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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그는 누구인가?

林 山 2019. 6. 7. 17:30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행한 항일 무장독립투쟁가 김원봉에 대한 언급을 놓고 정치권의 뜨거운 공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추념사에서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重慶)에서 좌우합작과 광복군 창설을 이뤘고,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합류하며 통합된 광복군의 항쟁의지와 역량이 광복 후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됐고,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6·25 호국영령을 기리는 날에 남침을 주도한 김원봉에 대해 언급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이 부분에 마땅히 사과문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통,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도 5일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전광훈 목사는 이른바 뉴라이트 소속이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도 '김원봉에 대한 서훈 논쟁이 있어 왔고, 당시 자리가 현충일의 국립현충원이라는 점에서 적절한 언급이었는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어 통합을 위해 노력한 점을 강조한 것'이라면서 '연설의 취지를 종합적으로 봐야한다'고 반박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김원봉 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학계에서 할 일'이라며 '다만 추념사 메시지의 취지와 맥락을 보면 독립과정에서 김원봉 선생의 역할에 대해 통합의 사례로 이야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평화당과 정의당도 '파란만장했던 김원봉의 삶을 오늘의 좁은 정파적 시각으로 해석할 수 없다'며 자유한국당에 지나친 정치 공세를 멈출 것을 촉구했다. 


조선의용대 선전 영상에 등장한 김원봉(출처 위키백과)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그는 누구인가? 김원봉은 1898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지배하던 시절 그는 만주로 이주해 성장기를 보냈다. 1918년 금릉대학(지금의 난징대학)에 입학한 김원봉은 이듬해인 1919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의백(단장)에 선임되었다. 중국 황푸(黃浦)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김원봉은 1930년경 베이징(北京)에서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동맹(朝鮮共産黨再建同盟)을 결성했고, 레닌주의 정치학교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했다. 


1930년대 후반 김원봉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내의 정당인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지도하면서 독립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고, 김구(金九)가 항저우(抗州)에서 조직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과 서로 대립하면서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1938년 그는 한커우(漢口)에서 강력한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결성하고 항일투쟁을 전재했다. 


1939년 5월 김원봉은 김구와 민족연합전선(民族聯合戰線)인 전국연합전선협회(全國聯合戰線)를 결성했고, 단일당 결성에 합의하여 7당통일회가 열렸으나 결국 실패했다. 1941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제6회 전당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조선의용대도 광복군(光復軍) 제1지대로 합편되었다. 1942년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 제38차 회의에서 국무의원(국무위원) 및 군무부장(국방부장관)에 올랐다.


8·15해방 후 12월에 귀국한 김원봉은 여운형(呂運亨)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이 결성되면서 중앙인민위원 및 군사부장을 맡았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좌파의 단결을 위해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결성했을 때 5명의 의장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중앙위원직도 맡았다. 김원봉은 1946년 10월 발생한 대구 10월 사건 등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는 1947년까지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살해했던 악질 경찰 노덕술(盧德述, 일본명 松浦鴻, まつうら ひろ, 마쓰우라 히로)에게 고문을 당하고 뺨을 맞는 등 온갖 수모를 당했다


김원봉은 미국과 이승만에 의해 친일민족반역자들이 남한을 장악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분노하고 좌절한 김원봉은 좌파운동단체에 대한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과 테러가 계속되자 월북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봉은 결국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했다. 그해 8월 김원봉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북한) 최고인민회의(最高人民會議)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1952년 5월 북한 노동상에 임명된 김원봉은 1956년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1957년 8월 그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올랐다. 그는 또 조선노동당의 대남공작 전위기구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의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을 맡았다. 하지만 김원봉은 1958년 10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된 후 숙청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한민국(남한)에서 김원봉의 가족들 중 남동생들은 모두 보도연맹 사건으로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복동생 김봉철(1918~1986)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김봉철은 4,18생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밀양피학살자조사대책위원회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기도했다. 그는 사망한 이후 대법원에서 재심결정 및 무죄를 판결받았다. 김원봉의 여동생 김학봉은 남한에서 살고 있다가 2019년 2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바 있는 신도환 전 신민당 최고위원은 회고록에서 '일제시대 수많은 악질 친일경찰이 있었지만 노덕술은 단연 압권이었다.'고 썼다. 그는 이어 '노덕술은 손톱 뽑기, 발톱 뽑기, 혀 뽑기, 칼로 찌르기 등 악랄하고 잔인한 고문으로 여러 명의 독립투사들을 직접 죽였다.'고 증언했다. 


2019. 6. 7.