베를린하우스 모형


전세계 지성인들과 독일연방공화국 정부의 항의가 빗발치자 세계 여론을 의식한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은 1969년 2월 25일 윤이상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서독으로 건너간 윤이상은 1969년부터 1970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70년 그는 킬 문화상을 받았다. 1971년 서독으로 귀화한 윤이상은 1977년부터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고국에 입국할 수 없었으며,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은 한국에서 윤이상이 작곡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조차도 금지시켰다. 1977년 독일의 작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의 윤이상과의 대담록 '상처받은 용(Der verwundete Drache : Dialog über Leben und Werk des Komponisten)'이 독일과 남한, 북한에서 출판되었다. 


윤이상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오갔다. 1982년부터 북한에서는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열렸으며, 한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85년 윤이상은 튀빙겐 대학으로부터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8년 독일연방공화국은 윤이상에게 대공로훈장을 수여했다. 1990년 10월 윤이상은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 통일음악제’의 준비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남북한 합동공연을 성사시켰다.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의 초청을 받아 방북하여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1992년 함부르크 시는 윤이상에게 자유예술원 공로상을 수여했다.


1994년 윤이상은 일본의 도쿄에서 모든 정치적 활동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1994년 9월 서울과 부산, 광주 등지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렸다. 윤이상은 참석하려 했지만 김영삼 정권과 갈등을 겪고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했다. 이때 그의 소지품 가운데는 안숙선의 남도민요 음반이 있었다. 윤이상은 유럽의 평론가들에 의해 ‘20세기 중요 작곡가 56인’,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1995년에는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이 선정한 ‘20세기 100년 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해 윤이상은 독일 문화원(괴테 인스티투트)으로부터 비독일 국민에게 주는 상인 괴테 메달을 받았다. 함부르크와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 및 국제현대음악협회(ISCM)의 명예회원으로 활동하던 윤이상은 1995년 11월 3일 오후 4시 20분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화를 보내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북한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2004년에는 서울에서 윤이상 평화재단이 설립되었다. 2006년 1월 26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원회)는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동백림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지나치게 확대, 과장했다고 밝혔다. 동백림 사건 조사 과정에서 자행된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들의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동백림 사건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2007년 9월 14일에는 미망인 이수자가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40년만에 한국에 입국했다. 

윤이상 생가터에 세워진 기념관


윤이상 평화재단은 매년 국제 윤이상 작곡상 수상자를 선정 수상하고, 통영 국제 음악제도 열고 있다. 독일에는 국제윤이상협회가 설립되어 있다. 1984년 9월 북한에서는 윤이상음악연구소와 윤이상관현악단이 설립되어 매년 윤이상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2016년 3월 30일 독일에 묻혀 있던 윤이상의 유해는 경남 통영시 도남동 통영 국제음악당으로 이장되었다. 묘비에는 '處染常淨(처염상정)'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연꽃처럼 어느 곳에서나 물들지 않고 늘 깨끗하다.'는 뜻이다. 통영시 도천동 윤이상 생가터에는 윤이상 기념관 및 윤이상 거리가 있다.  


윤이상은 서양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를 결합한 독창적인 음악가였다. 그의 음악은 도교와 불교를 소재로 하는 곡이 많고, 성서의 글을 가사로 한 곡도 있다. 그는 생애 대부분을 기독교 신자로 보냈지만,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였다. 윤이상은 클러스터 기법 등 당대 최첨단 작곡 기법을 응용하여 서양 악기와 음악체계로 동양적인 음색과 미학을 표현할 수 있게 고안한 주요음 (Hauptton) 기법과 주요음향 (Hauptklang) 기법이라는 작곡기법을 개척한 세계적인 음악가이다. 그는 ‘동서양을 잇는 중계자 역할을 한 음악가’라는 음악사적 지위와 함께 ‘독일 관념철학의 전통이 벽에 부닥친 서양문명의 흐름 속에서 동양사상을 담은 음악으로 세계음악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연 작곡가’로 평가를 받고 있다.


윤이상 묘소 앞으로 바라보이는 통영만


윤이상은 '고풍의상'과 '달무리', '추천', '편지' 등 가곡을 비롯해서 '유동의 꿈'과 '나비의 미망인', '요정의 사랑', '심청' 등 네 편의 오페라, '바라'와 '무악', '예악', '광주여 영원히' 등 20여 편의 관현악곡을 남겼다. 그는 또 오보에와 첼로를 위한 '동서의 단편' 등 40여 편의 실내악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등의 교성곡도 썼다.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는 경련 스님, 박두진, 김남주, 고은 등의 시를 가사로 사용하여 한민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칸타타이다. 윤이상이 남긴 작품은 무려 1백 50여 편에 이른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을 추모하며.....


2018. 1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